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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
본문 히브리서 5:11-14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5: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강론
질문을 드림으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예수를 믿은 지 몇 년 차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나이는 몇 살 쯤 된 것 같습니까?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중 어느 단계라고 여겨지십니까?
왜 이런 질문을 드리느냐 하면 12절을 보겠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하고 시작이 됩니다. 이는 믿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12절은 마지막에서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고 한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나이는 많이 먹었으나 영적인 나이는 어린애와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라지를 못한 소아마비와 같은 상태라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시라는 점을 증언하려는 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에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11절)고 답답해합니다.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한 뜻은,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영광스러움과 은혜와 축복은 많고도 풍성한데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즉 이를 깨닫지를 못한다는 답답함에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놓으신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은 아무 것도 행해주신 것이 없는 양 “주십시오, 주십시오”하면서 평생토록 가련하고 가난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은 연수는 오래되었으면서도 자라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듣는 것이 둔하다”한 원어는 6:12절의 “게으르다”와 같은 “노드로스”(nothros)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게을러서” 배우지를 않기 때문에 자라지를 못하고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11절에서는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어린애와 같은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13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13)합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13)란, 들은바 설교말씀을 삶에 적용을 시키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는 젖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젖으로 시작해서 점차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자식을 양육해 보면 엄마의 젖을 떼고 밥을 먹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언제까지나 젖만을 좋아합니다. 귀만 간지럽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단한 식물입니다.
왜냐하면 단단한 말씀을 먹어야만 믿음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되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엡 3:18-19)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있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지 아십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분별력”(分別力)과 결부되는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가 영적으로 어린아이인가? 장성한 자인가는 분별력의 문제입니다. 또한 성화(聖化)도 분별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중요하고도 어려운 것이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고린도교회가 혼란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한 어린애와 같아 영적 분별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전 6:2-5)고 “판단”, 즉 분별력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성숙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지각, 연단, 분별”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등장합니다.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지각”(知覺)이 있어야만 합니다. 신앙이란 지․ 정․ 의적인 전 인격의 결정체입니다. 그 중에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행해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이것이 지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는 것이 끝이 아니라 “지각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사용(使用)하는 것, 즉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에서 새 언약은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 8:10)하신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가라 하셨다, 보여주셨다”는 등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음성이나 환상이나 꿈이나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신” 불변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지각을 사용하는 것일까요? 때마다 일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엡5:10)하는 것인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엡 4:30)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노라면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8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하고 16절에서는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소욕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도들은 지각(知覺)을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感情)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편입니다. 감정을 따라 행하게 되면 그 신앙이 조석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그토록 변하기를 잘하기 때문입니다.
㉡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는 “연단을 받아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연단”이란 “훈련(訓練)을 통해 단련”(鍛鍊)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주님을 기쁘시게”(엡5:10)하는 일로 생각하고 한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엡 4:30)한 시행착오를 범하게 되는데 이것이 “연단”인 것입니다.
㉢ 셋째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기 위해서는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라는 노하우는 연단을 통해서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시간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아야”(12)하고,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한 시간이 필요하고, “연단을 받아”(14)한 훈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흉년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빼앗길 번 하기도 하고, 하갈을 첩으로 얻기도 하고, 그랄로 내려가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잘못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75세에 부름을 받아 40년 정도의 연단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영적 성숙 자를 양성한다는 것은 힘들고 때로는 낙심이 되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중단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교리를 말씀한 후에 우리가 행해야 할 실천윤리의 첫 말씀을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말씀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신 “빛과 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가 있다고 말씀합니까?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한 분별력을 행사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시라도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사모한 바울은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후 13:8)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를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제목도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한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문제는 여러분의 문제만이 아니라 제 고민이기도 합니다. 제 첫째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 인생의 나이는 86세나 되고 신앙의 나이는 정년퇴임을 하고, 많은 책을 저술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아직도 어린애와 같습니다. 좌우를 분별하지를 못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종에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하는 것이 제가 매일 드리는 기도제목입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진 것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하여 영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자신은 장성한 자, 신령한 자인 양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나 있는 것입니다.
㉮ 믿은 연수는 오래되었으나 영적으로는 어린아이 상태인 자,
㉯ 나이는 많고 믿은 지도 오래되었으나 영적으로는 미숙한 자,
㉰ 그래서 직분이 주어졌으나 분별력이 없는 자,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게 되면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준행할 수가 없게 됩니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인이라는 좋은 정치체재입니다. 그런데 국민의 의식수준이 성숙하지 못하여 분별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민주주의는 중우(衆愚)주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의 공동회, 노회, 총회가 거룩한 성회가 되려면 구성원들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때만이 성회가 될 수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저는 이번에 성도들을 기독교 기본진리 위에 세워주기 위한 훈련교재로 “205”를 편찬했습니다. 먼저 펴낸 “505”가 구속사의 맥을 잡게 하는 연구(硏究)과정이라면 205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알고 믿어야 할 기본적(基本的)인 진리인 것이다.
205는 부피는 얇지만 기독교의 기본진리인 “하나님을 가르쳐 주셔요”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책임이 무엇입니까”에 이르기까지 조직신학적인 주제를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번 서울 세미나에서 소개를 하고 제 카페에 자료를 올릴 것입니다. 살펴보시고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성경은 먼저 목회자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하여 너의 성숙(成熟)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繼續)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救援)하리라”(딤전 4:15-16)고 명하십니다.
다음은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5:18)합니다. 가르치기를 계속하고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지름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463장)
첫댓글 아멘~~♡
목사님~~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