[인물요약]
■최내길 (崔來吉)
1583년(선조 16) - 1649년(인조 27)
조선 후기에, 오위도총부도총관, 경기감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대(子大).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부사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는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형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곧 승문원에 들어간 뒤 성균관전적·직강·사예를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좀 뒤늦게 홍제원(弘濟院)으로 달려가 김류(金鎏) 등 문신·무신 200여 명과 함께 창의문(彰義門)을 넘어가 궁성을 지킨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장악원정을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하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하여졌으며 한성부의 좌우윤, 형조와 공조의 참판을 지내고, 1630년(인조 8) 장흥부사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어 청주·능주의 목사를 역임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다시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1645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자되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배수하였다. 2년 후 경기감사, 1649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집필자>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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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 제14권 / 비갈(碑碣)
공조판서 완천군 이재 최公 묘비명(工曹判書完川君頤齋崔公墓碑銘)
공의 휘는 내길(來吉)이요, 자는 자대(子大)이다. 최씨는 족계(族系)가 전주(全州)에서 나왔다. 시조인 순작(純爵)은 고려조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다. 그 뒤로 대를 이어 고관대작이 나왔는데, 문정공(文貞公) 재(宰), 평도공(平度公) 유경(有慶), 경절공(敬節公) 사강(士康)은 모두 경상(卿相)의 지위에 올랐다.
증조의 휘는 업(嶪)으로, 별제(別提)를 지냈다. 할아버지의 휘는 수준(秀俊)으로 학생(學生)이었다. 아버지의 휘는 기남(起南)으로, 우계(牛溪)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으며,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졸하였는데, 둘째 아들인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명길(鳴吉)이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들었으므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학생공(學生公)은 좌찬성에, 별제공(別提公)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은 완성부원군의 형이다. 어머니는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병조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16)에 태어났다. 병오년(1606)에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며, 전적(典籍), 직강(直講),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에 반정하는 데 참여하여 녹훈(錄勳)되었으며,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다.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624)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어가(御駕)를 호종하였으며, 가선대부로 승진되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져 한성부 좌윤과 우윤, 형조와 공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경오년(1630)에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나갔는데, 고을 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그 뒤에 청주 목사(淸州牧使), 능주 목사(綾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역시 치적이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병자년(1636)에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으며,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다.
을유년(1645)에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하였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었다. 무자년(1648)에 경기 감사에 제수되었다가 병으로 인해 체차되었다. 기축년(1649)에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5월 1일에 졸하였는데, 향년은 67세였다.
이보다 앞서 병이 들었을 때 상께서 의관(醫官)을 파견하여 병세를 물었으며, 부음을 아뢰자 매우 애도하면서 부의를 규례보다 더 내려 주게 하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용인(龍仁)에 있는 자봉산(紫鳳山) 구동(駒洞)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종실(宗室)인 익성군(益城君) 이형령(李亨齡)의 딸이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후윤(後胤)은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이 문학(文學)에 이르렀으나, 요절하였다. 장녀는 주부(主簿) 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갔으나, 자식이 없다. 차녀는 군수 윤홍거(尹鴻擧)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지평 이무(李堥)에게 시집갔다.
후윤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석삼(錫三)과 석명(錫命)은 모두 사인(士人)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윤홍거는 2남 5녀를 두었다. 장남 윤항(尹抗)은 도사(都事)이고, 차남 윤총(尹摠)은 사인(士人)이며, 장녀는 정정양(鄭正陽), 차녀는 홍수주(洪受疇), 삼녀는 박태진(朴泰辰)에게 시집갔는데, 이들은 모두 사인(士人)이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이무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진사 이윤조(李潤朝)에게, 차녀는 사인 권화만(權和萬)에게 시집갔으며, 아들들은 아직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육경이란 그 지위는 / 六卿之位
낮은 것이 아닌 거며 / 不爲少
육십칠 세 그 나이는 / 七十少三年
장수했다 할 수 있네 / 不爲不壽
빗돌에다 이를 새겨 / 刻而銘之
후손에게 보이노라 / 以示後
숭정기원 후(崇禎紀元後) 36년(1663) 계묘년 월일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정두경(鄭斗卿)은 글을 짓고
가선대부 행 용양호군 윤문거(尹文擧)는 글을 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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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이미지]
동명선생집(東溟先生集)
▲공조판서 완천군 이재 최내길 묘
▲공조판서 완천군 이재 최내길 묘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