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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은 향교, 다리, 높은 곳 등의 의미를 갖고 있어 조선조 향교가 있던 곳은 교리, 교동으로 불리어 많은 곳에서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1. 대구광역시 중구 교동(校洞)
원래는 대구부 동상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용덕리 일부와 함께 동본정(東本町)이 되었다. 8·15광복 뒤인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없애면서 교동으로 바뀌었으며 1981년 대구직할시 중구 교동을 거쳐 1995년 대구광역시 중구 교동이 되었다. 지명은 향교가 있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교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성내1동이다.
동아백화점 옆 도심 복판에 교동시장이 있고 시장 맞은편 골목에는 대구극장·자유극장·송죽극장 등의 영화관이 몰려 있다.
2. 울산광역시 중구 교동(校洞)
울산광역시 중구에 속하는 동이다. 1708년(조선 숙종 34)에 서문내리·서문외리·신교리·북문외리로 나뉘었으며 1765년(영조 41)에는 주부리와 남문내리,정조 때는 상서문내리·서문외리·하서문내리·북문외리, 1810년(순조 10)에는 상서문내리·하서문내리·신교리, 1894년(고종 31)에는 하서동과 교동, 1911년에는 상서동·하서동·교동으로 나뉘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하서동·교동과 상서동 일부를 통합하여 교동이라 하였고, 1997년 울산시의 광역시 승격에 따라 울산광역시 중구 교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성남동이다. 동 이름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전형적인 주택지역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양사초등학교가 있고, 문화재로는 울산향교(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7)가 있다. 그밖에 주요 시설로 백양정이 있다. 백양정은 활터로 1983년에 설립되었으며 규모는 90평이고 과녁은 3개이다. 출신 인물로 시인 서덕출(徐德出)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 고위관료를 지낸 서영국의 장남이다.
3.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교동(校洞)
동쪽으로 인계동, 서쪽으로 남창동, 남쪽으로 매교동(법정동)과 접한다. 조선시대에는 수원부에 속하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1789년(정조 13)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기고, 1796년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뒤 남부(南部)의 14개 동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교동이라는 이름은 1789년 수원향교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붙은 것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수원면 산루리가 되었다가, 1931년 수원읍 궁정(宮町) 지역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9년 수원시로 승격하면서 교동으로 환원된 뒤, 1963년 매교동과 함께 행정동인 매교동의 법정동이 되었다. 이후 권선구 매교동을 거쳐, 2003년 팔달구 매교동 관할이 되었다. 옛 지명에는 도화동(桃花洞)·향교골·향교재 등이 있다. 도화동에는 기생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1번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며, 교육기관으로는 화교중정소학교·중부신학교가 있다. 그 밖에 한국전력공사 경기지역본부, 권선구보건소, 수원 시립도서관, 대한극장·수원극장, 성공회 교동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문화재로는 수원향교(경기문화재자료 1), 팔달산 지석묘군(경기기념물 125)이 있다.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교동(校洞)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에 속한 동이다. 조선시대에는 수원부 남부의 교동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산루동 일부와 합하여 산루리라 하고 수원군 수원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면서 궁정(宮町)에 속하였고, 해방 후인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될 때 다시 교동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매교동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구제(區制) 실시로 권선구 관할이 되었다. 1992년 장안구 중동 일부가 교동에 편입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매교동에서 관할한다. 교동은 마을에 향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옛 지명에는 도화동·향교골·향교재 등이 있으며, 도화동은 기생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주요 기관에 권선구청, 권선구 보건소, 중앙도서관, 한국전력공사 경기지역본부, 수원화교 중정소학교 등이 있다.
문화재에는 수원향교(경기문화재자료 1)와 수원시 팔달산 지석묘군(경기기념물 125)이 있다. 수원향교는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었으나 조선 정조 때 화성을 축성하면서 지금이 위치로 옮겨 건립하였다.
4. 경기도 여주시 교동(敎洞)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법정동. 2013년 9월 23일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교리(敎里)에서 교동으로 개칭되었다. 행정동으로 신설된 중앙동(中央洞) 관할이다.
경기도 여주시의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중앙동의 관할에 속한다. 여주향교(驪州鄕校 경기문화재자료 3)가 있는 곳으로 구한말까지 교동(校洞)·향교말·생교말 등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목숙동과 가업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교리로 명명되었다. 이후 여주군 여주읍에 속하였다가 2013년 9월 23일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여주읍이 폐지되고 여흥동·중앙동·오학동의 3개 행정동이 신설되었으며, 여주읍에 속하였던 교리는 중앙동 관할의 교동으로 개편되었다.
소양천이 가로질러 남북으로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건지미·제비골·향교말 등이 있다. 건지미는 메마른 땅[乾地]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명칭이나 지금은 주택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제비골은 원래 주변 산세가 꼭 제복(祭服) 같다 하여 제복골이라 부르다가 발음하기 쉽게 바뀐 이름이라고 한다. 향교말은 본래 상리 마암 근처에 있던 여주향교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85년(숙종 11) 홍문리 잣나무고개에 향교를 재건하였다가 주민들의 요청으로 교리의 이 마을로 다시 이전하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5. 강원도 삼척시 교동(校洞)
면적 9.52㎢, 인구 9331명(2008)이다. 동쪽에 봉화대(광진산 146m), 동남쪽은 삼척시가지인 척주로에 이어지고, 서쪽에 초농산 등이 둘러 있으며, 남쪽에 봉황산(137m), 북쪽에 북정산·광장산·왼우산(42.6m)이 솟아 있다.
삼척향교가 있으므로 향교말 또는 교리(校里)라고 하였다.
삼척군 부내면(삼척읍)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너부나리(광진)·두나리(후진)·댓골(죽동)·은장골(언장)·하실골(하골)을 병합하여 교리라고 하다가 1986년 삼척시 지역이 되면서 리를 동으로 개칭하고, 이전 부내면의 지역으로 갈(갈대)이 많아 가을내·갈내·갈천리라고 하던 갈천동, 시루 모양의 산밑이라고 하여 실메·실뫼·증산리(曾山里)라고 하던 증산동, 큰 길 위쪽 마을이라고 하여 웃질·웃길·울계·우지리(禹池里)라고 하던 우지동, 못 아래 쪽이므로 못알·마달·마달리(麻達里)라고 하던 마달동의 6개 법정동을 관할한다.
행정동인 교동은 법정동인 갈천동·증산동·우지동·마달동·교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거에 비하여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높은 편이며, 번화가는 서남쪽의 척주로변에 집중되어 있다.
삼척시청·삼척시의회·삼척세무서·교동파출소·삼척문화방송국·한국방송공사 삼척중계소 등 공공기관과 삼척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해양수련원이 있으며, 삼척공설운동장·삼척해수욕장이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동부를 관통하는 동해고속도로와 국도인 척주로가 있으며, 삼척선의 철도가 있다.
문화재로는 삼척향교(강원유형문화재 102)가 있다. 1399년(조선 태조 7)에 고사리재 동쪽 기슭에 세웠는데, 그 뒤 월계동-건지동으로 옮겼다가 1700년(숙종 26)부사 심단(沈檀)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웠고, '대성전'의 현판은 1710년(숙종 36년) 부사 이성조의 글씨이다. 1968년 명륜당이 불에 타서 1970년 중건하였으며, 입구에는 1439년(세종 21)에 세웠다는 하마비가 있다.
그 밖에 부사 이지온 청백거사비(靑白去思碑), 부사 김우현(金佑鉉)·이규헌(李奎憲)·정대무·영장(營將) 윤명근(尹明根)·군수 최윤정(崔允鼎)의 흥학비(興學碑), 군수 심의승(沈宜昇)의 모성비(募聖碑)가 있다.
삼척초등학교 교정에는'삼일운동만세기념비'가 있는데, 1919년 4월 15일 삼척보통학교(삼척 등교)의 전교생은 김기덕 선생의 지도 아래, 재경 학생 김순하가 전해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심부윤·김윤달·최삼룡을 중심으로 민족자결주의 선언문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한 선열을 추모하여 1990년에 세웠다.
공설운동장 앞 국도변에는 1968년 11월 삼척해안에 침입한 무장공비 120명을 군민이 협력하여 섬멸한 것을 기리어 1978년에 세운'자유수호탑'이 있다.
봉화대(광진산)에는 조선시대 북쪽으로 강릉의 어달산, 남쪽으로 양야산에 응하여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가 있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삼척시에서 세운 표석이 있다.
향교말에서 우지동으로 가는 고개인 청고개 아래에 조선 선조 때 진사 김세민(金世民)의 묘소가 있는데, 묘를 쓰기 전에 비가 쏟아져 강물이 많이 불어나자 어느 노승이 강을 건너지 못하며 애쓰는 것을 보고 업어서 건네주니 노승은 그 보답으로 묘자리를 잡아주며 '하관은 자시(12시)에 하되 죽은 소가 하늘에서 울거든 하라'고 떠나갔으나 죽은 소가 어떻게 울 수가 있겠느냐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과연 자시경에 후진 앞바다를 지나가는 장삿배에서 북소리가 들리므로, 북은 죽은 소 가죽으로 만드니 바로 이때다 생각하고 묘를 썼으며, 북소리를 듣고 묘를 썼다는 뜻에서 그 고개 이름을 '청고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지에서 마달리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거북 모양의 바위 '구암'이 있는데, 장정 10여 명이 밀면 거북머리가 돌아가며, 그 머리가 향한 쪽의 동리는 흉년이 들고 불행이 닥친다는 속설이 있어, 양쪽 주민들이 방향을 돌리며 그로 인한 시비·언쟁이 매우 심하였으나 사방공사를 할 때 깨뜨려 지금은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삼척해수욕장은 수심이 얕은 동해안을 따라 너비 100m, 길이 1㎞에 이르는 흰 모래사장 뒤로 울창한 송림과 기암이 둘러싸고 있으며, 부근에 약수터도 있어, 1984년에 관광지로 지정하여 삼척의 시범해수욕장으로 개발되고 있다.
6. 강원도 강릉시 교동(校洞)
면적 5.32㎢, 인구 3만 8641명(2008)이다. 북쪽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중앙부에 있는 화부산(78.6m)·원댕잇재를 중심으로 주거지가 발달되어 강릉 시가지로 이어진다.
강릉군 남일리면의 지역으로서 강릉향교가 있으므로 향교마을·향교말 또는 교촌(校村)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곡리(聲谷里)·후임당리(後林塘里)와 북일리면의 대창리(大昌里)·옥가리(玉街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교동리라고 해서 군내면[강릉면(읍)]에 편입되었다. 1955년에 강릉시 승격으로 인하여 교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인 교동은 행정동인 교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거지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큰 편이며, 서남쪽 시가지에 이르는 곳에 상권이 발달되어 번화가를 이룬다.
강릉시립도서관·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춘천검찰청 강릉지청·동부지방 산림관리청·대한적십자사 강원도지사·강릉시의회·강릉시체육회· 강릉시립교향악단·문화예술회관 등의 공공기관과 영동선의 종착역인 강릉역·영동고속버스터미널·시외버스터미널이 있으며, 강릉종합운동장이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서북쪽 영동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국도와 강릉역까지 이르는 영동선의 철도가 있다.
문화재로는 강릉 문묘대성전(보물 214)이 있는데, 고려 말기에 창건하여 조선 초기에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그 밖의 문화재로 강릉 출신 명현들을 모신 향현사(강원유형문화재 8), 1810년(순조 11)에 중건한 계련당(강원유형문화재 39), 신라의 명장 김유신을 모신 화부산사(강원유형문화재 57)가 있으며, 조선 때 향교의 유생들을 상대로 엿을 만들어 팔던 엿방거리(현 교동초등학교 옆 국도 부근)가 있었고, 강릉지방 속담에, 농사가 잘 되는 좋은 논을 가리켜 '남 말미, 북 자일 논'이라고 하는데, 그 자일 마을이 있다.
7. 강원도 춘천시 교동(校洞)
면적 0.50㎢, 인구 4271명(2008)이다. 춘천 시가지의 중심부에서 50m 반경 내에 밀집한 주택단지로, 북쪽으로 후평동, 남쪽으로 조운동·효자동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 산등성이 너머 효자3동과 경계를 이룬다.
동명의 유래는 춘천향교가 있으므로 향교골 또는 교동(校洞)이라고 하였다.
춘천군 부내면(춘천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아동리(衙洞里)에 편입되었다가, 1931년에 춘천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향교의 대성전(大成殿) 이름을 따서 대성정 일정목(大成町一丁目)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다시 교동으로 개칭하고, 1988년에 일부 지역을 후평동으로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인 교동은 행정동명과 법정동명이 같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은 10%가 되지 않으며, 번화가는 동쪽의 신흥로와 북쪽의 지방도로변에 집중되어 있다.
춘천지방보훈지청·동부지방산림관리청·교동 우편취급소 등 공공기관과 배수펌프장이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운파사거리-공단입구 간 신흥로가 있다.
옛 이름 아동리(衙洞里)는 지금의 춘천여고 바로 아래쪽 일대인데, 조선시대 춘천부(춘천군)에 딸린 관아 앞으로, 아전(衙前)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후에는 공무원들이 많이 살았으나 교외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대부분 이주해 갔다.
문화재로는 교동 27번지에 있는 춘천향교(강원유형문화재 98)가 있다. 춘천향교는 1520년(조선 중종 15)에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594년(선조 27)에 서인원이 중건한 것을 비롯해 인조 때 부사 이원엽·엄황, 영조 때 부사 김낙수 등이 중건하였고, 그 뒤 여러 번 중수하였으나 6·25 전쟁 때 파괴되어 1960년 8월에 복원하였다.
봉의산(鳳儀山:301.5m) 동쪽 기슭에 있는 혈거유지(강원기념물 1)는 1962년에 성심여자대학(지금의 한림대학교) 신축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암벽을 파 들어간 인공동굴로, 바닥의 지름 4m, 높이 2.1m의 원형이다. 돌도끼 6점, 돌끌 2점, 돌방망이 2점, 돌화살촉 7점, 돌망치·돌송곳·관옥 각 1점, 빗살무늬 토기 5점 등이 출토되었고, 3구의 인골(人骨)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후기의 주거·매장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토기의 고리손잡이가 있는 점 등 빗살무늬토기에서 민무늬토기로 변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인다.
그 밖에 춘천향교 경내에 있는 지계사호성비(池繼泗護聖碑)는 병자호란 때 지계사라는 선비가 대성전에 봉안된 위패들을 대홍산으로 피난시켜 놓았다가 전란 후에 대성전에 다시 모시게 한 공로를 기리어 세운 비이다.
8. 강원도 속초시 교동(교동)
면적 0.75㎢, 인구 1만 3066명(2008)이다. 북쪽에 낮은 구릉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고, 남쪽에 충적평야가 펼쳐 있으며, 동남쪽에 석호(潟湖)인 청초호가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특히 청초호는 겨울에는 철새 고니의 도래지로 유명하고,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양양의 낙산사 대신 청초호를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양군 소천면 속초리(束草里)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 도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에 속초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속초리를 4개 구(區)로 나눔에 따라 속초리 사구(四區)가 되어 속초사구·사구(四區)라고 하였다. 8·15 광복 후 북한의 통치를 받다가 1951년 수복되고 피난민의 급증으로 사구에서 따로 갈려 나와 속초리 육구(六區)가 되었는데, 1966년 속초시 동제 실시 때 다시 둘로 갈리어 청초호 부근은 청학동(靑鶴洞), 이곳은 속초중학이 있어서 교동으로 개칭하였고, 1998년 10월 다시 청학동을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인 교동은 법정동인 교동·청학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속초시 중앙에 있는 청초호는 둘레 약 5㎞, 넓이 1.3㎢의 자연 석호(潟湖)인데, 속초에서 바다로 나가는 관문으로서 인근의 영광호, 강릉시의 경포호와 함께 동해안의 대표적인 호수로 꼽히는 곳이므로 이 일대에 유원지·관광단지의 조성사업이 진행 중이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은 편이며, 번화가는 청학동을 관통하는 도로변에 집중되어 있다.
속초시소방서·속초전화국·교동파출소·속초시교육청·속초시세무서· 국립농산물검사소 속초출장소·속초시보건소·속초시농촌지도소 등 공공기관과 청학시장·조선소가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중앙부를 관통하는 지방도로와 속초-설악산국립공원 간 관광도로가 있다.
9. 충청북도 제천시 교동(校洞)
면적 3.74㎢, 인구 1만 8646명(2008)이다. 교동의 남쪽에는 독송정(獨松亭)과 서낭당산[馬山]이 있다. 독송정은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직제학 원호가 단종이 귀양가 있는 영월 청량포(淸凉浦) 방향의 독송정에서 매일 망배(望拜)하고 통곡했다는 일화가 있는 산이다. 고암동에는 제천읍에서 제일 높다는 육탄산이 있고, 남쪽에 고암들이 있다. 장락동 남동쪽에 두구메[頭高山]가 있다.
제천군 현우면 지역이었으며, 1914년에 읍내면 읍부리와 병합되어 읍내면 읍부리가 되었다. 1940년에 제천읍에 편입되었고, 1949년에 읍부리에서 분동되어 교동이 되었다. 1980년에 제천군 제천읍이 제천시로 승격함에 따라 제천시에 편입되었다.
행정동인 교동은 법정동인 교동·고암동(古岩洞)·장락동(長樂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부락으로 굴청간·뽕나무골·향교골 등이 있다.
장락동에는 진양공업사, 성광플라스틱, 중앙·별표연탄 등의 제조업체가 있다. 교동에는 제천향교(충북유형문화재 105)와 남천체육관이 있다.
문화유적으로 고암동에는 김상태 장군, 최욱영 열사, 의병 칠의사총(七義士塚)을 이장해서 조성한 애국열사묘가 있다. 칠의사총은 조선시대 고종 때 의병대장 유인석의 지휘 아래 왜적과 싸우다가 박달재에서 잡힌 김용이(金用伊), 우규하(禹圭夏), 추성손(秋聖孫), 박원용(朴元用), 김재관(金在觀), 우재봉(禹在鳳), 오원룡(吳元龍)을 합장한 곳이다.
장락동에는 탑안과 원장락에서 고암동으로 가는 곳에 소도물이 있는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가워 빨래터와 농업용수로 쓰인다.
탑안 마을에는 수령이 300년 정도 되는 괴목(槐木)이라는 큰 느티나무와 옛 창락사 터에 칠층모전석탑(보물 459)이 있다. 칠층모전석탑은 기단이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에 돌문이 있다.
10. 충청남도 공주시 교동(校洞)
공주시의 서북부에 있다. 동북쪽으로 금성동(錦城洞), 서쪽으로 웅진동, 남쪽으로는 반죽동(班竹洞)과 접한다.
원래 공주군 남부면(南部面) 지역으로, 공주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 또는 향교골이라고도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교촌의 일부 지역을 갈라서 공주면 금정(錦町)이라 하였다. 1931년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공주읍 관할이 되었으며, 1986년 공주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공주시의 행정동인 웅진동 관할의 법정동이 되었다.
공주시를 서북, 동남으로 가르며 흐르는 금강(錦江) 남쪽 유역의 마을로서 시청 소재지인 봉황동 및 반죽동, 웅진동 등과 더불어 공주시의 중심을 이루는 지역이다. 공주소방서, 공주여자중학교, 교동초등학교, 공주향교(충청남도 유형문화재 75호) 등이 있다.
11.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校洞)
면적 1.16㎢, 인구 5,311명(2001)이다. 인후동과의 경계에 승암봉(306m)이 있다. 동쪽으로 남노송동에 접해 있고, 서쪽으로 풍남동, 남쪽으로 동서학동에 면해 있고, 북쪽으로 중노송동에 면해 있다. 전주향교일원이 있어 향교골이라고 하였다.
전주군 부남면 지역이었으며, 1914년에 한계리·구석리·삼계리·사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청수정으로 개칭하여 전주면에 편입되었다. 1946년에 교동으로 개칭하였고, 1957년에 교동 1·2가로 분동되었다. 1973년에 교동 1·2가를 통합하여 교동으로 개칭하였다.
교동은 행정동명과 법정동명이 같으며, 자연부락으로 생교골(향교골)·감나무골·수박동·옥류동·자만동이 있다. 전주군경묘지, 진석사, 수도암, 성심여중고교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전주향교일원 대성전(전북 유형문화재 7)과 한벽당(전북 유형문화재 15), 동고사(문화재자료 2), 오목대와 이목대(전북 기념물 16), 동고산성(전북 기념물 44), 학인당(전북 민속자료 8)이 있다.
전주향교일원은 고려시대에 창건된 건물로, 조선 효종 때 중건되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서무, 일월문, 명륜당, 장서각, 계성사, 양사재 등의 건물이 있다.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에 있는 누각으로 전주 8경에 속한다. 전주시 동쪽에 있는 동고사(東固寺)는 확실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는데,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고 그 후 허주화상(虛舟和尙)이 중건했다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844년에 중건하였다.
경기전 동남쪽에는 오목대(悟木臺)와 이목대(梨木臺)가 있다. 오목대는 1380년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정벌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전주에 들러 친지들과 회고의 정을 나눈 곳이다. 오목대 위에는 고종이 직접 쓴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동쪽 맞은편에 있는 이목대에도 고종의 친필로 새긴 비석과 비각이 있다.
동고산성(東固山城)은 숭암산의 기암절벽에 있으며, 남북에 익성(翼城)을 설치한 특이한 형식이다. 학인당(學忍堂)은 전주 한옥보존지역의 대표적인 건물로, 조선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12.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校洞)
전라북도 김제시(金堤市)에 있는 법정동. 행정동인 교동월촌동(校洞月村洞) 관할이다. 김제시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주위에 옥산동(玉山洞), 요촌동(堯村洞), 갈공동(葛公洞) 및 연정동(蓮井洞)과 접한다.
원래 김제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다. 1914년 신리, 대리, 중앙리, 옥리, 서변리의 각 일부와 입천면(立川面) 내리, 월산면(月山面) 입석리, 제남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김제면 교동리가 되었으며, 1931년 김제읍 관할이 되었다. 1989년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교동으로 개칭되어 갈공동, 옥산동, 복죽동(福竹洞)과 함께 행정동인 교동 관할의 법정동이 되었으며, 1998년 교동월촌동 관할로 바뀌었다.
향교골로 알려진 도농복합지역이다. 농업기술센터, 김제중앙병원, 김제향교 대성전(전북유형문화재 9호), 김제동헌(사적 482호)와 향교, 교남, 성산, 신동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13. 전라남도 나주시 교동(校洞)
원래 나주군 서부면(西部面)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교촌 또는 향교촌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향교리가 되어 나주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11월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나주읍 향교리가 되었으며, 1946년에 교동으로 고쳤다. 1981년 7월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되어 금성시(錦城市)가 됨에 따라 금성시 교동이 되었다가 1986년 1월 금성시가 나주시로 개칭되어 나주시 교동이 되었다. 이 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금남동(錦南洞) 관할하에 있다.
경현동(景賢洞)과 보산동(寶山洞)에 걸친 월정봉(月亭峯:280m)이 솟아 있으며, 맛재·느진맛재·된맛재·적두재 등의 고개와 맛재밑·성밖·시구밖·월정(月亭)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유적으로 객사(客舍)·나주읍성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 나주향교(전남 유형문화재 128), 나주향교 대성전(보물 394), 남평향교(전남 유형문화재 126)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 나주고등학교가 있으며, 이 밖에 상설시장인 중앙시장이 있다.
14. 전라남도 여수시 교동(喬洞)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동.
원래 여수군 여수면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병목처럼 생겨 병모가지 또는 교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정(上井)·구동(龜洞)·성동(城洞)·하정(下井)·종동(鍾洞)·석정(石井)·천동(川洞)·포동(圃洞)·석교리(石橋里)·교동(校洞)·추동(秋洞)·탕암(宕岩)·연동(蓮洞)이 통합되어 일본식 지명 표기인 서정(西町)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개편할 때 서정 일부를 분할하여 교동이 되었다. 이 동은 법정동으로, 1998년부터 행정동인 중앙동(中央洞) 관할하에 있다.
연등천(蓮燈川)이 흐르며, 자연마을인 신교동(新喬洞) 등과 구봉교(九鳳橋)가 잇다. 이 밖에 상설시장인 중앙시장과 코리아극장·중앙극장 등의 문화시설이 있다.
15.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校洞)
동쪽으로는 신음동(新音洞), 서쪽으로는 삼락동(三樂洞), 남쪽으로는 부곡동(富谷洞)과 접해 있다. 조선 후기 금산군(金山郡) 군내면(郡內面)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향동과 상리(上里)의 일부를 통합하여 교동이 되어 금릉면(金陵面)에 속하였다. 1931년 4월 금릉면이 신설된 김천읍에 통합되어 김천읍 교동이 되었다가 1949년 김천읍이 김천시로 개칭됨에 따라 김천시 교동이 되었다. 교동은 법정동으로 1998년 9월부터 행정동인 대신동(大新洞) 관할하에 있다. 교동이란 지명은 김산향교가 있다는 데 연유한다.
구읍(舊邑), 못안골 등의 자연마을, 마당막골, 물망골, 파잣골 등의 골짜기, 고개인 아홉사리, 연못인 앵화지 등이 있다.
유적으로는 고려~조선시대의 분묘 3기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김산향교(경북 문화재자료 257), 봉황대(경북 문화재자료 15) 등이 있다. 사찰로는 구화사가 있고,교육기관으로는 김천예술고등학교, 김천농공고등학교, 한일여자고등학교, 한일여자중학교, 금릉초등학교 등이 있다. 사회복지시설로는 1954년에 설립된 임마누엘영육아원이 있다.
16.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校洞)
조선 후기 경주군 부내면(府內面)에 속한 지역으로 향굣골, 교촌 또는 교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천원리(泉源里)를 통합하여 교리가 되었다. 1931년 경주읍에 편입되었으며 1955년 경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교동이 되었다. 교동은 법정동으로행정동인 월성동(月城洞) 관할하에 있다. 교동이란 지명은 향교가 있다는 데 연유한다.
인왕동(仁旺洞), 탑동(塔洞) 등에 걸쳐 도두랑산(95m)이 있으며, 가무치, 밭가무치, 아릇마, 웃마, 음달각단, 천원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문화재로는 경주향교(경북 유형문화재 191), 경주 최식가옥(중요민속자료 27), 경주 사마소(경북 문화재자료 2), 천관사지(사적 340), 경주 교동 법주(중요무형문화재 86) 등이 있다.유적으로는 계림김씨조비각, 영귀정(詠歸亭) 터 등이 있는데, 영귀정은 1803년(순조 3)에 건립되었으며 명문은 님공철(南公轍)이 지었고 글씨는 최헌중(崔獻重)이 썼다.
16.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校洞)
면적 4.61㎢, 인구 7576명(2008)이다. 동쪽은 추화산(推火山: 243m)이 솟아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남쪽은 내이동과 내일동에 맞닿아 있고, 북쪽은 북부면 산동면에 접해 있다.
선시대에는 밀양부 부내면(府內面)이었는데, 1918년에 밀양면으로 바뀌었다. 1931년에 밀양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고, 1989년에 밀양읍이 시(市)로 됨에 따라 교리가 교동이 되었다. 1995년에 밀양시와 밀양군을 합한 도농복합형태(都農複合形態)의 밀양시가 되었다. 교동은 교동 행정동명과 법정동명이 같다.
추화산에 추화산성이 있고, 밀양시청, 밀양향교, 백운사가 있고, 공장으로는 밀양 화이버가 있다. 교통은 25번 도로가 뻗어 있고,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있다.
문화재로는 교동 백운사에 백운사 범종(白雲寺梵鐘: 경남유형문화재 57)이 있다. 밀양향교(경남유형문화재 214)는 교동 향교의 소유이다. 추천선생 및 성은당문집책판(鄒川先生및星隱堂文集冊板: 경남유형문화재 303)은 밀양손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다. 그 밖에 추화산성(推火山城: 경남기념물 94)이 있다.
17.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校洞)
양산군 상서면(上西面)에 속하여 교동 또는 향교마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양동(良洞)과 합하여 교리가 되었다. 1939년 상서면이 물금면(勿禁面)으로 개칭되어 물금면 교리가 되었다. 1979년 5월 양산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양산읍에 편입되었으며, 1996년 3월 양산읍이 시로
승격하여 양산시 교동이 되었다. 교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강서동(江西洞)
관할하에 있다. 동 이름은 양산향교가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국개·신주동(神主洞)·양동·유복징이 등의 옛마을,
까드락방우(일명 흔들바위)·껌둥방우·꼭갈방우·탕건방우 등의 바위, 노송나뭇골·등잔골·모산골·원정골 등의 골짜기, 막골만딩이·석갓 등의 야산, 보(洑)인 떼보 등이 있다. 까드락방우는 바위가 흔들거린다는 데서, 꼭갈방우는 고깔처럼 생겼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1990년부터 아파트가 들어섰고, 1994년부터 남부동(南部洞)·중부동(中部洞), 물금읍(勿禁邑) 동면을 포함한 양산물금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시행되었으며 규모는 1018만 2000㎡이다.
양산산업단지 환경위생사업소·강서동사무소와 양산정보과학고등학교·양산여자고등학교 등의 학교가 있다. 공원인 춘추원과 체력단련시설 등이 있으며 춘추원에는 이원수 노래비가 있다. 사찰로는 춘추원사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양산향교(경남 유형문화재 205)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