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아픔 두루 살펴 / 약손과 천수관음보살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손은 마음의 실천이다.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손을 통해 이루어진다.
‘손이 모자란다.’든지 ‘손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일할 사람을 손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일을 하는 실질적 신체부위가 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을 시작하면 ‘손을 댄다(着手)’,
일을 그만두면 ‘손을 뗀다’,
어떤 일을 당해 무관심한 것을
‘수수방관(袖手傍觀, 손을 소매 속에 숨기고 바라봄)’
이라고 한다.
무언가를 얻거나 소득이 생겨도 움켜쥐어야 내 것이 되니까
‘손에 넣고 손에 잡는’ 의미로 파악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백수(白手)는 흰 손이니,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빈손 아닌가.
자신이 죽으면 두 손을 상여 밖으로 내놓도록 유언하여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을 말해준
어느 부자의 이야기 또한 그러한 맥락이다.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손의 육체성은 관계 맺기의 표상이 된다.
‘손을 내민다’, ‘손을 잡는다’는 것은
서로의 일을 덜고 힘겨움을 함께 진다는 뜻이다.
양손에 물건을 든 이에게 문을 열어주거나,
바쁜 동료의 일거리 하나를 대신해주는 것도 잠시나마
상대의 손이 되는 일이다.
이처럼 누구에겐가 손을 내미는 것은
대상을 마음에 담는 행동이기에
손은 마음과 몸이 하나 되는 실천행의 상징이다.
어릴 적에 ‘내 손이 약손’이라며
어머니, 할머니께서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면 신기하게도
편안해지고 아픔이 줄어들었던 경험들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내 아픔을 함께한다는
심리적 위안이 아픈 부위에 집중되어 있는 마음을
이완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아픔을 함께하고 치유해주는 궁극의 손을
우리는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에서 만나게 된다.
천 개의 손을 지닌 관음보살은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한 힘이
그만큼 한량없이 크고 많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천수관음보살의 도상을 자세히 보면 하나하나의
손바닥마다 눈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결국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보살인 것이다.
천수천안보살은 천 개의 눈으로 모든 중생의 고통을 낱낱이 살피고,
천 개의 손으로 모든 중생에게 두루 자비를 베푼다는 염원을
상징하는 존재일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한 여인이 눈이 먼 어린 자식을 위해
분황사 천수관음보살 벽화 앞에서 기도한 영험설화가 전한다.
여인은 아이에게 “두 손 모아 천수관음보살님께 비옵나이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 하나를 덜어,
두 눈 감은 저에게 주시옵소서.
아, 제게 주시면 그 자비 얼마나 클 것입니까”라는
노래를 부르며 빌게 했더니 눈이 떠졌다는 것이다.
중생의 고통이 ‘눈이 먼 괴로움’이기에,
고통의 치유가 관음보살이 지닌 천 개의 눈과 직접 연결됨으로써
천수천안보살의 상징성이 부각되는 이야기이다.
손과 마음의 관계를 얘기했듯이,
마음이 악하면 손도 ‘검은 손’이 된다.
마음이 이기적이면 누군가를 향했던 손을 거두고,
마음이 모질면 궁지에 빠진 상대의 손을 놓는다.
평정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악수(惡手)를 쓰게 되고,
마음을 가다듬으면 묘수(妙手)가 떠오른다.
천수천안보살의 눈이 자비의 마음(慈悲心)이라면
관음보살의 손은 자비의 실천(慈悲行)이듯이,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눈과 손의 등식관계’에
우리 삶의 질이 가늠된다.
‘눈이 달린 손은 맹목(盲目)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손, 마음이 있는 손입니다’라고 한
신영복 선생의 표현처럼, 손에 어떠한 마음을 담을 것인지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곧 보살이 아니겠는가.
천 개의 손에 천 개의 눈을 그려 넣은 것이
중생을 위한 부처의 마음이라면,
내 손에 어떠한 눈을 그려 어떠한 마음을 담을지 성찰하는 삶이
부처를 향한 중생의 마음 아니겠는가.
구미래/동국대 불교대학원 강사
불교신문
첫댓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