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효 작품론
자연으로부터 추출해낸 원형(原形)적 형상 - 글|고충환(미술평론)
오브제 미술
이재효의 작업실 2층에는 작은 전시공간이 마련돼 있다. 정확하게는 본격적인 전시를 위한 공간이기보다는 작품으로 태어나기 이전의 서브노트와 에스키스를 위한 공간에 가깝다. 작가의 사유의 편린들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그 상상력의 공간 속에서 일상의 잡다한 물건들이 작품으로 거듭난다. 담배꽁초의 필터들이 서로 잇대어져 작은 구조물을 이루는가 하면, 수건이 붕어 형상으로, 구부러진 파이프가 구렁이 형상으로 살아서 꿈틀댄다. 그리고 펼쳐진 낡은 성경책은 마치 깔때기 형상으로 깊게 파여져 있다. 이외에도 도르르 말려서 잇댄 나뭇잎들, 쌓인 나뭇가지들 등등 그의 상상력을 관통한 오브제들은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 이 오브제들에서는 여러 이질적이고 다양한 물건들의 조합에 바탕을 둔 우연성과 의외성이 드러나 보인다. 이를테면 가위, 대못, 연탄집게, 펌프 주둥이, 장도리 등의 일상 속의 사물들이 기능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차원으로 탈바꿈돼 있는 것이다. 쇠파이프와 연결 소켓 등 여타의 철 고물이 잇대어져 악어나 메뚜기로 거듭나는가 하면, 기계의 체인과 철사 줄이 결합하여 지네로 재생된다. 나아가 삼각팬티마저 짐승의 머리로 변형돼 있는 것에서는 일상의 변용을 넘어 일말의 위트마저 느껴진다.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예사롭지 않은 눈(心眼)과 여유(예술의 당위성을 유희충동에서 찾는 태도와도 통하는)로부터 비롯된 위트는 작가의 작업을 지배하는 미적 욕구가 동시에 삶의 욕구와도 통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이재효는 작업을 가급적 소재 자체, 자연 자체로부터 끄집어냄으로써 삶과 자연 그리고 작업과의 동일시를 꾀하는 예술관을 실천해내고 있다. 소재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를 조형물의 한 형태로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발견된 오브제의 개념에 바탕을 둔 이 작업들에 등장하는 여타의 물건들은 새롭게 두 번째의 삶을 부여받은 것 같다. 자기 외부로부터 주어진 이름과 기능을 가지고 사는 삶이 그 하나라면, 그렇게 부여된 이름과 기능을 상실하고 폐기 처분된 이후의 삶이 또 다른 하나이다. 물건의 시각에서 볼 때 전자는 전적으로 타자의 삶을 사는 것이며, 오히려 진정한 삶은 후자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물건의 진정한 삶은 필연적으로 자기 외부로부터 주어진 모든 이름과 기능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 가능해진다. 폐기 처분된 것, 기능과 의미가 변화 또는 변질된 것, 버려진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요구되는 물건의 운명이다. 일상의 맥락으로부터 심미적인 맥락으로 옮아가는 것, 정상성의 코드로부터 비정상성의 코드로 옮아가는 것, 현실의 맥락으로부터 비현실의 맥락으로 옮아가는 것이야말로 물건이 자기의 삶을 회복하는 전제 조건이다. 모든 기능과 의미가 지워진 지점에다가 물건을 다시 세우는 것, 물건이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지평을 발견하고 열어 주는 것을 통해서 물건 고유의 삶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렇듯 본래의 기능과 의미가 지워진 자리에는 기묘하고 낯선 이미지만 남게 된다. 이런 생경한 이미지로부터 사물은 비로소 의미의 대상이 아닌 의미의 주체가 된다. 모든 선입견과 편견과 상식이 지워진 지점에서 사물과 우연하게 맞닥뜨리게 하며, 알려진 세계가 아닌 가능한 세계와 대면하게 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를 알려진 세계에다가, 그리고 시를 가능한 세계에다가 각각 결부시킨 바 있다). 오브제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일상 속에서의 기능이 아닌 심미적 대상으로서의, 그리고 의미의 대상이 아닌 의미의 주체로서의 사물이 갖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것의 이면에는 사물의 전치 개념이 깔려 있다. 사물의 전치란 상식적으로는 하등의 관련도 없는 물건들을 본래의 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시켜서 전혀 다른 이질적인 상황 하에서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맥락 속에 불러들여진 사물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잠재적인 욕망이나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그 자체로 예기치 못한 상징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본래의 의미와 기능을 상실한 대신, 의외의 연상작용이나 기묘한 효과를 위해서 그 정체성이 변질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브제란 단순히 일상적인 물건이 심미적인 물건으로 자리를 바꾼 형식상의 전용이나 변용에 지나지 않는다기보다는, 물건 자체가 숨기고 있는 의미를 발견한다는 보다 적극적이고 치열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일상의 심미화에 접맥돼 있으며, 또한 일상의 심미화는 일상을 재발견하는 일과, 물건이 의미를 내재한 실체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진다. 너무나 자명하게 삶의 일부에 속해 있던 사물들과 우연하게, 생경하게, 낯설게, 이질적으로 맞닥뜨리게 하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이로써 비현실은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진작부터 현실 속에 이미 존재해 있었던 것으로서 드러난다. 오브제의 인식은 이렇듯 친숙한 세계가 자기 내부에 잉태하고 있는 낯선 틈을 발견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재효는 이처럼 작가의 심미안에 포착된 오브제와 더불어 사물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형태, 가능한 형태를 열어 놓는다. 용도가 폐기된 사물들에다가 작가의 상상력을 작동시켜 심미적 대상으로서의 물건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이 오브제들은 그냥 그렇게 머물기도 하지만, 오브제들 중 몇몇은 거대한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예컨대 집적된 나무들은 둥글게 다듬어져 거대한 크기의 원형이나 반원형을 이루고, 얼기설기 엮어져 설치된 나뭇가지들이나 나뭇잎들은 그 자연스러움으로 인해 마치 인공물이 아니라 자연물을 보는 듯하다. (이 작업들로 작가는 1995년 공산미술제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이후 1997년에는 한국일보 청년작가 초대전에서 대상을, 1998년에는 오사카 트리엔날레에서 조각 대상과 함께 같은 해에 문화부가 제정한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2000년에는 김세중 청년 조각상을, 2003년에는 우드랜드 조각상 등을 수상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이 일련의 작업들은 작가의 주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그의 작가적 면모를 높이 산다. 말하자면 그에게서는 일상과 작업과의 구분이 없으며, 나아가 일상의 순간순간 속에서도 작가로서의 긴장된 시선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생활과 작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삶의 체험을 조형의 체험 속에 편입시킨 허다한 오브제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오브제 미술과 함께 이재효의 작업을 특징짓는 것으로는 자연미술 혹은 생태미술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작업들이 있다. 에스키스 상태의 오브제 미술이 일정한 계기를 얻어 본격적인 조형물로 전환된 것도 그렇지만, 이 작업들이 오브제 미술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잉태되었음은 물론이다.
자연미술, 생태미술
지금은 흔하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돼버렸지만, 예전에는 촌가에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난방용으로 일정한 크기로 패어진 장작을 집 한 쪽에 쌓아두곤 했다. 또한 일주문을 지나 산길을 오르다보면 속인들의 기원과 염원을 담은 돌무더기가 쌓아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장작더미나 돌무더기 탑은 일상적인 삶에서의 기능적인 목적과 연관해서 생겨난 것들이지만, 이와 함께 그 자체가 조형적인 효과 곧 심미적인 대상성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이외에도 조형과 자연과의 경계가 불투명한 형상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버섯 균류를 키워내기 위해 설치해둔 종자목(種子木), 목책(木柵), 그리고 새의 둥지는 사실상 자연이 빚어낸 조형물들이다. 여기서 작가의 작업을 보면, 그 사이가 벌어진 형태의 나뭇가지들을 연이어 설치한 작업이 종자목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잔가지들을 집적시켜 원형의 형상을 재구성해낸 작업은 덤불이나 새의 둥지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조작을 통해서 자연을 되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의 초점은 다름 아닌 이런 자연에 대한 모방을 통해서 자연과 인공물의 경계를 불투명하게 하는 것, 그 경계를 넘나드는 조각을 실현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때론 무분별하거나 우연하게 주어진 자연 형상 속에서도 우린 그 자체 자연스런 상태로 놓여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우연하게 주어진 형상을 그 자체 자연의 한 습성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계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을 대면하는 주체의 몫이다. 즉, 주체가 자연의 무질서를 자기의 안쪽으로 불러들여 인위적으로 재구성된 질서 체계 속에서 재편하는 것이다. 특히 자연과 인공과의 경계가 불투명한 대상일수록 이런 주체의 심리적 계기는 더 쉽게, 효율적으로, 더 자주 작동한다. 그 형상들에는 일상성과 심미성이 복합돼 있으며, 자연과 인공이 불투명한 경계에 의지하여 하나로 접해 있다. 분명 인공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조형물들은 전혀 인공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그것들은 원래부터 그렇게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한편, 조각은 말할 것도 없이 인공적인 산물이다. 그렇다면 조각의 프로세스를 통해서도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처럼 보이게 하는 것, 처음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져 있었던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당연히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이재효의 작업이 위치해 있는 지점이 바로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넘나드는 조형물, 반쯤은 자연이 빚어낸 조각이다. 작가의 작업은 언제나 재료 본래의 소재적 특질을 유지하는 한에서 최소한의 인공적인 손길만을 허용한다. 말하자면 나무, 돌, 나뭇잎 등의 소재들은 하나의 조형물로서 재구성된 이후에도 여전히 최초의 자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자연 자체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자연을 빼닮은 이 일련의 작품들을 두고 자연과는 또 다른 자연의 한 원형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서도 어떠한 식으로든 자연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작품을 위한 최소한의 차이를 찾아낸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감각적인 문제인 것이며, 자연과의 친밀하면서도 치열한 교감의 과정 없이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교감의 과정이 있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자연은 자기를 열어 보이는 것이고, 또한 작가의 열려진 의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순간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재효의 작업을 대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작업이 근본적으로는 자연에 맞닿아 있고, 자연이 자신을 드러내는 여타의 조형적인 양태에 접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여러 면에서 장작더미와 돌무더기 탑, 그리고 종자목과 새의 둥지처럼, 그 절반에 있어서 자연이 빚어낸 조형물을 거의 직접적으로 환기시킨다. 그러니까 그의 작업에서 인공적인 과정은 가급적 가려지고, 대신에 가능한 한 자연의 과정만이 드러나 보인다. 예컨대 나무를 조합하기 위해서 동원된 철제 틀이나 못은 거의 조형물 외부로 드러나 있지 않다. 자연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에다가 최소한의 인공의 과정을 더하는 이런 방식으로 인해 작가의 작업은 마치 자연 고유의 성질이 저절로 드러난 듯한 인상을 준다. 소재에 가해지는 인공적인 조작을 최소화하는 대신 자연의 본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나아가 작가에 의해서 가해진 인공적인 과정은 자연의 본성이 드러나는 일을 돕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조형적인 성과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의 본성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경험이 선결되어야 한다. 자연의 본성을 알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그 본성의 외화(外化)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인위적인 것을 최소한으로 국한하고, 재료가 가진 자연성을(아마도 재료가 가진 단순한 질료, 물성을 넘어서는) 순수하게 보여주고 싶다는 작가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성, 자연의 본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연의 본성은 이를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서 원시주의와 유기주의로, 이원론과 일원론으로 나눠질 수 있다. 자연의 본성에 대한 원시주의의 입장은 반문명적인 태도 곧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 나타나고, 유기주의는 자연이 내재한 생명력에 주목하는 태도로 현상한다. 그리고 이원론은 자연을 인간에 종속된 하부 개념으로, 질료적이고 현상적인 국면으로, 도구적인 차원으로 이해한다. 이에 반해 일원론은 인간을 자연이라는 보다 큰 범주 속의 일부로서 이해하며, 자연을 인간과 마찬가지의 영적인 존재로서 해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범신론과 물활론에 기초한 생명사상이 유래한다. 이원론이 자아 중심적인(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주체적이고 수직적인 맥락에 기초해 있다면, 일원론은 타자 중심적인(상호 타자적인) 관계적이고 수평적인 맥락에 접해 있다. 참고로 박이문은 진정한 생명사상을 인간 중심적인 환경에 대한 인식과는 비교되는, 생물 중심적이고 생물학적인 토대에 바탕을 둔 생태계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찾는다. 그리고 이때의 인식은 관계적인 세계관으로 나타난다. 그런가하면 자연성은 자연에 대한 구조적이고 구축적인 조형성에 대한 이해와 생태에 대한 이해를 뜻하기도 한다. 자연이 상징적 의미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조형적 이해라고 한다면, 생태에 대한 이해는 생태미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생태미술에서의 창작 행위는 자연의 본성에 일치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자연으로부터 취한 소재를 가지고 자연의 습성을 좇아 형태를 빚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연후에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썩어서 마침내는 소멸되는 리사이클링(재생)의 과정을 밟는 점이 특징이다. 이재효의 작업에서 보면, 예컨대 잔 나뭇가지들을 조합하여 일종의 덤불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에서 덤불의 형상은 다름 아닌 자연의 형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마른 나뭇잎을 조합해 만든 조형물은 마침내는 자연에 되돌려지고, 풀을 조합해 만든 일종의 풀공은 결국 풀로 되돌아간다. 또한 배추를 이용해서 배추란 문자를 재구성한 작업에서 배추는 여전히 배추 그대로이다(물론 실재를 문자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개념적 전이의 과정이 개입되긴 하지만). 자연으로부터 시작해서 재차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에 나타난 과정에서는 자연의 속성에 순응하는 순환원리와 함께 모든 유기적 존재의 특징인 변태(생명체 특유의 생장 과정과 이후의 자연스런 소멸로 이어진)가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눈에 발자국을 찍어 원을 새긴 눈 조각은 이후 눈이 녹는 것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여기서는 단순한 자연의 생명력이나 순환원리에 대한 공감을 넘어, 있음과 없음, 실제와 허상이 면해 있는 탈경계에 대한 성찰이 느껴진다. 보기에 따라서는 완결된 조형물 대신 그 과정에 주목한 프로세스 아트의 일면도 있다. 이처럼 자연성에 대한 작가의 이해는 생태미술에 접맥돼 있고, 이는 자연의 속성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은 감각적 실체일 뿐만 아니라, 그 감각적 실체의 동인(動因)과 원인(原因)을 포함하는 유기적 전체인 것이다. 동양의 사고로는 나와 너, 주체와 타자, 인간과 자연은 그 각각이 기(氣, 자연의 운동원리, 에너지)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그 구성 요소 모두는 거대한 기의 흐름 속에서 하나로 통합돼 있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자연성은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실체로서 나타나기도 하고(표면으로서의 자연), 자연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의탁한 상징적 의미(상징적 형태는 곧 그 의미를 표상한 것이다)로 나타나기도 하고(이념으로서의 자연), 절대 시간 속에서 반복 순환하는(끊임없이 처음으로 되돌려지는) 존재의 회귀성 혹은 귀속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원리로서의 자연).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어떤 형상을 위해 소재를 변형시켜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는 대신, 가급적 소재 자체의 원래 형상(질료)을 유지하고 있다. 그 과정은 소재를 죽임으로써 형상을 살리는 여타의 조각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이런 과정은 물론이고 최초의 질료를 근거로 하여 이를 하나의 조각으로 추출해내는 방법 역시 다르다. 말하자면 흔히 조각은 하나의 소재와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작가의 조각에서는 이런 소재와 양감의 단일성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나무들, 나뭇가지들, 마른 나뭇잎들, 돌 조각들을 집적시키는 방법으로 이뤄져 있다. 소재를 쌓고 배열하는 그의 방법은 분명 단일성과는 배치되며, 그보다는 집적과 누적의 방법에 바탕을 둔 어셈블리지와 통한다. 즉,
이재효 작품의 독특함은 외계의 사물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물질이 가진 질감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것에서 찾아질 수 있을 듯하다. 이는 말의 순수한 의미에서 일즉다(一卽多)의 세계요, 다즉일(多卽一)의 세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예컨대 하나의 구는 수많은 재료들의 결합이요, 수많은 개개의 나무들은 구(球)라는 하나의 큰 형상을 구성하는 재료인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 나무를 이용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선택한 나무의 질감과 형상을 생긴 그대로 살리면서, 한편으로 이를 조합하여 추상적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탁월함을 발휘한다(정민영).
이는 작가의 작업을 공간설치미술에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당연히 여기에는 관계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소재 상호간의 관계, 소재와 공간간의 관계가 중요시되는 것이다. 이는 전시공학적으로 관객을 작업의 일부로서 끌어들이는 효과적인 장치로서 작용한다. 마치 자신이 작품의 일부로서 그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작가의 창작행위의 한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관계를 중시한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작가의 작업은 여러 면에서 모노파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이 최종적으로도 여전히 소재 본래의 물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며, 그리고 이를 위해서 인공의 손길을 최소한으로만 한정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는 어떤 이미지나 형상을 추출해내기 위해서 최초의 소재를 가공하고, 그 본래의 물성을 변형시키고 변질시키는 과정을 통한 여타의 조각 방식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노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노파는 우선적으로 소재의 물성과, 그 물성의 우연하게 주어진 조건(선험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드러내는 것에 맞춰져 있지만, 이재효의 작업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작가는 소재의 물성을 간직하면서도 이를 하나의 임의적인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시킨다. 이는 아마도 작가가 기하학적인 형태를 빌려 자연의 본성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우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자연의 본성으로 보는 모노파와는 변별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작가는 기본적으로는 어셈블리지의 방법을 택하곤 있지만, 자연 소재들을 이렇다 할 원리 없이 그저 쌓거나 배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재들은 일정한 형식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는데, 대개는 기하학적인 형태와 특히 원(圓)형상의 형식적인 원리 아래에다 소재들을 포괄한다. 원 형상이 갖는 의미에 대한 작가의 말은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즉,
나의 작업은 못이나 철근 등으로 나무를 결합하여 구나 반구, 원기둥과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나무를 집적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나는 원이나 구와 같이 둥근 형태가 주는 느낌에 관심을 갖고 있다. 둥근 산, 둥근 초가지붕, 빙 둘러쳐진 울타리 등. 모나지 않은 우리 민족의 심성의 근원이 이 둥근 형태에 있다. 눈에 익어 친근한 잡목으로 단순한 구의 형태를 만들어,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다.
실제로 작가의 작업 중 상당 부분은 원 형상을 기본 모듈로 해서 이를 다변화한 것들이다. 예컨대 나무공이나 원 기둥, 잡석들을 집적시켜 마치 작은 터널을 재구성한 것, 나뭇가지들을 마치 울타리처럼 설치한 것에서 보듯이. 한편 작가 자신은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상의 진술에 나타난 특정의 정서와 미적 감수성은 분명 관념의 형태(관념상)로 표상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원 형상은 일종의 관념의 한 형태로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관념은 기하학적인 형태와 특히 원 형상을 자연의 본질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엄밀하게는 원 형상을 통해 구현된 완전함의 관념을 자연의 본성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그리고 이런 완전함의 관념과 자연이 내재한 본성과의 일치를 작업이 기초해야 할 궁극적인 지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원 형상이 자연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곧 자연성에 대한 한 표상 형식임을 알 수 있는가. 이는 당연히 상징을 통할 수밖에 없다. 비록 원 형상 자체는 하나의 무의미한 형상에 지나지 않지만, 이는 그 이면에서 특정의 정서 또는 미적 감수성과 결합하고(유의미한 관념의 한 형태로 변질되고), 이는 재차 상징의 연쇄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 상징의 다발 한가운데에 자연성이, 자연의 본성이 들어 있다. 또한 이때의 자연성은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알(宇宙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알 신화에 접맥돼 있다. 태초에 하나의 알이 있었고, 그 알로부터 궁극적인 존재가 태어났으며, 그가 죽은 다음 그의 머리는 하늘이 되고 그의 몸은 땅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하늘과 땅으로부터 모든 만물이 기원했다는 식이다. 이는 태초에 일자(一者)가 있었고, 그 일자로부터 이자(異者)가 유래했으며, 그로부터 만물이 태어났다는 일자 유출설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에서 하나의 소재가 처음의 질료를 변질시키지 않은 채 집적된 한 형태를 재구성해내는 과정과 방법을 거의 직접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부분이 전체 속에서 자기의 개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해주고 있다. 다시 원 형상을 보건대, 이는 근대 이후 세계의 기원을 밝히는 두 축인 본질론과 생성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본질론이 세계의 궁극적 실체에 맞춰진 유물론적 관점을 대변한다면(흔히 그 궁극적 실체는 원자 또는 단자의 형태로 나타난다), 생성론은 세계의 기원을 그 자체 어떤 고정된 실체로서보다는 원초적인 에너지와 기운(氣)의 운동성으로 나타난 역학 원리로 본다. 따라서 본질론이 자기 동일성의 원리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면, 생성론은 자기 속에 일정한 차이나는 것들을, 이질적인 것들을 포함하는 비동일성의 원리를 대변해준다. 이러한 기원 신화의 이면에는 하나의 상징체계가 놓여 있다. 즉 알로 나타난 생명 원리와 구(球)로 나타난 완전한 형상 또는 존재에 대한 신념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원형(圓形)이란 그 속에 생명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모든 존재가 유래한 존재의 원인인 것이다. 또한 하나의 원형은 하나의 알이 그런 것처럼 무한한 자기 복제가 시작되는 시점, 세계가 파생되는 시점, 세계의 근원, 하나의 모듈이다. 그리고 원형 자체는 어떠한 맺힘도 매듭도 없이 닫혀져 있는 구조로 인해 자기 완결적이고 자기 순환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결정적이다. 즉, 그 속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고, 모든 지점이 시점인 동시에 종점이며, 모든 지점이 과정으로서 주어진다. 그 속에서 모든 결정적인 것들은 임의적인 것, 자의적인 것, 비결정적인 것으로 변질된다. 이처럼 구형은 그 자체 닫혀 있는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로부터 유래한 완전성의 상징은 열려진 체계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열려진 체계로 나타난 비결정적인 성질로 인해 무한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원형이 실현하고 있는 완전성과 무한의 상징은 다름 아닌 이처럼 열려진 체계와 비결정성에서 유래한 것이란 점에서 그 자체 모순율에 의한 상징인 것이다. 이처럼 이재효의 작업에 나타난 원 형상은 자연의 본성을 밝혀주는 상징의 연쇄를 불러일으킨다.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작업은 자연의 본성을 표상하기 위해 도입한 원형이나 기하학적 형태로 인해, 그리고 소재를 매달거나 쌓는 구축적인 방법으로 인해 구조주의에 대한 암묵적인 영향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다양하고 복잡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의 우연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듯한 자연은 실상 그 감각적인 표면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면에는 엄밀한 구조와 기초가 놓여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구조를 자연의 원형, 자연의 본성이 반영된 피사체로 본다. 그리고 이는 작가의 작업에서 원형과 여타의 재구성된 기하학적인 형태로, 개별적인 개체들이 모여 군집을 이룬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이런 구축적이고 구조적인 방법이 작가의 조각으로 하여금 단일의 소재에 기초한 여타의 조각의 방법과는 구별되게 한다. 이처럼 개체들이 개별적인 성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단일한 형상과의 관계 속에 놓여진 작가의 조각은 집약적이고 또한 기념비적인 인상을 준다(모든 본성과 원형 그리고 구조를 지향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본질주의와 환원주의에 접맥돼 있고,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형상은 대개 기념비적이다). 이런 구조주의에 대한 환기는 원형이나 기하학적인 형태와 함께, 상대적으로 더 추상화된 관념의 형태로도 현상한다. 예컨대 마른 나뭇잎을 둥글게 말은 오브제나, 가는 철사를 둥글게 뭉쳐 만든 오브제를 평면의 틀 속에다가 빼곡하게 부착한 작업들은 같으면서도 다른, 반복적이고도 순환적인 자연의 원리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여타의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연을 조각의 형태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작업 중에는 서사미술(서사조각)의 가능성을 예견케 하는 작품을 볼 수 있다. 마치 배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천장에다가 거꾸로 매단 작품이 그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배는 삶에 대한 대표적인 상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테면 전복된 배, 좌초된 배, 풍랑에 직면한 배는 그대로 삶의 여러 형편들을 은유하는 기호이다. 그리고 가능성으로 치자면, 일종의 생물학적 변태에 바탕을 둔 메타모르포제의 가능성도 엿보인다. 예컨대 우연적으로 주어진 나뭇가지의 비정형의 형태가 마치 생명체의 유기적인 생장(생리)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이런 내레이션이나 생물학적 변태의 도입에 대해서는 일단은 예외적인 경우로 보이며(특히 배 형상은 보기에 따라서는 작가의 다른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기하학적 형상에 대한 형식실험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차후 작가의 작업에서 일정한 변수로 작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더 지켜볼 일이다.
자연과 조각을 매개하는 연금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재효의 작업은 자연으로부터 취해온 돌이나 나무 그리고 낙엽 등의 소재를 이용하여, 이를 원통이나 원구와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재구성해낸 것이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자연에서 채집된 소재의 질료가 최종적인 형태에서도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가급적 자연의 형질을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자연 상태로부터 형상화의 가능성을 찾아낸 결과가 조각으로 현상한 것이다. 여기서 그 형상화의 가능성이란 이미 소재로서 도입된 돌 속에, 나뭇가지 속에, 나뭇잎 속에 내재돼 있던 것이며, 이를 작가가 치열한 자연과의 교접 속에서 발견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서는 자연에 편재해 있는 가능한 형상을 발견해내는 과정이 중요하며, 이는 전통적인 조각 개념과는 일정한 차이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는 연금술에 비유될만한 일종의 비의적인 과정을 통해서 조각의 지평을 증대시키고 있다(이미 전작에서 작가는 조형물 자체에 한정된 전통적인 조각 개념을 상대적으로 개체와 요소들간의 관계성이 강조된 공간설치미술로까지 그 지평을 증대시킨 바 있다). 전작에서는 재료로 도입된 소재의 질료가 최종적인 형상에서도 그대로 간직돼 있었던 데 반해, 근작에서는 소재의 질료가 연금술의 개입으로 인해 현저하게 변질된다. 이처럼 연금술은 일종의 화학반응을 매개로 하여 주어진 세계, 주어진 조건의 형질을 변화시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부연하면, 둘 이상의 이질적인 물질(질료)들을 하나로 결합시켜서 제 3의 물질을 추출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흙, 물, 불, 공기의 4대 원소 상호간의 화학반응이 이를 현실로 만들어준다(4대 원소는 세계의 기본 질료이며,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의 개념이 기대고 있는 근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연금술이 흔히 세상과 존재를 변화시키는 혁명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연금술의 도입으로 작가가 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려는 것은 아닌가,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작품을 보면, 불에 탄 탄화목(炭化木, 숯)을 몸체로 한 특유의 조형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자연목과 나뭇가지, 나무둥치와 침목의 표면에다가 수많은 못을 박아 넣고, 휘고, 그라인더를 이용하여 그 휜 표면을 갈아낸다. 그리고는 이를 거의 숯 덩어리가 될 정도로 불에 태워 못이 나무 표면 위로 돌출 되게 한다. 이로써 은색의 빛을 발하는 금속성의 소재와 숯 덩어리의 유기적인 소재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는 전작에서의 자연스러움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조형적이고 인공적인 자취가 많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질적인 소재간의 결합에 연유한 대비효과 탓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들에서는 일종의 일루전적인 효과도 발견된다. 마치 평면 위에 부가된 정형 또는 비정형의 드로잉을 연상시킨다(이는 작가가 근작에 대해 못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 진술과도 통한다). 그리고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서는 거대한 침목들을 잇대 놓은 작품에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부터 헤아리기 어려울 만치 수많은 별들이 빛을 발하는 밤하늘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이로부터는 마치 우주의 신비에 직면하고 있는 듯한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 연금술에서 숯은 침묵, 죽음, 파괴, 소멸, 그리고 재생을 상징하는 물질이다(그 상징적 의미는 재와도 통한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고, 죽음은 삶을 전제로 한 것이다. 소멸이 없으면 재생도 없고, 재생이 없으면 소멸도 없다. 이처럼 숯은 그 이면에 삶과 죽음, 재생과 소멸이 서로 물려 있는 순환원리를 숨기고 있으며, 이는 그대로 삶의 과정에 존재하는 전이의 계기들, 예컨대 정화의식과 통과의례와도 통한다(작가는 아예 검게 탄 숯만을 설치 전시한 작업에서 숯이 내포한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은 흙, 물, 공기와 함께 세계의 근원 물질인 4대 원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숯과 불 그리고 공기의 결합은 연금술에 있어서 특히 재생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작가의 근작은 이러한 생명과 유관한(세계의 근원물질은 필연적으로 생명이 유래한 최초의 조건일 수밖에 없다)물질과 원소의 힘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자연이 다시 생명을 얻어 빛으로 되살아난 것으로, 잿더미 속에 움튼 생명의 싹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헤아릴 수 없는 것들, 소멸로부터 재생으로 건너온 것들이 거듭 존재에 대한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
결어
이재효는 나무를 재료로 하여 나무공을, 풀을 재료로 하여 풀공을, 돌을 재료로 하여 돌공을, 철을 재료로 하여 철공을 만든다. 재료는 하나같이 자연으로부터 채집된 것들이며, 최종적인 형상 속에서도 여전히 처음의 질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공들은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 어떠한 틈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의 강고한 결정체가 아니다. 대신 나뭇가지들, 풀들, 잡석들, 철근들이 얼기설기 얽혀져 만들어진 헐렁한 구조물이다. 그 속에서 부분들은 자기의 개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전체 형상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구조물에 나타난 헐렁한 구멍들, 틈들은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가 상호 내포적이고 상호 포괄적인 관계로서 서로 통해 있다. 그 구조물에서는 자기의 존재를 주장하기보다는 타자에 대해서 열려 있는 유연성, 호환성, 가변성이 느껴진다. 그 공들은 시각적이고 심미적인 쾌감을 불러일으키며, 이와 함께 어떤 의미를 불러온다. 그 의미는 다름 아닌 자연성 즉 자연의 본성으로서, 이는 완전성과 질서로서 표상된다. 이런 자연의 본질로서의 완전성과 질서 개념은 일상적인 관점과 현상적인 차원에서의 개념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자연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며, 또한 자연이 내재하고 있는 질서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인위를 넘어선 선험적인 것이다. 이재효의 작업에 나타난 공 형상은 선험적인 자연, 그 자체로 완전한 자연, 이런 자연이 내포하고 있는 질서를 모방한 것이다. 자연의 감각적인 표면을 넘어서 있는 자연 자체, 그리고 그 자연 자체의 원리와 규준과 법을 상징한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연의 본성을 하나의 원으로서 이해하고 있고, 이는 작가의 작업에서 원형과 원통 그리고 원기둥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같은 원의 다변화된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원형(圓形)의 기하학적인 형태를 빌려 자연의 원형(原形)을 표상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탄화목과 못을 대비시킨 근작에서는 자연의 비의(秘儀, 秘意)가 드러나 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물려 있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자연의 진리를 드러낸다. 탄화목의 표면에서 반짝이며 빛을 발하고 있는 헤아릴 수도 없는 빛의 점(光點)들은 소멸로부터 재생으로 건너온 존재의 비밀을 엿보는 것과 같은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리고 일련의 오브제 작업들에는 버려진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배어있다. 버려진 물건들은 작가의 상상력을 관통하면서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놀라움을 자아내는 오브제로 다시 태어난다. 이로부터는 삶에 대한 애정과 위트와 여유가 느껴진다. 그 이면에는 미미한 물건조차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는 작가의 치열한 의식과 근성이 놓여 있다. 그리고 작가의 혜안(慧眼, 心眼)이 생활 속에 존재하는 미적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준다. 작가의 작업이 갖는 매력은 이처럼 생활 속에서, 그리고 자연 속에서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던 형상(자연의 원형)을 조각으로서 실현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일상과 자연을 심미화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즉,
아마도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힘이 없다. 단지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 녹슬고 휘어진 못 하나라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아름답다.
일상을 심미화한다는 것은 일상이 숨기고 있는 잠재적인 형태를 발견한다는 것이며, 일상을 사는 개별적인 것들(물론 물건들도)에게 존재의 의미를 찾아준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을 나와 무관한 무의미의 지평으로부터 나와 유관한 유의미의 지평으로 건져 올리는 것이다. 이재효는 한낱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게서도, 버려진 미미한 물건에게서도 그것이 존재하는 의미를 찾아내고야 만다. 그러므로 작가의 일련의 작업들에 대해서는 삶 자체에 대한, 삶의 조형화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각의 전통적인 개념에 대한 일종의 작은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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