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오늘은 고기 먹는 얘기를 좀 해야겠다. 내가 사는 동네 정육점 간판에 쓰여 있는 문구가 늘 보면서도 그때마다 심금을 울린다. 뭐라고 쓰여 있는가 하면 이러하다.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 언어적 유희이면서 묘하게 시적 여운을 남기는 표현이다. 때로 유행가의 상투적인 표현에 식상해하다가도 어떤 절실한 순간에는 그 상투적 클리셰적 표현에도 울컥하게 되는 수가 종종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유행가의 끈질긴 호소력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 시와 같은 언어를 매재로 하는 예술 작품들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경구들을 발견할 때 다른 모든 내용들은 사라지고 그것이 그 작품에 대한 인상의 표상으로 남아 오래 반향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 '명량'에서 '먹을 수 있어서 좋구나'와 같은 말, 혹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다가올 한 끼의 배고픔 앞에서 지나간 모든 끼니의 기억은 무효다.'라는 말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곱씹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인상적인 표현에서 수많은 변주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당신이 읽는 것이 당신이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 당신의 벗들이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낸다. 등등. 아니면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있는 문구라고 전해지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말도 나는 기억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타인의 묘갈문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종종 자신의 묘지명을 쓰거나 행장을 써서 남기기도 했다. 일종의 자서전인 셈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억되는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도 기억과 애도와 추모의 행위가 어떤 존재가 이 세상에 머물렀음에 대한 사회적 인정에 해당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기억 속에 남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경우가 많다. 위대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 속에는 이런 간단한 원의도 내포되어 있을 것임은 자명하지 않은가.
다소 옆길로 샜지만 거리의 간판들을 보다가 이마를 치는 경우들이 참 많았다. '까끌래 뽀끌래', '까까줄까 뽀까주까'와 같은 언어적 유희는 누군가에게는 걱정스러운 느낌을 주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삶에 대한 해학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언어의 순수성과 진지함을 고민하는 관점과는 좀 결이 다른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 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여운이 있는 표현들과 정신을 훅 훑고 가는 아포리즘적인 표현들이 나는 참 좋다.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성수를 찍어 성호를 그을 때 쓰여 있는 구절을 나는 좋아한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이렇다. '들어오십시오. 하느님과 함께 머무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가십시오.' 정녕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 <사람과 고기>를 보다가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라는 간판 속 아포리즘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장마가 들고 상추가 비싼 시기가 되면 곧잘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상추에 고기를 싸서 먹는 게 아니라 고기에 상추를 싸서 먹을 정도로 비싸다.'와 같은 말은 과장적 수사에 해당되지만 무엇을 말하려는지 선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노령화 시대의 삶을 비추는 영화 중의 하나에 해당할 <사람과 고기>는 <플랜 75>와 같은 안락사의 차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스틸 라이프>와 같이 기억됨과 죽음과 장례의 문제를 이야기함도 아니다. <죽어도 좋아>처럼 노인에게도 여전히 존재하는 성욕과 사랑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도 않다. 이 영화는 먹는 것에 대하여 특히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의 공통적인 속성과 노인의 결핍에 대해서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다.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일은 대표적인 노인 소득원의 하나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두 남자 노인과 한 여자 노인은 공통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경제적 상황과 외로움 속에서 헛헛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다. 집은 있으나 명의가 아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자식들과 연락이 두절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병에 걸린 채 반려묘를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손주가 있어 난전에서 채소를 팔아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고단한 할머니가 있다. 이들은 소고기 뭇국이라는 음식을 통해 의기투합하게 된다. 거기에 들어가는 소고기는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온 것이기에 이들의 만남은 일단 사회적 상규에 대한 일탈로부터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겹살을 좋아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이 되었다. 스페인산 돼지고기가 수입되고 캐나다, 미국, 유럽 각국에서도 수입한다. 노르웨이 고등어의 주 수입국이 우리나라임은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다. 고기를 먹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뭔가 단백질과 지방이 부족해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증세를 헛헛증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어릴 때 한 달에 한 번 정도라도 뭔가 기름진 것을 먹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월급날이면 치킨 한 마리를 사서 가족이 함께 먹는 그 기분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할 세대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국민의 생활 수준이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여전히 끼니를 거르는 사회 구성원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노인 빈곤이라는 문제에서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 있는지와 같은 지표들도 복지적인 관점에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맹자가 한 말을 기억한다. 생업을 잘 돌보게 하여 다섯 무에 해당하는 집에 뽕나무를 심고 개와 닭과 돼지를 잘 기르면 오십 넘은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일흔 넘은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침을 삼키는 영화 속 세 사람의 노인을 생각해 본다. 먹을 수 있는데 먹지 않는 것과 먹고 싶은 데 먹을 수가 없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를 것이다. 늙어갈수록 더 잘 먹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