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님의 위빠사나 체험기 (자료: http://cafe.daum.net/vipassana)
2002. 9. 30.
50세에 미얀마에 간 지 3일만에 사야도와 인터뷰할 때,
"망상도 안 보이고 빛도 안 보이고 '일어남-꺼짐'만 보여서 무상을 느꼈습니다." 라고 보고했더니
"그대는 출세간이 아니라 세간의 법을 얘기하는구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잘난 체하지 말라는 뜻이었지요.
창피해서 3일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잘난 척도 해야 배우는 것 같습니다.
미얀마에 가서 수행한지 4년 만에 위빠싸나가 뭔지 조금 알았습니다. 그 후 미얀마에 갈 때마다 "아, 이것이 위빠사나로구나"라고 새롭게 알곤 합니다. 수많은 고정관념의 벽을 하나하나씩 뚫어 가는 게 수행의 과정입니다.
90세 된 스승(우 쉐오민 사야도)에게
"밥 탈 때 '내 앞에 서는 두 사람이 단기출가를 마치고 빨리 귀가하면 내가 스님들을 제외하곤 가장 먼저 밥을 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제 마음을 봤습니다. 저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보고드리니, 스승이
"그게 누구 마음이냐?"
하는 순간 저는 깨닫고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 그 순간의 제 마음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걸 내 본심인 줄 알고 오랫동안 괴로워하곤 합니다. 과거심을 잡고 바둥거리는 것이죠. 이것은 상(想, 산냐, sa~n~naa)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궁극적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자(자족, 감사하는 마음, 분수를 아는 자), 진리를 들은 자, 진리를 본 자이다."
사마디(삼매)는 그냥 집중이 아니라 "청정한 마음의 집중"입니다. 도둑이 도둑질하려고 집중해서 자물쇠를 몰래 여는 것은 사마디가 아닙니다. 6근에서 감지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 차별 없이 보는 것입니다. 사마디가 되면 통증이 없어지고, 잠도 안 오고, 엔돌핀이 나오고, 지혜가 생깁니다.
위빠사나는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영원한 어떤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있으나 '절대적인 그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지어져 생멸할 뿐이며, 업의 조화일 뿐입니다.
♣ 2002/10/1 ♣
수행 중에 소음이 들릴 때 마음을 소리나는 곳으로 가져가면 화가 납니다. 그러나 마음을 귀로 가져가면 그냥 소리로 들리고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랬구나. 그것의 특성은 그것이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랬구나."는 알아차리고(사띠하고),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자식, 남편, 아내를 가장 못 받아드립니다. 집착 즉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좋아하는 게 사라지면 고즈넉이 바라보는 게 즐거움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근이 6경과 접촉할 때 6식으로 아는 것만이 실재다. 즉 세계는 18계이다. 이것 이외의 것은 언급하지 말라."
이것은 사띠로 6경을 보라는 메시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 수행이 어디까지 왔는지 드러내는 자는 내 제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할 때, "저 사람"이라고 지칭하면서 비방하는 것보다 "수다원" 또는 "아라한"이라고 하면서 비방하면 구업(口業)이 더욱 무겁게 되기 때문입니다.
*: 18계는 다음의 6근, 6경, 6식을 말한다.
6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경: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6식: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 2002/10/2 ♣
마하시선원에서 4년 간 명칭을 붙였습니다. "일어남-꺼짐" "왼 발-오른 발"이 자동적으로 붙여졌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의 부작용은 명칭 붙이느라고 바빠서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대상을 봐야 하는데 실제로는 대상을 못보고 명칭을 보게 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초기에는 명칭을 붙여서 재미를 느껴야 하지만 나중에 명칭을 붙이지 않아도 대상을 볼 수 있을 때에는 명칭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마하시선원에서 4년 수행 후. 쉐오민 선원에서 3년 간 마음 보는 수행을 하다가, 마음에 너무 매달리니 오히려 걸려서 명칭 붙이는 게 옳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하시 선원으로 돌아와서 마하시선사의 위대함을 알았습니다.
요약하면, 초기에는 명칭을 붙여야 하나 어느 단계에 이르면 명칭을 빼야 합니다.
부도나거나 이혼한 사람들이 괴로워서 수행합니다. 선업으로 수행한다고 하는데, 부도나거나 이혼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선업으로 부도난 게 아니라 악업으로 부도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선업이 전혀 없다면 좌절을 하겠지만 선업이 있었기에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선업과 악업은 별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 4단계 수행 - 느낌[受]① - 수념처(느낌을 알아차림)란 무엇인가 ♣
2002/10/7
수념처(受念處, Vedanaa, 웨다나): 느낌(감각)을 알아차림.
1) 수카(뚝카, 미얀마 발음) 웨다나(Sukha V.): 즐거운 느낌, 행복한 느낌
2) 두카(Dukkha) 웨다나: 괴로운 느낌, 불행한 느낌
3) 우뻬카(Upekkha) 웨다나: 덤덤한 느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느낌.
4) 소마나싸(Somanassa) 웨다나: 즐거운 마음의 느낌
5) 도마나싸(Domanassa) 웨다나: 괴로운 마음의 느낌
1) 2) 3)은 몸으로 느끼는 웨다나, 4) 5)는 마음(意), 정신적 웨다나.
몸으로 느끼는 3가지 웨다나에 2가지 정신적 웨다나를 플러스하여 쾌락 혹은 고통을 더 깊게 느낍니다. 사띠가 잘 안 될 때 몸 웨다나가 정신적 웨다나로 발전됩니다. 이를 사띠하면 커트됩니다.
사야도께서 "몸 아플 때 마음까지 아프지 말라. 몸의 아픔은 몸의 아픔으로 그쳐라."라고 하신 것이 이른 말입니다. 두카 웨다나를 그대로 보지 못할 때 도마나싸 웨다나로 발전됩니다.
몸 아플 때 "아이고, 나 죽겠다."라고 하면 몸만 아픈 게 아니라 마음까지 괴로워하는 것으로 도마나싸 웨다나로 발전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는 걸 모르고 몸을 '나'라고 잘못 알기 때문이지요. 몸은 몸이고 마음은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를 사띠로 차단해야 합니다.
아플 때 끙끙 소리를 내는 것도 마음까지 아파진 것입니다. 괴로울 때 술 마시거나 노름으로 빠지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마약에 손대면 영육(靈肉)이 피폐해지지요.
경전에서 "몸에서 몸을 봐라."라고 한 것은 몸을 볼 때는 몸만 보라는 뜻입니다. 물질을 볼 때는 물질만 봐야지 이를 다른 것(정신적인 것)으로 발전시키지 말라는 것이지요. 자동차에 개가 치어 죽은 것을 보고 "왜 안 치웠나? 나도 언젠가 죽겠구나."라고 비약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상을 느끼는 것은 좋지만 지혜로 볼 뿐, '슬프다'는 생각을 내지 말라는 것이지요.
우뻬카 웨다나는 수행자가 알아야할 핵심인데 균형되어 삿된 견해가 배제된 느낌입니다. 기쁨이나 편함마저 배제되어 흔들리지 않는 느낌인 것이지요.
우뻬카 웨다나는 무지한 느낌에 가깝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덤덤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무지에 빠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일어남-꺼짐' 다음 숨이 멈춰 있는 동안을 '쉼'이라고 명칭을 붙여서 '일어남-꺼짐-쉼'이라고 명칭을 붙여가면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느낌이 없다' 보다는 '덤덤하다' 혹은 '특별한 느낌이 없다'라고 아는 게 더 사띠하기 쉽습니다. 흔히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데,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선한 마음으로 가득찬 느낌으로 존재함을 느끼는 게 삶이 구현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1) 2) 3)에서 4) 5)로 넘어가지 않도록 사띠해야 합니다. 만약 이미 넘어갔으면 넘어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물질적 웨다나인 두카 웨다나가 일어났을 때 정신적인 도마나싸 웨다나가 일어나면, 이것이 마음의 영역이지만 물질인 가슴에 강렬한 흔적을 남깁니다. 이는 마치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돌은 이미 갈아 앉아 버렸어도 물결은 파문은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으로 화를 냈을 때 고통을 바라보면 화는 사라지지만 뒤에 강렬한 느낌으로 가슴에 뜹니다. 이를 보는 게 수념처입니다.
잘못했을 때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낍니다. 그 느낌은 사라져서 마음에 남아 있지 않지만 파장은 몸에 남아 있습니다. 괴로움은 사라졌어도 파장은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이지요. 두근거림의 성품이 뭔가를 느낌으로 보십시오.
잘못했을 때 두근거리는 마음을 보고 미안해하는 내 마음을 보십시오. 미안해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주위 사람에게 미안해하면서 괴로워하는 마음에 포커스를 차단하고, 느낌을 느낌만으로 보십시오. 하나의 사건이 일생동안 괴로움 혹은 즐거움을 주는 것을 커트해야 됩니다.
♣ 4단계 수행 - 느낌[受]② - 자신을 나무처럼, 하늘처럼 보라 ♣
2002/10/8
사야도에게 호흡이 끊어져서 안 보인다고 했더니, "그럼 아는 마음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없는 마음을 어떻게 보냐고 했더니 "새로 마음을 내라. 희미해진 마음을 봐라. 마음은 끊임없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좌선을 끝내고는 (1) 내 자세가 바른가? (2) 위리야(정진), 사띠(알아차림), 사마디(삼매)가 균형을 이루었는가를 점검하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띠가 강하면 잘 하려는 마음 때문에 산만해지고 사마디가 강하면 혼침에 빠지기 쉽습니다.
수행자는 자기자신을 "나무처럼 봐라, 하늘처럼 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에는 새도 찾아오고 바람도 불고, 해도 비치지만 하나도 거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합니다. 하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성하거나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영향으로 번뇌가 자랍니다. 단지 "그랬구나."라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망상을 100번 보면 100번 알아차린 만큼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망상 후에 가슴에 남은 망상의 흔적을 보십시오. 망상이 선생님입니다.
화를 느낌으로 변경해서 보십시오. 화낸 마음을 보십시오. 화가 사라졌으면 사라진 마음을 보십시오. 이를 되풀이하면 마음이 탐진치를 여의게 됩니다.
* 위리야, 사띠, 사마디는 팔정도의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른 알아차림), 정정(바른 마음집중)에 해당하며, 계정혜(戒定慧) 삼학 중의 혜에 해당한다.
♣ 4단계 수행 - 느낌[受]③ - 독서할 때, 그리고 잠들기 전에 ♣
2002/10/9
독서를 할 때는 배를 보지말고 책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때는 사마디이므로 사띠가 불가합니다. 현재 내가 하는 행위 중 가장 뛰어난 행위에 집중해야 합니다. 배를 보는 것은 볼 게 없을 때 보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TV를 보면 잠을 설칩니다. 자기 전에 호흡을 보십시오. 그러면 아침까지 이어져서 눈뜸과 동시에 호흡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숙면을 취하게 되어 하루의 출발이 산뜻하게 됩니다.
아침에 "무슨 마음으로 일어났는가?"를 꼭 보십시오. 불안한 마음으로 잠들면 그 마음을 그대로 잠으로 가져가게 됩니다. 의식이 연속적으로 고양되어야 합니다. 잠들기 전에 호흡을 봐서 고양되면 잘 때까지 의식이 고양됩니다. 습관이 되면 아침에 깼을 때 딱 보이는 게 호흡입니다. 꿈은 부정적 요인이어서 꿈을 꾸면 대미지를 받습니다.
안이비설(眼耳鼻舌)이 색성향미(色聲香味)를 접촉했을 때 일차적으로는 덤덤한 느낌만 생깁니다. 그리고 나서 2차적으로 호불호(好不好)가 생깁니다. 신(身)이 물체를 접촉했을 때나 의(意)가 법(法, 생각)을 접촉했을 때는 즉각 호불호 반응을 일으킵니다. 통증은 바로 괴로움입니다. 망상은 정신적인 것이므로 호불호가 있습니다.
미세한 느낌을 보면 졸리는 순간에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졸릴 때의 느낌은 미세하기 때문입니다.
불쾌감을 느끼면 그 마음을 보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까지 보십시오. 느낌의 변화를 건성으로 보지말고 분명히 알아차리(sati)십시오. 변화를 보게 되면 위빠사나에 재미를 느낍니다.
♣ 4단계 수행 - 느낌[受]④ - 위빠사나를 위해서 포기해야할 것, 내가 가만히 있는데 남이 미워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
2002/10/10
위빠사나를 위해서 포기해야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활동하기를 좋아하는 것
(2)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것
(3)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
(4) 사교를 즐기는 것
(5) 감각제어를 하지 않는 것
(6) 음식을 절제하지 않는 것
나는 가만히 있어도 나 때문에 남이 괴로워합니다. 잘 생겨서, 부자라서, 좋은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삶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지은 지 모르는 죄에 대해서 용서해 주세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잘 나서 남이 괴로워하고, 그 때문에 내가 남을 미워했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면, 원인은 '나'입니다. 상대가 화내는 건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드리는 게 지혜입니다. 괴로움을 느끼는 걸로 그치고 아프지(도마나싸 웨다나)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설법하여 제자들이 많이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깨닫게 해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갑" 도우(道友)님께 "절에 100만원 보시하시오." 하면 '저 절에 보시하면 무슨 공덕이 있을까, 할까, 말까?'하고 이해타산을 따져서 결국 보시했을 때 내가 하라고 해서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인이 선택한 것입니다. 선택은 자기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 4단계 수행 - 느낌[受]⑤ - 수행이 답보 상태인 이유, 10 바라밀 ♣
2002/10/11
수행이 답보 상태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노력 부족
(2) 선업(바라밀) 공덕 부족
(3) 빠라마타로 보지 않고 빤야띠에 빠져 있을 때
수행에는 남녀노소의 구별, 지식 등이 필요 없습니다. 선업의 마음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개념적이 아니라 내용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몸이나 말은 빤야띠이고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빠라마타입니다. 수행이 발전되면 의식이 고양됩니다.
손을 합장했을 때 손은 빤야띠이고 열기는 빠라마타입니다.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은 손이 아니라 열기입니다. 우리는 닭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맛을 먹습니다.
빛이 보일 때는 '내가 좋아하고 있구나.'하고 그 마음을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자꾸 불러들여서 다음 단계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스스로 벗어나기 힘들므로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랬구나."하고 끝내야 합니다.
부처님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먹는 것은 즐거운 것입니다. 다만 쾌락으로 빠지지 말라는 것이지요. 선업의 즐거움을 알아차리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시할 때 교만한 마음이 생깁니다. '즐거움도 변한다'고 보라는 것입니다. 보시할 때 뭔가 바라고 주었다면 교만심을 낸 것입니다. 목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지고의 행복 - 열반은 느낌이 사라진 것입니다. 거친 속성이 배제된 느낌입니다. 지고의 행복은 느낌이 없습니다.
사띠할 때 너무 집중하면 사마디가 잘 안 됩니다. 나를 주목하십시오.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대상에 빠진 것입니다. 이번에는 마음을 안근(눈)에 두고 나를 보십시오. 이목구비가 덜 뚜렷할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대상에 빠지지 않은 것입니다. 남녀로 구분하여 보지 않은 겁니다.
사띠로 보면 객관화가 됩니다. 뚫어지게 보면 사띠가 아닙니다. 그냥 있어서 볼뿐입니다. 뚫어지게 보면 상기(上氣)가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철견(徹見)하라는 것은 뚫어지게 보라는 것이 아니라 성품을 보라는 것입니다. 무상·고·무아로 보라는 것입니다. 안팎을 보라는 것은 '밖'은 빤야띠를 보라는 것이고 '안'은 빠라마타로 보라는 것입니다.
♣ 10 바라밀 ♣
(1) 보시
거지에게 보시할 때는 탐진치의 마음으로 주기 쉽습니다. 보시할 때 순수하게 못합니다. 동정, 아만, 자랑 등등 목적이 있습니다. 보시하기 전에 3번 사띠하십시오.
① '무슨 마음으로 보시하는가?' 보십시오. 동정이나 탐심, 진심(瞋心)으로 주려고 할 때는 주시 마십시오. 뭔가 바라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선업으로 시작했지만 불선업으로 갑니다. 사띠가 없으면 나쁜 방향으로 갑니다. 과시, 바라는 마음, 기복, 경쟁적으로 주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남이 보시하는 것 방해하지 마십시오. 선업의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욕계에 살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② 바라는 게 없을 때 보시하십시오. 그러나 미미하나마(잠재의식 속에) 보상을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③ "내가 보시로 인한 모든 공덕까지도 당신에게 주겠다."는 생각이 들 때 보시하십시오.
스님이 보시를 받을 때는 단절의식, 즉 "이 보시의 공덕으로 도과(道果)를 얻어서 열반을 성취하십시오."라고 말함으로써 주는 사람이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과 '스님이 내가 보시를 받았다.'는 생각을 없앱니다.
상대방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정 주고서 실망했을 때,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 주었는데 네가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게 한국사람입니다. 한국인이 한이 많은 것도 정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2) 지계: 계를 지키는 것.
(3) 출가: 미얀마는 단기출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취직, 결혼에 불리합니다.
(4) 지혜: 삼법인을 이해하는 것
(5) 정진: 수행시 활력을 내서 이끌어 가는 것
(6) 인내: 고통을 참는 것. 다른 사람을 참는 것.
(7) 믿음: 자신과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
(8) 발원: 굳건한 결심. "서원(궁극적 목표)을 세우되 바램은 없어야 됩니다." 바램은 욕망입니다. 호흡시 망상, 통증 없애려는 것은 욕망입니다. 피하는 것도 욕망입니다. 좋은 바램도 다 버리십시오. 선업에 대한 욕망도 불선업으로 변경됩니다.
(9) 자비: 모든 존재의 행복을 바람.
(10) 평등(우뻬카): 집착과 혐오가 없고, 좋고 싫은 것이 없이 공평하게 바라보는 것. 올바르고 합당하게 생각하는 것.
부처님은 상대방이 욕을 해도 평등심으로 받아드리고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상대방을 열반을 얻은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아플 때 화내지 마십시오. 아프면 열이 나는데, 화내도 열이 나므로, 열에 열을 더해서 더 아프게 됩니다.
망상이 들어오는 걸 보는 것도 좋지만 사라지는 걸 보는 것은 무상을 느끼게 되므로 더욱 좋습니다. 망상할 때 망상을 싫어하는 내 마음을 보십시오. 망상을 배척하면 진심(瞋心)이 생겨서 망상이 더 극성을 부립니다.
♣ 4단계 수행 - 마음[心]ⓛ - 심념처(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림)란 무엇인가 ♣
2002/10/14
심념처(心念處), 즉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림은 느낌을 통해서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또한 생각이나 망상을 통해서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오온의 수상행식이 마음임을 알아차립니다. 식(識)은 마음이고, 수상행(受想行)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 보는 수행(심념처) 순서
제1단계: 물질과 호흡의 빤야띠(모양) 보기 -> 수행 시작할 때. 수행이 잘 안 될 때는 제1단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제2단계: 물질과 호흡, 느낌의 빠라마타(성품, 실재) 보기
제3단계: 마음 보기 -> 쉐우민에 우 꼬살라 사야도가 숲 속에서 몇 십 년 간 스스로 개발한 것으로, 경전에도 구체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법구경의 제1게송
마음(식)이 그들(색수상행)을 앞서 나간다.
마음이 그들(색수상행)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 모든 행위가 이루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천인: 무엇이 세상을 이끌고 무엇에 의해 끌려 다니며 번민합니까?
세존: 세상은 마음이 이끌고
마음에 의해 끌려 다니며
마음이란 하나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네.
천인: 무엇이 세상을 이끌고 무엇에 의해 끌려 다니며, 어떠한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합니까?
세존: 갈애가 세상을 이끌고
갈애에 의해 끌려 다니며
갈애란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한다.
갈애(ta.nhaa, 탕하)는 모든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갈애는
(1) 감각적 쾌락의 갈애(오근이 대상을 만나서 쾌락을 즐기고 오욕락을 즐기는 마음)
(2) 존재에 대한 갈애(살고 싶다는 마음,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마음)
(3) 비존재에 대한 갈애(삶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 주고 싶다는 마음, 허무에 대한 갈망,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
♣ 마음의 3가지 분류 ♣
1) 심(citta, 찌따): 마음은 마음의 작용을 일으킵니다. 이때의 마음(citta)과 마음의 작용(cetasika, 쩨따시까, 心所)을 말할 때 찌따라는 말을 씁니다.
(1) 마음: 탐진치가 있는 마음, 큰 마음(자비, 선정)과 작은 마음, 집중된 마음과 집중 안 된 마음 등 121 가지가 있습니다.
(2) 마음의 작용: 마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능과 작용이 있습니다. 오온의 느낌(수), 상, 행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모두 52가지가 있습니다.
2) 의(意, mana): 6근을 구별할 때의 인식기능. 법이란 것은 아는 대상인데, 이 법이 의(mana)의 감지대상입니다. 법을 대상으로 볼 때의 의(意). 대상의 내용을 받아드리는 것이 의(意)의 역할입니다.
3) 식(識, vi~n~na.na, 위냐나): 6근(眼耳鼻舌身意)이 6경(色聲香味觸法)에 부딪쳐서 6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할 때의 인식작용. 오온(色受想行識)을 인식합니다. 오온의 왕초입니다.
마음은 정보를 받아드릴 뿐입니다.
심소: 느낌, 기억, 행동, 호불호(好不好), 이익/불이익 등이 저장된 것.
마음: 고양된 상태에 따라 121가지이지 실제로는 하나입니다. 질만 달라질 뿐입니다. 선심/불선심, 집중된 마음, 집중되지 않은 마음 등. citta에 그림이란 뜻도 있습니다. 어떻게 색칠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특정한 마음은 없습니다.
심소: 그림이 다 다릅니다. 자기 마음의 상황으로 그립니다. 화가가 명작을 그릴 때 어떻게 그려질까요? 마음 작용의 수준이 반영된 것이 그림입니다.
손을 합장할 때 따뜻함을 아는 것은 식(識)입니다. 망상(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자기 마음이 생깁니다. 고정관념 응어리, 즐거움 등이 일어납니다. 이때 망상(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심념처에서 봅니다.
망상이 생기는 것을 아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중의 식(識)이 앞의 식을 본 것으로써, 이는 앞의 식과는 다른 식입니다. 두 개의 마음이 아니고 앞뒤의 마음입니다.
사띠가 계속되면 사마디가 되고 그러면 혼침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띠가 부족해서 나태, 게으름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위리야(정진)가 필요합니다. 정진이란 "지금 내 마음이 느슨한가?"를 관찰하면서 새로운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사띠입니다. 그래서 사띠, 사마디 및 위리야가 균형이 잡혀야 됩니다. 사마디가 바로 서고 사띠가 바로 서는데 이는 위리야가 세워준 것입니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나? 아, 사띠하고 있네." 그러면 사띠가 더욱 면밀해 집니다. 사띠 중에 또 사띠를 하는 것이지요. 1+1=2 가 아니라 1+1=5 가 됩니다.
사야도한테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 한 시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하니까 "그래? 그러면 앞으로는 하루 종일 계속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스스로 생멸합니다. 같은 수준의 알아차림이 계속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성성적적(惺惺寂寂)입니다.
♣ 4단계 수행 - 마음[心]② - 색수상행식은 구름,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 환상과 같다 ♣
2002/10/15
오온(五蘊)
색(色)은 한 조각 구름 같고
수(受)는 물거품 같으며
상(想)은 아지랑이 같고
행(行)은 파초나무 같고
식(識)은 요술처럼 환상 같다.
벗기고 또 벗겨도 알맹이가 없다.
망상이 떠오르면
망상을 알아차리고
망상하는 마음을 보고(집착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알게 된다)
망상이 사라진 마음을 보고
가슴에 남아 있는 느낌(망상의 흔적)을 보십시오.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 성향 때문에 마음이 쨍하고 울립니다.
그 느낌까지 봐야 편안해 집니다.
통증이 있을 때:
통증 때문에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십시오. 그걸 안 보고 통증만 보니 통증이 커지고 통증에 휘말려버립니다. 보면 사라집니다.
통증은 고질적이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로 마음을 내서 괴로워하는 마음을 보십시오. 마음이 통증을 보면 정신적 괴로움인 도마나싸 웨다나는 사라지고 육체적 괴로움만 남습니다.
수행자가 마음을 보지 못하면 수행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히려 화를 더 잘 냅니다. 수행이 잘 된 척 하려는 괴로움이 나쁜 짓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느낌이 있으면 느낌을 보고
마음이 있으면 마음을 보십시오.
♣ 4단계 수행 - 마음[心]③ - 마음과 물질(몸)의 상호 영향 관계, 가족으로 인해 괴로운 이유, 번뇌는 축적되는가? ♣
2002/10/16
마음과 물질(몸)의 상호 영향 관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마음.-----> 물질
②..↕..............↕③
...마음.<----- 물질
..............④
① 행주좌와의 모든 움직임은 마음이 일어나서 물질이 움직임.
② 마음이 마음의 작용을 일으킴. 즐거운 마음이 쾌락을 일으키고, 괴롭고 슬픈 마음이 쾌락을 추구하거나 죽고 싶도록 하는 경우.
③ 뛰면 땀나고 밥 먹으면 땀나고, 배변, 배뇨하는 것.
④ 속이 비었을 때 음식이 먹고 싶어짐.
마음은 앉은뱅이고
몸은 장님입니다.
마음은 몸이 없으면 갈 수 없고
몸은 마음이 없으면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현생의 성향은 과거생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비판하거나 개선이 안 됩니다. 바꾸려하지 않는 게 답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사야도에게
"왜 이렇게 가족으로 인해 내가 괴로운가?" 물었더니
"가족에 대한 집착 때문에 괴로운 건데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그냥 받아들여라. 못 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가족을 분신으로 보지말고 개체로 보십시오. 서로 조건지어져서 만났는데 선업인지 악업인지 모릅니다. 사랑을 줄뿐입니다. 시시비비를 따지지 마십시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나?
마음이 뭐 하고 있나? 마음은 어떤 상태인가?
마음은 바른가?
마음과 사띠가 같이 생겼다가 커져 가는가?
마음이 대상에 빠져 있는가?
마음이 집중하고 있는가?
마음이 사라지는 걸 아는가?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를 아는가?
부처님이 "나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하신 것은 각자의 선택으로 수행했을 뿐 부처님이 시켜서 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번뇌는 축적되는가?: 마음은 사라지지만 다음 마음에 조건지어주고 사라집니다. 따라서 번뇌는 축적됩니다. 이는 마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에 운동량을 전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번뇌는 지금의 촛불과 다음 순간의 촛불처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수증기가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는 것과 같고, 우유가 조건에 의해서 치즈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불행할 때 선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행, 불행은 보기에 따라서 불행, 행일 수도 있습니다.
마하시선원에 수맥이 지나가는 자리가 있어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수행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나 수맥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인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경행할 때 "그 자리에서 마음을 보십시오. 그 마음을 유지하면서 경행을 계속하십시오. 이제 발을 보지말고 마음을 보십시오. 발을 보지 않아도 마음에서 발의 움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분은 이렇게 하시고 안 되는 분은 그냥 발을 보십시오. 자기 수준에 맞춰서 수행하면 됩니다. 무리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 4단계 수행 - 마음[心]④ - 불교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
2002/10/17
위빠사나는 일상에서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거부하지 말고 싫어하지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 핵심이며 중도입니다.
명칭을 붙이기 때문에 마음을 못 봅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데 명칭을 붙이게 되면 하나가 더 추가되어 사띠가 약해지고 염불하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집중이 안 될 때 집중되게 하기 위해서 명칭을 붙이지만, 어느 정도 집중이 되면 안 붙이는 게 좋습니다.
새로 마음을 내는 게 마음 보는 것입니다.
화났을 때 그 때의 내 마음을 보십시오.
객관적으로 화낸 내 마음을 봅니다.
그리곤 "아상(我相), 사견(邪見)이 있었네."하고 알아차립니다.
그 다음에 가슴으로 돌아와서 탐심이 사라진 내 마음을 봅니다.
또 사라진 것을 아는 마음을 보십시오.
그 아는 마음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곤 가슴으로 돌아와서 느낌이나 호흡을 보십시오.
탐욕은 나쁜 것이 아니라 봐야할 대상입니다.
자꾸 봐야 사라집니다.
뿌리가 깊어서 한 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게 탐욕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바라지말고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의 흐름처럼 받아들이십시오.
나무가 모든 것을 받아드리듯 수행하십시오.
느낌을 보지 못하면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여 탐욕으로 빠집니다.
지혜의 개발만이 인간을 깨끗하게 합니다.
고귀한 가문은 정견(正見)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에 고귀한 가문이 되지 않습니다.
졸부는 3대 못 갑니다.
재가자는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즐거움은 괜찮습니다. 지나쳐서 극단으로 빠지면 탐욕이 됩니다. '어느 정도까지의 즐거움이 괜찮은가?'는 사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재가자가 수행한다고 부부관계를 깨서는 안 됩니다.
좌선할 때,
망상하는 것을 사띠하고
망상하는 마음을 보고
가슴에서 망상의 흔적을 느끼고
호흡으로 돌아가든지 혹은
사라진 느낌(아무 느낌이 없음)을 계속 봅니다. 그러면 우뻬카 웨다나가 우뻬카로 됩니다.
깊은 사마디에 들면 지혜가 안 나오고 졸게 됩니다. 조느냐, 깨어 있느냐, 마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위빠사나는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성품을 보면 대상을 잡을 수 있고 집중도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루해서 마음이 도망갑니다.
♣ 4단계 수행 - 마음[心]⑤ - 마음을 보는 여러 가지 방법 ♣
2002/10/18
마음을 보는 여러 가지 방법
1) 좌선을 시작할 때
① 지금 나의 마음가짐이 바른가?
② 지금 나의 마음이 바라는 것이 났는가?
③ 지금 나의 마음이 화를 내거나 누구를 미워하고 있지 않은가?
④ 지금 나의 마음이 게으름에 빠져 멍멍한 상태가 아닌가?
⑤ 지금 나의 마음이 들떠서 안정이 안 되었는가? 또는 무엇을 의심하고 있지 않나?
*주) 마음을 보려는 순간 가슴에 강한 느낌이 일어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좋고, 아니면 느낌을 보는 것으로 좌선을 계속합니다. 느낌이 약해져도 계속 가슴의 창에서 느낌을 보고 있거나 또는 호흡을 봅니다. 이때 마음을 보지 못하면 덤덤한 마음임을 알고 다음 단계로 갑니다.
2) 좌선, 경행이나 일상생활 중에 망상이 일어나면
① 망상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립니다(사띠).
② 망상하는 마음을 봅니다.
③ 망상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을 본니다.(그러면 덤덤한 마음이 뜹니다. 경전에도 '소멸을 본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라진 것을 확인해야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절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지요. 적어도 세력이 약해집니다. 사라진 것을 봐야 무상을 알게 됩니다.)
④ 마음의 느낌을 봅니다.
*주) 망상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을 본 뒤에 바로 가슴의 느낌으로 대상을 바꿉니다. 이때 마음을 오래 보고 있으면 사라진 마음이 다시 나타납니다. 가벼운 망상이 일어나서 가슴의 느낌을 볼 수 없을 때는 호흡을 봅니다. 가슴의 느낌이 강하면 계속 봅니다. 느낌이 사라지면 호흡을 봅니다.
3) 좌선 중에나 경행 중에 이따금씩 마음을 봅니다.
① 지금 나의 마음이 무얼 하는가 봅니다.
② 이때 사띠를 놓치고 있으면 알아차림을 챙깁니다.
③ 사띠를 하고 있을 때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는 마음을 계속 새로 냅니다.
④ 무기력하거나 혼침에 빠지려는 마음을 볼 때는 새로 마음을 내서 무기력한 물질과 마음의 상태를 자세하게 계속해서 알아차립니다.
4) 통증을 느낄 때
① 통증이 있는 걸 압니다(사띠).
② 통증 때문에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봅니다(통증이 계속될 때는 싫어하는 마음을 계속 주시해 봅니다).
③ 통증이 계속될 때 통증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통증의 성품(변화, 아픔, 피가 안 통함)을 주시합니다. 이때 가슴에서나 마음에서도 통증을 봅니다. 그러면 약화되어 통증이 볼 만하게 됩니다.
④ 견딜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될 때는 호흡으로 가서 호흡에 마음을 집중시킵니다.
5) 좌선이 끝났을 때
① 지금 나의 마음이 어떤지 봅니다.
② 지금 나의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봅니다.
③ 이때 마음이 마음을 보고 있으면(마음의 창에서) 모든 의도가 차례로 보이고 몸의 움직임이 마음의 창에 떠서 모두 보입니다.
6) 좌선, 경행, 일상에서
① 좌선, 경행, 일상 중에 마음의 창에 마음을 고정시켜서 보면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마음의 창에 뜨므로 그것을 지켜봅니다.
② 경행 중에도 발을 보지 않고 마음의 창을 보면 그곳에서 발과 몸의 움직임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찌따누빠사나는 마음의 창에 마음을 고정해서 보는 것입니다. 직관으로 봐야 하고 그러자면 사마디가 생겨야 볼 수 있습니다. 실재를 보는 단계이지요. 빤야띠에 걸려 못 봅니다.
느낌 자체가 성품입니다. 단단하다고 알고 있는 이 마음을 객관화하여 봅니다.
내 사진(혹은 거울)을 볼 때, 사진을 '나'로 잘못 알고 봅니다. 실재의 '나'는 여기 있습니다. 사띠를 가지고 사진을 보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그냥 사진일 뿐이지요. 사띠가 있으면 균형 감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웨다나누빠사나에서는 가슴의 창에서 느낌을 전부 잡습니다. 다리의 통증도 뜹니다. 통증이 가슴에서는 순화되어 나타납니다. 싫어하는 마음도 계속 주시할 수 있습니다.
화를 냈을 때 단순히 이를 알아차리는 것만이 아니라, 화낸 것을 아는 마음을 보면 화낸 이유가 보입니다. 사유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생겨서) 저절로 알게 됩니다. 사띠의 힘에 플러스해서 그 마음까지 보므로 대응력이 강화되어 잠재의식에서 사라집니다.
무지는 빤야띠와 빠라마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가슴이 철렁할 때 마음을 보면 마음의 뒷다리가 잡힙니다. 그 원인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 원인을 보는 힘이 생겨 그런 마음이 힘을 못 쓰게 되고 잘 안 나타나게 됩니다. 철렁하는 것은 심소(心所)입니다. 마음을 알게 되므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전에는 몰라서 무지에 당했으나 이제는 안 당합니다.
어느 순간에 내 마음을 보니 사띠 중이었으면 또 사띠하는 꼴이 되어 호흡이 확 커지고 선명한 밝은 빛이 드러납니다. 그게 아는 마음을 본 것입니다.(성성적적)
위리야는 마음을 새로 내는 것입니다.
통증 때문에 수행을 못합니다. 고질적 둑카를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좌선할 때 목 아픈 것을 참지 못하고 탐욕으로 움직여서 목 아픈 것을 풉니다. 이때 싫어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십시오.
좌선할 때 다리를 2회 이상 바꾸는 것은 싫어하는 마음에 자기가 진 것입니다. 마음이 산란해지고 지구력이 없어지고 사마디가 깨집니다.
♣ 4단계 수행 - 대상[法]① - 법념처(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림)란 무엇인가, 오개 ♣
2002/10/21
사념처(四念處)가 주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체는 깨끗하지 못하다.
(2) 감각은 괴로움이다.
(3) 마음은 항상 변한다.
(4)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신(身)은 육체적 현상을 알고
수(受)는 느낌을 알고
심(心)은 마음의 상태를 알고
법(法)은 마음의 여러 가지 대상을 안다.
법념처(法念處, 마음의 여러 가지 대상을 안다.): 다섯 가지 장애(오개), 여섯 가지 내적 기관(六內入處, 안이비설신의)과 외적 인식대상(六外入處),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칠각지), 네 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제)를 알아차리는 것.
오개(五蓋, 다섯 가지 장애, 덮개, 빤짜니와라나, pa~ncanivarana): 알아차림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1. 감각적 욕망: 감각적 쾌락, 감각적 즐거움. 6근이 6경에 부딪쳤을 때 즐거움이 욕망으로 발전.
2. 악의: 가해, 성냄(진에, 瞋 ), 싫어함, 미워함
3. 혼침과 게으름: 수면과 나태함
4. 들뜸과 회한: 도거(悼擧), 악작(惡作). 흥분과 주저함. 들뜨고 한탄함.
5. 회의적 의심: 의심, 불확실성, 주저.
이상에 대해서 각 항목별로 설명하겠습니다.
1) 감각적 욕망
① 수행법
㉠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오직 알아차릴(sati) 대상일 뿐이라고 알고, 감각적 욕망이 일어난 것을 압니다.
㉡ 감각적 욕망을 생각한 (감각적 욕망의 뿌리인)마음을 봅니다.(마음을 못 보면 원인 결과를 못 봅니다.)
㉢ 감각적 욕망이 사라진 것을 봅니다.(소멸) 보면 덤덤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를 못 보면 재발합니다.
㉣ 가슴에서 욕망으로 인해 일어난 느낌을 거친 것, 중간 것, 미세한 것까지 모두 알아차리십시오.(처음부터 끝까지 보라는 뜻)
㉤ 계속해서 가슴의 느낌을 보거나 마음을 보거나 호흡을 봅니다.
* 낙엽이 떨어지는 걸 보고 무상을 느꼈다는 것은 사유로 안 것일 뿐입니다. 진정한 무상은 자기 몸을 보고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유로 알아도 도움은 됩니다.
② 대치법
㉠ 부정관(不淨觀)을 할 것.
㉡ 부정관에 전념할 것.
㉢ 감각기관을 제어할 것: 그 방법이 사띠입니다. 느낀 그대로 수용하여야 합니다. 사띠가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 부정관(不淨觀)은 부정적(否定的) 효과가 있습니다. 자기 몸에 혐오를 느껴 심지어는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띠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충동 구매하려고 할 때 느낌을 보십시오. 그러면 자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빨려 들어갑니다.
평상시의 느낌을 잡아서 보십시오. 짜릿한 맛에 술을 마시고는 괴로워합니다.
㉣ 식사의 절제: 탐심으로 식사하면 게걸스럽게 먹게 됩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다른 6근도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알아차리면서 잘 씹어 먹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 가면 허무하기도 합니다. 무슨 마음으로 먹나 잘 살펴 보십시오.
식사하는 의식이 변화해야 합니다. 힘내려고 장어나 개고기 같은 것 먹지말고 필요에 의해 먹어야 합니다. 탐욕으로 먹지말고 수행을 위해, 몸을 유지하기 위해 먹어야 합니다.
미얀마의 스님들은 물어뜯으며 먹어도 안 되고, 입에 음식이 있는데 또 넣어도 안 되고 삼킨 다음에 다른 음식을 넣어야 합니다. 게걸스럽게 먹어도 안 되고, 한 장소에서만 먹어야 되고, 식사 때에만 먹어야 합니다.
안 먹다가 먹으면 체합니다. 오후 불식인데 먹으면 아픕니다. 몰래 숨어서 급히 먹기 때문이지요.
㉤ 훌륭한 도반과 가까이 할 것: 부처님께서 도반은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하셨습니다. 각자가 좋은 도반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보시할 때 자기 마음을 봐서 아만심이나 바라는 게 있을 때는 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 적절한 대화: 안거 중에 호랑이가 물어가도 말 안 하는 건 극단입니다. 부처님은 상견, 단견 등의 극단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결정하기 어려울 때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이라고 반문해 보고 결정하면 좋습니다. 또한 나 스스로 비속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 비유
감각적 욕망에 사로잡히면 물에 여러 가지 물감(빨강, 노랑, 파랑)을 섞은 것과 같습니다. 이런 물에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도 사실적인 시각을 지닐 수 없습니다.
감각적 욕망은 빚을 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날을 보냅니다. 그러나 욕망이 사라지면 빚을 갚고 자유인이 됩니다.
2) 악의
① 수행법
㉠ 남을 미워하고 해치고 성내는 것을 오직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알아차립니다.
㉡ 성내는 마음을 봅니다.
㉢ 성내는 마음이 사라진 것을 봅니다.
㉣ 가슴에서 성낸 마음이 일으킨 느낌을 끝까지 봅니다.
㉤ 계속 느낌을 보거나 마음, 호흡 중에서 선택하여 알아차립니다.
② 대치법
㉠ 자애관을 배운다.
㉡ 자애관에 전념.
㉢ 자신이 자기 행위인 업의 주인임을 안다: 원인과 결과임을 안다.
㉣ 분노의 해로움과 자애관의 좋은 점을 안다.
㉤ 훌륭한 도반과 가까이 할 것.
㉥ 적절한 대화.
③ 비유
악의에 차 화를 내면 펄펄 끓는 물과 같아 그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수 없습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주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악의는 병에 걸린 것과 같고 악의가 사라지면 병이 나아 건강해 집니다.
화났을 때는 무얼 결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3) 혼침과 게으름
잠과 싸우면 더 잠에 빠집니다. 자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수행은 죽는 연습입니다. 밤에 잠드는 것도 죽는 연습입니다. 노력하여 잠에서 깨어나면 즐겁습니다. 이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승리감에 취해 있으면 도로 잠에 빠집니다.
잠은 물질과 마음의 상호작용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① 수행법
㉠ 나른하고 졸릴 때 혼침(혹은 게으름)이 오직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라고 알고 그것이 일어난 것을 안다.
㉡ 눈꺼풀이 두껍고 호흡이 나른하고 힘이 빠진 것을 알고, 마음도 무기력해지고 몽롱한 상태의 변화를 매우 주의 깊게 알아차린다.
㉢ 졸린 마음을 본다. 이때 자고 싶은 마음을 본다. 잠과 싸우면 안 된다.
㉣ 이때 보는 힘이 강하면 잠에서 깨어나고 보는 힘이 약하면 잠에 빠진다.
㉤ 잠에서 깨어나 반드시 승리감에 즐거움을 느낀다. 이때 즐거워하는 마음을 본다. 이 마음을 보지 못하면 빠르게 잠에 빠진다.
㉥ 즐거운 마음을 본 뒤, 그 마음이 사라진 것을 본다.
㉦ 계속 느낌을 보거나 마음, 호흡을 본다.
② 대치법
㉠ 과식의 원인
㉡ 자세를 바꿈
㉢ 밝은 곳의 빛을 봄
㉣ 밖으로 나가 경행
㉤ 도반
㉥ 적절한 대화
③ 비유
혼침은 물에 이끼가 덮인 것과 같습니다. 이런 물에는 자신을 비춰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올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혼침과 게으름은 감옥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감옥 속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4. 들뜸과 회한: 도거(悼擧), 악작(惡作). 흥분과 주저함. 들뜨고 한탄함.
불안하면 자책합니다. 잘 해 보려고 하면 산란해 집니다. 시합하듯 연습하고, 연습하듯 시합하십시오. 힘을 빼십시오. 환자가 높은 사람일 때 의사가 떨려서 수술 못하기 때문에 외국으로 갑니다. 환자가 가족일 때도 수술 못합니다. 수행할 때 무슨 마음으로 수행하는지 봅니다.
들뜸은 바람에 물이 출렁이는 것 같아서 자기 얼굴을 못 비춰보지 못합니다. 안절부절못합니다. 이 때 느낌을 보십시오. 들뜬 자는 불안해하고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고 조급하고 서두릅니다. 주인이 종이 된 것과 같이 들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자의가 없고 창의력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자유를 얻으면 노예에서 해방된 것과 같습니다.
5. 회의적 의심: 의심, 불확실성, 주저.
의심은 흙탕물 같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갑니다. 자기 마음을 보십시오. 담마위짜야는 의심스러울 때 네 몸과 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확신이 서면 그렇게 하십시오. 의심스러울 때 의심하지 말고 알아보십시오.
오개로 인해 사마타 수행에서 필요한 근본삼매(uppanaa-samaadhi)와 근접삼매(upacaaraa-samaadhi)를 얻을 수 없으며, 위빠사나에서 필요한 찰나삼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이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면 깊은 통찰력이 생기고 사마디가 생겨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생깁니다.
진리는 좋은 것만 진리가 아닙니다. 나타나 있는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6근이 6경에 부딪쳐서 6식할 때 나타나는 모든 대상이 진리입니다. 선업, 악업이 모두 진리입니다. 실재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차별하면 선업과 악업이 있지만 제대로 보면 모두 알아차려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수행자는 욕망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피안으로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이때 필요한 뗏목이 사띠입니다. 물결에 내맡겨서 떠밀려 가지 않습니다. 떠밀려 가는 사람은 탐진치의 노예입니다. 사띠할 때 나타나는 것이 5가지 장애, 오개입니다.
느낌으로 보고, 마음으로 보고, 법으로 보라고 4념처에서 얘기하지만, 모두 같은 것이다.
망상은 원인과 결과로 보고, 마음의 작용(쩨따시카, 心所)으로 볼 대상일 뿐입니다. 망상을 심소(마음의 작용)로 보는 견해가 성숙돼야 합니다.
상(想)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느낌도 마음의 작용입니다. 망상을 실재로 받아드리는 것이 빠라마타로 보는 것입니다. 모양으로 보지말고 빠라마타로 보십시오.
요약하면,
(1) 사띠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2) 어떻게 하면 사띠가 끊어지지 않게 빠라마타로 보는가? 끊어지지 않으면 사마디가 생겨서 지혜가 생깁니다.
목적은 열반이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삼법인(지혜)를 얻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마디, 이를 위해서는 사띠해야 합니다. 열반은 무위로 얻어지는 것이므로 열반이나 삼법인은 법문할 때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삼법인을 얘기하면 보려고 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본 것처럼 얘기합니다.
위빠사나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봐서 실재를 아는 것이며, 실재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 중 유일하게 실재를 볼 수 있는 게 호흡입니다. 호흡은 언제나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합니다. 현재에서 나뭇잎을 볼 수 있는가? 개념일 뿐입니다. 개념적인 것은 지식일 뿐이고, 실재는 수행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합니다. 그래야 집착을 끊을 수 있습니다.
망상, 느낌, 호흡, 마음을 통해서 실재에 접근합니다. 괴로움을 통해서 의식이 성숙되어 무르익으면 열반에 들어 집착을 끊게 됩니다.
법념처에서 법은 봐야할 대상을 말한다.
눕고 싶은 것은 탐심입니다. 인간은 욕망으로 삽니다. 탐진치로 삽니다.
오개는 먹어 줘야할 반찬이요, 반갑게 맞이해야 할 내 집에 찾아온 손님입니다. 대상으로 보지 못하면 사마디가 생기지 않습니다.
불교 가르침 중 많은 것이 사마타에 필요한 것입니다. 장황한 이야기가 사마타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위빠사나에는 오직 사띠 한 가지만 필요하지만, 사띠 하나로 부족하므로 사마타를 방편으로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허지만 최종 목적은 이들을 결집하여 사띠로 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집중을 위해서 사마타를 방편으로 도입했습니다. 그래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장애가 생기면 사마디가 생기지 않습니다. 사마디를 얻기 위해서는 장애를 풀어야 하고, 그래야 지혜가 생깁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계와 사띠가 필요합니다.
근본삼매(안지정)에 들면 색계와 무색계에는 들어가지만 지혜는 생기지 않습니다. 욕망을 억지로 억눌러 놨기 때문에 수행자가 더 난폭해 질 수도 있습니다.
찰나삼매는 경행시 많이 발생합니다. 이는 일상의 모든 것을 알아차려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도 무조건 잘 해 주니까 자기 잇속으로 좋아합니다. 이것도 탐심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모두 탐심에서 나옵니다. 느낌에서만 마음 컨트롤이 가능합니다.
느낌이 갈애를 만들고 이게 집착이 됩니다. 느낌을 봐야 갈애로 안 빠집니다. 보면 선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 4단계 수행 - 대상[法]② - 빤냐띠(관념적 진리)와 빠라마타(궁극적 진리) ♣
2002/10/22
진심(瞋心, 진에, dosa): 화를 내는 것. 분노. 혐오(미워하는 것,
싫어하는 것). 피하는 것. 없애려는 것. 질투하는 것. 후회. 인색.
진심의 2종류
(1) 괴로운 느낌에 따라 분노와 함께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
(2) 괴로운 느낌에 따라 분노와 함께 유발되어 일어나는 것
치심(癡心, 어리석음, moha)
무명: 헛된 것에 사로잡혀 진리에 어두운 것
무지: 사물의 이치를 알지 못함.
미혹: 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림.
어리석음: 사물에 어둡고 지능이나 사고력이 부족.
의심: 불확실성. 주저.
둔함: 무디다.
들뜸: 유익하거나 바람직함에 어쩔 줄 모른다.
망상: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
현혹: 정신이 홀림에 빠져 미혹함.
맹목성: 사리에 눈이 어두운 것.
무명은 명, 지혜, 앎의 반대.
빤냣띠와 빠라맛타
(1) 빤냣띠(pa~n~natti)
표명, 서술, 가설, 명칭, 이름, 개념, 가정, 시설(施設, 실재하지 않는 것의 방편적 설정), 관념적 진리.
빤냣띠는 일상적인 관용어(습관적으로 쓰는 말)로 표현되는 개념의 세계를 말함.(개념: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추상하여 종합한 하나의 일반적인 뜻. concept)
(2) 빠라맛타(paramattha)
최고의 의미. 최상의(最上義). 승의(勝義). 실재. 성품. 궁극적 진리.(궁극적 진리: 일의 이치가 마지막까지 다다른 진리라는 말로 최고의 진리를 말함.) 무지는 빠라맛타를 모르는 것이다.
빠라맛타는 절대적 4가지 실재임.(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 앞의 3가지는 조건지어진 실재이므로 유위법이다. 이것은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므로 무상하다.
열반은 조건지어지지 않은 단 하나의 근본법이므로 무위법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없다. 그래서 닙바나로 윤회가 끝난다.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은 오온으로 분류한다. 오온의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생멸의 유위법이다. 이 유위법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으면 생멸하지 않는 무위법인 닙바나를 경험할 수 있다.
뿌리가 있는 마음
(1) 불선심 뿌리
(ㄱ) 탐 - 무지, 탐욕
(ㄴ) 진 - 무지, 탐욕
(ㄷ) 치 - 무지 그 자체. 들뜸, 의심
(2) 선심 뿌리
(ㄱ) 무탐 - 관용, 보시
(ㄴ) 무진 - 자애
(ㄷ) 무치 - 지혜
이상의 모든 것이 다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티베트나 미얀마 사람들은 화를 잘 안 냅니다. 화가 나면
화를 보고
화낸 마음을 보고
화낸 마음이 사라진 것을 보고
가슴의 느낌(두근두근)을 사띠합니다.
탐욕: 대상을 취하려는 것입니다.
혐오: 대상을 싫어하는 것
두려움: 자폐를 야기합니다. 애들은 겁주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도 고통은 있으나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탐욕은 바라는 게 있는 것입니다. 탐욕이 원인이 되어 결과로써 혐오가 생깁니다.
후회는 나쁜 짓 한 것과 좋은 일 못한 것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뭐하고 있나?" 하고 보는 것이 아는 마음을 아는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90세 쉐오민 사야도가 "마음을 새로 내라."고 한데 대한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면 사띠하고 있는데 다시 사띠가 더 해지는 것이어서 면밀하게 사띠하게 됩니다. 영어로는 noting을 watching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례하게 굴면, "그 사람이 도를 얻지 않았어도 나는 그가 도를 얻은 것 같이 대하겠다."라고 생각하십시오.
비법(非法)을 들으면 자신의 악업에 의해 받은 걸로 생각하고 부처님은 화를 안 냈습니다.
남에게 뺨을 맞았을 때, 부처님은 원인과 결과를 아는 과보심이 먼저 생깁니다. 전생에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므로 남 탓할 게 없습니다. 보통 사람은 화를 냅니다. 그에 따라 결과(뺨을 맞은 것)에 따른 새로운 원인을 또 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가 괴롭습니다.
업은 적용되는 범위가 있습니다. 자연 재해로 인한 것은 업이 아닙니다.
업은 조건이 성숙해야 나타납니다. 원인과 결과 모두는 오직 부처님만 압니다.
약간의 욕망은 필요하지만
탐심의 욕망은 버리십시오.
원래의 승단에는 수다원 이상만 참여했었습니다. 나중에 4부 대중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사물을 빠라맛타로 봐야합니다.
염불, 절 등은 집중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위빠사나에는 필요 없습니다.
무상보다 무아를 깨닫는 것이 더 깊은 단계입니다. 무아를 알면 무상을 아는 것보다 더 빨리 아라한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무아를 보기가 어려우므로 무아보다는 무상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수다원도를 얻어도 항상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라한은 탐진치가 생기지 않습니다.
마음이 어디로 가나 보면 의도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을 본 것입니다.
마음이 머무는 곳 - 마음의 창을 주시하십시오. 망상하는 마음 주시가 아니라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덤덤한 마음을 보면 거기에 호흡이 뜹니다. 경행할 때는 발이 마음의 창에 뜹니다. 마음의 창을 만들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특" 뜹니다. 창이건 아니건 어느 날 "특" 눈앞에 뜹니다. 단 사마디가 있어야 됩니다. 덤덤한 마음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에 발이 마음의 창에 뜹니다.
마음을 새로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내가 리드(lead)하는 것입니다. noting을 watching 하는 것이지요. "내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 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의 창에 그냥 뜹니다. 어디로 가지도 않습니다.
♣ 4단계 수행 - 대상[法]③ - 6내처(안이비설신의)와 6외처(색성향미촉법), 10가지 족쇄 ♣
2002/10/23
12처(處)
6내처: 안이비설신의
6외처: 색성향미촉법
1. 봄
① 눈(시력)
② 대상
③ 빛
④ 식(아는 마음)
위의 4가지가 합해져 조건지어져야 봄이 성립됩니다. ①②③④가 원인이고 보는 것이 결과입니다. 다시, 보는 것이 원인이고 알아차리는 것이 결과입니다.
보는 것은 ①②③④가 합해져 조건지어져야 성립됩니다. 내가 있어서 보는 게 아닙니다. 식은 그때의 마음일 뿐입니다.
2. 들음
① 귀 ② 소리 ③ 귀와 소리 사이에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④ 식
3. 냄새
① 코 ② 냄새 ③ 바람의 방향 ④ 식
4. 맛
① 혀 ② 맛(맵다, 달다, 짜다) ③ 실제로 닿음 ④ 식
5. 감각
① 몸의 감각 ② 대상 ③ 실제로 닿음 ④ 식
6. 의식
① 생각(識) ② 마음의 대상(識) ③ 닿음 ④ 식
- 어리석은 배려, 부당한 의도(아요니소마나시까라, ayonisomanasikara)
- 현명한 배려, 이치에 맞게 숙고함. (如理作意, 요니소마나시까라, yonisomanasikara)
다른 사람에게 뺨을 맞았을 때 부처님은 요니소마나시카라(현명한 배려)를 하여 진심(瞋心)을 내지 않습니다. 이때 화를 내면 악과보심(惡果報心)이 발생합니다. 화살을 두 번 맞는 것이지요.
what 보다는 how 입니다. 경전에는 홧만 있지 하우는 별로 없습니다. 있어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수행할 때는 홧(목표)이 없어야 합니다. 하우는 나의 안을 보는 것 즉 사띠입니다. 이것이 요시소마나시까라입니다.
-10 가지 족쇄(속박)
오하분결(五下分結, 욕계인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의 번뇌):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족쇄)
① 유신견(有身見): 오온을 자아라고 보거나 영원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
② 회의적 의심: 삼보와 수행법 등에 대한 의심
③ 계금취견(戒禁取見, 금지 조항에 집착): 잘못된 의식(儀式)에 대한 집착. 부처님 당시에 인도의 자이나교 등은 지나친 계율이나 형식에 치우쳤음.
④ 감각적 욕망(애욕): 감각적 즐거움, 감각적 쾌락, 오온에 집착함. 느낌으로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로 인해 집착.
⑤ 악의, 분노: 성냄. 원한심
오상분결(五上分結, 색계, 무색계의 번뇌): 미세한 물질의 세계인 색계와 정신의 세계인 무색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
⑥ 색계에 대한 욕망: 선정을 닦으면 선정에 머무르려 함.
⑦ 무색계에 대한 욕망: 무색계 선정을 닦으면 무색계 선정에 머무르려 함.
⑧ 아만: 나는 누구라고 하는 생각
⑨ 들뜸: 초조, 불안.
⑩ 어리석음(무명): 무지
성인(4 가지)의 10가지 족쇄의 소멸
1. 수다원(須陀洹, sotapanno, 소따빠띠): 흐름에 들어선 분. 예류과(預流果). 7생 이내에 윤회가 끝남. 죽어서 4악도에 떨어지지 않음. ①②③ 소멸
2. 사다함(斯多含, sakadaagami, 사까다가미): 한 번 오시는 분. 일래과(一來果). ①②③ 소멸, ④⑤의 약화
3. 아나함(阿那含, anaagami, 아나가미): 돌아오지 않는 분. 불환과(不還果). 천상의 정기천에 태어나 그곳에서 아라한이 된다. ①②③④⑤ 의 소멸. 분노와 감각적 욕망이 없어짐.
4. 아라한(阿羅漢, arahato, 아라하또, 應供): ① ~ ⑩ 소멸. 원인과 결과가 끊어져 윤회하지 않음.
마음의 기능에 대한 요약(121 가지 중 일부)
1. 결생(決生) - 태어남. 선심, 불선심, 과보심, 무표심.
2. 유분(有分)- 생명체를 연속시킴.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것.
3. 대향(對向): 오관향심의 감각 경로와 의식향심의 의식경로를 통하여 대상으로 향함. 6근이 6경을 향하는 것.
4. 봄
5. 들음
6. 냄새 맡음
7. 맛을 앎
8. 접촉
9. 영수(領受): 대상을 확정함
10. 추탁(推度): 대상을 살핌
11. 확정(確定): 대상을 확정함
12. 찰나견: 대상을 꿰뚫어 훑어 봄
13. 대상을 앎: 대상을 등록, 유지
14. 사몰(死沒): 죽음
느낌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것이 중요하므로, 사념처[身受心法]에서 신(身)과 심(心) 사이에 끼어 넣은 것입니다. 가슴에서의 느낌을 보십시오. 왜냐하면 느낌을 보면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동시에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작용에는 느낌(受), 상(想, 기억, 확정된 것. 꼬리표를 붙여 놓는 것), 행(行, 50가지) 등이 포함됩니다.
불교에서는 6근이 6경에 부딪쳐서 6식하는 것 외는 없는 것입니다.
쉐오민 사야도 생일 법문: 먹을 때 뜨겁게 먹지 말라. 탐진치의 불을 끄고 먹어라. 사띠를 챙기면서 먹어라.
♣ 4단계 수행 - 대상[法]④ - 칠각지(7가지 깨달음의 요소), 10가지 우뻬카 ♣
2002/10/24
보장가[bojjhanga, 깨달음의 요소, 각지(覺支)]: 깨달음은 위빠사나를 통하여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고, 요소는 깨달음에 이르는 7가지를 말함.
"보장가 숫타(각지경)"을 환자에게 낭송해 줍니다. 묵언실에서 냉병에 걸렸을 때 이를 다른 사람이 읽어 주니 환희심이 생겼습니다. 병의 99%는 마음에 의해 유발된 것입니다. 가족이 병에 걸렸을 때는 자비경, 축복경, 각지경을 읽어 준다.
칠각지(七覺支)
1. 사띠보장가(sati-b.): 뛰어난 지혜로 대상을 잊지 않고 알아차림. 함께 하는 대상을 기억함. 잊지 아니함. 아는 대상에서 가볍게 떠나가지 않는 특성.
공을 물에 놓으면 빠지지도 않고 물에서 솟아오르지도 않습니다. 대상을 그처럼 빠지지도 않고 바깥으로 가지도 않게 아는 대상 속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지혜가 납니다.
튼튼한 성의 기둥 사이에 있는 문처럼 6근의 문을 잘 지키기 때문에 문지기와 같습니다.
2. 담마위짜야 보장가[dhammavicaya-b., 법(대상)의 조사(照査). 택법지(擇法支)]: 진실된 대상만을 선택하고 그릇된 대상은 버림. 담마로 물질과 마음을 대상으로 선택하는 것.
이와 같이 오직 물질과 마음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해 보는 것.
6근이 6경에 부딪쳐서 6식 하는 과정의 18계를 통하여 실재(빠라맛타)를 보는 것.
맹신은 금물입니다. 탐구해 보고 좋으면 그대로 따르십시오. 불교는 릴리전(religion)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종교(宗敎, 으뜸가는 가르침)가 아닙니다. 그냥 기독교입니다. 진리의 길을 가서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 줘야 종교입니다.
3. 위리야 보장가[viriya-b., 노력, 정진각지(精進覺支)]: 진실된 가르침을 알아차리면서 붓다, 아라한, 모든 성자가 오직 이 길로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믿음으로 노력하는 것.
일을 함에 용감한 것을 노력이라 합니다.
대상에 대해 영향을 줍니다.
물러나지 않음으로 지혜가 드러납니다. 지나친 노력으로 대상을 너무 잡으려 하면 대상을 놓칩니다. 균형을 취해야 합니다.
윤회의 두려움을 알면 바른 원인과 결과를 알고 바른 길로 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부귀와 행복의 기초가 됩니다.
노력이 지나치면 산란해 집니다. 이때는 담마위짜야, 위리야, 삐띠 등을 키우지 말아야 합니다. 산란한 불을 끄려면 빠삿디(평안함), 사마디(고요한 집중), 우뻭카(평등심) 등을 내서 산란함에서 벗어납니다.
"지금 나의 마음은 어떤가?" 보고,
산란한 마음일 때는 그 마음을 보고,
그 마음이 사라짐을 보고,
사라진 다음에는 가슴의 느낌을 봅니다.
마음을 새로 냅니다.
4. 삐띠 보장가[piti-b., 기쁨. 희각지(喜覺支)]: 삐띠는 좋아하고 만족함을 말함. 삐띠는 물질과 마음을 기쁘게 함. 좋은 마음으로 인해 기쁨이 온몸으로 퍼지게 됨. 물질과 마음을 기운나게 함.
삐띠의 종류
① 조그만 기쁨, 약한 기쁨, 작은 기쁨(쿠디카 삐띠, khuddika p.): 소름이 끼치고, 몸의 잔털이 일어서며 머리털이 쭈삣쭈삣 하는 기쁨.
② 순간적인 기쁨(카니카 삐띠, khanika p.): 번갯불이 번쩍하듯 하는 순간순간의 기쁨.
③ 진동하는 기쁨(옥칸티까 삐띠, okkantika p.): 파도가 밀려오듯이 깊숙이 스며드는 기쁨.
④ 도취의 기쁨(우베가 삐띠, ubbega p.):몸을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기쁨.
⑤ 널리 퍼지는 기쁨(파라나 삐띠, pharana p.): 몸 전체가 바람을 가득 채운 풍선처럼, 크게 흐르는 골짜기 물처럼 끊임없이 퍼지는 기쁨.
5. 빠삿디 보장가[passaaddi b., 평온, 편안함, 가벼움, 휴식, 안정, 경안각지(輕安覺支)]: 기쁨이 생긴 수행자가 물질과 마음이 평온하고 경쾌한 것.
행주좌와에서 수행의 균형이 생기면 기쁨이 생기고, 물질과 마음이 가볍고 편합니다.
자기나 다른 이나 모두가 업만이 각자의 재산이 됨을 알아차려 편안함을 얻습니다.
6. 사마디 보장가[samaadhi b., 청정한 마음의 집중, 정각지(正覺支)]: 물질과 마음이 경쾌한 상태에서 고요한 집중에 이르는 것.
대상에 마음을 고르게 기울여 놓는 것을 사마디라 합니다. 사마디는 대상이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산란하게 하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사마디는 함께 하는 모든 것을 모으게 하는 일을 합니다.
사마디는 조용한 상태로 지혜가 드러나게 합니다.
사마디는 행복과 사이가 가깝습니다.
사마디는 바람 없는 곳에서 타고 있는 조용한 기름불처럼 마음이 잘 머무는 조용함입니다.
위빠사나는 찰나 사마디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얻습니다.
집중을 깊이 하라고 하는 것은 사마타 수행(자나 선정이다. 사마디와는 다르다.)입니다. 위빠사나가 아닙니다. 사마타로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7. 우뻭카 보장가(upekkhaa b., 평등심, 평상심, 평등각지(平等覺支)]: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좋고 싫고 옳고 그르고에 흔들리지 않고 평등한 상태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
고르고 적당하게 알아차리기 때문에 우뻭카라고 함.
행복과 고통에 기울지 않고 봅니다.
깨끗한 성정으로 농축해서 기쁨이 없기 때문에 평등심이 구족해져서 3번째 선정에 듭니다. 이를 평등하게 보는 이라 이릅니다.
칠각지에서 가르치는 것은 사띠하여 다음 단계인 열반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칠각지 중에서 한 가지에 빠지면 스스로는 못 벗어나니 스승과의 면담이 필요합니다.
우뻭카의 10 가지 종류
① 살란구뻭카(cha.langupekkhaa): 아라한의 6문에 나타나는 평등심
② 브라흐마위하루뻭카(brahmavihaarupekkhaa): 높고 고상하게 지내서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 현재의 나는 업의 결과임.
③ 보장구뻭카(bojja.ngaupekkhaa): 깨달음의 요인에 평등함.
④ 위리우뻭카(viriupekkhaa): 노력에 치우치지 않고 평등함.
⑤ 상카우뻭카(sa.nkhaupekkhaa): 일어나고 사라짐에 평등함. 비상비비상처정인데, 사마타의 최고경지임.
⑥ 웨다우뻭카(vedaupekkhaa): 느낌에 평등함.
⑦ 위빠사누뻭카(vipassaanupekkhaa): 생기고 사라짐에 평등함.
⑧ 따뜨라맛자뚜뻭카(tatramajjhattupekkhaa): 중도.
⑨ 자누뻭카(jhanupekkha):선정에 치우치지 않는 평등함. 3선정
⑩ 빠리숫두뻭카(parisuddhupekkhaa): 알아차림이 깨끗한 평등심. 4선정. 없애려는 마음이 사라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게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좋아하는 것도 문제인데, 이를 문제삼지를 못합니다. 자식이 말썽을 부리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하고 괴로워합니다.
집중을 너무 깊게 하면 골치 아픕니다. 마음이 달아나 버리지요. 이는 용쓰는 것입니다. 구름이 달을 가리지 못합니다. 깊은 사마디에는 사띠가 없습니다.
출발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주의집중도 아니고, 관찰도 아닙니다. 마음챙김은 수의(守意)를 재번역한 것입니다. 깊게 가다가는 몸을 버립니다.
사띠는 대상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튼튼한 기억입니다.
법을 얻는 조건
(1) 훌륭한 스승
(2) 높은 법
(3) 생각을 바르게 한다 - 정견
(4) 도과(道果)를 얻을 수 있는 수행, 즉 삼학 혹은 팔정도
돌멩이 갈아서 기름을 짤 수 없습니다. 깨나 콩을 갈아야 합니다. 8만4천 법문을 요약하면 37조도품, 다시 요약하면 8정도, 다시 요약하면 계정혜, 다시 요약하면 사띠. 그러면 지혜가 나옵니다.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본다고 하니까 눈으로 보려고 해서 상기가 옵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 4단계 수행 - 대상[法]⑤ - 사성제, 여덟 겹의 고귀한 길(팔정도), 부처님의 유언 ♣
2002/10/25
사성제(四聖諦, 아리야 삭카, ariya saccaa, 성스러운 진리, 성자의 진리): 성자(ariya)에 의해 발견되었기에 성자의 진리로 불립니다. 진리(saccaa)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말하는데 부처님이 출현하셔서 전에 누구도 들어 보지 못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처음으로 다섯 동료 수행자에게 찾아가 설법하신 초전법륜경이 그것입니다.
내용은 두 가지의 낮은 법과 중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두 가지 낮은 법은
① 지나치게 감각적인 욕망을 즐기는 것
② 지나치게 고행을 일삼는 것 입니다.
이것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탐심과 진심을 내므로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시고 중도를 취하라 하셨습니다.
그 중도가 사성제를 알고 행하여 팔정도를 수행하여 생활과 수행의 기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사성제는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다, 괴로움은 소멸될 수 있다, 괴로움의 소멸은 팔정도이다.'라는 것입니다.
1. 고(苦, 둑카, dukkha, 괴로움, 고통)
괴로움은 원래 참기 어려운 것이라는 뜻으로, 하찮음(du)과 비어있음(kha)의 합성어입니다.
고에는 다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 일상적인 괴로움(심신의 괴로움. 고고성): 일상적인 괴로움은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육체적 정신적인 모든 괴로움입니다. 생노사나 싫어하는 것과 만남, 좋아하는 사람이나 상황과 이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 슬픔, 비탄입니다.
②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괴로움(고고성):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괴로움은 삶의 행복, 느낌, 조건은 영원하지 않고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과 불행이 따릅니다.
③ 조건지어진 상태의 괴로움(행고성): 물질과 마음은 다섯 무더기인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 자체가 끊임없는 괴로움입니다.
2. 집(集, samudaya, 고의 발생 또는 원인):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로 인한 집착 때문입니다. 갈애로부터 괴로움이 일어나고 갈애로부터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갈애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는 괴로움이 없고, 두려움은 더욱 없습니다. 이 갈애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자발적인 것이며 유발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 탓입니다.
사람은 싫어하는 것은 행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해서 현재의 '나'가 된 것입니다.
마음을 보면 자신이 얼마나 감각적 욕망의 덩어리인가 알 수 있습니다.
3. 멸(滅, niroda, 고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은 닙바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닙바나는 갈애로 인한 모든 집착을 여읜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괴로움이 있다고만 말씀하시고 소멸하는 것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아무 의미가 없고 혼란만 가져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의 소멸을 말씀하셔서 진리의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4. 도(道, 막가, magga,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팔정도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중도사상입니다.
또한 팔정도를 통해서만 깨달음의 길에 이릅니다.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으로 분류하며, 이것이 있으면 정법이 있는 시대입니다.
팔정도(八正道)
팔정도는 중도수행입니다. 중도수행은 8 가지 도의 조건들을 말합니다. 팔정도의 정(正)이란 '바른'이란 뜻으로 빨리어로는 sammaa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올바른' 또는 '바른'으로 쓰고 있으나 더 정확히 표현하면 "수행자의 알아차림"이라는 뜻입니다. 팔정도는 수행자의 기본이고, 수행자는 언제나 알아차림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① 바른 지혜(正見, 慧): 알아차려서 잘 아는 것입니다. 사성제의 고집멸도를 아는 것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삿된 견해와 반대되는 앎이지요.
② 바른 생각(正思惟, 慧): 알아차려서 잘 생각하는 것입니다. 五慾樂(재산욕, 성욕, 식욕, 수면욕, 명예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생각입니다. 연민의 정을 가지며, 남을 괴롭히거나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③ 바른 말(正語, 戒): 알아차려서 잘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말, 꾸며대는 말, 거친 말, 이간질하는 말의 4가지 악업의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④ 바른 행위(正業, 戒): 알아차려서 잘 행하는 것입니다. 살생, 도둑질, 음행이라고 하는 몸으로 짓는 불선업 3가지를 삼가는 것입니다.
⑤ 바른 직업(正命, 戒): 잘 알아차려서 잘 먹고 살아가는 것으로, 삿되게 살아가는 것을 삼가 하여 몸과 입으로 불선업을 짓지 않습니다. 무기, 인간, 고기의 거래, 도살을 목적으로 짐승을 기르는 것, 알코올 및 유독 물질 거래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⑥ 바른 노력(正精進, 定): 잘 알아차려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선업을 버리려 하고
이미 생긴 불선업은 버리도록 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업은 생기도록 하고
이미 생긴 선업은 그것을 보다 더 크게 키우도록 노력합니다.
이것이 사정근(四正勤), 바른 노력입니다.
⑦ 바른 알아차림(正念, 定): 잘 알아차리는 것이다. 사띠, 신수신법 사념처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⑧ 바른 집중(正定, 定): 잘 알아차려서 마음이 잘 머무는 것으로,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이 있고 바르게 알아차려야 바른 집중이 있습니다. 오직 마음이 하나로 머무는 것을 바른 사마디라고 합니다. 집중된 마음은 사물을 있는 대로 보게 하는 통찰력의 지혜가 나게 한다.
집중은 깊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나의 선정에 들면 절반은 잠을 자게 됩니다. 길게 하면 머리 아프고 피로해지고 수행하기 싫어집니다. 수행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정에 드는 것은 좋습니다.
고엔카 수행 센터에서는 3일간 사마타 수행을 하고 7일간은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경행은 하지 않습니다.
수행이 어느 단계에 올라갔다고 좋아하면 아만심이 생겨서 더 이상 진전이 없습니다.
팔정도 중에서 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른 견해는 나머지를 모두 바르게 합니다. 그러나 바른 견해는 바른 알아차림(사띠)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 부처님의 유언 ♣
모든 것들은 변하게 되어 있다.
잊지 말고 완전하게 알아차리면서 생활하라.
Vayadhammaa samkhraa
appamaadana sampadetha
와야담마 삼카라
아빠마데나 삼빠데타
♣ 4단계 수행 - 슬피 우는 스승님 ♣
2002. 10. 25.
유명한 스승이 계셨는데 그 스승 밑에서 수많은 아라한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지혜의 눈으로 스승을 보니 아직 아라한이 안 되었다. 그래서 스승이 아라한이 되게 하여 은혜를 갚을 요량으로 스승에게 법문을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시간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내일은 어떠냐고 여쭈니 내일은 제자들 가르치느라고 바쁘다고 하셨다. 그래서 스승님께서 그렇게 바쁘시면 좌선하실 시간도 없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스승이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남만 공부시켰지 자기는 아직 아라한이 안 된 걸 알게 되었다. 비로소 나도 수행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잠깐이면 되겠지 하고 숲으로 갔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도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슬피 울면서 수행을 계속하다 보니 29년이 흘렀다.
그런데 옆을 보니 누가 와서 울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니, 나는 천신인데 위대한 스승이 울고 있어서 저렇게 울면 아라한이 되는가 보다 생각하고 나도 열심히 따라 울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스승은 자책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열심히 수행하여 30년 만에 아라한이 되었다.
♣ 4단계 수행 - 마하시에서 쉐우민으로, 다시 쉐우민에서 마하시로 ♣
사념처 수행을 마쳤습니다만, 역시 한 가지에 대해 2주씩 8주는 해야 제대로 전달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장소가 마련되면 다시 시도해 보겠습니다.
미얀마에서도 집중수행할 때는 교학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를 모르면 수행이 힘을 받지 못하고, 또한 자기자신은 어느 정도 수행이 됐어도 남에게 전달하지 못합니다.
마하시 선원에서도 책을 못 보게 하지만, 마하시 사야도 자신은 교학을 가르쳤습니다.
미얀마가 네윈 수상 전, 우노 수상시절에는 부유국이어서 한국에 원조를 제공한 적도 있습니다. 농사를 삼모작하고 원유도 생산되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노 수상 재임 시에 불교 수행을 국민화하자는 취지로 마하시 사야도를 초빙하여 수행을 체계화했던 것입니다. 마하시 센터는 신도 중심입니다. 미얀마의 상류사회가 지원하여 식사도 호텔식이고, 신도가 중심이 되어 센터를 운영하므로 스님은 수행만 합니다.
쉐우민 사야도는 빤디따 사야도에게 상석을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셔서 마음 보는 수행을 개발하셨습니다.
마하시선원에서 4년 간 있었지만, 초심자나 고참이나 똑 같은 방법으로 지도하였습니다. 호흡이 사라져서 마음 보는 수행하러 쉐우민으로 가서 수행에 눈떴습니다.
마하시에서는 호흡이 사라지면 "엉덩이 닿음, 왼 쪽 어깨, 오른 쪽 어깨 등등"의 명칭을 붙이면서 호흡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쉐우민에서는 호흡이 사라졌을 때 "명칭 붙이는 네 마음을 봐라." 혹은 "마음을 새로 내서 봐라."라고 지도했습니다.
그 때도 사야도가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는 바람에 가슴이 뭉쳤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볼 때는 눈앞에서 봐야 합니다. 가슴에서는 느낌을 봐야 합니다.
3년 후 마하시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쉐우민에서 매일 마음만 보라고 하니 집중하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사마디가 되는 데는 마음 보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일상에서는 마음 보는 게 좋으나 삼매에 들어가서 집중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마하시로 돌아갔던 겁입니다.
마음의 창에서 발, 호흡, 느낌이 다 보입니다. 망상과 통증도 쉽게 사라지고, 조는 것도 보다 쉽게 극복됩니다. 그러나 쉐우민에서는 까야누빠사나(身念處)가 배제되어 있어 약간 기초가 부실해 지는 증상이 3년 만에 나타났습니다. 또한 초심자가 경험자나 모두 마음을 보라고 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매우 어려운 얘기입니다.
아는 마음을 아는 걸 봤습니다. 내 마음이 뭐 하는가 봤더니 사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확 드러나 보였습니다. 이것은 남의 말로 안 되고 자기 생각으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중에 "내가 말한 다음 10초 후에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쉐우민에서 제가 만든 3단계 수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몸을 본다. 걸을 때 "터치, 터치, 터치"하거나 호흡할 때 볼록볼록 하는 걸 본다 이때 명칭은 붙이지 않는다. 단 필요할 때는 붙인다.
(2) 빠라맛타를 본다. 호흡, 풍대, 가벼움과 무거움.
(3) 마음을 본다.
이렇게 했더니 수행이 제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가르치려고 사념처 특별과정을 열었던 것이었습니다.
탐심이 사라져도 가슴이 뛰고 있는 걸 보십시오. 이것이 사라져도 미미한 느낌이 있으니 이를 잡고 있으십시오. 그 다음에 덤덤한 느낌 즉 우뻭카 웨다나를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우뻭카로 됩니다. 즉 편아~안한 상태가 됩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망상이 들어오면 느낌으로 돌아가십시오. 하늘같이 보십시오. 빈 공간에 무엇이든지 나타나면 보십시오.
어느 것이든 3단계입니다. 까야(몸)-빠라맛타(궁극적 실재)-찟따(마음).
사띠는 선한 마음, 깨어 있는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정(正)으로 물질과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사띠는 안으로 6문의 문지기 역할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6구멍을 지킵니다. 사띠가 밖으로 향할 때는 어떤 대상이든지 수용하고,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좌선할 때의 사띠는 6식 중에서 의식의 문지기일 뿐, 전5식에는 별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6식에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불안한 마음은 불선업의 마음이어서 악업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가슴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불안은 탐심으로 인한 진심(瞋心)입니다. 불안할 때는 뭔가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보십시오.
성질이 급한 것을 고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와 남의 오래된 성향이므로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랬구나!"하고 알아차리십시오. 보는 힘이 강해지면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받아드리려면 봐야 받아드립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심소, 心所)은 같이 보는 것입니다.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망상을 보는 것은 상(想)과 식(識)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작은 느낌을 객관적으로 보면 살인도 막을 수 있습니다. 탐진치의 노예가 되는 것도 막을 수 있습니다. 담배 피우다가 끊은 사람이 다시 피고 싶을 때는 휴지통까지 뒤집니다.
혼침이 올 때 노력하여 혼침을 극복하면 좋아합니다. 좋아하면 마취되어 도로 졸립니다.
부부 싸움할 때, 상대방의 성향은 100년 간 축적된 성향입니다. 가족끼리는 수행이 안 됩니다. 무조건 가슴으로 보십시오. 아내의 그런 성향은 내가 키워 준 것입니다. 절반은 내 책임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성향이 있는 사람은 자기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선악이 어울려 있습니다.
자식에게 잔소리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화를 내지는 마십시오. 아들딸의 그런 성향을 인정하면서 수용하는 자세 즉 친절한 배려를 가지고 교육시키십시오. 진심으로 "그랬구나. 고생했다."라고 말해야 바뀝니다. 자애심을 밑에 깔고 받아드리고 수용하고 관용하는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자애심이 완충 역할을 합니다. 자식에 대해서 화를 내는 건 내 문제입니다.
♣ 4단계 수행 - 나는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 ♣
수행 안 하다 집중수행 들어가면 1시간 좌선하는 몸을 만드는데 1달 걸립니다. 어떤 때는 2달 걸리기도 합니다. 2~3시간 계속 사마디가 계속되면 호흡이 사라지는 현상이 오기도 합니다.
대념처경에 '호흡 볼 때, 안팎을 보라'고 했습니다. 밖을 보라는 건 남의 호흡을 보라는 것이라고 마하시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호흡은 내 것이 아니듯이, 남의 호흡도 남의 것이 아닙니다. 나도 무아, 남도 무아입니다. 남의 호흡도 봐야할 경우가 있습니다. 크게 포괄해서 빠라맛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구(字句)에 걸리지 않습니다.
잔소리를 들을 때는 마음을 소리 나는 곳으로 가져가지 말고, 귀에 마음[耳識]을 가져가서 그냥 소리로 들으십시오. 그러면 화내는 마음이 줄어들 겁니다.
쌍윳따 니까야(전재성 역주, 제1권, 24쪽)에 다음과 같이 하늘사람과 세존의 대화가 나옵니다.
질문: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윤회의 바다의 물결)을 건너셨습니까?
대답: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는 갈아 앉으며
내가 애쓸 때는 휘말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물결을 건넜던 것이다.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는 "상주(常住)하지 않고, 변화에 적응하면서"라는 뜻입니다. 늙어 가는 것을 서글퍼 하지말고 주름살에 편승해야 합니다.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애쓰지 않고"는 갈애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고, 영원히 살려고 하지 않고, 콱 죽어 버리려 하지 않고" 라는 뜻입니다. 재산욕, 수면욕, 성욕, 식욕, 명예욕은 아무리 채워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돈은 비처럼 쏟아져도 부족합니다. 대통령을 5번 하면 6번 하려고 할 것입니다. 사랑이나 명예나 돈은 순간의 쾌감일 뿐 손에 넣는 순간 그 가치는 떨어져 버립니다.
♣ 4단계 수행 - 성성적적은 위리야, 사띠, 사마디가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
2002/11/26
사마디가 넘치면 잠에 빠집니다. 사띠를 지속하여 변화를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실증을 냅니다. 일어남 꺼짐 사이에 휴지부가 있습니다. 그때 마음이 달아납니다. 마음의 창에서 보면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사띠가 유지되면 사마디가 유지됩니다. 사띠가 있으면 각성된 상태가 유지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잠에 빠집니다. 어떻게 사띠를 유지하는가? '내 마음이 지금 뭐하고 있나?'를 보는 것이 사띠를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성성적적은 사띠, 사마디, 위리야가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수행하면 사띠, 사마디, 위리야 중 뭐가 부족한지 알게 됩니다.
잘 해보려는 마음이 강하면 산란해 집니다. 이는 집중보다 정진이 강해서 그렇습니다.
오후 불식하면 냉병이 생기는데 단전호흡하면 배가 더워집니다. 그래서 마하시 방식에서 배를 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명칭을 붙이면 명칭이 호흡을 만드는 폐단이 있습니다.
통증이 생기면
1. 느낌을 보십시오.
2. 진심(싫어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없애려는 마음, 피하는 마음)을 보십시오.
3. 마음 혹은 통증을 보십시오. 통증을 느끼는 마음을 계속 봐야 합니다. 마음 보고 난 다음에 통증을 보면 가벼워집니다. 가슴에서 봐도 좋습니다. 마음의 창에서 봐도 좋습니다.
4. 통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호흡을 보십시오.
♣ 4단계 수행 - 풀에 잠자리 앉듯 사띠하십시오, 일본은 50년 전에 남방 경전 번역 완료 ♣
2002/12/3
일본은 100년 전에 불교 공부하라고 영국에 2명을 파견하였는데 남방불교의 상좌부 경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처님의 원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지요. 일본에 불교 혁명이 발생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50년 전에 남방경전의 번역을 완료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작해서 몇 권의 번역서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스승 없이 혼자 수행하면 100명 중 99명은 잘못 갑니다. 탐진치의 마음으로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띠할 때 대상을 따라가면서 보십시오. "일어남-꺼짐"이라는 구령에 맞춰서 배를 일어나게 하고 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일어날 때 일어나는 것을 따라가면서 알아차리십시오. 배가 꺼질 때 배가 꺼지는 걸 따라가면서 알아차리십시오. 즉 일어난 대상을 일어난 다음에 알아차리는 것이지, 알아차림이 앞서서 대상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풀에 잠자리 앉듯 하는 것입니다. 풀에 잠자리가 앉으면 그 무게에 의해 풀이 기울어집니다. 풀이 기울어지는 데 따라서, 풀에 앉아 있는 잠자리(사띠)도 풀(대상)과 함께 움직입니다. 객관적이고 수동적으로 사띠하십시오.
♣ 4단계 수행 - 더위가 피부에 닿는 느낌을 느껴라 ♣
2003/1/28
호흡이 아니라 느낌만 보는 수행을 시작하겠습니다.
느낌을 계속 보면
다른 수행[身心法]할 때
더 깊게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서 느낌만이 아니라
평상심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음 뒤에 느낌이 따라 옵니다.
마음 보려면 느낌을 봐야 합니다.
즐거움이 없어지면 괴롭고,
괴로움이 없어지면 즐거움이 오고,
덤덤함을 모르면 괴롭고
덤덤함을 알면 즐겁습니다.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니라
그 순간의 느낌입니다.
자꾸 생각하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법문을 자꾸 들어야 합니다.
왜 호흡을 봅니까?
그것은 현재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현재를 보면 번뇌가 없고, 행복하고, 고요하고,
지혜가 생깁니다.
매듭을 풀어줍니다.
호흡 끝에는 느낌이 붙어 있습니다.
느낌은 완벽한 현재입니다.
지금 현재 불이 붙어 있는 상황입니다.
더위를 피부로 못 느끼고 바로
'덥네.' 합니다.
사야도께서
"더위가 피부에 닿는 느낌을 느껴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더니
"약간 훅 하네."로 되어
"견딜 만하네."가 됐습니다.
피부로 못 느끼고 바로
"덥네." 하는 것은
1차, 2차 화살을 바로 맞아서
피부로 느낄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주된 대상을 잡아서 보십시오.
다른 느낌으로 갔다가 다시 대상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의 대상을 봐야 사마디가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