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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臺灣.타이완.중화민국中華民國)을 가다.
旲 熀 高 達 五
3월 2일 20시 45분 대구공항을 출발하여 대만(도원桃園)공항에 도착하니 시계는 22시(대만시간)를 훨씬 넘어있다. 우리(대한민국)와는 1시간의 시차(時差)가 있어 조금은 혼란스럽게 느껴지며, 날씨가 후덥지근하고 습도가 높아 기분이 상쾌하지 못하다.
가이더(Guider. 허운순)의 안내로 차내에서 간단한 자기 소개와 대만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시는데, 그의 조부님은 중국사람이며 부모대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자신은 한국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대만에서 대학(연극학전공)을 졸업하여 현재 관광업계에 종사하고 있으며, 부인(婦人)은 한국의 전남 장성(長城)사람이어서 한국이 처가이자 제2의 고향이라 한다.
대만(臺灣)은 고구마(긴 타원)처럼 생겨서 면적이 우리나라의 약 1/3정도이고, 인구는 약 2,300만(2017년 기준)명이며, 주민은 고대로부터 살았던 ‘말레이-폴리네시아계’의 여러 원주민과 초기 중국에서 이주한 내성인, 그리고 1949년 장제스(蔣介石)와 국민당 정권과 함께 이주한 외성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다.
기후는 북부는 아열대이고, 남부는 열대 기후라 하며, 연중 약 280일 정도는 하루에 한 두차례 비가 내리기 때문에 항상 우비를 가지고 외출해야 한단다. 그럭저럭 숙소(桃園市)에 도착하니 “주도대반점(住都大飯店:Chuto Plaza Hotel)"이라 적혀있어 갸우뚱 했었는데 ”大飯店”이란 뜻이 여기서는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숙소를 배정받아 취침후 3/3일 새벽(4시)에 일어나 간단한 체조를 한 후 TV를 켜니 왠통 ‘중국말’이라 이 곳이 낯설고 물설은 이국 땅임을 실감케 합니다. 7시 쯤 모두 모여 조반을 들고는 3/3일(토) 8시 30분, 하루 일정(답사여행)에 출발합니다.
우리 ‘천우회(天友會)’는 1983년에 동문수학하던 벗님들로서 어~언 40여 년동안 모임을 해 와서 지금은 부부동반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덕망이 높으신 오정무 회장님을 비롯하여 서동재 총무님께서 변함없이 회를 이끌어 주셔서 철저한 재정관리와 우애가 돈독(敦篤)하여 무릎을 맞대고 앉아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정도이다.
답사지 “스펀(十分.십분)”을 향해 가는도중 대만을 다시 소개하는데, 남북의 길이가 약 450Km, 동서길이가 140Km, 산지(山地)가 약 80%여서 3,000m 이상 이 130여 개, 2000m 이상 이 300여 개 정도이고, 또 남북으로 탑만산(塔曼山.2130m), 설산(雪山.3884m), 기래주산(기萊主山.3559m), 옥산(玉山.3997m), 비남주산(卑南主山.3293m), 북대무산(北大武山.3090m) 등으로 연하여 중앙산맥 설산산맥 옥산산맥 아리산산맥이 섬 전체를 이어 달리고 있다.
스펀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으며 날씨도 오늘따라 화창하여 되려 더위를 느낄정도이다. 선착객들은 벌써 천등(天燈)을 날리고 있어 우리도 천등(天燈.둥근 역사다리꼴모양) 하나에 두 가정(家庭)의 소원을 붓으로 적어 하늘높이 날립니다.
순간, 상점 주인이 기념촬영도 해 주어서 고객에 대한 서비스와 배려가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스펀 라오제(十分老街.십분노가)” 거리에는 옛 일제시대 때 광산물을 실어 나르던 철로가 놓여져 있고, 마을 뒷산은 금성형(金星形)으로 부봉(富峰)이다.
1908년 처음으로 스펀(十分), 핑시(平溪), 징통(菁桐) 같은 지역에서 탄광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핑시선 철도가 건설된 후 절정기를 맞이하다가 1970년대 점차 석탄이 고갈되자 탄광이 폐쇄되었다.
하지만 스펀에서 시작된 천등(天燈) 날리기가 관광객의 인기를 얻으면서 핑시선 지역 어느 곳에서든 사람이 모여들고 하여 거리에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이곳 핑시선(平溪線)은 기차로 루이팡(瑞芳)역에서 징통(菁桐)역에 이르는 12,9Km 구간을 말하며, 1921년 일제 강점기에 완공되어 대양광업(臺陽礦業)의 석탄 운반용으로 사용되어 석저선(石底線)이라고도 불리워졌다고 한다.
천등의 발원지는 스펀으로 옛날에는 마을간 긴급한 사항이 있을 때 신호용으로 날리곤 했으나, 요즘에는 새해 소망이나 음력 정월대보름 밤 소원을 적어 날리는 행사로 발전하였으며, 또 허우샤오센(候孝賢) 감독의 영화 “연연풍진(戀戀風塵.1986년)”을 촬영도 하였고, 연하여 천등을 날리는 행사가 TV에 방영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져 오늘날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철로에서 2~30여 미터 떨어져 흐르는 지룽강(基隆河) 위에는 일제시대 때 건설한 거대한 “정안교(靜安橋)”가 있는데 상당히 노후화되어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정안조교(靜安弔橋)”라 새겨져 있어 첫 눈에 현수교(懸垂橋)임을 짐작케 합니다.
또 쇠사슬을 고정시킨 보호벽에는 행복(幸福), 스펀발원지(十分發源地)라 새겨 놓아서 이 곳이 천등의 본고장임을 증명하고 있으며, 기념으로 부부가 함께 촬영을 하고 출렁다리를 다같이 왕복합니다.
다시 40여 분을 달려 신베이시(新北市) 루이팡구(瑞芳區)에 속한 옛 광산마을의 “주펀(九份)”을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서 대중교통(버스.BUS)으로 갈아타야 한다. 10여 분 이상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구~불~ 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을 서행으로 얼마간 올라 주펀에 도착하니 어찌나 관광객이 많은지 상상을 초월한다.
주펀은 산의 8부능선 쯤 위치해 있으며 옛날 아홉가구가 살았는데, 인근 마을에서 가져온 생필품을 똑 같이 나눴다고 해서 “주펀(九份)”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런 산골마을에서 1889년 금맥이 발견되면서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03년~1904년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본토의 생산량에 필적했으나 해방(1945년) 후 점차 금광이 쇄락해 1971년 폐광되었다가, 1989년에 만들어진 영화 <비정성시>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고, 우리나라 드라마 <온에어>에 등장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관관명소로 각광을 받게되었다. 입구 세븐일레븐(7-eleven)편의점에서 이어지는 지산제(基山街)에는 기념품점과 식당, 찻집, 각종 먹거리와 공예품 등 어망처망 합니다 그려!
이 높은 산비탈의 좁은 골목상가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저 밀려나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가이더의 안내로 이것 저것 살펴 구경하면서... 가끔은 특별한 음식과 공예품들도 소개하는데, 개중에는 도자기로 여러가지 모형의 악기를 만들어 소리 내는데 오리, 바둑이, 거북이, 단지모형, 개구리 등 인기가 좋은편이다.
몇몇 회원님들께서 구매하여 다음 코너로 나아가니 “땅콩아이스크림(花生氷淇淋.화성빙치린)”을 파는 곳에는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줄을서 있다. 한참을 기다려 하나씩 사서 맛을 보는데 고소하고 달달하여 맛이 좋기는 하나, 우리나라 ‘롯데아이스크림’보다 맛이 못하다는 생각이든다.
또 몇걸음을 나아가니 “토란경단(芋圓.위위안)”을 파는 곳에도 역시 줄을서 기다려서 한컵씩 맛을 보는데, 토란과 함께 고구마 경단, 팟 등을 넣어서 조리한 음식인데 한국의 겨울철에 즐겨먹는 ‘단팟죽’ 맛과 흡사하다.
가이드분의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면서 “주펀 라오제(九份老街)” 중심골목을 돌아 경사진 계단을 나려오니, 전체적으로 일본문화와 대만문화가 혼합되어 특이하게 느껴진다. 홍등이며 초롱등, 심지어는 일본어 간판이 그대로 달려있고 복장도 ‘기모노’ 차림으로 판매를하고 있다.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 밖에도 어묵, 소시지, 각종 빵이며, 악세사리, 공예품 등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것 같슴니다. 몇 계단을 더 내려가니 경사가 심한 우측언덕에 “아매차루(阿妹茶樓.아메이차러우)”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목조건물로서 차와 식사를 파는 곳이라 한다. 또 영화 ‘비정성시<非情城市>’의 촬영지이기도 하여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는다.
조금 더 내려와 돌계단 끝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고 주위를 돌아보니, 왼쪽으로 수치루(竪崎路) 아래쪽에 “승평희원(昇平戱院)”이라는 극장이 있는데 1914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의 명칭은 ‘희대자(戱臺仔)’였고 1951년에 지금의 “승평희원”으로 개칭됐으며, 1~2층 약 600석 규모로 당시 타이완 북부의 최대 극장이었다. 또 1920~1930년대 골드러시 때 사람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기도 했으나 금맥이 끊기고 영화 인기가 시들해 지면서 1986년에 폐관되었다 한다.
대만이 일제치하에서(1895~1945) 해방되기까지 50여년이요, 한국이 36년 동안 일제의 속박에서 함께 해방되었는데, 우리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배척하는 반면에 대만은 그들(일본)의 문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문화로 융성하게 꽃 피워서 특별한 관광지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으니... 배울점이 많습니다 그려! 우리나라도 강원도 태백시(太白市)에 폐광됀 탄광촌을 새로운 “골목상가”로 조성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오면서 ‘주펀’의 전체 풍광을 바라보니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으로 비록 경사가 심하기는 해도 앞쪽으로 지근한 거리에 기륭항(基隆港)의 바다가 풍요의 산물이요, 주위의 산새가 잘 감싸주고 있어 상당한 길지임을 알겠습니다.
약간은 늦은 시간에 오후의 답사지인 “예류지질공원(野柳地質公園)” 근처에서 점심을 합니다. 다양한 매뉴로 매끼마다 다른 식사를 하니 먹는 즐거움도 큼니다 그려! 이제 여행도 먹고 마시며 즐기는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깨달아 오는 문화로 바뀌어야 할 때라고 봅니다. 허선생(가이드)께서 지나가는 말로 한국사람들이 관광을 오면 지나치게 음주를 마시고는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 추태를 부리는 일이 많다고 하여 내심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해외에 나오면 한분 한분이 외교관인 것을 아셔야 할텐데...
점심후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여러개의 돌계단을 올라 ‘예류공원’으로 들어서니 산책로 좌우에는 가로수를 심어 놓아 그늘이 상당합니다. 대만은 아열대성 기후라 낙엽수는 없고 전체가 녹색의 자연공원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는 빠른 계절의 변화때문인지 비교적 조급한 편인데, 이 곳은 늘푸른 상록수 계절의 탓인지 조금은 느긋해 보입니다. 산책길 좌우로 푸른바다가 잔물결로 은빛 찬란하고 가늘게 이어지는 탐방로는 반도 끝에 불쑥 솟은 “구이터우산(龜頭山.귀두산)”까지 연결되어 있다.
안내자는 ‘야류지질공원’은 땅 밑에 바위층 용암이 지상으로 분출해 굳은 상태에서, 다시 그 밑에 모래층이 분출하여 이루어진 모형으로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바람에 의해 침식과 풍화작용이 거듭되면서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지질층이고, 1구역 공원내에는 풍화작용으로 아랫부분이 깎인 ‘심상암(蕈狀岩)’이 많아서 버섯모양, 아이스크림모양, 신발모양, 물고기모양, 달팽이모양, 굼뱅이모양, 공룡알모양 등 기이한 형상들이 보이며, 바닷가 한켠에는 촛대모양(젖꼭지모양)이 여러개 보이는데 “금지월선(禁止越線:出入禁止)”이라 가까이 가 보지 못함이 못내 아쉽슴니다.
몇몇 회원님들과 내자(內子)에게도 아름다운 암석(巖石)들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는 2구역으로 나아가니, 여기서도 심상암(蕈狀岩)과 사암이 깎기긴 했으나 아직 기둥을 만들지 못해 지면에 붙은 기이한 모양의 강석(薑石)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여왕 머리 바위(女王頭. 뉘왕터우)’가 단연 돋보여서 여행객들은 사진을 찍기위해 길게 줄을서 기다린다. 야류공원내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심상암’으로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상으로 고대 이집트의 “네페르티티여왕”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공원 입구 부근에 모조품이 하나 더 있다.
시간이 여의치 못해 건성 건성 둘러보고는 3구역인 ‘귀두산(龜頭山.93m)’으로 나아가니, 조그마한 짧은 다리(橋梁)가 놓여있어 사실은 육지와 끊어진 섬(島)이다. 입구에는 아름다운 닭벼슬 모양의 커다란 사암(砂巖)이 있어 수문장(守門將)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뒤로는 나지막한 야산으로 나무숲이 우거져서 산책하기에는 더 없이 좋겠습니다.
중간쯤에서 산책을 멈추고 공원입구로 되돌아 나와서 야류공원전체를 조망(眺望)하니, 대륙의 끄트머리에서 거북이가 바다로 기어들어가는 형국으로 상당한 길지이며, 하늘에서 대만에 ‘천연기념물’을 내리신 것으로 생각됨니다.
연하여 지근한 거리에 모조품 ‘여왕머리바위’를 배경으로 집사람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얼마간을 휴식한 뒤 다시 대만의 명물 “발맛사지”를 받으러 갑니다. 이는 선택사항이라 서동재총무님과 나는 다른 벗님들이 끝날 때까지 길 건너 초등학교(初等學校)를 견학하는데, 담벼락에 붙은 “학생상하학.가장접송구(學生上下學.家長接送區)”란 글귀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아서 나중에 허가이드에게 여쭤보니 왈(曰), “어린이 등하교시에 학부형 만나는 곳”이라 한다. 같은 한자(漢字)를 써 놓고도 발음과 이해가 서로 달라서 문화의 차이가 이런 것인가 봅니다.
저녁후 대만에서 제일 역사가 깊은 “용산사(龍山寺.룽샨쓰)”로 갑니다. 안내자의 설명에 대만의 사원(寺院)에는 불교, 도교, 유교, 민속 종교의 신까지 다양한 신들을 모시고 있으며, 본당건물 용마루에 좌우로 새겨진 용의 발톱이 5개이면 최고의 사원이고, 그 다음이 4개, 공자묘(孔子廟) 같은 사원에는 발톱이 3개로 단청도 없이 그냥 단촐하게 짓는다고 한다.
용산사(龍山寺) 들어가는 주변거리는 연등(蓮燈)으로 찬란하고 사원 앞의 넓은 광장에는 비룡(飛龍)과 봉황(鳳凰)의 조형물을 세워놓아 그야말로 불야성(不夜城)이며, 역사가 깊고 이름난 사원이라 그런지 오고가는 답방객이 넘치고 넘쳐난다.
광장 옆의 인도(人道)에는 연등터널을 만들어 놓아 반짝이는 별빛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들며, 길섶에는 4명의 기도객이 순백색의 옷을 입고 좌선삼매(坐禪三昧)에 들어있다. 길 건너 정문(正門:一柱門.일주문)은 화려하고 장엄하여 보는 눈이 현란하고, 그 뒤로 웅장하고도 휘황찬란한 본당의 건물이 보인다.
사원에 들어서니 왼편에 코끼리를 상징하는 조형물에 연등을 밝혀놓았고, 우측으로는 인공폭포를 만들어 놓아서 음양(陰陽)의 조화를 맞춰놓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선채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보개문(寶蓋門)을 들어서니 향초를 파는 곳에서는 원하는 사람들에게 향을 한 개씩 나누어 주신다.
본전(本殿) 마당에는 좌우에 고루(鼓樓:북)와 종각(鐘閣)이 있고, 또 관음 향로와 천인 향로가 있어 향을 사르고 선채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고도 많슴니다. 연하여 마당의 긴 탁자위에는 각자의 성의대로 제물(과자, 과일, 생화 등)을 올려놓고 기도하는 모습이 거룩하고도 거룩합니다.
본전(本殿)은 정면5칸, 측면3칸의 2층구조 팔작지붕양식이며, 기둥에는 섬세하게 용(龍)을 새겨놓아 권위와 상스러움을 상징하고, 처마밑에는 호국우민(護國佑民), 택후민풍(澤厚民豊), 자운보조(慈雲普照)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그리고 내부에는 불교의 관세음보살, 도교의 마조, 성리학의 주자, 삼국지의 관운장 등이 모셔져 있다.
아울러 만사형통, 평안을 위한 기원은 관세음보살이나 도교의 마조에게, 사업성공이나 재물을 위한 기원은 관운장에게, 시험합격이나 학업성취는 문창제(文昌帝)에게 기도를 한다고 하며, 또 소원성취 여부(與否)를 묻는 방법으로 뜰 앞에 반달모양의 나무패 2개를 던져서 서로 다른 모양이 나오면 성취됀 것이고, 그 밖에도 대나무가지로 길흉을 점치는 방법, 사무실에서 가짜 돈을사서 태우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안내문에 용산사는 1738년에 창건하여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현존건물은 1757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일진데... 한국불교와는 다소 의식의 차이가 있음을 느낌니다. 기도를 마당에서 선채로 하는 것이며, 소원성취 여부를 점치는 행위이며, 참선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주로 각자의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주를 이루고, 사원의 건축양식도 화려하고 장엄하여 수행본래의 정신에서 멀어져 있는 것 같슴니다.
짧은 시간에 피상적(皮相的)으로 보는 나의 좁은 안목으로 이러쿵 저러쿵 할 일은 아닙니다만 본대로 느낀대로 적어봅니다. 여러 회원님들에게 기념사진을 찍어드리고는 도량을 한바퀴 휘~ 돌아서 좀 더 머무르고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길 건너 “멍자 야시장(艋舺夜市場)”으로 갑니다.
사람사는 이치가 어디가면 다르겠슴니까? 전통시장은 규격화된 백화점이나 대형유통과는 달라서, 그래도 인간미가 넘치고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어서 눈요기꺼리로는 최고라! 남녀노소(男女老少)가 한데 어우러져서 생동감이 넘치고 왁자지껄 사람사는 재미가 철~철~ 넘치는 곳이라!
각종 먹을거리와 악세사리, 장난감류, 의류, 신발, 공예품, 휴대폰 등 어찌나 많은 상품들이 진열돼 있는지 가는 곳마다 넘치고 넘쳐나서 살 사람보다 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저녁후 나온 쇼핑이라 배가 부르니 그냥 눈으로만 먹고 지나 갑니다. 듣기로는 “화시제 야시장(華西街夜市場.화시제예스)”과 연결되어 있어 그 쪽 보신탕 거리에는 자라, 뱀, 거북이 등이 있는데 식도락가들이 많이 모여든다고 한다.
일정이 타이트(tight)하여 고단한지라 일찍 잠자리에 들어 3/4일 아침 7시에 조반을 들고는 오늘은 8시 출발이다. 말이 2박 3일이지 실은 2박 1.5일이다. 국립고궁박물관(國立故宮博物館)을 가는 차내에서 허가이드님은 대만의 역사에 관해서 열변을 토하신다.
한국과 대만은 1948년에 수교를 맺고 상호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며, 1949년에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1966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하였다. 그러던 두 나라가 1971년 중국(하나의 중국을 강조)이 UN에 가입하게 되면서 대만이 UN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러나라에서 대만과 단교를 하게 되었고, 드디어 우리나라도 1992년 8월에 단교를 하였는데... 그 이후 2005년 3월부터 다시 교류가 이루어져 2012년에 이르러서는 두 나라 사이에 무비자 방문기간을 30일에서 90일로 연장하였으며, 이처럼 관계를 회복하는데는 한국드라마 <대장금>이 2002년에 대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크게 일조(一助)를 하였다고 한다.
대만(臺灣:中華民國)은 1912년 중국 대륙에서 쑨원(孫文)이 세운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으로 1913년과 1914년에 걸쳐 국부 손문(孫文)이 두 차례 방문하였고, 1949년 장제스(蔣介石)가 국공내전에 패해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臺灣)으로 이주하면서 초대 총통이 되었다.
이 후 장제스의 국민당은 1999년까지 정권을 잡았으며, 경제와 문화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서 현제 국민소득(1인 GDP) 26,000달러이고, 달라 보유액이 세계 4위라고 자랑한다. 허나 약 10년 째 경제성장이 둔화되어 그 선($26,000)에 머물러 있으며, 문화(文化)는 일본을 많이 닮아 있으나 사고(思考)는 서구적이라고 한다.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내에는 1층에는 도서문헌 특별전, 황실 소장품, 가구, 불교조각, 2층에는 회화, 서예, 도자기 상설전, 기물 특별전, 3층에는 기물 상설전, 조각 상설전, 취옥백채, 육형석, 기물 특별전시실, 청동기 상설전, 모공정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총 608,985점에 달하며 일반 기증품을 포함하여 약 69만 점에 이른다고 한다.
이 많은 유물들을 1948년(중국본토 국공 내전의 악화로) 대만으로 옮겨와서 1956년 전시실을 완공하여 1957년부터 전시를 시작하여 1965년에 개관하였다고 하니, 무려 17년에 걸친 대 역사다.
3층에는 청동기시대 유물과 명, 청 대의 도자기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섬세하고 미려(美麗)하여 보는 눈이 현란하다. 허나 우리의 ‘고려청자’에 비하면 그 수수하고 순박함이 덜하게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옥배추(翠玉白菜.취옥백채)’는 1874년~1908년 청나라 말에 만들어진 옥 조각으로, 11대 황제 광서제의 왕비 서비(瑞妃)의 혼수품이었다고 하는데 그 색의 배열과 정교함이 무섭도록 뛰어나고, 잎 부위에 풀무치가 새겨져 있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또 바로 이웃하여 ‘상아투화운룡문투구(象牙透花雲龍紋套球)’라는 조각품이 있는데, 상아를 섬세하게 조각한 공모양의 구(球) 안에 겹겹이 작은 구가 겹쳐 새겨져 있어 겹쳐진 구의 수가 무려 17개나 된다고 하며, 이 상아덩어리를 3대에 걸쳐 새겼다고 하니 그 공력과 정성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그저 입이 딱 벌어짐니다. 옛 말에 쌀 한톨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새긴다드니, 과시(果是) 허언(虛言)이 아닌가 봅니다.
연하여 ‘육형석(肉形石)’이 있는데 꼭 삼겹살을 빼 닮아 있으며, 동파육은 소동파가 즐겨 먹은 돼지고기 요리였다 한다. 우째 이리도 사실적으로 조각해 만들었는지 탄복에 탄복을 거듭합니다.
이 밖에도 ‘올리브 씨앗으로 만든 배. 조감람핵주(雕橄欖核舟)’가 전시돼 있는데, 그 작은 씨앗에 배 안에 8명이나 타고 있어 돋보기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으며, 그 정교함에 혀를 내 두를정도이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모르게 살짝 살짝 찍는다고 오금이 다 저리다.
옛 유물에 문외한인 필자가 더 이상 운운하기가 그저 송구할 따름인저... 대충 건너 뛰어서 2층 서화전시실로 내려 갑니다. 초입(初入)부터 고색(古色)어린 동양화(산수화)가 진열돼 있으며, 주로 명(明) 대진의 산수도(山水圖)부터 청(淸)대 오창석의 석국도(石菊圖)까지 선경산수화(仙境山水畵)가 많이도 보이고, 또 1600년대의 명나라 화가 동기창(董其昌)의 작품도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 조선후기에 일어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화풍과 흡사하여 문외한인 제 눈에는 明, 淸, 朝鮮의 화풍이 별로 구분이 안됨니다 그려! 건성 건성으로 보며 서예전시실로 들어서니 경계(境界)에 ‘모란(牧丹)과 나리’ 그림의 전시품이 조명에 찬란하여 살짝 한 컷 찍습니다.
빛바랜 당지(唐紙)에 예서(隸書)로 씌여진 상소문(上疏文)과 청나라 황제가 관직을 임명한 첩지(牒紙)들도 보이며, 특히 북송(北宋) 시대의 시인(詩人), 문장가(文章家), 학자(學者), 정치가(政治家)로 이름을 날린 소동파(蘇東坡. 1037~1101)의 글씨도 보인다.
기대 했던 것 보다 작품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여쭈어 보니, 전시공간이 좁아서 3개월마다 다른 작품들을 바꿔서 진열하는데 다 보려면 40년은 걸린다고 한다. 조금은 과장된 듯 한 얘기로 들리며, 동(銅)으로 만든 병풍에 ‘옥매병도(玉梅甁圖)’를 새겨넣은 것이 특이하며, 서화로됀 병풍은 보이지 않는다.
일정이 촉박하여 더는 머무를 수 없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박물원 바깥으로 나와서 주위를 살펴보니 박물관의 터가 참으로 명당이다. 대만의 풍수(風水)라드니! 가는 곳마다 예사롭지 않았으며, 식당의 내부장식도 하나같이 풍수에 입각해서 실내장식을 꾸몄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궁박물원 답사(踏査)를 기념하기 위해 허가이드님과 함께 단체로 기념촬영을 합니다. 점심후 16시 40분에 대구로 출발합니다.
대만은 작지만 크게 느껴지고
검소하고 소박하지만 비루하지 아니하다
외양은 누추해 보이나 실속은 단단하고
시민들은 겸손하고 진실해 보인다.
단기 4351년(서기2018년) 3월 2,3,4일
대만(臺灣. 타이완. 중화민국中華民國)을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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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솜씨가 탁월하여서 후기만 보고도 같이 여행을 다녀온 생각이 듬니다.
대만도 산으로 싸여 있어도 사는 풍경은 다르지 않게 느낌니다.
잘 보고 갑니다.
황까페지기님 과찬이십니다.
변변찮은 장문의 여행답사기를 읽어 주신것 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제가 이세상에 왔다가 남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서투런 솜씨로 짧은 일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널리 널리 양지하시옵고, 늘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멋진 여행을 하셨네요.정말 보기좋습니다.이것또한 건강이 허락하니 다닐수있죠.늘 건강하시어 좋은여행 많이하셨슴 좋겠습니다~^^.
해바라기님께서 다녀가셨군요.
여행이라기보다는 잠시 바람을 쐬고 왔을 정도입니다.
졸문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 감사하오며, 늘 편안하시고 행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