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산 용연사 주지 설암 스님
“내 모든 게 무너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육조단경 속 ‘자성’에 환희, 이튿날 삼척 신흥사서 출가
“전생에 흉악 스님” 일언에 방에 탱자 가시 두르고 좌선
은사 화광 스님 방문 열고 “깨달으면 나부터 제도!”
경운기‧포클레인 끌며 불사 12년 만에 템플스테이 사찰
용연계곡 일대 명승지 지정 지역 문화 발굴 전파 ‘정성’
강릉 대표 산사문화예술제 ‘연화제’ 통해 자긍심 고양
신도가 사찰재정 철저 관리, 법회 보시금 일체 보육원에
선원‧찻집‧문화관 신축 원력, 산속의 ‘치유 마을’도 계획
“주지, 신도 위 군림 안 돼!” 은사스님 가르침 늘 기억
인도 캐사리아 대탑(Kesariya Stupa) 앞에서 자괴감에 눈물을 흘렸다는 설암 스님은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며 “다시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을 서원했다”고 전했다.
첩첩산중의 심산유곡으로 들어서는 것만 같다. 마을에서 불과 1km 멀어졌는데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곤신봉(1131m)과 매봉(817.5m)에서 솟은 물은 장장 6km를 흐르며
크고 작은 소와 폭포를 빚어냈다. 계곡 내에 있는 소에서 살던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을 전해온 사람들은 그 소를 용소(龍沼)라고 했다.
하여, 이 계곡의 이름도 용연계곡(龍淵溪谷)이다.
계곡에 산재한 암반 사이로 흐르는 초록빛 맑은 물과
계곡 주변의 짙게 물든 단풍이 어우러지는 가을 풍경이 일품이다.
용연계곡의 물줄기도 여기 사기막저수지에서 한 번 숨을 돌리고는
다시 사천천을 따라 내려가 사천면의 대지를 적신 후 동해로 들어선다.
사기막(砂器幕)! 이 깊은 산골에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살며 그릇을 구웠다는 방증이다.
이 저수지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100여m를 오르면 용연사(龍淵寺)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이 절을 포함한 ‘강릉 용연계곡 일원’은 2013년 ‘명승 제106호’로 지정됐다.
국가문화재 지정에 앞장선 장본인은
만월산(滿月山) 용연사(龍淵寺) 주지 설암(雪庵) 스님이다.
용연계곡은 웅장하다.
밀양에서 2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나 신뢰와 의리로 똘똘 뭉친 열혈 청년의 삶을 살았다.
1993년의 늦여름. 지인이 삼척 신흥사 인근의 땅을 매입했다고
구경 오라 해서 걸음했다가 당시 신흥사 주지 화광 스님을 친견했다.
차 한 잔 내며 들려준 봉암사 등의 선방 이야기에 푹 빠졌다.
해가 기울어 하룻밤 묵어가야만 했는데 화광 스님은 처음 본 거사에게
“밤에 잠 안 오면 보라”며 ‘육조단경’을 주었다.
별 가득했던 여름밤 홀로 앉아 책장을 열었다.
‘육조단경’을 관통하는 ‘자성(自性)’에 꽂혔다.
당장이라도 ‘내 안의 부처’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환희심이 차올랐다.
다음 날 이른 아침 화광 스님을 친견했다.
“출가하겠습니다!”
“성격 참 급하시네!“
“오늘 안 해 주시면 저 스스로 삭발하겠습니다.“
31세의 거사는 그렇게 불연을 맺고 화광 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했다.
화광(현 수타사 주지) 스님은 탄허 스님의 상좌였던 만화희찬(1922∼1983) 스님의 제자이다.
화광 스님으로부터 ‘무(無)’자 화두를 받은 후 전국의 선원에서 정진했다.
오대산 북대에서 정진할 때는 잠들지 않으려
한밤중에도 설산을 걸어 중대의 적멸보궁으로 넘어가곤 했다.
“오대산에 눈 좀 내린다 싶으면 굉장합니다.
달빛과 작은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쳐갔습니다.
밤 10시에 떠나서는 적멸보궁에서 새벽예불을 맞이한 적도 많습니다.”
정진 중에 눕지 않으려 한 이유가 있다.
신흥사에서 행자 생활을 할 때다.
당시 청련암에는 월인(月印·1999년 입적)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 찬을 드리려 암자에 올라갔다.
“행자는 어디서 오셨는가?”
“밀양에서 왔습니다.”
“행자님은 전생에 흉악한 스님이었습니다. 평생 선방 떠나지 마세요.”
“어떻게 공부하는 겁니까?”
“검소하게 살며 잠 안 자고 정진하면 됩니다.”
‘검소함’과 ‘잠’은 그때 마음 깊이 새겨졌다.
“선방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월인 스님 곁에서 정진하겠다고 결심하고는 옆방에 들어앉았습니다.
작은 전기장판을 쓰고 계셨던 월인 스님은 당신의 방에 불을 넣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나무 속 벌레가 타 죽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가시 돋친 탱자 가지로 방안을 둘렀습니다.”
졸지 않으려는 방책일 뿐만 아니라
깨닫지 않고는 이 방을 함부로 나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을 터다.
“찬을 갖고 암자로 간 제자가 하루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은사스님께서 올라오셨습니다.
제 방문을 열어 보고는 놀라셨지요. 잠시 후 한마디 하셨습니다.
‘깨달으면 내부터 제도해 주이소!’ 내심 한심하다고 생각도 하셨겠으나
열정만은 알아주셨나 봅니다. 한겨울 암자에 앉아있던
제가 인상 깊으셨는지 법명을 ‘설암(雪庵)’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수좌의 길만 걷던 설암 스님은 2003년 용연사 주지를 맡았다.
당시만 해도 대웅전과 허름한 목우당이 전부였다.
중창불사가 절실했으나 신도들에게만 의지할 생각은 없었다.
경운기, 포클레인, 트랙터를 몰며 땅을 다지고 돌을 날랐다.
농번기에 일손이 필요하다 싶으면 사하촌으로 내려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절과 마을 사이에 신뢰가 쌓여가며 용연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그 사이 관음전, 명부전, 설선당, 삼성각 등이 들어서며 사격이 온전히 갖춰졌다.
12년이 흐른 2015년 조계종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됐다. 인고와 감내의 결과일 것이다.
“울화통 터지는 일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터지면 불사는 수포로 돌아갑니다.
주지가 짜증을 내면 신도들은 싫증을 느낍니다. 그럼 불사의 동력은 급격히 약해집니다.
신도 스스로 동참하도록 주지가 솔선수범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묘수가 없습니다.”
심산유곡에 자리한 용연사가 강릉의 대표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건
‘신행도량’을 넘어 ‘문화도량’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설암 스님 각고의 노력 끝에 창출된 ‘용연계곡 연화제’가 대표적이다.
강릉이 배경인 ‘연화부인과 무월랑’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절 안으로 품은 용연사는 2박 3일에 걸쳐 ‘용연계곡 연화제’를 펼쳐 보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을이 깊어지면 강릉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축제다.
설암 스님은 한국 전통의 ‘화랑다례’에 천착하고 있다.
연화부인을 기리는 연화제례를 봉행하고,
강릉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용왕재와 풍어재를 지낸다.
‘화랑다례(花郞茶禮)’를 포함한 신라·고려시대의 다례를 체험할 수 있는
차 문화 한마당과 흥겨운 탈놀이 한마당, 염색·자수·매듭체험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선을 보인다.
명망 있는 가수들이 출연하는 산사음악회가 백미를 장식한다.
아울러 지역 특산품 홍보와 사회적 약자 후원을 위한 나눔행사 부스도 운영한다.
“연화제가 펼쳐지는 항구와 계곡, 사찰이 곧 예술의 공간이자 소통의 공간입니다.
전통제례에서 우리 민족이 품었던 정(情)과 지혜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오늘날 다시 새겨봅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남긴 체취를 통해 우리 고유의 차 문화를 구축‧확대합니다.
개별적인 동호회, 준전문가라도 자신의 예술활동을 자신 있게 펼치다 보면
스스로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공연하는 사람과 관람하는 사람의
교감이 깊어질수록 문화예술 환경은 넓어집니다.
자연스레 강릉의 품격은 고양됩니다.
지역 주민들과 호흡하는 절이 되어야 생기가 돌고 자생할 수 있습니다.”
축제의 기본 원칙은 ‘자발성, 자유로움, 자긍심, 연대감,
그리고 축제를 통한 삶의 존엄성에 대한 재인식’이라고 한다.
‘용연계곡 연화제’는 이 원칙에 정확히 부합한다.
‘용연계곡 연화제’가 강릉시의 대표 ‘산사문화예술제’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전통양식에 맞지 않아 올해 해체될 대웅전 관련 불사를 제외하면
도량 정비는 거의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설암 스님은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수행에만 전념할 수좌를 위한 선원과
절에 들어선 사람들이 쉬어 갈 아담한 찻집을 지을 겁니다.
청소년과 지역 주민들이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문화관 신축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용연계곡 깊은 곳에 8264㎡(2500평) 규모의 땅을 오래전에 확보했습니다.
그곳에 ‘화전민 마을’을 복원하고 여건이 닿는 대로 ‘치유 마을’로 조성하려 합니다.”
‘용연계곡 연화제’ 는 강릉 최고의 산사문화축제로 평가받는다.
원대한 계획이다. 이 원력은 성취될 수 있을까?
설암 스님은 “용연사 신도님들이 후원하고 있기에 큰 걱정 안 한다”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용연사를 움직이는 건 ‘기도 행원회’. ‘수행 만월회’, ‘문화 연화회’ 세 축입니다.
모두 재가신도로 구성됐는데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사찰행사와 재정은 물론 화주도 세 신행 단체가 서로 협의해 가며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관음‧지장재일이나 백중 때 들어오는 보시금과
절에서 주최한 플리마켓 행사에서 나온 수익금 일체는 ‘특별 통장’으로 입금된다.
“사회 그늘진 곳에 계신 분들의 힘겨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만든 통장입니다.
기존에는 면사무소 등에 전했는데 지금은 강릉시보육원에 전액 전달합니다.
신도님들과 논의한 결과 올해부터는
보육원에서 출소하는 아이 중의 한 명이라도 대학에 입학시키기로 했습니다.”
용연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읽을 수 있겠다. 회향이다!
“저는 부처님 제자입니다. 부처님께서 꿈꾸던 세상을 실현할 의무가 있습니다.
‘생명 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이 땅에 실현해 가는 건 저의 운명입니다.”
상월결사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신도와의 차담이 길어졌다고 한다.
“인도 성지순례를 자주 가는데 갈 때마다 조금 더 철들어 옵니다.
이번 순례는 부처님의 숨결이 배어 있는 시골길을 걸으며
저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기에 더욱 의미 깊었습니다. 그
런데 캐사리아 대탑(Kesariya Stupa)을 마주했을 때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탑의 주변은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융성했던 불교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대탑 안의 지하 2층, 지상 6층에 부처님 좌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목이 잘렸거나 사라졌습니다. 주위에 힌두교 사원은 있으나 불교 사원은 전무 했습니다.
‘정녕 우리는 이곳에 작은 절 하나도 짓지 못하는가!’라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홀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밤을 지새우다 발원했다.
“물질적으로는 좀 부족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서원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화를 내지 않겠다.’
내려놓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불사도 포기하지 않으나 서두르지 않으려 합니다.
전에는 관광객이 다가온다 싶으면 슬쩍 피했습니다.
이것저것 답하고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았거든요.
인도 성지순례에서 천명한 게 무엇입니까?
‘부처님 법 전합시다!’
지금은 ‘어서 오시라’며 차를 냅니다. 성지순례 다녀온 후 신도가 더 늘었습니다.”
코로나19 여파 속에서도 신도 수가 늘었던 용연사다.
문화도량이라는 입소문을 들은 어린이‧청년 등의 젊은 불자들이 속속 절을 찾고 있다.
용연사 주지를 맡았을 때 은사스님의 당부가 있었을 법하다. 처음으로 맡은 주지 아닌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스님은 세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주지가 신도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한시도 잊은 적 없습니다.”
허름했던 암자 수준의 산속 절을 강릉의 포교 지평을 넓히는 거점 도량으로
우뚝 서게 한 힘이 무엇인지 알겠다. ‘검소와 하심’이다.
용연사는 더 활기찰 것이고 대중의 수희동참으로 대작불사는 원만회향 할 것이다.
신도들에게 자주 전한다는 육화(六和) 일언이 귓전을 맴돈다.
“화합하는 과정에서 내 모든 게 무너집니다. 무너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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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암 스님은
1993년 화광 스님을 은사로 삼척 신흥사에서 출가했다.
1994년 사미계·1998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조계종 총무원 재무·호법·사회 국장을 역임하고
조계종 총무원장 종책 특보를 맡았다.
현재 승가학원 법인처장이며 16·17·18대 중앙종회의원이다.
2023년 9월 27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