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조율이시(棗栗梨枾)
대추 조(棗), 밤 율(栗), 배 이(梨), 감 시(柿)는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과일이다. ‘조율이시(棗栗梨枾)’는 “대추, 밤, 배, 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조(棗)자가 다소 어려운 한자이다. 가시 자(朿)자를 아래위로 두개 겹쳐 놓은 글자이다. 대추나무가 많은 마을을 대조동(大棗洞)이라 하는데, 서울시 은평구에 있다. 밤을 나타내는 율(栗)자와 조를 나타내는 속(粟)자를 혼동해서는 아니된다.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는 말이 있다. 넓은 바다 가운데 한 알의 좁쌀이라는 뜻으로 하찮고 작은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자아~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왜 차례상에 대추와 밤과 배와 감을 빠드리지 않고 놓는 지,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1.먼저 대추(棗)부터 알아본다
대추나무는 암수가 한 몸이고, 한 나무에 열매가 엄청나게 많이 열린다. 꽃 하나에 반드시 열매가 맺히고 나서 꽃이 떨어진다. 헛꽃은 절대로 없다. 즉,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자식을 낳고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 폐백(幣帛)드릴 때, 신부 치마폭에 대추를 한 움큼 던져 뿌린다. 자손 많이 낳고 잘 살라는 뜻이 담겨있다. 대추는 겉은 물렁해도 속은 단단하다. 소위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열매이다. 나무도 단단해서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도장의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대추씨 역시 단단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옹골찬 놈을 ‘대추씨 같이 단단한 녀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건강한 자손을 많이 낳아 가문이 번창하라고 제사상에 대추를 첫째로 올린다. 제사음식 차릴 때, 붉은 색의 과일은 동쪽에 놓고, 하얀 색의 과일은 서쪽에 놓는 것이 상례이다. 이를 홍동백서(紅東白西)라고 한다. 대추는 동쪽에 놓고, 밤은 서쪽에 놓는 데, 이를 조동율서(棗東栗西)라고 부른다.
2. 밤(栗)을 살펴 본다.
대부분의 식물은 종자에서 싹이 나올 때, 종자 껍질을 밀고 올라온다. 그런데 밤나무는 이상하게도 뿌리와 줄기의 중간 부분에 오랫동안 껍질을 그대로 매달고 있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낳은 근본안 조상을 잊지 않는 나무라고 해서 제사상에 밤을 올린다.사당이나 묘소의 위패(位牌)를 만들 때에도 밤나무 목재를 쓴다.
또한 밤은 옛날부터 다산(多産)과 부귀(富貴)를 상징하기도 한다. 폐백 드릴 때, 시아버지는 신부 치마폭에 대추를 한 움큼 던지고, 시어머니는 밤을 한 움큼 뿌리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자식이 성장해서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짝을 정해서 분가(分家)시킨다. "이제는 품안에서 나가 살아라"하며, 밤송이처럼 쩍 벌려주어 독립된 생활을 시킨다. 이처럼 밤은 나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할 뿐아니라, 다산과 부귀를 뜻하기 때문에 밤이 제사상에 오르는 것이다.
3. 배(梨)가 왜 제상에 필수적으로 오르는 지를 살펴본다.
배는 누런 색이다. 음양오행에서 황색은 흙의 성분(土:토)으로 우주의 중심을 나타낸다. 흙은 만물을 자라게하고,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 배는 누런색으로서 이러한 생명력의 원천인 흙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배꽃은 하얗다. 하얀 배꽃에 달빛이 비추면 환상적인 신비감을 창출한다. 배의 속살 역시 하얀 것으로 정직과 순수를 나타내고 있다. 자손들이 순수하고 밝게 살라고 하는 뜻에서도 제물로 쓰이는 것이다.
4.감(枾)이 제사상에 오르는 이유를 살펴본다.
감의 씨앗을 심으면 감나무가 나지 않고 대신 고욤나무가 자라게 된다. 그래서 3~5년쯤 지났을 때, 기존의 감나무를 잘라서 이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야 그 다음 해부터 감이 열린다.
감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데는 생가지를 칼로 째서 접 붙일 때 처럼 아픔이 따른다.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비로소 하나의 인격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 시골에 가면 어느 집이나 감나무가 한 두 그루는 있게 마련이었다. 감나무는 충효(忠孝)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감은 겉이 붉듯이 속도 붉어서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찬 서리가 내려도 굴하지 아니하고 매달려 있으니, 이는 충(忠)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감은 부드럽고 달아서 이가 없는 노인들도 먹을수 있으니 효(孝)의 과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선인(先人)은 소반 위에 놓인 붉은 감을 바라보면서, 감을 가지고 집에 가도, 이를 반길 부보님이 안 계심을 서러워하는 심정을 시조로 읊었다.
반중(盤中)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는구나
유자(柚子)아니라도 품은 직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박인로(朴仁老:1561~1642)
*반중조홍(盤中早紅)감 : 소반에 놓인 일찍 익은 붉은 감
*유자(柚子) : 귤의 일종으로 귤보다는 작은 과일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으로 전통적으로 관혼상제를 중시해 왔다. 제사상의 주된 과일로 대추, 밤, 배, 감이 오르는 것은 이들이 자손의 번창과 부귀, 희망을 나타내는 전통적 과일이기 때문이다.(2023.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