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선 - 도시의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
이영준(큐레이터,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


도시는 태생적으로 상업적 기능을 위해 탄생한 근대적 공간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근대도시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산업혁명이다. 철도와 항구의 발달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주거환경을 만들게 되었으며 도시라는 공룡은 지금도 여전히 성장해가고 있다. 근대라는 이름으로 일어났던 수많은 예술사조들도 따지고 보면 ‘도시’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랭루주를 통해 도시인의 현실과 욕망을 그린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1864 ~ 1901)이나 파리를 빛바랜 하얀풍경으로 묘사했던 위트릴로(Maurice Utrillo 1883∼1955), 도시인들의 오만과 위선을 가감없이 드러냈던 꾸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등 그 예들은 수없이 많다. 한국은 기형적으로 80%가 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 도시풍경이 과거 전형적인 시골풍경처럼 낯설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류승선은 줄곧 도시를 형상해 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스산한 뒷골목도 음습한 이면도 아닌 간판즐비한 도시의 정면이다. 대형광고판이 위용을 자랑하고 네온사인이 점멸하는, 그래서 도시적 가치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 표면을 응시한다. 자본과 욕망이 뒤엉킨 도시의 생태는 무한 경쟁과 생존의 논리가 우위를 점하는 처소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붓 터치와 화려한 색채로 그려진 류승선의 도시는 그렇게 암울하지 않다. 오히려 활기차게 느껴진다. 작가의 탁월한 회화적 감수성 때문이기도 하고 심각한 것을 싫어하는 태생적인 기질 탓이기도 하다.
도시의 풍경이 압도하는 작가의 작품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등장한다. 조그맣게 형상화되어있는 사람들은 이미 이 공간의 주제가 아님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어디론가 바삐 흘러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도시적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무척이나 닮아있다. 그럼에도 작가의 작품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쇼윈도우를 클로즈업해서 묘사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항상 하늘이 건물과 대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건물에 가려 힘겹게 드러나는 하늘은 자연을 상징하는 기제이자 희망의 메신저이다. 도시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숭고’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숭고’의 감정이 퇴색된 조형적인 요소일 뿐이다. 도시적 삶을 살아가며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그렇게 하늘이 묘사되어있다. 하지만 이 하늘은 광고판으로 뒤덮여 있는 도시의 표면을 살리는 여유이자 잉여이다.
류승선의 작품이 가지는 미덕은 바로 도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의 감각적인 시선에 있다. 도시라는 실재가 주는 느낌을 가감없이 투영하는 작가의 작품 속에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작가는 “작업도중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매력적인 흔적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그 상황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너무 짜여진 각본은 싫다.”고 말해왔다.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감각으로 그저 도시의 정면을 형상화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도시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