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징고(尹徵古)는 초명(初名)이 윤원재(尹元載)이고, 수주(樹州)의 수안현(守安縣) 사람이다.
성종(成宗) 말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목종(穆宗) 때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되었다.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차례를 뛰어넘어 시어사(侍御史)가 되었고, 이어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옮겼으며,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에 충원되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중추사 우산기상시 검교사도 상주국(中樞使 右散騎常侍 檢校司徒 上柱國)으로 되었다. 〈현종〉 12년(1021)에 검교태위(檢校太尉)가 더해졌고 추충좌리공신(推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죽었다.
성품이 침착 중후하고 엄정하였으며, 풍모도 아름다웠고, 해서(楷書)를 잘 썼다. 부임하는 곳마다 판단과 결정이 공평하고 진실하였으며 입으로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어려워하면서도 좋아하였다.
부음을 듣고, 왕이 이르기를, “세상에 어찌 이런 사람이 다시 있겠는가? 짐은 앞으로 누구를 의지할까?”라고 하였다. 〈왕이〉 오랫동안 탄식하며 아쉬워하였으며,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추증하였고, 시호를 장경(莊景)이라 하였다.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윤징고가 공로가 있다고 하여 그의 아들 윤희단(尹希旦)을 발탁하여 등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