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비유라는 말은 서로 대조시켰다는 말입니다.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란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장막은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점점 낡아져야 되는 겁니다.
10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 다음 신약 곧 새 언약으로 넘어갑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계속해서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새 언약에 대한 성경의 말씀에 눈이 열리지 않아
구약 마당에서 예수를 믿고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애쓰고 몸부림치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즘 제일 부흥이 잘 되는 종교는 자기 숭배라고 하는 말이 있듯
진리의 지식이 없어 자기 의를 세우려고 열심히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는 겁니다(롬10;2-3)
11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0절까지는 옛 것을 말씀하시고 11절 부터는 새 것을 말씀합니다.
8장 13절에 옛 것은 점점 낡아지게 하는 것이고 쇠하여져 가는 것이며 없어져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옛 것과 새것을 대조해서 우리로 하여금
새 것을 붙잡도록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는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의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은
창세기 3장부터라고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가죽옷을 입히셨거든요. 그 다음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있고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드린 것으로 봐서 거기서부터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믿음의 의식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됩니다.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단 번에 들어가셨느니라’ 따라서 이제는 피의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산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갈 때에 중간에 휘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얻고 그와 하나가 되어 그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피를 받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제사를
드리려고 아버지 앞에 나가고자 하면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발생시켜
우리를 늘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의 제사가 아니라 산제사를 드립니다.
요한일서에 나옵니다. “우리가 빛과 사귐을 위해 빛 가운데로 나아가기만 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하십니다. 무한반복입니다.
우리는 피를 들고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참말로
귀중한 것이긴 하지만 그 보혈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는 이미
우리 안에서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나아가기만 하면 자동세척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치를 해 놓으셨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가 정말 중요한 겁니다.
13절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옛 언약 아래서는 짐승의 피로도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린 이유는 우리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엡3장12절 이후를 보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어디에 사용해야 되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지 않는 믿음은 산 믿음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아바 아버지’를 부르면서
그 품에 달려가 안길 수 없는 믿음이라면 아무리 열심 있는 믿음이라 할지라도
생명 있는 믿음은 아닌 겁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는 믿음은 절대로 생명이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의 업적을 쌓아야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할부를 다 넣어
그 분이 나를 데려갈 것 같이 열심히 끙끙대는 것은 결코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건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처해 있는 종의 믿음입니다.
자유하는 아들의 믿음이 아닙니다. 더러운 양심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해서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우리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는 서로 비교하면 오십보백보입니다. 하나님 측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이 죄라고 여기는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죄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무서운 죄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에게 통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거역한 죄 외에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성령을 거역한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게 요일5장에
나오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죄와 사함을 받을 수없는 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제대로 대접해야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령을
제대로 모르고 성령을 제대로 대접을 못해서 사달이 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겨우 사도행전까지 밖에 못가고 로마서도 없고 바로 계시록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확실하고,
내가 거듭난 것이 확실하고, 내가 다시 산 것이 확실해 집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게 있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교회 서신을 통해서 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점점 가득하게 되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계시록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계시록
7장에 내가 있습니다. 유다지파 속에 내가 있습니다. 또 계시록 14장에 내가 있습니다.
인 맞은 자 중에 내가 있는 겁니다. 21장에 새 예루살렘 속에 내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누가 나를 끄집어 낼 수 있겠습니까?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 안에 아담 안에서 옮겨 심었습니다. 누가 뽑아내겠습니까?
어떤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계시록14장에는 십사만 사천밖에 안되는데
구원 받는 숫자가 그렇게 적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요. 그래서 제가
‘단 한 사람이라도 그게 바로 나다 하면 되는 겁니다’ 라고 대답을 해 줬습니다.
성경 속에서 ‘내가 여기 있네’하고 확인이 되면 된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생명을
가진 자의 족보 책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있으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걸
누가 뽑아냅니까? 계시록을 잘 몰라도 내가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있으면 되는 겁니다.
없으면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아야 됩니다.
애들 엄마는 아버지를 가르치듯 성령님이 이를 가르쳐주십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찬양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