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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인천 94코스 제2부
논현포대근린공원-남동국가산업단지-
은청로-인천인력개발원-승기천인도교-
원인재-승기천산책로-경원대로-선학역
20240814
1.코스 소개
1)코스 개요
-봄나들이를 즐기기 좋은 공원과 도심을 지나는 코스
-논현포대근린공원은 봄철에는 벚꽃 명소로 유명함
2)관광 포인트
-옛 포대 자리에 조성된 공원으로 대포가 전시되어 있는 '논현포대근린공원'
-인천 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의 사당 '원인재'
3)여행자 정보
-길이 12.5km, 예상 소요시간 4시간, 난도 보통
-주요경로 : 만수교 서측 3.9Km 오봉산 3.1Km 논현포대근린공원 2.0Km 인천인력개발원 3.5Km 선학역3번 출입구
-시점 : 인천시 남동구 수산동 595-24 남동체육관 입구(장수천2교 아래 만수교 서측)
교통편) 인천2호선 남동구청역 정류장에서 급행 909번 버스, 지선 순환56번 버스 이용, '남동체육관' 하차, 도보 300m
-종점 : 인천시 연수구 선학동 406-9 선학역 3번 출입구
교통편) 인천지하철 1호선 선학역 3번 출입구
2.수인선 협궤철도와 승기천 둔치 풍경
제2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논현포대근린공원을 나와서 남동동로를 따라 은청로(銀淸路) 사거리로 내려간다. 이 지역은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온 호구포 지역이다. 현재 호구포 지역은 매립되어 고층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남동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인천 경제의 바탕이요, 대한민국 경제 발달의 초석이 된느 남동국가산업단지는 내륙 쪽에 1985년 4월부터 조성하기 시작해, 1986년부터는 해변 쪽으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남동국가산업단지는 대한민국 경제의 제7 동맥으로 발전하여 '남동인더스파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남동인더스파크는 남동구(南洞區) 논현동, 고잔동, 남촌동에 걸쳐 자리하고 있는데, 매립지 논현동을 중앙에 두고, 남쪽 해안에 매립지 고잔동, 북쪽 내륙에 남촌동이 자리하고 있다.
서해랑길은 남동인더스파크 지역의 중심부 은청로(銀淸路)를 따라 서쪽 승기천 방향으로 이어간다. 은청로를 따라가는데 가로수들이 예쁜 모양으로 단장되어 있다. 무슨 나무일까? 대왕참나무일까? 수피를 살피니 거칠다. 아마도 중국단풍나무인 것 같다. 올림픽공원에도 중국단풍나무들이 식재되어 있는데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을 보여준다. 은청로의 중국단풍나무 가로수는 여름날 무성한 푸른 잎과 그 모양으로서 존재의 가치를 빛낸다. 은청로의 산단본부 사거리를 건너서 수도권전철 수인분당선 남동인더스파크역과 인천공단소방서를 지나면 남동서로와 만난다. 남동서로를 가로질러 인천인력개발원 정문 앞을 통과하여 으슥한 언덕을 넘으며 승기천 언덕의 승기천로이다.
서해랑길은 인천인력개발원 후문 방향으로 승기천로를 따라 이어진다. 인천인력개발원 후문 앞에서 승기천 인도교를 따라 승기천을 건넌다. 승기천(承基川)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수봉산(壽峰山)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동막마을의 동쪽에서 승기천 하구 담수호를 이루었다가 배수갑문을 통해 황해로 흘러가며, 길이 10.33㎞로 인천광역시 남동구와 인천광역시 연수구의 경계를 이루며, 상류에서 하류로 갈수록 하폭이 넓어진다고 한다.
승기천 풍경의 으뜸은 옛 수인선 협궤철도의 승기철교일 것이다. 인천에서는 이 승기철교를 보존하고 있는데, 승기철교 동쪽 언덕에 우뚝 솟은 지붕건물이 승기철교와 어우러져 더 멋지다. 그리고 협궤철도 위쪽에는 새로이 건설된 수도권전철 수인분당선의 승기철교가 승기천을 가로지른다. 그러니까 승기천 인도교를 건너면서, 남쪽으로는 1937년에 개통된 수인선 협궤철도의 승기철교, 북쪽으로는 2016년에 개통된 수인분당선의 승기철교를 바라보며, 80년 세월의 역사를 더듬게 된다. 아픔과 환희가 승기천을 흐르고 현재의 아름다운 풍경이 승기천 둔치에서 펼쳐진다.
승기천 인도교를 건너 연수구 연수동 승기천서자전거길&산책로를 따라 승기천을 거슬러 오른다. 승기천 둔치에는 능수버들이 가지를 늘어뜨리고서 세월을 날리고, 황화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루어 주황색 꽃빛을 반짝인다. 승기천 둔치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승기천산책로를 걷다가 언덕에 자리한 인천 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허겸(李許謙)의 재실(齋室) 원인재(源仁齋)로 올라간다. 원인재(源仁齋)의 ‘원인(源仁)’이란 ‘인주(仁州) 이씨(李氏), 곧 인천 이씨의 근원(源)’이라는 뜻이며, 원래 있던 곳에서 택지개발사업으로 해체되어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복원하였다고 한다. 원인재 담장 안에는 늘푸른소나무들이 자리하고, 담장 밖에는 선비의 꽃 배롱나무 꽃들이 한가한 여름낮을 풍성하게 단장한다.
원인재 후문은 산앙문(山仰門), 산이 우러르는 문인지, 산을 우러르는 문인지? 산은 이허겸, 아마도 이허겸의 묘를 이르는 것이 아닐까? 산앙문 북쪽으로는 메타세쿼이아들이 빽빽하게 솟은 메타세쿼이아 숲길, 산림욕을 즐기며 북쪽으로 이어가면 연수교 서단에 이른다. 이곳에서 함박뫼로의 연수교를 가로지를 수 없어 승기천산책로로 내려가 연수교 아래를 통과한 뒤 다시 제방길로 오른다. 이곳에서 행정구역은 연수구 연수동에서 선학동으로 바뀌며 제방길은 황톳길로 조성되어 있다. 황톳길 안쪽에 선학동 시영아파트가 줄지어 서있고, 승기어린이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황톳길 북쪽 끝에서 서해랑길은 다시 승기천 둔치의 산책로로 내려간다.
여름날에는 몸이 늘어진다. 늘어지는 몸은 승기천 둔치 풍경을 감상하며 일어서는 느낌이다. 승기천을 거슬러 올라왔지만 승기천을 따라 내려가면 승기천 하구에서 시흥시 배곧해안과 오이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풍경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서해랑길 93코스 탐방 때 승기천 하구 지역을 가늠하며 높이 솟은 고층아피트빌딩 풍경에 주눅들지 않았던가? 어느 날일까? 승기천 하구에서 서해랑길 94코스 탐방을 추억하며 아득해질 그날이.
승기천서자전거길&산책로를 따라 선학교(仙鶴橋) 아래를 통과하여 선학동(仙鶴洞) 대규모 아파트단지 갈림길에 이르렀다. 서해랑길 94코스 종점인 선학역은 가까워졌다. 걸어온 승기천 산책로를 뒤돌아보며, 승기천 동쪽의 남동구 남천동과 남동인더스파크를 가늠한다. 서해랑길 94코스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자연 탐방의 으뜸은 오봉산 등산과 승기천 산책일 것이다. 이 자연 탐방과 더불어 94코스의 핵심은 인천 경제의 축이 되는 남동인더스파크를 통과하는 은청로일 것이다. 걸어온 은청로의 중국단풍나무들이 아른거린다. 동그란 나무들이 아른아른, 선학동 대규모 아파트단지 북쪽을 돌아서 경원대로로 나갔다. 경원대로(慶源大路)?
"신라 경덕왕이 757년(경덕왕 16)에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숙종(肅宗)이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다. 공양왕(恭讓王)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 이를 기리는 도로가 경원대로(慶源大路)라고 한다.
인천의 최초 명칭은 미추홀(彌鄒忽)로서, 백제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형인 비류(沸流)의 도읍지였다. 이 지역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장수왕 때(475년)로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16년(757년)에 한자식으로 바뀌어 소성현(召城縣)이 되었다. 고려 숙종(1095~1105) 때 숙종 어머니의 내향(內鄕)이었던 관계로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승격되었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승격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하다시피 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慶源府)로 환원되었다. 그것은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고려왕실과 관련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경원부는 다시 인주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현 명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현재의 인천(仁川)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그날 (1413년 10월 15일)을 기려 ‘인천시민의 날’ 이 제정되었다.(인천광역시사 참조)
아, 인천의 옛 지명이 소성현, 경원군, 경원부였구나. 그리고 고려 인종 때 인주(仁州), 조선 태종 때 인천(仁川)으로 탄생하였구나. 경원대로에 인천지하철 1호선 선학역 출입구 4곳이 설치되어 있다. 인천지하철1호선 선학역 3번 출입구 앞 서해랑길 안내도 앞에서 서해랑길 94코스 탐방을 마친다. 전체 탐방거리 12.5km, 전체 소요시간 3시간 28분이 걸렸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2.5km 중 4.5km
전체 소요 시간 : 3시간 28분 중 1시간 11분
논현포대근린공원 출입구로 나와서 남동동로 서쪽 보도를 따라 앞쪽의 은청로와 교차하는 사거리로 내려간다.
논현동(論峴洞)의 옛 이름은 논고개 마을로 구한말까지 인천부 남촌면에 속해 있던 곳이다. 주변에 많은 자연부락이 있었지만 이중 논고개 마을과 모래 마을이 중심이어서 1903년 인천부가 동네 이름을 확정할 때 논현리 사리동(沙里洞)이 됐다가 1906년 논현동이 됐다. ‘논고개’는 ‘이 마을에 있는 논들이 고개[峴] 위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 옛날 이곳의 논현 포구에서 중국으로 배가 다녔는데, 가족이 중국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식구들과 ‘이것저것 의논(論)하며 넘은 고개’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 이 마을에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이 마을 뒷산의 넓은 공터에 모여 의논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또 우리말의 ‘늘어진 고개’, 곧 ‘는 고개’에서 발음이 바뀐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이곳의 땅이 바다 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것으로, ‘는골’ 또는 ‘는 고개’가 ‘능골(능고개)’을 거쳐 ‘논골(논고개)’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 해석은 중구 답동의 옛 이름인 논골도 이와 같은 경우로 보고 있다. 답동의 옛 이름 논골에는 ‘무엇을 의논했다’는 식의 전설이 전혀 없지만, 그 지형으로 볼 때는 ‘(바다쪽으로) 늘어진 고개’의 형상을 하고 있다. - 인천광역시사
남동동로 서쪽 보도 옆에 남동열린근린공원이 있으며 그 위로는 수도권전철 수인분당선이 지난다.
이곳은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호구포(虎口浦) 지역 같다. 남동열린공원 왼쪽에 논현오수중계펌프장이 있다.
남동구 논현동 서남쪽에 있는 호구포(虎口浦)는 이름 그대로 ‘호랑이의 입처럼 생긴 포구’라는 뜻이다.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지만 ‘범아가리’가 바로 호구포의 순 우리말 이름이다. 예전에 호구포는 말 그대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다. 전설에는 이곳서 멀지 않은 소래 오봉산(五峰山) 기슭에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으르렁거리는 모양의 검고 큰 바위가 있어 호구암(虎口巖)이라 불렀고, 이 때문에 호구포라는 이름도 생겼다고 한다. 실제로는 이곳의 지형이 바다 쪽에서 안으로 파고 들어와 호랑이의 입처럼 생긴데서 동네 이름이 유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이 매립되기 전인 1918년 일제가 발행한 지도에 보면 호구포 일대의 모양이 실제 호랑이의 입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1920년대에 들어 호구포 앞 바다에 버려져 있던 개펄을 이용해 남동염전이 만들어지면서 호구포는 그 원래의 모양을 잃어버렸고, 그나마 지금은 남동공단이 들어서 더욱 모양이 바뀌고 말았다. - 인천광역시사
남동국가산업단지(南洞國家産業團地)가 펼쳐진다. 남동국가산업단지의 새로운 이름은 남동인더스파크이다.
수도권 정비 및 공업 재배치를 목적으로 수도권 내에 입지한 용도지역 위반 공장들을 서울에서 40㎞ 떨어진 인천 해안 지역인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남촌동·고잔동 일대의 폐염전과 반도형 구릉지로 이전하여 조성된 국가산업단지이다. 1980년 7월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인천시 남동의 폐염전 지역을 공업단지로 조성하여 수도권의 용도지역 위반 공장들을 이전시킬 계획을 확정하였다. 조성 공사는 2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수인선 협궤철도 내륙 쪽인 1단계 공사는 1985년 4월부터 1989년 12월까지 2,642천㎡가 조성되었으며, 해변 쪽의 2단계 공사는 1986년 10월부터 1992년 6월까지 6,931천㎡가 조성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동서를 잇는 은청로와 남북을 잇는 남동동로가 만나는 교차로에서 남동동로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 은청로를 따라간다.
남동열린근린공원 서쪽 출입구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승기천 1.7km 지점, 종점 4.5km 지점이다.
남동동로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의 접착제와 포장용품 생산업체인 오공본드 제2공장 앞으로 이어간다.
남동구 논현동 은청로의 북쪽 보도를 따라 남동국가산업단지 지역을 거쳐오고 있다.
남동구(南洞區)나 남동공단, 제2 경인고속도로 남동 인터체인지 등의 이름은 이 지역이 이전에 ‘남동’이라 부르던 곳이었기 때문에 생겼다. 인천시의 구(區) 이름이 대부분 지역에 따른 개성을 나타냄이 없이 그저 중구, 동구, 남구, 서구 하는 식의 방위(方位) 개념으로 붙다 보니 남동구를 남동구(南東區)로 잘못 알고, 남동도 남동(南東)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 하지만 남동은 구한말까지 인천부에 딸린 남촌면과 조동면 지역이었던 곳으로, 남촌면(南村面)의 ‘남(南)’자와 조동면(鳥洞面)의 ‘동(洞)’자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남촌면이란 인천부 청사가 있는 곳의 남쪽 면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행정의 중심 기관이었던 인천부 청사가 지금의 남구 관교동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대략 그 남쪽의 마을이 됐던 것이다. 조동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이는 조동이 우리말 ‘새말’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새말’은 우선 ‘(둘) 사이의 마을’로 해석된다. ‘새말’은 또 ‘새로 생긴 마을’을 뜻해 흔히 ‘신촌(新村)’이라는 한자 이름을 갖는다. 또는 ‘동네에 새[鳥]가 많아서’ 새말이고, 그것이 그대로 한자로 바뀌어 조동이 됐다는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새말의 ‘새’를 풀[草]을 뜻하는 순 우리말로 해석해 ‘풀이 많은 마을’로 보고, 이 말이 한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돼 ‘새[鳥] 마을[洞]’이 된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이렇게 보면 남동은 결국 인천부의 남쪽 마을과, 풀이 많은 마을이 합쳐져 생긴 동네인 셈이다. - 인천광역시사
은청로의 가로수는 중국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남동국가산업단지는 남동구 논현동, 고잔동, 남천동에 걸쳐 있다.
남동국가산업단지 입지 여건은 경인고속도로와 인천·안양 간의 제2경인고속도로 및 서해안고속도로와 인접해 있고 동암역, 주안역, 제물포역을 통해 경인선 철도에 연결되며 수인선 전철이 2012년 6월 개통되어 남동인더스파크역에 운행하고 있다. 또한 대형 선박 25척의 동시 접안이 가능한 인천항이 6㎞거리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종도 국제공항의 건설 등이 이루어지고 있어 앞으로 중국과의 교역에 있어서 유리한 지역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해랑길은 은청로 북쪽 보도에서 은청로 횡단보도를 건넌 뒤 남동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은봉로 남쪽 보도로 건너간다.
남동대로 건너편에 한국산업공단 인천지역본부와 그 뒤 오른쪽에 남동근로자종합복지관이 있다. 은청로 횡단보도를 건너서 다시 남동대로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보도로 이어간다.
원미철강 앞에서 은청로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남동대로 공중을 가로지르는 수도권전철 수인분당선 철교 옆면에 남동국가산업단지의 새로운 이름이 남동인더스파크라고 적혀 있다.
논현동 공단본부 사거리 남동대로 남쪽 횡단보도를 건너 은창보 남쪽 보도로 이어간다.
은청로 북쪽 보도를 따라와 공단본부 사거리에서 은청로 동쪽 횡단보도를 건너 북쪽 보도로 넘어와 남동대로 남쪽 횡단보도를 건너 은청로 남쪽 보도로 이어왔다. 은청로의 중국단풍나무 가로수가 멋지다.
수도권전철 수인분당선 남도인더스파크역이 은청로 북쪽에 있다. 서해랑길은 은청로 남쪽 보도를 계속 따라간다.
남동인더스파크역 맞은편에서 걸어온 은청로를 돌아본다. 은청로 왼쪽은 남동구 논현동, 오른쪽은 고잔동이다.
남동구 고잔동(古棧洞)은 구한말까지 인천부 남촌면 고잔리(古棧里)였던 곳으로 그 이름은 우리말 ‘곶’에서 나왔다. ‘고지’ 또는 ‘곶’은 ‘바다나 호수 쪽으로 내민 육지의 끝’을 나타내는 말로, 한자의 관(串, 국어발음 곶)이나 갑(岬)에 해당하며 이 ‘곶의 안쪽‘, 곧 ‘곶안’이 고잔으로 바뀐 것이다. 말 그대로 이 동네의 원래 지형이 바다에서 육지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인데, 삼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에는 당연히 이와 똑같은 땅이름이 곳곳에 많이 있다. 인천만 해도 옛날 인천도호부 시절 지금의 중구 중앙동, 선린동, 항동 일대가 다소면 고잔리였고, 이곳 남동구 고잔은 조동면 고잔리였다. 이처럼 네 곳이나 됐던 인천의 고잔은 그 뒤 모두 다른 이름으로 바뀌고 지금은 남동구 고잔동만이 남아있다. - 인천광역시사
은청로 북쪽에 119인천공단소방서와 그 오른쪽에 다목적훈련장이 있다.
은청로 남쪽 보도에서 남동서로 남쪽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 남동서로205번길을 따라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 이어간다.
한국산업인력공단 입구에서 은청로를 뒤돌아본다. 오른쪽 건너편 은청로 남쪽 보도에서 남동서로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남동서로205번길을 따라 대한상공회의소 인천인력개발원 정문으로 이어간다.
대한상공회의소 인천인력개발원 정문에서 본 건물을 살피고 지난다.
남동서로205번길을 따라 승기천로로 이어간다.
남동서로205번길을 따라오면 승기천로와 만난다. 승기천로를 오른쪽으로 따라간다.
승기천로를 따라 대한상공회의소 인천인력개발원 후문 앞으로 이어간다.
대한상공회의소 인천인력개발원 후문 앞 승기천로에서 왼쪽 승기천 인도교로 이어간다.
승기천 인도교 옆에 수인선 폐협궤철도 승기철교가 보존되어 있다.
승기천 인도교는 인천광역시 남동구(南洞區) 논현동(論峴洞)과 연수구(延壽區) 연수동(延壽洞)을 잇는 다리이다.
택지개발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돼버린 연수구 연수동(延壽洞)은 구한말 인천부 시절 먼우금면에 속한 마을들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고촌말, 솔안말, 함박말, 장승배기, 머그미 등의 여러 마을이 있었다. 이들은 1903년 인천부가 동네 이름을 바꿀 때 함박리(咸朴里)와 망해리(望海里)의 둘로 나누어졌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부천군 문학면으로 들어가며 모두 한데 합쳐져 연수리가 됐다. 한자로 풀이하면 ‘수명[壽]이 연장[延]되는 동네’, 곧 ‘오래 사는 동네’라는 좋은 뜻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일제가 자신들이 좋아하는 ‘목숨 수(壽)’자를 갖다 붙여 마음대로 지은 것일 뿐 원래 이 동네의 유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전해오는 말로는 이곳이 문학산 남쪽에 있어 날씨가 따뜻하고, 바닷가에 있다 보니 공기도 맑아 건강에 좋기 때문에 연수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도 한다. 또는 『조선왕조실록』에 “길주에 199세 된 노인이 있고, 인천에도 100세 된 노인이 있다”고 한 기록을 근거 삼아 연수동의 이름 유래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뒤에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이는 남동구의 만수동(萬壽洞)이나 장수동(長壽洞)과 똑같은 경우이다. - 인천광역시사
승기천 상류 방향에 수도권전철 수인분당선 승기철교가 승기천을 가로지른다.
승기천(承基川)은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마을이 다시 생겨나면서 이어졌다고 하여 ‘승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승기천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수봉산(壽峰山) 남서쪽 줄기 60고지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동막마을의 동쪽에서 승기천 하구 담수호를 이루었다가 배수갑문을 통해 황해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전 구간이 인천광역시 시내를 흐르고 있는 하천은 승기천이 유일하다. 승기천은 길이 10.33㎞로 인천광역시 남동구와 인천광역시 연수구의 경계를 이루며, 상류에서 하류로 갈수록 하폭이 넓어진다. 인천의 주요 행정 기관이나 길 병원, 남동공단, 주변 택지지구 등이 들어서기 직전이던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승기천은 현재의 루트가 아닌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다. 이곳도 굴포천(掘浦川)과 마찬가지로 도심 지역 구간을 중심으로 지류가 단절된 상태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인선 폐협궤철도 승기철교가 승기천 하류 방향에 보존되어 있다.
수인선 협궤철도는 1937년 개통되어 1995년까지 운행된 협궤철도이다. 수인선 협궤철도는 수원시와 인천광역시를 잇는 철도라는 의미로 수인선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고, 보통 열차보다 좁은 철도 노선이라 협궤철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인선 협궤철도는 40㎞/h 전후의 속도로 인천~수원 간 편도 구간을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에 주파하였다. 열차편의 경우 50석 정원의 좌석을 설치한 객차 및 디젤동차를 편성하였는데, 과거 탑승 수요가 많을 때는 디젤동차 2량에 무동력차 객차 2량을 정규 편성하여 다니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 탑승 수요 급감으로 인하여 디젤동차 2량으로만 정규 편성하였다. 운행 편수 또한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왕복 일곱 차례까지 운행되었으나, 1980년대 왕복 세 차례로 줄어들었다. - 두산백과
대한상공회의소 인천인력개발원 후문 앞 승기천로에서 승기천 인도교 동쪽 출입구로 이어왔다. 왼쪽은 남동구 논현동, 오른쪽은 남동구 고잔동 지역이다.
수도권전철 수인분당선 승기철교가 승기천 위를 가로지른다. 승기천은 미추홀구 용현동 수봉산에서 발원하여 흘러온다.
승기천의 상류는 복개되어 도로가 놓였고, 중류의 둔치에는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하류는 오른쪽 둔치 너머에 연수 택지 지구 개발이 이루어졌고 왼쪽에는 남동 산업 단지가 조성되었다. 택지 지구와 공업 단지의 입주 이후 생활하수 및 공장 폐수 증가에 따른 오염 물질 급증으로 생태계 파괴 및 용존 산소 감소, 콘크리트 제방 생성에 따른 자연형 하천 특성 상실 등 환경 오염도가 매우 심각한 곳 중의 하나로 꼽혔다. 현재는 생태 복원 사업이 완료된 상태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인선 폐협궤철도 승기철교가 보존되어 있다. 왼쪽 언덕에 솟은 지붕 건물은 무엇일까?
수인선 협궤철도는 일반적인 철도의 표준궤간은 철로의 폭이 1,435㎜이지만, 수인선 협궤철도의 철로의 폭은 절반 수준인 762㎜에 불과하였다. 1937년에 개통한 수인선 협궤철도는 수원역에서 남인천역까지 52.8㎞ 구간을 운행하였다. 이 열차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열차로 불렸다. 경기 동부 지역에서 생산된 미곡과 시흥과 인천에서 생산된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빼돌리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발달과 함께 수인선 협궤철도는 자동차 교통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경제성이 떨어짐에 따라 1996년 1월 1일부터 운행을 중단하였다. - 두산백과
승기천은 연수구 동춘동 동막마을 앞에서 황해로 유입된다고 한다. 수인선 폐협궤철도의 승기철교가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인선 협궤철도는 최초 일본인 소유의 사철(私鐵)로 부설되었으며 주로 경기도 해안 지방에서 만들어진 소금과 경기 동부 지방에서 생산되는 곡물까지 인천항으로 실어날라 일본으로 반출하는 역할을 하였다. 1937년 수원~인천 간 철도 영업이 개시되었으며 광복 이후 철도청 산하의 국철(國鐵)로 이관되었다. 화물 수송보다는 여객 수송의 비중이 커졌으나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더불어 교통수단이 다양화되면서 효용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절을 거쳐 결국 본격적인 폐선 절차에 들어가게 되었다. - 두산백과
곧바로 나가면 연수동 원인재역으로 이어지며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승기천 산책로로 내려간다.
승기천 동쪽 언덕의 지붕 건물은 무엇일까? 수인 폐협궤철도의 승기철교, 수양버들, 승기천 둔치 등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서해랑길은 승기천 산책로를 왼쪽으로 따라간다.
승기천 하류 남동대교 방향이다. 승기천은 연수구 동춘동 동막마을 앞에서 서해 바다로 유입된다.
승기천 인도교 서쪽 출입구에서 승기천 산책로로 내려왔다. 산책로를 따라 승기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연수리(延壽里)는 1940년 일제가 일본식 행정구역 이름을 붙여 연수정(延壽町)이라고 했다가, 광복 뒤인 1946년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연수동(延壽洞)이 됐다. 한편 연수동은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곳곳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곳곳에 방죽을 쌓고 농경지를 만들려 애를 썼는데, 그래서 지금까지도 숭어방죽이나 변산이방죽, 함박리방죽 등 여러 방죽의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는 인천이 천일염(天日鹽), 곧 햇볕에 바닷물을 말려 얻는 소금의 주산지가 되면서 이곳에도 대규모 염전이 만들어졌고, 이 때문에 염전마을이라는 동네 이름도 아직껏 남아 있다. - 인천광역시사
승기천 인도교 아래서 승기천 하류 방향을 바라본다. 승기천은 동쪽 남동구와 서쪽 연수구를 가르며 서해로 흘러간다.
수도권전철 수인분당선의 승기철교가 승기천 공중을 가로지르고 승기천 둔치에 황화코스모스 꽃이 그득히 피어 있다.
승기천 산책로에서 왼쪽 원인재역은 120m 거리, 직진하면 연수교 860m 거리이다.
원인재역을 출발한 수인분당선 전동차가 승기철교를 건너 남동인더스파크역으로 향해 간다. 황화코스모스가 둔치를 메운다.
승기천 둔치에는 황화코스모스가 그득하지만 초원에 수양버들이 늘어진 풍경도 멋지다.
승기천 산책로 서쪽 언덕에 원인재(源仁齋)가 자리한다.
인천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생긴 원인재(源仁齋)역은 역사 바로 옆에 인천 이씨의 중시조(中始祖)인 이허겸(李許謙)의 재실(齋室) 원인재가 있어 그 이름을 갖게 됐다. 재실이란 묘소에 딸려 있는 전각이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 또는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집을 일컫는데, 원인재 옆에는 실제로 이허겸의 묘소가 있어 이곳에서 제사를 준비한다. 지금의 원인재는 원래 있던 것을 인천시가 도시계획을 빌미로 철거해 버림에 따라 ‘인천 이씨 대종회’에서 5년여 간의 공사를 벌인 끝에 지난 1999년 10월에 새로 지은 것이다. 원인재(源仁齋)의 ‘원인(源仁)’이란 ‘인주(仁州) 이씨(李氏), 곧 인천 이씨의 근원(源)’이라는 뜻으로, 인천 이씨의 여러 분파가 이허겸 대 이후에 나뉘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의 새 건물이 지어지기 이전의 원인재는 순조 7년(1807년)이나 고종 4년(1857), 아니면 1927년 을묘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 인천광역시사
승기천서자전거길이 달리고 그 옆에 산책로가 이어지며, 승기천 둔치에는 황화코스모스 꽃밭과 초원, 수양버들이 늘어진다.
오른쪽에 원인재 후문 산앙재, 앞에는 여름 선비꽃인 배롱나무 붉은 꽃이 흐드러진다.
원인재는 닫혀 있다. 담장 밖에 배롱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담장 안에는 소나무들이 무성하다.
원인재(源仁齋)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에 있는 인천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李許謙)의 묘려(墓閭). 1990년 11월 9일 인천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이허겸은 고려시대 외척 세력인 이자연(李子淵)의 할아버지이다. 이자연은 세 딸을 고려 문종의 비로 혼인시켜 세력을 장악하였다. 이는 이허겸의 묘가 연화부수지의 명당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원래 연수구 연수동 적십자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왼쪽의 신지마을에 있었으나, 택지개발사업으로 해체되어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으로 옮겨져 복원하였다. 팔작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32세손이 쓴 《원인재기(源仁齋記)》와 33세손이 쓴 원인재상량문(源仁齋上樑文)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807년(순조 7)이나 1835년(헌종 1)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묘려의 명칭을 원인재라고 한 것은 인천이 인천(인주)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두산백과
원인재(源仁齋) 후문인 산앙문(山仰門)은 출입할 수 없다고 한다.
함박뫼로의 연수교가 승기천을 가로지르고 승기천 둔치에 황화코스모스 꽃들이 그득하다. 건너편은 남동구 남촌동이다.
남동구(南洞區) 남촌동(南村洞)은 구한말까지 인천부 남촌면의 염말이라 불리던 곳이다. 남촌면은 이곳이 인천도호부 청사가 있던 문학산 일대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은 이름이고, 염말은 소금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모두 공단이나 택지 등으로 바뀌고 말았지만, 옛날 이곳에는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자염(煮鹽)밭이 많았기 때문에 염말이라 불렸다. 염말은 1906년 인천부가 동네 이름을 다시 지을 때 와우리(臥牛里)가 되는데, 마을의 산 형태가 마치 소[牛]가 누워있는[臥] 것 같다고 해서 생긴 것이다. 정조 13년(1789)에 발간된『호구총수』에 보면 남촌면이 기록돼 소관 마을이 1∼4리로 나와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발간된 『인천부읍지』에 보면 남촌면에 염촌, 냉정리, 능동, 논현리, 도림리, 고잔리, 사리동, 여무실리, 발리동, 경신리가 적혀있을 뿐 남촌동이나 와우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정황으로 보아 이중 염촌이 지금의 남촌동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와우리는 광복 직후인 1946년 지금의 이름인 남촌동으로 바뀌었으니, 이는 이곳이 구한말까지 남촌면에 속해 있었고 이곳이 면소재지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1949년 8월 인천시 남동출장소 남촌동에 편입됐다가, 1968년 1월 인천시 남구로 편입됐다. - 인천광역시사
오른쪽 승기천 산책로로 내려가 연수교 아래를 통과하여 함박뫼로 북쪽 보도로 올라간다. 함박뫼로 왼쪽은 신연수역 방향이다.
함박뫼로 남쪽 보도에서 북쪽 보도로 건너갈 수 없어 오른쪽 계단을 통하여 승기천 산책로로 내려간다.
승기천 서쪽 제방의 메타세쿼이아길을 따라와서 연수교 서단 남쪽 출입구에서 내려와 뒤돌아본다.
승기천서자전거길 산책로에서 연수교 서단 북쪽 출입구로 올라간다.
함박뫼로 건너편은 연수구 연수동 지역, 오른쪽 선학아파트 일대는 연수구 선학동 지역이다.
연수구 연수동에서 선학동으로 넘어왔다. 연수교 서단 북쪽 출입구에서 황톳길을 따라간다. 왼쪽에 선학아파트가 있다.
황톳길 오른쪽에 맨발걷기를 생활화하여 건강을 지키자는 알림막이 걸려 있다.
황톳길 아래 선학아파트 입구에 승기어린이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에 설치된 벽에 소련, 미국, 일본, 중국, 대한민국의 우주 개발과 위성 탐사에 대하여 사진과 안내글이 게시되어 있다.
황톳길 북쪽 끝 선학로와 선학동행정복지센터 갈림길에서 오른쪽 승기천 산책로로 내려간다.
송기천 산책로로 내려가 선학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승기천 동쪽은 남동구 남촌동 지역이다. 저 빌딩은 무슨 건물일까?
황톳길 북쪽 출입구에서 승기천 산책로로 내려와 뒤돌아본다. 선학교 230m 방향으로 이어간다.
메타세쿼이아숲 황톳길을 따라와서 승기천서자전거길로 내려왔다. 왼쪽 길은 산책로, 오른쪽 두 길은 자전거길이다.
승기천서자전거길은 왼쪽 두 길, 맨 오른쪽 길이 산책로이다. 앞에 비류대로의 선학교, 건너편은 남동구 남촌동 지역이다.
비류대로의 선학교가 승기천을 가로지르고, 건너편 남동구 남촌동 지역에 빌딩이 솟아 있다. 무슨 빌딩인지 궁금하다.
선학교 아래 승기천 산책길 왼쪽에 비류대로 선학교로 올라가는 출입로가 있다. 서해랑길은 계속 산책로를 따라간다.
왼쪽은 선학초등학교 출입로, 서해랑길은 계속 승기천서자전거길&산책로를 따라간다.
서해랑길은 앞에서 승기천서자전거길&산책로와 헤어져 왼쪽으로 꺾어 선학동 아파트단지로 이어간다. 승기천서자전거길&산책로를 계속 따라가면 제2경인고속도로 승기교로 이어진다.
승기천서자전거길&산책로와 작별하고 선학동 아파트단지 방향으로 이어간다.
승기천서자전거길&산책로에서 선학동 아파트단지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선학동 아파트단지 출입구에서 승기천 둔치와 건너편의 남동구 남촌동을 돌아본다. 수양버들과 황화코스모스 풍경이 아름답다.
선학동 아파트단지 동쪽 승기천 제방길은 선학로68번길, 아파트단지 북쪽길은 경원대로496번길이다.
선학동 아파트단지 북쪽 경원대로496번길을 따라 경원대로(慶源大路)까지 이어간다.
선학동에 금호어울림 아파트를 비롯하여 여러 아파트들이 대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아파트 뒤쪽에 길마산 줄기가 보인다.
연수구 선학동(仙鶴洞)은 문학산의 동쪽 길마산 주변 지역이다. 옛부터 도장마을, 또는 도정이나 도재 등으로 불리던 곳으로 구한말 인천부 부내면 도장리였다. 일제 말기인 1940년에는 일본식으로 무학정(舞鶴町)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가, 광복 뒤인 1946년 1월 선학동이 됐다. 이 마을의 뒷산 꼭대기를 선유봉(仙遊峰)이라 부르는데, 선학동은 그 아랫마을이라 해서 선유봉의 ‘선’자와 문학산의 ‘학’자를 붙여 새로 만든 이름이다. 원래 동네 이름인 도장은, 다른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안방’이나 ‘규방(閨房)’을 뜻하는 우리 옛말 도장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네가 산줄기에 쌓여 그 안에 안방처럼 푸근하게 자리잡고 있는 경우에 많이 붙는 이름이다. 도장마을은 지금도 큰도장, 작은도장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사잇도장 등 세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이곳에는 또 ‘중기리’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었는데, 이는 이곳에 ‘하중길’이라는 이름의 무인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해 다른 설명은 전혀 없으니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은 얘기다. - 인천광역시사
경원대로496번길 북쪽에 선학힐링텃밭이 조성되어 있으며, 쉼터정자도 있다.
서해랑길은 경원대로496번길을 계속 따라서 경원대로(慶源大路)까지 이어간다.
연수구에서 관리하는 인천광역시 소유 공유재산 토지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관리 주택이 출입문 오른쪽에 있다.
금호어울림아파트 북쪽 경원대로496번길에서 문학산 방향을 바라본다. 길마산 산줄기가 가늠된다.
선학동 도장마을 위쪽에 길마산(吉馬山)이 있다. 문학산의 동쪽 끝 줄기에 붙어있는 야트막한 산인데, 그 모양이 길마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길마’는 짐을 싣기 위해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며, 소나 말의 등에 길마를 얹는 것을 보통 ‘길마를 지운다’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요즘은 소나 말이 물건을 싣고 다니는 것을 볼 기회가 거의 없으니 길마라는 말도 낯설기만 할 수밖에 없다. 어떻든 이렇게 보면 길마산(吉馬山)이라는 한자 이름은 원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소리만 대충 따다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길마산이라는 산은 우리 나라 곳곳에 적지 않게 있으며, 구개음화(口蓋音化)된 발음으로 질마산, 또는 질마재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 인천광역시사
승기천서자전거길&산책로에서 선학동 아파트단지 출입구로 올라와 경원대로496번길을 따라오고 있다.
금호어울림아파트 북쪽의 경원대로496번길을 따라 경원대로(慶源大路)로 나간다.
경원대로496번길 서쪽 출입구에서 경원대로(慶源大路) 동쪽 보도로 나간다.
경원대로 건너편 왼쪽 뒤에 선학역이 보인다. 경원대로 동쪽 보도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경원대로 서쪽 보도로 이어간다.
경원대로(慶源大路)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외암도사거리부터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굴다리오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이 14.5km의 왕복 6~10차선 도로. 도로명은 인천의 고려시대 명칭인 '경원부(慶源府)'에서 유래되었으며, 서울-원산간의 교통축을 의미하는 경원(京元)이나 경원대학교(暻園大學校)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 나무위키
횡단보도 맞은편 왼쪽의 경원대로496번길을 따라 경원대로 동쪽 보도로 나와서 경원대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맞은편 중앙 뒤 경원대로496번길에서 경원대로 동쪽 보도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경원대로 서쪽 보도를 따라오고 있다.
경원대로가 남북으로 달리고, 인천지하철 1호선 선학역 출입구가 경원대로 동쪽과 서쪽에 2개씩 설치되어 있다.
경원대로(慶源大路)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거쳐 연수구 동춘동의 외암도 사거리와 부평구 부평동의 굴다리 오거리를 잇는 도로이다. 경원대로는 인천광역시의 부평구, 남동구, 미추홀구 및 연수구를 S자 형태로 지나는 전체 길이 약 14.45㎞의 도로로, 인천의 주요 대로 중 하나이다.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의 굴다리 오거리에서 출발하여 산곡동과 십정동을 지나 남동구 간석동으로 이어지며, 미추홀구에서 주안동, 관교동 및 문학동을 통과한 후 연수구의 선학동과 연수동을 거쳐 동춘동에서 끝난다. 인천광역시는 과거 소성현(邵城縣)이라 불리다가 고려 숙종 때 인예 태후의 친정 고을이라는 이유로 소성현을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하여 경원대로(慶源大路)라고 명명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경원대로 서쪽 보도의 인천지하철 1호선 선학역 4번 출입구를 지나 그 뒤의 3번 출입구로 이어간다.
인천지하철 1호선 선학역 3번 출입구 앞 가로등 뒤쪽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인천지하철 1호선 선학역 3번 출입구 표시기둥 앞 보도 가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서해랑길 94코스는 거리 12.5km, 예상 소요시간 4시간, 난도 보통이다.
서해랑길 94코스 안내도만을 찍어 보았다. 94코스 탐방길이 일목요연하다.
서해랑길 94코스 탐방길을 완주하고 서해랑길 94·95코스 안내도와 함께 이를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