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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순 자서전
서문
아직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날처럼 새봄새싹 같은 마음인데 벌써 예순셋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사실 세상에 글을 남길 만큼 지혜로운 교훈이나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살아왔던 어린 시절은 부모님의 삶에 의해 정해졌기 때문에 청소년 시절부터 갖가지 시련들이 나를 짓눌러 가치 있는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는 지혜도 없었다.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지혜와 사랑, 보살핌과 인내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제 와서야 딸 지원이에게 많이 미안하다. 자녀들의 소중한 운명이 부모들에 의해 값지게 될 수도 있고, 슬픈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부모라는 말을 들을만한 부모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청년기에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끝에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또 그들을 존경한다.
때로 나는 우리어머니가 홀어머니셨으면... 할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나의 삶은 아버지로 인해 굴곡이 심했기 때문이다. 평탄한 삶이기를 늘 꿈꿔왔지만 나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은 ‘자서전’이라기 보다는 ‘한사람의 일상모음집’ 이라 칭하고 싶다.
그동안 주안장로교회 주안복지재단 애녹재에서 자상하게 지도해주신 박기남 선생님과 배성훈 사무국장님, 그리고 정성껏 편집 및 상담에 도움을 준 담당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부족한 삶의 이야기들을 책으로 출판하는 오늘이 있기까지 나의 삶을 함께 돌아봐 준 사랑하는 딸 지원이와 사위 정진이 그리고 남편에게 감사한다.
탄생
1953년 휴전협정 중인 그해 9월 17일.
나는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2구 390번지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날은 밝은 밤하늘에 초저녁별이 빛나던 가을이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고모, 삼촌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살림살이가 넉넉한 집 장남의 큰 손녀로 막내삼촌과 여섯 살 터울이었는데 내가 몸이 약해서인지 조부모님과 온 가족들은 내게 유난히 마음을 쏟으셨다. 나의 태몽은 맑은 옹달샘에서 예쁜 아기고기들이 노니는 꿈이었다고 하셨다.
예전에는 생일에 7자가 들어가면 잘 산다는 말이 있었는데 음력 구월 열이렛날이 내 생일이라 할머니께서는 천지에 오곡이 넘쳐 풍족하고 이렛날이니 ‘이루자 이루자 하며 잘 살거라’는 덕담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창평면 유천리에서 보냈다. 내 고향 창평은 5일마다 장이 섰고 창평엿과 한과, 장날의 국밥집, 극장도 있었다. 그리고 근동에 가장 길고 아름다운 메타세쿼이아 나무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가로수길이 있었다. 창평은 전남 담양군에서도 가장 큰 면단위이고, 지금은 슬로시티 둘레길과 예스러운 고가들, 돌담 위 기와담장 아래로 졸졸졸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어린시절
남동생이 세 살, 내가 일곱 살 즈음, 남동생은 빵모자와 나비넥타이, 조끼와 신사복을 입고 나는 색동저고리에 붉은 치마, 머리에 금박이 달린 조바위를 쓰고 찍은 사진이 지금도 희미하게 기억난다. 꽤 오랫동안 가족 앨범에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만 남고 사진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아버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예절을 중히 여기셨고 공부도 1등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를 엄히 대하셨다. 아버지가 외출하셨다 돌아오시면 모두들 무슨 책망을 들을까봐 겁을 먹었다. 하지만 옷이나 학용품, 영양제 등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꼼꼼히 챙겨주셨다.
3단 레이스가 달린 예쁜 꽃무늬 원피스에 귀여운 리본이 달린 분홍색 구두를 신고 갈색 가죽가방을 등에 메고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친구들이 예쁜 옷과 가방을 부러워했던 것 같다. 나도 속으로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우리 집은 시골이었지만 우체국 아저씨가 가장 많이 오는 집이었다. 서울동아제약에서 남동생과 나에게 ‘원기소’라는 영양제가 배달되었고 의류는 ‘서울만복상회’에서 배달되고 월간지 신문들이 왔다. 원기소도 맛있었고 우유가루, 붉은 엿(붉은 엿은 어른들이 망치로 금을 내고 잘라주셔야 먹을 수 있었다), 옥수수를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엿을 좋아한다.
남동생은 자신의 것이나 내 것이나 원기소를 한줌씩 들고나가 친구들에게 나눠주어 내가 화내고 울고 그랬던 것 같다. 짧은 시간들이었지만 그때는 동생도 나도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 철부지들이었으니 얼마나 행복했었을까.
외갓집 가는 길
어렴풋이 외갓집 가던 길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자주 어머니를 아프고 서럽게 하셨다. 그날 밤도 그랬다. 한밤중이었다. 아버지가 잠든 사이, 어머니는 나와 내 동생 손목을 잡고 밤새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달빛이 하얗게 신작로를 비치었다.
엄마 손을 잡았으니 우린 그 밤이 무서울 리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없는 평화롭고 안전한 외갓집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번갈아 업어주시며 걷고 또 걸었지만 우린 투정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창평 유천리와 고서 해평리는 십리는 족히 되는 길이었다. 엄마와 나, 동생은 새벽에 눈뜨면 집이 아닌 외갓집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말 우리는 그 새벽, 외갓집에 당도했다. 그때는 차도 없었다. 외갓집에 당도하자 버선발로 나오시는 외할머니 품에 우린 쓰러진 듯 안긴 채 정신을 잃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우리 모두는 외갓집의 평화로움에 젖어있었다. 전쟁 속에서 뛰쳐나온 듯 마음이 편안해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으리라. 이웃마을 창평에서 고서면 해평리까지 밤새 걸어 새벽에 도착했다. 외갓집 식구들은 모두 우릴 사랑해주셨다. 어머니와 같이 외갓집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며칠 동안 외갓집에 있었다. 외갓집에는 외숙모도 계시고 내가 참 좋아했던 외사촌 언니도 있고 성희, 용희, 남동생들도 있었다. 모두들 나를 좋아해주고 나도 언니와 동생들이 좋았다. 그러고 있노라면 아버지가 외갓집으로 오셨다. 아버지는 외조부모님 두 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뒤 잔칫집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고 우리 가족 모두 택시를 타고 다시 유천리 집으로 왔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 당시 군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시 같은 부대 내의 여군의관과 사랑에 빠져 있을 때였는데 할아버지께서 병환으로 위중하다는 전보소식에 집에 오시게 된 후 바로 어머니와 혼인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같은 담양군 고서면 해평리 마을에 사셨는데 당시 일본군이 위안부를 만들려고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에 외할아버지께서는 평소 친분이 있던 우리 할아버지와 술좌석에서 급히 사돈을 맺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모교 선생님과 결혼을 꿈꾸었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께서 선생님은 평생 가난하게 산다며 부농의 아들이 낫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할아버지 두 분이 서로 아들, 딸을 인연 맺어 주셨다.
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다시 부대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잘 생기시고 어머니도 청순하고 고우셨다. 넉넉한 집 막내딸로 부족함 없이 사시다 시집을 오셨는데 어머니는 허리도 한줌밖에 안되고 밥도 할 줄 모르는 애기가 시집온 것 같다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후 몇 년을 더 안살림을 할머니가 그대로 하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시집와서 며칠 만에 외로운 독수공방이 시작되었으나 조부모님께서 어머니를 딸처럼 아끼셨다고 어머니께 들었다. 일하시는 분들도 많아 육체적인 고생은 적었으나 마음의 서러움은 깊어 항상 슬픈 얼굴이셨다. 아버지가 오랜 기간 부재중일 때 한 줌도 안 되는 나를 낳고 쓰러진 엄마, 엄마의 젖도 먹지 못하고 할머니가 갖은 정성으로 만든 미음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그로부터 두해 지나서인가 내가 숨을 쉬지 않아 언덕 양지 바른 곳에 나를 묻으려고 강보에 쌓인 나를 안고 손을 모으며 기도하신 후 막 묻으려는데 내가 숨이 돌아와 다시 집에 데려왔다고 하셨다.
그 후에도 어머니가 젖이 돌지 않았던 까닭을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애를 끓여 그런 거라고 속이 타는데 어찌 젖이 돌겠냐. 순결한 처녀로 부족함 없이 열아홉 해를 부모, 형제와 평화로이 지내다가 할머니의 아들인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시집온 날부터 이미 다른 여자에게 마음 팔린 서방님이 야속하여 얼마나 간장을 태웠으면, 또 어머니 태중에 있는 아기인 나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으면 그랬겠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오죽하면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쓰러져 버리셨을까. 요즘 같으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할머니께서 미음을 쑤어 먹이며 나를 살리셨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제대 하셔서 오신 후 바로 나에게 건강하고 예쁜 여동생을 낳아주셨는데 당시 세살도 안 된 여동생에게 홍역이 찾아와 아버지께서 부재중이실 때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그 후 아버지께서 나와 내 동생의 꽃신을 사오셨으나 동생은 그 꽃신을 신어보지 못하여 아버지께서는 크게 우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 어머니께 들었다. 그리고 네 살터울인 남동생(철) 득락이가 태어났다.
육남매 모두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아무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관계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이 세상에 아빠 없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다. 누가 내 마음을 알까. 세상에는 아버지가 있어 불행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조부님들께서도 아들임에도 아버지를 두려워하신다. 집에만 들어오면 소리 지르며 무섭게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나도 동생들도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일 뿐 아무것도 의지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가난해도 좋으니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동생들과 평화롭게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버지는 밖에서 사회생활은 잘하시는 편이셨던 것 같다. 왜냐하면 군수님도 서장님도, 지서장님과 면장님, 교장선생님 모두 새로 부임해오시면 우리 집에 오시어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우리 집은 잔칫날 같았다. 일하시는 분들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집에는 마을 유지 부부님들이 오셔서 집안에 흥이 감돌았다. 이상했던 것은, 어머니는 그때도 자리에 끼지 않으셨다. 그때부터인지 더 이전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늘 다른 여성과 부부처럼 행동하셨던 것 같다. 또 어머니를 외갓집에 보내려고 모질게 대하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사랑과 보살핌 없는 아버지와 사는 동안 7명의 자녀를 낳았다. 딸 하나는 죽고 육남매 지금은 제각각 반듯하게 잘 살고 있다. 다만 어머니의 사무친 일생은 외로움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벌써 4년이 지났다. 지금도 가끔씩 내 곁에 어머니가 계신 듯하다. 어머니가 세상에 안 계실 거라는 것을 나는 늙도록 상상조차 못했다. 어머니가 안 계신 세상을 살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에게서 따로 분가를 했고, 어머니는 잘 지내시다가 요양병원에 가시게 되었다. 그 후 우리에게 이별연습을 시키시더니 끝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밥을 먹고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이렇게 살아간다. 이제야 어머니를 안아드리고 등을 토닥여 드리고 싶다.
“엄마 얼마나 슬프고 외로우셨어요. 자식을 여섯이나 낳고 남편이라는 이름을 지우려 애쓰시다가 한 많은 이 세상을 쓸쓸히 가신 어머니, 그래요 차라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막내딸로 사셨을 때가 어머니 일생 중 가장 편안하셨겠지요...”
입학식
1961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셨던 분들이 내게 다가와 하얀 수건을 바르고 정갈하게 핀으로 가슴에 달아주시며 참 예쁘구나 하시며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다. 그분이 당시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것 같았다. 왜 엄마는 안 오시고 아버지만 학교에 오셨는지 그때만 해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첫 딸인데 엄마도 고운 옷 입고 오시어 큰딸의 입학식을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초등학교 첫 번째 나의 담임 선생님은 최남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매우 단정하시고 엄격하셨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정하셨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학교에 가기 싫어 배가 아플 때가 많았다. 부모님은 여전히 자주 다투셨다. 늘 어머니가 아버지께 무례한 고통을 당하셨다. 난 어머니가 우릴 두고 떠나실 것만 같아 학교에 가도 공부가 안 되고 불안하여 자주 아파 조퇴를 하였다. 그 멀고 무서운 신작로 길을 혼자 걸어 집에 당도하여 어머니가 집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야 쓰러지듯 누워버릴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나를 많이 의지하셨다. 어디를 가시든 나의 손을 놓지 않으셨다.
공부 잘하는 딸이길 바랐지만 나는 늘 어떤 공상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엄마가 집을 떠나버릴 것만 같은 공상을. 나는 슬프고 우울했다. 왜 아버지는 착하고 고운 엄마를 모질게 대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일들이 잦았기 때문에 나는 늘 어머니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더욱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놀 수도 없었다. 조부모님 두 분은 부지런하셨던 까닭에 재산이 많은 부농이셨는데 아버지가 결혼하자마자 재정을 물려주고서 나중엔 아무런 권한도 없이 살아가신 조부모님 두 분이 너무 가엾으시다.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를 참 좋아했다. 여름에 마루에서 놀면 할아버지는 밭에 가셔서 수박이랑 참외도 따오셨다. 우리 집에는 아주 넓은 땅콩 밭이 있었다. 땅콩을 볶는 커다란 도라무통(일본말)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잘생기시고 동네에서 키도 제일 크신 멋쟁이에 유머도 많으시고 인정도 많으셨다. 꼭 영화배우 허 장강 아저씨처럼 항상 웃는 얼굴이시고 지혜로우셨다.
당시 매실주도 담아 벽장에 넣어두시고 한 잔씩 따라 드시면서 우리에게도 맛을 보여주셨다. 어느 날, 남동생과 나는 다락방으로 들어가 그 달콤새콤한 매실주를 마시고 그곳에 잠들어 버렸는데 온 동네에서 우릴 잃어버렸다고 지서에 신고하고 난리법석이었다고 했다. 끝내 할아버지가 우릴 찾았다고 했다. 그동안 아버지가 조부모님과 엄마를 탓 하느라고 온 집안이 상상을 초월한 전쟁터였다고 한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시재가시면 마을 분들이 웃어른이라고 좋은 음식만 챙겨주시어 하얀 한지에 싸오셔서 우리게 펼쳐주셨다. 할아버지는 90세 가까이 건강하게 장수하시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할머니께 시중을 받다 가셨으니 다행이다.
할머니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항상 할아버지가 즐기시는 술과 안주를 꼭 챙겨드리시고 늘 단정하시고 웃음이 많으셨다.
초등학교 때 같은 마을 명숙이, 형숙이와는 즐거운 시절, 슬픈 시절을 함께 나누었다. 여름이면 우리 집 마당에 널어둔 곡식을 할머니께서 자루에 담아주셨다. 우리는 함께 복숭아밭 원두막에 앉아 즐겁게 먹고 놀다가 다시 동네 개울 다리 밑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옷이 다 젖도록 물놀이를 했다. 학교 옆 읍내 사는 춘자, 영숙이도 있었다. 봄이 되면 할머니가 많이 그립다. 유천리 언덕에 올라 봄 하늘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쳐다보며 명숙, 영숙이와 나물바구니를 들고 나물을 캐러갔다. 나는 삐비(띠)만 잔뜩 뽑아 바구니에 넣어왔다. 삐비가 맛있기 때문이었다. 연한 삐비맛은 입안에서 단 향기가 나며 보드랍게 혀끝을 즐겁게 한다. 단물이 다 빠지고 나면 껌으로 변한다. 할머니는 나물은 없고 삐비만 가득 든 바구니를 보며 빙그레 웃으셨다. 지금 생각하니 할머니께서는 우릴 향해 거의 꾸짖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우리 육남매에게 수없이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 봄이면 콩을 삶아 단것을 넣어 주물럭주물럭 해서 우리에게 골고루 나눠주셨다. 간식으로는 최고였다.
지금도 난 그렇게 해먹는다. 수수팥떡도 부꾸미도 모두 그 안에 달콤한 주물러 으깬 팥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또 감자와 옥수수를 커다란 솥에 함께 찧어 솥뚜껑을 열면 지금도 말로 표현 못할 달콤한 고향의 향기가 난다. 할머니께서는 늘 부지런하셔서 새벽에 일어나 장독에 물을 떠놓고 아이고 천지 신명이시여하고 손을 모아 비비며 기도하셨다. 도시락을 깜박 잊고 안 가져가면 반드시 할머니가 도시락을 갖고 오셨고 비 오는 날은 우산도 할머니가 갖고 오셨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많이 좋아했던 분들은 조부모님들이셨다. 조부모님들께서는 우리를 가장 많이 아끼고 사랑해 주셨다. 우리가 가여웠을 것이다.
문 수환 선생님, 고 영우 선생님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문 수환 선생님이 음악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스와니강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제목이 선생님 성함과 비슷해 노래도 좋아했지만 선생님의 성함도 잊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와 음악이었다. 도덕도 좋아했다. 그런데 나는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때마다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러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이분이 아버지셨으면 좋겠다’하고 바랄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하셨다. 나는 돌아서면 집 걱정과 어머니의 나약함을 원망하고,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했다. 죽음을 자주 생각했고 여러 차례 시도도 했다. 수학여행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생님은 고영우 선생님이셨다. 아버지는 또다시 우릴 떠났고 어머니와 우리 육남매만 남아있을 때이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서울로 가게 되었다. 모교 선배 국회의원이 우리 후배들을 초청했다고 했다. 서울과 인천으로 여행을 하는 동안 다리가 아파 내가 함께하지 못하자 인솔자이신 고영우 선생님이 계속 나를 업고 다니셨다. 나는 육학년이어도 많이 마르고 작았다.
선생님께선 나를 업고 다니시며 빨간 게도 사주셨다. 그때 생전 처음으로 빨간 게를 먹어봤다. 인천 바다도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곳이 아마도 월미도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바닷가 근처에 살고 싶었다. 내 고향은 육지라 그런 것 구경할 기회도 없었으니 그랬던 것 같다. 이 지면을 통해 선생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 때 선생님 등은 참으로 따뜻하고 요람 같아 자꾸 졸았던 생각이 납니다. 지극히 고맙고, 감사합니다.”
종현이 삼촌
또 감사한 인물로는 종현이 삼촌이 떠오른다.
창평 극장 사장님이 종현이 삼촌이어서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극장에 새로 들어온 영화 프로그램 모두 접수했었다. 그래서인지 형로 삼촌이 나와 대화를 나눌 때면 꿈꾸는 소설가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재미있고 신선하다고 했다.
어머니의 가출
급기야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집을 나가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진주 하동 화계외삼촌댁(엄마의 오빠)으로 가계셨다고 했다. 나는 동생들도 가엾고 나도 가여웠다. 어머니가 집 나가신 것을 아시고 창평 극장 사장인 삼촌이 오셔서 나를 달래어 방으로 들어가게 하시고는 아버지와 한참 얘기하다가셨다. 나는 부모님 두 분의 안 좋은 기운이 감도는 듯 하면 극장 삼촌이 우리 집에 오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했다. 어머니가 안 계시는 동안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나를 반기며 웃으시는 모습을 그리워했다.
엄마는 포플린천의 꽃무늬 저고리에 검정 긴 치마를 입고 엄마 일을 돕는 아줌마들과 함께 일하시다가 내가 도착하면 길고 하얀 앞치마에 손을 닦은 후 반가이 내 가방을 받아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시고 나를 안아 주셨는데 그런 어머니가 안계시니 나 또한 집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조부모님과 동생들 다섯 명의 가엾은 상황이 눈에 밟히는데 나만 집을 나갈 수 없었다. 또 중학교에 가야하니까 나갈 수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아버지가 다시 집을 오래 비우셔서 집안은 잠시 평화로웠다.
중학교 시절
초등학교 졸업 후 병약하여 1년을 쉬고 읍내 중학교를 갔다.
고모님이 광주사시고 우리를 몹시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공부를 잘했으면 광주 중학교로 갔을 텐데 난 공부가 딸려 읍내중학교에 갔다.
동생들과 부모님은 읍내로 이사를 가고 난 조부모님 두 분과 함께 시골에 살았다. 아버지가 두 분 조부모님을 위해 배려한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아버지를 몹시 미워하는 것을 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조부모님 두 분과 함께 살던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당시에 맥가이버이셨다. 못하는 일이 없으셨다. 일 하시면서도 우리와 장난도 쳐주시고 항상 여유로움이 있으셨다. 그런 할아버지도 아버지 앞에서는 어머니나 우리가 해를 당할까봐 아무말씀 안 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한없이 존경하고 사랑하셨다. 보면 안다. 조부모님께서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늘 두 분은 웃는 얼굴이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씩 우리 남편에게서도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어 좋았다.
나는 읍내로 학교를 다녔다. 학교 갔다 돌아와 할머니가 안계시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지고 교복을 입은 채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꽃밭 칭이)밭으로 향했다. 아마 늦은 가을이었으리라. 논둑밭둑 길을 지나는데 수수밭이 내 키보다 더 늘씬늘씬 자라 나를 숨겨버린다. 수수밭 사이 황금빛 노을이 물든 가을 들판은 지금 생각해도 장관이었다. 한참 그 노을빛에 취하여 걸어가다 보면 옛날부터 처녀귀신이 나온다는 뚬벙(연못)을 지나야 한다. 무서움이 온몸을 조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할머니를 부르는데 목소리도 나지 않고 그렇게 간신히 할머니께 다다르면 아직도 호미를 손에 쥐신 작고 동그란 할머니가 부지런히 밭일을 하시는데 나는 그저 마음이 급해 할머니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나는 중학생인데도 성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부모님께서는 자자 일촌인 동네에서 제일 웃어른이라 이곳저곳에서 좋은 음식을 해오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조부모님께는 나 혼자만 있었기 때문에 더욱 나를 애지중지 하셨다. 외출후 돌아오시면 빈손으로 오신 적이 없으셨다.
아버지가 국회의원 비서관을 하신다고 부지런히 서울을 왕래 하시면서 조부모님 가산을 모두 탕진하시는 바람에 조부모님은 또 다시 산을 개간해 삼 농사를 지으셨다. 삼을 삶아 껍질을 벗기고 그 껍질을 실처럼 가늘게 조각내어 할머니 허벅지에 대고 그 가는 삼줄을 또 쪼갠 뒤 다음 실에 연결한 뒤 물인가 침이든가 발라 비벼대면 실이 단단히 연결되어 길어진다. 할머니 허벅지는 붉게 되어 많이 아프고 쓰라리셨을 것 같았다. 그렇게 꾸준히 하고 다시 물레에 실고리를 끼고 물레를 돌리면 실 꾸러미가 두툼하게 된다. 그 다음에 전주댁이랑 또 몇몇 분들이 마당에 길게 삼실을 질기게 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풀을 쓰고 화로에 숯불 피우던 정경들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어찌나 정갈하고 부지런 하시던지 여름 내내 할아버지께 풀이 빳빳한 하얀 모시옷을 입혀드리고 할머니도 같이 입으셨다. 읍내 장에 가실 땐 부잣집 양반마님 모습이셨다. 나도 따라갈 때가 더러 있었다. 할머니는 외출할 땐 모시옷, 집에서 일하실 땐 삼베옷을 풀을 빳빳이 다려 입으시고 활동 하시던 기억이 난다.
독풀
한번은 당시 새마을 운동퇴비증산으로 우리 집에 일하시는 분들이 산에서 풀을 뜯어와 마당에 산처럼 쌓아두었다. 유월 초쯤일 것 같다. 그러다 풀숲 사이로 찔레꽃대가 보였다. 내 눈엔 그래보였다. 할머니가 봄이 되면 칡순이랑 찔레꽃대를 끊어 껍질을 벗긴 후 입에 넣어주셨는데 향도 맛도 달았다. 그때의 맛을 생각하며 나는 그 풀을 동생에게 주고 나도 먹었다. 아뿔싸 그건 칡순이 아니라 독풀이었다. 동생과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집안이 난리가 났다고 했다. 병원에서 입원치료 후 살아났다. 지금도 들이나 산에 가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움
내가 1학년, 그는 3학년 때 일이다. 그는 우리 옆집 친척 오빠인데 우리 사는 곳보다 더 깊은 시골에서 누나 집으로 와 중학교를 다닌다고 들었다. 곱상한 얼굴이 지금의 지현우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그 오빠가 내 앞으로 걸어갔다. 그 때는 초록 보리밭이 참 많았다.
오빠는 내가 뒤에 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갔고 가끔 휘파람도 불었다. 오빠는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앞서지 않았다. 그 뒤를 따라 걸으면 묘하게 기분이 든든하고 좋았다. 왜냐면 그때는 보리밭에서 문둥이가 나 같은 빼빼하고 작은 여자아이들을 잡아먹는다고 소문이나 혼자 기나긴 신작로 길을 걷기에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한 학기를 나는 늘 오빠의 등을 보며 그렇게 보냈다. 우린 먼 친척이어서 속으로 좋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가끔씩 마주치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때로는 마주쳤으면 할 때도 있었다. 그때는 보리밭 노래도 그 집 앞 노래도 어찌 그리 시절에 맞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오빠는 고등학교를 서울로 갔다고 들었다. 그 후, 몇 년이 흘러 오빠는 서울 은행 명동지점에서 근무했다. 나도 그때 대연각 빌딩 호남정유에 출근할 때라 두서너 번 만났다.
아이스크림 일본 집
우리학교 태권도 강당에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막내 작은아버지가 태권도 사범으로 부임해 오셨다. 초등학교 다닐 때도 삼촌이 육학년을 두 번 다니는 바람에 나의 바람막이로 든든했었다. 초등학교 때 작은아버지는 아이들의 고무줄을 끊어다가 우리 교실에 던져주기도 했다. 속으로 난 즐겼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셔서 조부모님은 시골집에 계시고 난 일 년 정도 시골집에서 살다가 읍내 집으로 합류했다. 우리 집은 아이스크림과 제과, 엿 등 고물장사 사업을 크게 했다.
읍내 집은 일본식 집이었다. 그 집에는 붉은 벽돌을 높이 쌓은 굴뚝이 있고 우람한 목조대문과 건물 방 한 칸에는 아버지가 서재를 만들어 100권이 넘을 만큼 많은 책들이 있었다. 저녁마다 아버지께서 일찍 자라고 할 때면 군용모포를 방문에 가리고 새벽이 되도록 책을 읽다가 학교는 지각하기 일쑤였다. 그때 나는 많은 책을 읽어 평생 글 쓰는 일이 취미생활이 되고 말았다.
집 뒤에는 늘 산처럼 고물이 쌓여 있었다. 광주에서 큰 차가 와서 고물을 실어가고 아버지는 그때 많은 돈을 버신 것으로 안다. 아버지는 부지런하신 편이었다. 우리 육남매 중 둘째 남동생이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깔끔함을 많이 닮은 것 같다. 아버지는 영화배우처럼 의복도 고급으로 멋지게 입으시고 잘생기셨다. 꽃도 좋아하시고 화단에 조경도 아름답게 꾸미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손에 흙을 묻힐 것 같지 않은 분이지만 그런 것엔 소탈하셨다. 다만 어머니와 감정이 데면데면 하니 우리 육남매들과도 관계가 부드럽지는 못했다.
당시 우리 집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스크림과 엿, 액세서리 등을 팔았고 가게 안에서는 우유, 빵 등을 팔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제주에서 육지로 온 대학생 처녀가 우리 집 빵가게에 들어와 오갈 곳이 없다고 아버지께 일을 부탁했는데 마침 대학생이라고 하니 나와 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집에 들였다. 우릴 위해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정신을 쏟더니 아버지는 또 바람처럼 집을 나가셔버렸다. 때마침 해병대 작은아버지가 휴가 나오셔서 막내 작은 아버지와 함께 가게를 운영했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그 잘나가는 사업을 내팽개치고 또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서울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었고 공부도 하기 싫었다. 당시는 시험을 안보고 갈 수 있는 전수고등학교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험에서 떨어지고 서울 전수상업고등학교에 갔다. 거긴 실력 없이도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는 곳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창순언니와 같이 지내라고 했다. 창순언니와는 서로 아끼며 힘들지 않게 함께 생활했다. 언니는 나를 도와주며 수편물 기계 일을 했다. 나는 언니와 한동안 평화로이 살았다. 그러다가 언니는 시집을 가야한다고 고향으로 갔고 이어서 어머니는 동생들을 할머니께 맡기고 나 때문에 서울로 오셨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있어 너무나 행복했다. 잠시 내가 무남독녀 외동딸처럼 호강했다. 그러나 고향에 두고 온 조부모님과 다섯명의 동생들이 눈에 밟혔다. 어머니 지인분의 소개로 호남정유에 입사했다. 월급도 좋고 사원들의 후생복리가 잘되어있었다. 점심 티켓과 초록원피스 유니폼에 금강 가죽샌들이 나왔다. 당시는 유니폼이 유행이었다. 가끔씩 주유소에 가보면 주유를 하는 여직원들도 붉은 유니폼을 입었고 마치 승무원 복장 같았다. 나는 매일 광화문, 명동, 충무로, 퇴계로를 활보하고 다녔다.
인숙이
서울정란여자 상업학교 다니던 인숙이가 보고 싶다. 인숙이는 혼자 자취하면서 낮에는 직장에,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가끔씩 자신의 집에 가보자 해서 가면 조그만 아주 작은방에는 부엌도 따로 없었는데 석유 난로에 냄비밥과 꽁치조림을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어왔다.
나는 키가 작고 왜소한 편이지만 당시 인숙이는 페티김 같은 체형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내 손으로 밥을 해보거나 음식을 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가 요리한 꽁치조림 맛은 지금도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그 후 인숙이가 더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인숙이와 친구들과 송추계곡에 놀러가 찍은 사진들도 몇 장 있다.
금숙이
친구들이 정말 보고 싶다. 내가 호남정유 다닐 때였는데 금숙이는 바로 옆 대한생명 빌딩에서 아주 예쁘고 멋진 스튜어디스처럼 유니폼을 입고 엘리베이터를 운행했다. 매번 점심때마다 들리다보니 눈인사를 하다가 나중엔 친해져서 퇴근시간이면 만나곤 했다. 눈이 어찌나 크고 선하고 예쁜 모습인지 여자인 나도 반할정도였다. 그때부터 우린 매일 밤 만나 저녁을 먹고 맥주도 한잔했다. 인숙이는 남자 친구가 이미 있었다. 나도 있었다. 한양공고 축구부 3학년 김성수라고 나이는 나보다 한살위인데 학교를 좀 늦게 갔다고 했다. 고향은 보성으로 알고 있다. 꽤 많이 나를 아꼈으나 플라토닉으로 끝났다.
나는 당시 식사를 제때하지 않은 관계로 위경련을 자주 앓았다. 그러다 대연각에 불이 났다. 그곳엔 우리 회사 호남정유가 있는 곳이었다. 그 여파는 아니지만 건강 상 회사를 쉬고 나는 잠시 조부모님 그리고 동생들이 있는 고향으로 갔다.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서울에 있던 친구들은 얼마다 황망했을지.
금숙이는 남자친구와 내가 사는 고향에 왔다갔다. 성수는 기나긴 편지를 써 인편에 보내어 내가 받았다. “보고 싶다. 친구들아!”
아버지 빼고는 모두 사랑하고 애틋한, 내가 보호하고 살펴야할 사랑하는 가족들이다.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동생들 모두 나만 바라보았다. 바라보지 않았어도 나는 안다. 내가 늘 주어야만 할 가족들이라는 것을.
미국
우리가 집을 비운사이 그동안 아버지는 돈이 되는 집과 농토, 명작그림과 고가의 액자 등 모두 팔아 내 초등학교 동창인 미경이 엄마와 미국으로 가버렸다. 왜냐면 미경이가 미국인과 결혼해서 미국에 사는데 제 엄마를 초청 후 또 우리 아버지를 초청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미국에 가시고 싶어 하셨다. 할머니와 동생들만 남기고 가버린 아버지.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껏 산 것은 책임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가버려서 시원섭섭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를 본 후 그때부터 나는 ‘비비안 리’였다. 그리고 나의 연인은 ‘크라크 케이블’이였다.
나는 비비안 리처럼 첫 째 언니였다. 아버지가 팔아치운 집들과 땅과 농토들을 되찾기로 각오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을 믿으며...
어머니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21살 때쯤 이었나보다. 해는 서산에 지고 바람에 날리는 오동잎하며 중국영화 스잔나 노래가 생각났다.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함께 본 영화는 ‘나타샤’였다.
나는 어머니가 외국영화를 그처럼 잘 이해하실 줄 몰랐다. 나와 함께 본 영화 중 가장 잊지 못할 감동의 영화였다고 살아생전이실 때 자주 얘기하셨다. 지금도 나는 깊어가는 가을, 해질 무렵 붉은 노을빛을 뒤로하고 노을빛 같은 감빛의 니트 가디건을 입고 진흙길을 걸어가는 아름다운 나타샤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 뒤에 나의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서계시는 듯하다.
어머니는 나의 친구, 나는 엄마의 친구였다.
미선이
의상실 친구 미선이는 대구에서 이사왔다. 경상도 말씨가 그렇게 부드럽고 매력 있을까.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였다. 역시 미선이도 미스코리아 감 이었다. 피부도 뽀얗고 몸매는 늘씬하고 자주 함께 목욕을 갔다. 의상실을 운영하니 패션스타일은 광주에서 최고 같았다. 광주에 내로라하는 최고의 의상 패션디자이너들 중 가장 세련된 몸매를 가졌고 늘 멋진 의상을 입었었다. 흠이라면 경제관념이 빵점이었다. 미선이는 마치 자신이 내 남자 친구인 것처럼 무조건 여행비도 밥값도 영화비도 모두 자기가 냈다.
우리 젊은 날, 난 미선이에게 질투도 많았다. 미선이는 친구도 많고 나는 미선이 외엔 친구가 없었다. 나는 본래 두문불출 형인데 늘 미선이가 나를 불러 마지못해 나가서 미선이와 함께 했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미선이는 내게 아낌없이 마음을 주었던 친구였다. 보고 싶다 미선아. 사실 내 형제들보다 더 나를 좋아해주던 친구였다. 한 살 위인데도 우린 친구로 지냈다.
미선이가 많이 보고 싶다. 어느 날 미선이가 둘째 딸 은정이의 대학 등록금을 빌려 달래서 고심 끝에 빌려주었다. 그 뒤로 우린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바뀌게 되었고 내가 광주를 떠나 인천으로 이사 오면서 미선이와 나는 지금껏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말하고 싶다. 미선아 넌 그 돈 안 갚아도 된다. 어쩜 처음 빌려줄 때부터 나는 너에게 못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그리고 지금은 내가 너에게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부디 어느 곳에서든지 건강하고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교훈
아끼는 사람일수록 금전관계를 갖지 마라. 친구도 잃고 돈도 잃는다.
두 번째 교훈도 여동생의 오랜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이자를 받아 생활비로 쓰라는 동생의 권유가 있어 나의 재산 전부인 일시납 연금을 해약하여 빌려줬는데, 그리도 친절하던 동생의 친구는 강남에서 내로라하는 식당을 하는데도 갚을 생각이 없는 건지 여전히 형편이 어려워 종업원들 월급주기도 버겁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 돈을 못 받으니 가끔 만나도 데면데면하다.
두 번째 교훈도 이와 같다.
오늘은 내가 살게
동생친구에게 빌려준 돈으로 땅을 사두었더라면 지금쯤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동생들과 어머니께, 딸 지원이에게 돈을 쉽게 쓰지 못한 게 안타깝다. 꼭 돈을 떼이고 잃은 것만은 아니다. 또 얻은 게 있다.
지금은 그때보다 어렵지만 오히려 내가 써야할 때 망설이지 않는다.
돈을 먼저 쓸 방법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먼저 입으로 말한다. 오늘은 내가 살게. 그처럼 멋진 말을 나는 돈을 잃은 후 배웠다. 오늘은 내가 살게.
밥이든 커피든 오늘은 내가 살게. 꽁꽁 싸두었다가 도둑맞고 연금 털어 고액이자 받겠다고 빌려주고 돈 잃고 친구 잃을 바엔 내가 쓰자. 형편이 되거든 오늘은 내가 살게 말해버리자.
신앙
미선이 옆 가게는 송죽회 꽃꽂이가게가 있었다. 나는 미선이 가게에 들렀다가 꽃꽂이를 배우러 다니게 되었다. 꽃꽂이 중급 자격증까지 땄다. 그때는 배우는 게 많았다. 배운다기보다 배우러가서 친구들도 만나니 즐거웠던 것 같다. 당시 방림동 성당에 다니셨던 수녀님도 우리와 함께 꽃꽂이를 배우셨다. 그해 겨울 수녀님께서 12월 24일 전야의 성전을 꾸미려 하신다고 도움을 청하셨다.
나는 그때부터 성당을 다니기 시작해서 교리공부를 하고 수녀님께서 권해주신 에스텔이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그때는 에스텔이 누구인지 성경을 제대로 모를 때였다. 수녀님께서는 우리 집에 오셔서 기도도 해주시고 그랬는데 어느 날 다른 성당으로 가신다고 들었다. 이스라엘을 구한 에스텔 황후, 나도 그렇게 훌륭한 여인이 되고 싶었다. 당시 방림동 김홍언 신부님은 지금은 많이 유명해지셨다. 그 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 딸 지원이가 살레시오 여고 입학당시 살레시오 여고 운동장에서 김신부님을 우연히 만났는데 곧 아프리카 파견봉사 가신다고 하셨다. 체구도 아담하시고 참 고우신 분이었는데 아프리카는 잘 다녀오셨는지 지금은 어디 계신지 궁금하다.
그 수녀님을 통해 하느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된 일에 지금도 감사하며 살고 있다.
임신
임신 7개월째인데 배가 부르지 않아 사람들이 잘 모른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 무슨 꿈들로 살아갈까.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아빠 없는 아기를 낳으려고 한다. 아기 아빠는 돈이 많은 한의사였다. 일찍 중국에 가서 침술공부도 해오고 인근에서는 꽤 유명한 한의원 한의사였다. 하지만 이승에서 나와의 인연은 빨리 끝났다. 성당에서 신부님께 고백성사 받았다. 아기는 하느님의 자녀이니 엄마는 몸을 잘 보살펴 꼭 순산하라고 말씀해주셨다. 본래 47kg였는데 50kg 조금 넘었다. 아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건강하고 예쁘고 착하고 지혜로운 그런 아기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많아졌다. 주위에서는 아빠 없는 아기를 왜 낳느냐고 하지만 나는 아기를 갖고서야 비로소 내 인생의 소중함을 알았고 수많은 꿈과 희망 용기가 생겼다. 나를 다시 살고 싶게 하고 일어서게 해준 우리 아기에게 감사하며 아기와 나를 잘 보살필 것이다. 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이제 아기를 가졌으니 마음을 너그러이 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만 하며 살고 싶다.
모임에서 간 담양 수북연수원 이박 삼일여행 중 아침 일찍 일어나 야영장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냇가에 커다란 바윗돌들과 그 틈사이로 골짜기에 흐르는 맑고 차가운 물소리, 야영장 안에 소박한 초가집들은 마치 내 고향 창평 유천리 같다. 아가야 너도 엄마랑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지. 고개 들어 하늘과 산등성이를 본다. 뿌연 연무가 모락모락 산으로 하늘로 오른다. 날씨는 맑음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 속에서 비로소 혼자가 아닌 내 아기와 나 둘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은 뜨거워지고 마음은 흥부의 박이 갈라지는 느낌처럼 부유해진다.
주님, 당신께서 주신 이 새로운 생명에게 부디 축복을 내리시어 건강한 아기를 순산하게 하옵시고, 착하고 어여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은혜 내려주소서. 따뜻한 마음씨로 풍족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 제 아기, 당신의 자녀, 이 귀한 생명에게 다윗과 같은 담대함과 솔로몬의 지혜를 주시어 주님을 사랑하고 본받는 마음으로 한생을 평화롭게 살게 하소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이오니 당신의 자녀인 아기를 위해 좋은 엄마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좋은 엄마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항상 하느님을 경배하며 늘 소중하고 귀한 아기 잘 보살필 터이오니 귀하고 사랑스런 아기 허락해주소서. 엎드려 비옵니다.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비오니,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12월 첫 날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을 보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 쌓였다. 배가 부르니 엎드리기도 누워있기도 힘들었다. 워낙 내가 허약한 체질이라 어떻게 아이를 키우겠느냐고 모두들 걱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기 낳으면 내가 키울 것이라고 했다. 아무에게도 맡기고 싶지 않았다. 내 아기에게는 일찍부터 하느님을 알게 하고 사랑하고 의지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할 것이다. 내 아기의 일생은 순탄하게 하느님의 축복을 온몸에 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 주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나의 삶도 정직하고 올바른 삶으로 더욱 노력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수많은 밤들이 지나가고 어둠이 지나가고, 날이 가고, 낮이 가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나는 때로 귀 기울였다. 갖가지 소리에 행여 누가 올까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 “하늘의 밝은 별에 올리는 나의 기도를 하느님 들어주소서.” 날마다 조금씩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기도하였다. 나는 한동안 방림동 성당으로 버스타고 다녔는데 두암동 우리 집 부근에 성당이 생겼다. 임시 천막으로 건축헌금도, 벽돌도 한 장씩 나르기도 하며 광주 두암동 성당이 완성된 후 태중에 있는 내 아기와 어머니 셋이서 함께 꾸준히 성당에 다녔다.
어머니는 정성어린 보살핌과 좋은 음식, 먹고 싶은 것 다 챙겨주시고 오히려 나보다 더 아기를 기다리시며 임신한 열 달을 한결같이 나와 함께 동행 하시고, 나와 아기를 지켜주셨다. 어머니는 자신이 일곱 명의 아이를 낳을 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낳아 기르셨다며 이제 내 아기를 마치 어머니가 임신하여 낳을 것처럼 아빠가 없음에도 단 한 번도 원망 없이 나의 아기 태어날 날만을 기도와 기쁨으로 기다려주셨다.
‘최지원’의 탄생
1988년 1월 25일 오후 5시 아기가 태어난 장소는 지금은 없어진 진산부인과였다. 조촐하지만 깨끗하였고, 독방에 나와 내아기를 함께 뉘어주고 미역국도 아주 맛있게 끓여주었다. 참기름을 넣어 어머니랑 함께 드시라고 매끼 넉넉하고 맛있게 차려주셨다. 해산 후 산후조리가 끝나고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될 것 같다고 2.2kg 체중 미달이라며 나의 의중을 물었다. 얼마나 기다린 아기인데 병원에 둘 수 없었다. 내가 집에 가서 인큐베이터처럼 집안을 꾸며 잘 보살필 테니 그냥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하였다. 광주시 북구 두암동 574-1번지 집에 왔는데 아기가 잘 울지 않았다.
옆집 아줌마가 이 집은 아기를 낳았다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안 나느냐고 물었다. 며칠 후 산부인과에 예약한 날 아기를 데리고 갔더니 아기가 황달기가 있다고 이비인후과를 소개해주었다. 이비인후과에서는 아기가 심장이 안 좋은 것 같다고 광주 조대병원으로 소견서를 써주시며 가보라고 했다.
심실 중격결손증
다음 날 조대병원에서 아기가 ‘심실 중격결손증’이라고 했다. 심장에 구멍이 나서 성장이 더디다는 것이었다. 구멍으로 피가 흘러버린다고. 나는 그날부터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지원이 엄마로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시작 하려는데, 내 아기 지원이를 살려야한다는 일말의 희망뿐이었다.
마침 어머니가 내 곁에 계시고 동생들도 곁에 있어 위로가 되었다. 아기가 아플 때마다 엄마와 나는 한줌도 안 되게 가벼운 아기를 안고 택시를 타고 정신없이 병원 다녀오기를 반복하였다. 수개월이 흐른 후, 아기가 앉아 이것저것 만지고 놀다가 엄마와 내가 이불바느질을 하는데 잠시 눈 떼는 순간 아기가 또 숨이 멎는 것 같아 아기를 안고 어머니와 함께 벌벌 떨며 택시를 부르는데 그냥 지나갔다.
예수님
집을 나와 차를 기다리는데 빨강 승용차가 우리 앞에 서더니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주며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어서 타라고 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숨이 넘어간 아이를 살릴 의사선생님이 전대병원에도, 조대병원에도 없었다. 나중엔 기독병원으로 갔다. 천사가 보내준 듯 의사선생님이 이층에서 내려오셔서 거즈 수건을 도톰히 개어 물에 적신 후 가만히 짜서 접은 뒤 아기 입술에 올리고서는 의사선생님 입술로 아기에게 힘껏 숨을 넣었다 빨았다 했더니 아이가 숨을 토해내며 살아났다. 아 그날 그 시간 아기는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눈물을 감추었다.
우리를 태워주신 빨강 승용차 그 분이 병원비도 내주셨다. 하도 급한 나머지 지갑도 안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집으로 오는 길에 누구시냐 여쭈었더니 경신여고 수학선생님이라고 알려주셨다. 집에 내려주시면서 위급할 때 또 전화 하라고 하셨다. 그분 명함을 십년 넘게 갖고 있었다. 그분도 운암동 어느 교회 집사님이셨다. 지금도 그분이 빨간 차로 빨간불을 켜고 달려와 광주시내를 다 돌며 아기의 생명을 구해주신 예수님이라고 생각이 든다. 다시 다음날 조대병원을 찾았다.
심장재단
나는 우연히 벽보에 새세대 심장재단에서 심장병 아기들을 무료로 수술해 주는 서류준비의 내용을 읽게 되었고, 메모 후 그날 밤 나는 한달음에 편지를 썼다. 밤이 지나기를, 새벽이 오기를,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가 편지봉투를 들고 우체국에 가서 등기를 보낼 때까지 하느님 부디 이편지가 헛되지 않게 동행해주소서 아멘. 하고 기도하였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 후에도 아기는 여전히 자주 까무러쳤다, 깨어났다 하는데 깨어날 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르르 까르르 잘도 웃고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할머니, 엄마 두 사람에게 사랑을 나눠주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이렇게 예쁜 우리 아기 지원이가, 우리 딸 지원이가 죽는다면 나는 바로 따라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어머니마저도 그러실 것 같았다. 나보다 더 손녀딸 지원이를 애지중지 하셨으니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지원이는 성장이 더디었다. 심실방에서 다른 곳으로 피가 새어나간다는 것이었다. 조대 병원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산소통을 쓰고 있었다. 아기가 많이 칭얼댈 때면 나도 같이 산소통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기를 10여 개월 후 새세대 심장재단에서 심사가 끝났다며 수술비 전액을 100% 무료로 해주겠다는 화답을 받았다. 나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서류에는 수술날짜가 적혀있었다. 서울 인재대학 백병원 이듬해 1989년2월13일로 적혀 있었다. 당시 광주 두암동 성당을 다녔었다. 난 에스텔, 엄마는 아네스. 아기 지원이를 임신했을 때도 새벽마다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지원이를 안고, 업고 새벽마다 성당에 갔었다.
두암동 성당
신부님은 나 미카엘신부님이셨다. 신부님의 어린조카도 고국에서 심장병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셨다. 당시 나미카엘 신부님은 광주에서 서울 백병원까지 오셔서 지원이의 건강 상태를 보시고 다시 광주로 돌아가셨다. 그 후 아기 이불속에서 신문지로 싼 지폐를 보고 놀랍고 고마웠다. 당시 신부님의 사비로 주셨음을 나중에 광주 성당으로 돌아와 알게 되었다. 또한 광주 북 구청 최 석중 부청장님께서 두암성당 빈체시오 단장님이셨다. 빈첸시오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카톨릭 단체이다.
그 외 모든 단체에서도 우리 지원이 수술성공을 위해 기도해 주셨다.
어떤 택시기사님은 아무 때고 우리가 긴급할 때 부르면 언제든지 오겠다고 약속하신분도 계셨었다.
광주조대병원
지금 말하지만 당시 조대병원 임 진수 선생님, 간호사 김현희씨는 잊을 수 없는 은인들이셨다. 아기가 일 년이 넘도록 그때까지 생명을 연장해온 것은 이 두 분의 사랑과 정성 없이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두 분의 간절한 치료와 간호, 보살핌으로 드디어 서울로 가게 되었다. 당시 아기는 생후 13개월인데도 5kg도 안되었다. 본래10kg이 넘어야 수술 들어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서울 중구 백병원
89년 2월에 서울 백병원에 도착했다. 지원이의 담당주치의는 구본일 선생님이셨다. 어쩐지 믿음직스럽고 훌륭해 보이셨다. 그런데 지원이가 합병증을 다섯 가지나 앓고 있는데다 체중도 많이 미달이어서 고심이라고 했다. 폐동맥 고혈압, 그리고 감기, 천식, 기타 그래서 그 치료들이 모두 끝나야만 심장수술을 들어갈 수 있으나 99% 중 1%의 가능을 믿고 수술에 임할 것에 사인이 필요하다 하셨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사인을 했다. 흉부외과라 그런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조용하였다. 어머니와 나는 긴 기다림 끝에 지원이를 안고 입원실에 들어갔다.
미영이
바로 옆 침대에는 중학교1학년 소녀 미영이가 지원이처럼 심장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해 있었다. 미영 엄마는 목동교회 다니신다고 하셨다. 미영이도 미영엄마도 금세 지원이와 친해졌다. 지원이는 늘 잘 웃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원이를 너무나 예뻐하였다. 나중에 퇴원 후에도 광주 집으로 몇 통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우리가 이사를 자주 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목동에 살았던 미영 엄마와 미영이가 정말 보고 싶다. 틈틈이 어머니와 나를 쉬라하시고 지원이를 많이 예뻐해 주시고 사랑해주셨다. 그분들의 따뜻한 사랑 없이는 2월,3월,4월의 그 긴 겨울 병원생활을 어찌 보냈을까. 또 지원이 또래 현빈 이라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둘이서 찍은 사진도 있다. 얼마나 둘 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지원이는 여러 날을 거쳐 합병증을 치료하고 다음날 10시로 수술 예약을 했다.
명동성당
그 전날 나와 어머니는 백병원 바로 옆 명동성당을 찾았다. 명동성당에서 중년 정도이신 신부님께 지원이의 사연을 전하고 유아 세례를 부탁드렸다. 신부님께서는 지원이에게 ‘산디아’라는 이름을 주시고, 아기 혈액형이 무어냐 물으시더니, 그날 밤 미사시간 후에 A형 혈액형을 가진 젊고 건강한 청년들은 오늘밤 또는 내일 오전 여덟시까지 백병원에 가서 헌혈을 부탁한다고 하셨다고 들었다. 생후 13개월 된 여자아기 산디아가 수술 들어가게 되었다고 전해들은 젊은 청년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그 날 또 다음 날 오전 일찍 백병원에 많은 젊은 청년들이 기도와 헌혈을 하고 갔다고 들었다. 명동 성당에서 노래하던 청년 박준, 토마스 웨딩샵에 근무하던 순덕 데례사님 항상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장 수술
그 외에 많은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의사 선생님이 우리 딸 지원이에게 가장 맑고 건강한 피로 수술을 들어갈 것이라고 내게 알려주셨다. 그 때부터 영락 교회와 명동 성당 신자 분들이 여러 팀으로 나누어져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져갔다. 아기의 수술은 4시간이 넘어서야 끝났는데 바로 만날 수 없다고 하여 중환자 대기실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수술은 잘 되었으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이틀 후 쯤 오전에 아기를 보러 들어갔더니 아기는 여러 가지 호스 줄이 이마와 입안에, 양쪽 가슴, 양쪽 배 아래쪽 해서 열 몇 줄 연결되어 있었다. 또 아기 몸보다 더 큰 얼음덩이 위에다 아기를 올려놓아 아기가 푸른 얼음덩이 같았다. 담당 의사가 아기가 스스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고 이 기계가 피를 갈아주며 숨을 쉬게 하는 거라고 했다. 그래도 수술 성공했으니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린다고 하루에 두 차례씩 엄마와 나는 교대하며 아기를 보았다.
미영엄마
그러기를 며칠, 한날은 미영엄마가 지원이 면회시간에 나도 한번 가보면 안 되느냐고 하셨다. 지원이가 너무 보고 싶다하시기에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웠다.
당시 미영이는 수술대기 중이었다. 미영엄마는 지원이를 보고 오셔서는 넋이 나가신듯 숨을 고르시더니 한참 진정을 하시다가 말씀 하셨다. 우리 지원이는 깨끗이 나을 거라고, 이 병원 수술환자들 중 그 누구보다도 깨끗이 건강해 질것이라고 위로해주셨다. 왜냐면 미영이 엄마가 지원이 면회를 하기 위해 중환자실 커튼을 열고 들어가셔서 커튼을 닫고 막 기도를 시작하셨는데, 미영이 엄마 등 뒤에서 붉고 뜨거운 불이 세차게 밀며 들어와 지원이에게 그 불길이 가는 바람에 미영엄마가 지원이에게 넘어질 뻔 하셨다고 했다. 너무나 놀래어 숨을 고른 뒤 나오셨다며 내게 말씀해주셨다. 지원이는 틀림없는 하느님의 딸이라 하셨다. 그때 나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고 가톨릭이나 교회나 구분을 안 할 때였다. 교인이나 가톨릭신자도 다 같은 신앙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미영이나 지원이나 심장수술을 성공해야하는 기도가 같기 때문이리라 미영엄마 말을 듣고 나니 한결 안심이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경희
지원이가 심장 수술 후에도 광주에서 서울을 한 달에 한 번씩 오갔다. 계속 수술 후 경과를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동생 경희가 서울 구로에 살아 늘 그곳에 들려 하루 이틀 밤씩 머물러 지내다 올 때도 있었다. 경희는 동생 중에 가장 마음이 의젓하다. 좀처럼 누구와 부딪혀 다투는 일도 없다.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오기처럼 살아오면서 내겐 참 든든한 동생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우리 경희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는데 끝까지 가르치지 못해 정말 미안해 그리고 항상 고맙다 사랑한다.
동생들
지원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동생들도 하나둘 짝을 만나 떠나고 두 남동생과 막내는 춘은 대학 공부를 하려고 서울로 갔다. 이제 딸과 나, 어머니, 셋이 남았다. 우리 세 사람은 무척 행복하게 지냈다. 가끔씩 동생들 일 아니면 어머니와 나, 지원이는 내가 쉬는 날이면 휘휘 돌아다녔다. 우린 대중교통도 잘 이용했고, 외로울 것 없이 살았다. 지원이는 서울 백병원도 처음에는 한 달에 한번 갔는데 시간이 흐른 후 3개월, 6개월, 1년에 한번 이렇게 늦춰졌다가 아예 가지 않아도 될 만큼 건강해졌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흉터도 미세해서 아무도 모를 만큼 결과가 좋았다.
어머니와 분가
어머니가 영광에서 친구 분과 단출하게 지내고 싶다 하셔서 우린 분가를 하게 되었다. 한동안 어머니가 안 계셔서 허전했다. 지원이를 데리고 내가 일부러 도시 아파트를 전세주고 시골집과 텃밭, 논까지 있는 것을 구입하여 들어갔다. 딸에게 시골의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딸이 지금 서른 살인데 지금도 엄마의 선택 중 가장 좋은 선택이었고 자신은 그곳에서 가장 행복했노라고 말하곤 한다.
수북초교 당시 무용부를 하면서 학예회 때 우리 딸 지원이는 무대 위만 올라가면 당당하고 행복해하였다. 어쩜 대사도 술술 잘 외우는지 그때부터 예능인 자질이 보였다. 시골집에서 학교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 동네 이장님, 반장님, 아저씨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을 태우고 가시면서 지원이도 꼭 태워다 주시곤 했다.
어머니와 지원이
두 사람은 궁합이 딱딱 맞아 어찌 그리 서로 사랑하는지 곁에 있으면서도 애달프다. 주말마다 나는 지원이를 데리고 어머니가 계신 영광에 놀러 갔다. 그럼 어머니는 저만치 먼데서부터 “지원아” 하고 달려오셨다. 지금도 그 모습이 너무 선하다. 얼마나 손녀딸을 어여뻐 하시던지 육남매 전체 손자손녀 13명중 오직 지원이만을 귀여워하셔서 남동생 운이는 아예 ‘지원이 할머니’ ‘누나 엄마’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가 계시는 영광백수로 놀러가거나 또 어머니가 광주로 오셔서 한참씩 계시다 가시고는 했다. 나는 지원이를 데리고 담양수북 시골로 이사를 왔다.
지원이는 초등학교를 시골에서 다니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원이가 서먹서먹해 하더니 친구들도 잘 사귀고 집으로도 많이 데리고 왔다. 우리 집이 학교에서 꽤 먼 거리인데 아이들이 우리 집까지 와주어 나는 딸의 친구들이 딸처럼 몹시 사랑스러웠다.
딸이 초등 6학년 때 다시 도시로 전학을 왔다. 딸은 아이들과 잘 어울렸었는데, 내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중학교 졸업식에 가주지 못했다. 그때도 어머니와 경란이가 지원이와 함께 졸업식 사진도 찍고 자장면도 사먹었다고 했다.
경란이
이름만 불러도 요즘은 가슴이 아프다.
경란이는 나에게 특별한 동생이다. 젊은 날은 거의 매일 서로 지지고 볶으며 추억을 많이 쌓으며 살았다.
우리는 셋
지원이와 나, 엄마 이렇게 셋이 병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공교롭게 어머니도 허리 때문에 입원하시고, 나는 교통사고로 입원하게 되어 우리 딸 지원이는 같은 병원에 입원한 나와 할머니를 왔다 갔다 하며 보살폈다. 내 머리도 감겨주고 발도 씻어주고 병원 방바닥에 흘린 물도 다 닦아주면서 열심히 간호하다가 철재계단 사이로 새끼발가락이 들어가 이젠 지원이마저 깁스를 하게 되었다. 우리 삼대모녀는 그래도 행복해 웃고 다녔다.
지원이는 목발을 하고 충장로를 다니면서 옥수수를 먹고 아이쇼핑하는 것을 좋아했고 어머니와 나는 옷 사는 것을 좋아했다. 딸은 충장로만 나가면 충장서림, 삼복서점 등이 있었는데 “나 이 책사 줘” 그럴 때가 많았다. 어쩌다 한 번씩 책을 사줄 때는 너무나 좋아했었다. 함께 시내 쇼핑하러 나가도 그새 내손을 놓고는 저만치 서점으로 달려간다. 서점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엄마와 할머니가 쇼핑을 한 후 집에 가자하면 끝까지 못 읽은 책을 몹시 아쉬워했었다.
난 지원이에게 공주처럼 예쁘고 귀여운 스타일의 옷을 권하는데 지원이는 편안한 바지와 헐렁헐렁 한 티셔츠를 좋아한다. 4학년쯤 되더니 아예 자신의 옷은 스스로 사 입겠다고 하여 나는 지원이에게 공주처럼 옷 입히는 것을 포기했다. 지원이는 돈가스보다는 생선가스를 좋아했고 어머니와 나는 돈가스와 옥수수를 좋아했다. 우리 셋은 광주 유생촌 돈가스를 일주일에 한 번씩은 먹었다. 우리 세 사람은 회도 잘 먹었다. 광주에는 회보다 세꼬시가 더 맛있었다. 스끼다시도 엄청 많이 나왔다. 지원이는 내 덕에 이사를 많이 했다. 나는 한 집에서 이년을 살지 못했다. 자꾸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을 좋아했었다.
지원이가 태어나자마자 아프기 시작하여 15-16세가 되도록 나의 마음을 붙잡은 채 정신없이 나의 젊은 날도 함께 흘러갔다.
나의 젊은 날들이 15년 눈 깜짝할 사이 가버렸다.
지원이는 광주 살레시오 인문계여고와 서울이나 인천의 명문 여고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조건이었다.
애당초 지원이는 서울의 여고로 전학을 시키고 싶었다. 그때 혜화여고, 덕성여고 주위에 집이 없었다. 매매 아니면 월세뿐이었다. 그때 춘근이에게 돈을 받아보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받지 못했다. 대출받아 집 살생각도 못했다. 그저 전세만을 생각하다가 결국엔 인천으로까지 오게 되어 명신여고로 갔다. 지원이는 연극영화, 뮤지컬을 공부하는 게 꿈이었다. 결국 학원은 서울 여의도로 다녔다. 명신여고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만 다니는 곳이라는 소문을 들어선지 지원이는 학교보다 학원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찌어찌 명신여고를 졸업하고 우린 이사를 했다 지원이가 대학을 서울에 있는 서울 예술학교에 갔기 때문에 맹자 엄마처럼 이사를 했다.
이사
서울 안의 시골 구로 항동으로 이사를 했다. 오랜 시간 기도를 했다. 우리가 찾는 집을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찾았다. 이사도 참 많이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사를 즐기는 편이다. 늘 낯선 곳,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정들여놓은 사람들과 헤어져야 할 때 그 마음도, 내 마음도 많이 아프게 했다. 이제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자 우리 희망대로 서울안의 시골이다, 산과 항동 저수지, 물과 나무가 많은 곳이니 이젠 이사하지 말고 아예 내 집으로 만들어야지. 그런 집과 동네를 만났으니 오래오래 살기로 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창밖으로 나무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창문 넘어 숲이 우거져있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긴 하나 가끔 자동차들이 조용히 지나다녔다. 집 앞으로는 서울수목원 마당이 정갈하다. 뒤로는 그린빌라가 있었다. 이태리의 소도시 같은 풍경이었고, 정말 속세를 떠나온 느낌이었다. 이사 올 때 많은 짐들을 버리고 왔는데도 아직도 산처럼 쌓여있다. 나의 욕심 때문에 자리를 찾지 못한 짐들, 어디에 두어야 알맞을지 모를, 버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짐들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듯하다. 주인님 저를 버리실 건가요? 나의 욕심 때문에 버리지 못 할 거라는 것도 몇날 며칠에 걸려 이삿짐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마다 '주인님, 다시 머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것 같았다. 아 이사 그만해야지. 이 집을 남편과 둘이서 예쁜 도배지를 사와 둘이서 도배를 했기 때문에 더욱 정이 깊은 집이었다.
딸도 콘서트 준비한다고 바빠 내 품속으로 들어와 자고 어느새 아침 되면 얼굴 마주할 시간도 없이 가버리고 없다.
그럼에도 오히려 외롭지도 쓸쓸치도 않았다. 그저 오랜 방황의 삶을 접고 드디어 살고 싶은 곳에서 안주하며 평화의 자유를 누리듯 몇 달을 걸쳐 발품과 마음을 모아 꼭 살고 싶은 곳으로 이사를 와 살게 되서 너무 기쁘다. 빌라 옆 작은 터에 딸과 함께 저수지 부근에서 틈날 때마다 흙을 담아와 조그맣게 텃밭을 만들었다. 또 장에 가서 호박모종과 가지 고추모를 사다가 심었다. 호박이 주렁주렁 열어 옆집, 아랫집, 윗집 나눠주느라 바빴다. 내가 좋아하는 호박잎과 가지, 고추 그 모든 것들을 통해 농부의 고생과 기쁨까지 헤아리게 하였다. 이 모든 것 하느님께 한없이 감사드리며 살 무렵 우리에게 또 이사할 상황이 왔다.
어느 날 미사 가야할 시간에 지인들이 횟집에 앉아있었다. 길가는 나를 보고는 마구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성당을 가다말고 자리를 함께했으나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여 좌불안석일 때 ‘엄마 무서워 빨리 집에 와봐 집안에 누가 있는 것 같아 열쇠로 문을 열었는데 문이 안 열려’ 라고 딸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했다.
지원이에게 "지원아, 빨리 집 앞에서 나와 지금 걸어갈게. 엄마 있는 쪽으로 와. 엄마도 가고 있으니." 라고 말했다.
딸과 둘이 만나 집 앞에 당도했는데 여전히 문이 안 열렸다. 나는 이웃들에게 우리집 안에 도둑이 있는 것 같다고 하고 열쇠 집에도 전화하고 119에도 전화했다.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집에 도둑이 들고나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 처음 알았다. 경찰도 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이불장 서랍장 액세서리 함도 엎어져 있었다.
잃어버린 것은 돈 봉투와 지원이와 나의 18k반지, 그이와 내 18k묵주반지, 신기하게도 금과 18k만 쏙쏙 챙겨가고 나머지 액세서리는 흩어져 있었다. 두 분 경찰들은 도둑의 지문을 사진 찍고 꼭 찾을 수 있게 한다더니 그 길로 끝이었고 우린 그 집에서 하루도 더 못살겠기에 또 이사를 했다. 마음이 급한데 서울엔 집이 없었다. 결국 당시 청라에 좋은 아파트 빈집이 많아 우린 아무계획도 없이 청라 제일 풍경채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거의 삼년을 살면서 서울과 부평에 텃밭 있는 주택을 알아보았다. 지금은 산곡동 원적산 꼭대기 텃밭 있는 집에서 3년 넘게 살고 있다. 이사를 많이 다니는 동안 욕심도 비우고 버리는 습관도 갖게 되었다.
결국 대출받아 주택을 샀다. 매월 원금과 이자가 월세와 똑같으나 내 집이어서 좋았다.
그래도 청라에서 못 버리고 끌고 온 것들, 지금은 계속 누굴 주거나 버릴게 없는지 찾고 또 찾으며 살고 있다. 지금은 금은보석도 없다. 현금도 없다. 갚아야할 대출금과 이자 통장뿐 우리 집에 또 도둑이 들어오면 가져갈게 없어 허탕 칠 것이다. 쌀은 있다. 하지만 다시는 도둑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도둑은 귀신보다 더 무섭다. 도둑은 온전한 사람의 정신도 쏙 빼놓는다. 도둑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
#교훈
1. 기도하러 가다가 그보다 나쁜 장소로 발길 옮기지 마라.
2. 누구든지 집안에 문이 닫혀있을 땐 멀리 물러서서 112에 전화하라.
감사
그때 그만하기가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집안에 도둑이 문을 열고 우리를 끌어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예수님, 그때 그날 저희를 보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떨립니다.”
우리 딸 지원이는 광주 두암동 문화 유치원을 시작으로 세종대 연극영화교육학과 대학원을 졸업 후 작은 아동 가정연구소 근무. 그리고 2017년 8월 26일 결혼 후 곧바로 임신하여 지금은 입덧이 심해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 아기 태명은 '푸름'이란다. 제 아빠가 푸른 숲에서 아기를 만난 꿈을 꾸었다고.
나의 딸 지원이
나의 딸의 지원이의 이름은 ‘지혜로울지(智)’ ‘예쁠 원(媛)’ 지원이다.
우리 딸 태몽은 새벽에 동녘 해가 나에게 빠른 속도로 덮치는 꿈이었다.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는데 예전에 미영엄마가 지원이 중환자실에 방문했을 때 느꼈다는 것과 거의 흡사한 내용이어서 우리 딸 지원이가 분명 하느님의 자녀이고 이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내 육십 여생 수많은 일들이 스쳐가고 또 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다행히도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고 소소한 일상이지만 감사하다.
딸 지원이를 낳고 기르면서 천날 만날 학교에서 반, 병원에서 반, 그 반, 세월 보낸 내 딸이 사위 정진이를 만나고부터 급속도로 건강도 좋아지고 병원에 갈 일이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건강한 아내로, 건강한 산모로 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니 그보다 더 감사할 일이 없다. 딸이 2년여 연애하는 동안 내가 가끔씩 말했다. "지원아 정진이가 너의 보약인가보다. 정진이 만나고 아프단 말을 안 하니 말이다." 하고 웃었다. 오랜 시간 지켜보았는데도 어찌 서로 그리 좋은지 늘 잔잔히 행복한 향기가 감도는듯하다.
지원이는 시집을 가더니 집에 잘 안 온다. 나는 그 이유도 안다. 나의 부모님이 다투는 때보다는 덜 하지만 남편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나는 그 술로 인해 고초를 겪다가 딸 지원이의 권유로 주안장로교회 중보팀 교육 후, 끊임없이 남편 술을 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술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툼이 있는 친정에 지원이가 오기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또 우리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딸이 많이 보고 싶어서 전보다 더 많이 참고 참아 요즘 부부 싸움은 70%이상 줄어들었다. 남편에게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야 지원이, 정진이가 행복해 한다고 했더니, 남편도 예전보다 말투도 부드럽고 술 마시는 횟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나 또한 예전 할머니가 할아버지께 했듯이 남편이 워낙 좋아하는 술이니 집에서 조금씩 먹을 때는 안주도 챙겨주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
아이들이 신혼여행간지 사흘째 되는 날 쓴 편지
삼십년을 함께 살아온 딸 지원이가 시집을 간다기에 처음에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하루 이틀 시집가는 시간이 가까이 오니 마음이 시무룩해졌다가 서러워졌다가 반복했다. 게다가 딸이 시부모님께서 잘해주시고 자신을 많이 예뻐하시며 신랑의 남동생도 너무 착해서 좋다고 했다. 그럼 나는 딸을 많이 사랑 안 했을까하는 후회스런 마음이 들었었다. 어째 난 쓸쓸 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더 하겠지. 어제는 옷 정리를 하다말고 딸의 옷을 하나둘씩 개다 문득 지금은 이정도이지만 점점 더 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리에서 신혼여행 중인 신랑과 둘이서 스피커폰으로 하루하루 행복하고 재미있다고 사진도 계속 찍어 보내며 사진작가님은 진정진, 글은 최지원 하며 자랑이다. 그런데 나는 딸을 붙잡는 마음이 남아있는지 가슴이 울컥 하며 눈물이 주루룩 쏟아진다. 태어나자마자 삼십년 세월을 함께한 나의 분신인 딸인데 어쩜 신랑도, 시댁 양부모님과 시동생까지도 서로들 아끼고 사랑하는지 내 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댁 딸이었던 것 같다. 2년의 교제기간 중에도 엄마, 아빠인 우리보다 시어머니 시아버지께서 친부모님처럼 자상하시고 세심하게 챙겨주심을 봐 온 터라 유구무언이다. 섭섭함도 참아야 한다. 금이야 옥이야 싸안고 길렀는데 엄마의 보따리를 풀고 예쁜 파랑새 되어 새로운 사랑의 신랑의 둥지로 날아가 안주했으니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한다. 아이들은 신혼집을 서구 쪽에 차렸다. 계약할 때 한번보고, 침대와 가구를 들일 때 또 한 번, 가구 조립할 때 한번해서 딱 세 번 가보았다.
처음 마음에 들었던 집은 성당 옆이어서 쉽게 찾겠다 싶었는데 다시 이번 새로운 빌라택지란다. 딸, 사위가 신혼여행 중일 때 살짝 한번 가보고 싶다. 살림은 어찌 정리 해두었는지 냉장고에는 무슨 반찬이 있는지 신혼여행 지에서 오기 전에 청소 해놓고 정리도 해주고 싶은데 주소도 모르고 갈 때마다 아이들 차로 가서 어디인지도 잘 모른다. 안다고 해도 비밀번호를 모른다. 내가 그럴 것을 알기에 안 가르쳐 준단다.
서운하면서도 한편 나는 어땠는지 돌아보니 나는 육십 살까지 어머니와 같이 살다시피 했었다. 오히려 어머니가 내 곁에 안 계실 때 허전하고 서러웠는데 딸은 나와 반대인가보다. 그래서 아마도 축복받은 좋은 운명이 펼쳐지려나 보다. 딸에게 목 메인 마음을 삼키며 거실에 있는 남편을 불러 "여보 지원이가 보고 싶어 자꾸 눈물이 난다." 했더니 방으로 들어와 묵직한 손으로 등을 다독여주며 이제 내가 잘해줄게라고 한다.
그래 딸아 사위아들 정진아 시집장가를 갔으니 이제 어른들이 되었구나.
이제 그 어떤 모진 비바람에도 서로 꼭 붙들고 안아주며 행복하게 살아라. 늘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안에서 평탄한 일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엄마가 너희 위해 할 수 있는 건 밤낮 없는 기도뿐임을 깨닫는다.
사랑해 지원아, 사랑해 내 사위이고 아들인 정진아.
부디 둘이서 서로 위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라.
2017년 8월 30일 엄마가.
작은 아버지
나와는 띠 동갑 이셨던 나의 작은아버지가 벌써 76세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예닐곱 살 때 작은아버지는 고등학생쯤 되었으리라. 작은 아버지는 로마의 휴일에서 볼 수 있는 그레고리펙처럼 아주 미남이시다. 특별히 유머가 가득하셔서 항상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시고 축구와 달리기도 잘 하셨다. 작은 아버지를 위한 노래가 전남 담양군 체육대회 때마다 마을곳곳에 울렸다. 작은아버지 머리 뒤가 짱구라고 해서 붙은 별명이 '내문이'이었다. "앞뒤 꼭지 내문이 왔다 갔다 삼천리" 라는 노래도 있었다. 작은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해병대 하사관으로 입대하셨다. 늘 웃음이 가득한 게 하회탈 같았다. 그리고 해병대 모자와 군복을 입으시고 우리 앞에 시원한 웃음으로 나타나시면 흡사 맥아더 장군모습 같았다. 작은 아버지는 아들 셋 중 둘째이시다. 우리 아버지와 막내 삼촌 중간이 작은 아버지신데 내 기억으로는 셋 중 가장 효자셨다. 작은 아버지가 휴가 오셨을 때는 막내 삼촌과 잠시 가업을 이어가시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부요함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부모님께는 항상 자랑스러운 최고의 아들 작은 아버지셨다. 내가 중학교 때 작은 아버지가 월남에 가셔서 청룡부대 귀신 잡는 해병으로 국가에서 무공훈장 받으신 모습을 우리 아버지가 신문스크랩해서 자랑스럽게 간직해 놓으신 것을 보았다. 작은 아버지는 평생 군인이셨고 항상 씩씩하고 웃는 얼굴이셨다. 우리 여섯 명의 조카들에게 늘 한없이 다정하셨다.
어느 날 작은아버지는 나와 함께 산책을 하셨는데 "메리 메리" 하고 우리집개의 이름을 부르시더니 메리에게 공을 보여주시고는 힘껏 저수지에 공을 던지셨다. 메리에게 저수지를 향해 손짓을 하시니 용감한 메리가 그 깊은 저수지 물위로 날쌔게 달려가 유연하게 헤엄쳐 공을 입에 물고 나와 몸에 물을 후르르 털었던 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그러면 작은아버지는 메리를 안고 쓰다듬어 주시며 "야 뽀삐"(내 별명) 하시며 “잘 봤지? 우리 메리는 이렇게 똑똑하고 훌륭하단다.” 하고 설명하신 것 같다. 그렇게 젊었던 작은 아버지께서 몇 해 전부터 통풍으로 보훈병원에 계시고 아무런 낙이 없는 듯 쓸쓸해 보이셔서 가슴이 아팠다. 나는 인천에 살고 작은 아버지 내외분은 양주에 사신다. 몇 번이고 찾아뵈려 했지만 그리 못했다. 어렵게 이번에 찾아뵈었는데 작은 아버지는 작은 엄마와 깔끔하고 넓은 거실이 있는 쾌적하고 좋은 주거환경에서 잘 지내고 계셨다. 다만 혼자계시면 월남전 당시 여러 가지 환청이 들려 못 견디어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은 엄마가 24시간 곁에 계셔야하고 보훈병원 통원치료도 버거워하셨다. 그 후로 잠깐 작은아빠, 엄마께서 우리 집에 다녀가시기도 했다. 우리 집은 지대가 높은 곳이어서 그날 집에 오시느라 힘드셨던 것 같다. 나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또 오시면 나랑 여기저기 다니셨으면 좋겠다. 우리 작은 엄마도 참 곱고 예쁘셨다. 지금도 여전히 고우시고 목소리도 예쁘시다.
작은 아버지께서 그토록 힘이 없어지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기력이 많이 쇠하셔서 보기 안타까워 가슴이 쿵쿵 아팠다. 이것이 혈육의 정이라고 느낀다. 작은 어머니께서도 작은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이번에도 나와 함께 목이 메이시는 듯 했다. 마음속으로 우리 세 사람은 울었다. 월남을 가지 않으셨더라면 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당시 우리 집은 아버지의 경제관이 서툴러서 모든 가산을 탕진할 무렵이었고 작은 아버지께서 조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해병대를 지원하여 입대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목숨 걸어 다녀오셨는데 나는 작은아버지께 드릴 게 없다. 그저 행복하고 잘사는 모습 보여드리고 가끔씩 찾아뵈려고 생각하고 있다.
전쟁은 참으로 무섭고 엄청난 재앙과 수많은 사람들의 고귀한 인생을 짓밟는다. 다시는 이 땅에 어떤 이유로도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전쟁 없는 지구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작은 어머니의 해맑은 웃음이 초가을 빛에 얼마나 고우신지 앞으로도 두 분 모두 많이 웃으시고 마음의 평화를 가지셔서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 나는 오늘도 기도해본다.
물건
물건을 찾다가 오랫동안 쓰지 않은 물건들이 여기저기서 활동도 없이 숨만 쉬는 것을 본다. 어제도 집에 있는 1950-60년대 사전들 문학전집을 한차례 끌어내어 버렸는데 또 버릴 게 숨어있다. 언제까지 버릴 것 못 버리고 붙잡고 있을 것인지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아직도 버릴 물건은 많은데…….’
7월의 끝
어느새 7월의 끝자락에서 서성거리며 성하의 여름에 얼굴이 붉게 익었다. 깊어가고 익어갈 여름을 기대하며 예순의 나이까지 꺼이꺼이 올라갔는데 산 중턱인가 하였더니 이미 꼭대기이다. 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나온 사연들이 숲처럼 뒤엉켜 내려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돌아서 갈 수 없다는 것, 내려갈 수 없다는 것, 내가 다시 젊어지고 어려지고 아이가 될 수 없다는 것, 육십 넘어 깨달음 하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술이 과한 남편에게 그리 앙탈부리지 말 것을, 하나뿐인 딸에게 사랑하고 사랑만 할 것을, 올라온 길 내려다보니 나 어느 골짜기를 타고 올라왔는지 예순이 넘어서야 별 것도 아닌 것을 것 별 것 인양 난리였음을, 이제야 내 마음에 비움이 얼마나 자유인가를 내 나이 예순 넘어야 알게 되었다.
커피
커피만 마시면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새 커피 중독인가, 가는 곳마다 무료 자판기 커피가 나를 유혹한다. 외출하면 누가 커피를 권한다. 거절을 못한다. 그럼 딱 한잔만 마실까 장소를 옮겨 국민은행에 갔다. 국민은행 커피는 맛있다. 번호표 들고 기다리는 동안 난 또 커피를 뽑았다. 삼백원 했으면 아니 이백원 했으면 아니 백원이라도 조금 전 먹었으니 나는 나에게 먹지말자 했겠지.
내일 성당 행사 있는 날인데 한복을 예쁘게 입고 안내하기로 한 날인데 아 나는 결국 한잠도 못자고 얼마나 피곤한지 눈꺼풀까지 떨리는데 오전 봉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겨우 끝냈다.
저 커피 두 잔으로 밤을 꼬박 새우며 예순에 알맞지 않은 경거망동의 행위, 아직도 말이나 행동에 자제 못하는 일에 깊이 부끄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나이다. 하루아침에 어른스러움과 성숙함을 가지려고 고심하고 있는 나에게 난 피식 웃는다. 모두에게 마음에 드는 내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지 하고...
분실
서류봉투를 분실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집까지 잘 와서 몇 시간 흘러 저녁까지 먹고 난 후 이제 서류 좀 검토할까 하고보니 서류 봉투가 없다. 요즘 나에게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해서 놀랍지도 않은데 남편이 몰아친다. 큰일 났다며 정신을 어따 팔고 다니는 거냐고 호통이었다. 다행히 돈 봉투 서류는 아니고 내 글 모음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더듬어갔다. 틀림없이 어느 곳에 있을 거라고 집을 나섰다. 먼저 가장 유력한 장소를 생각해서 114로 번호를 물었다. 한의원이다.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발바닥이 시려서 한의원에 들려 발바닥에 침을 맞고 난 후 롯데마트에 들르고 핸드폰가게에 들려서 마지막으로 은행 일까지 보고 집으로 왔기 때문이다. 전화할 곳은 한의원뿐이었다. 마침서류가 있다고 한다. 더 놀라게 화내는 남편이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걱정을 줄여주려고 전화했다. "여보 서류 한의원에 있대요." 한 해, 한 해가 아니라 하루, 하루에도 몇 번씩 무언가 분실한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면 좀 덜 하겠지. 오늘도 정신 줄을 꽉 잡고 있는데도 정신 줄이 분실되니 그게 문제다.
아반테 29마 5733, 세상 떠나던 날
딸 지원이가 2010년쯤 사랑하는 아반테를 만나 몇 년을 친구처럼 끌고 다니더니 지난 2014년10월25일 새벽 미아리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을 했다고 지원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반테와 택시가 부딪쳐 사고가 났다는 청천벽력의 전화를 받았다. 전날 밤 소품준비로 미아리 동생에게 들려 함께 현장으로 가야해서 새벽에 집을 나선다고 하였다. 평소 지원이가 집을 나설 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안아주고 기도하고 뽀뽀까지 해주어야 내가 안심이었다. 딸은 늦는다고 방방 뛸 때도 나는 기어이 기도를 해주었다. 지원이 말이 그날 새벽은 엄마가 곤히 잠들어 가만히 나갔다고 했다. 나도 딸이 제 방에서 자는 줄 알았는데 새벽 전화벨소리에 놀래고 말았다. 의외로 지원이의전화 목소리는 침착했다. "엄마 여기 미아리인데, 나 사고 났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어마어마한 파도에 부딪쳐 놀란 가슴이 되었다. 지원이는 이어서 "엄마 나는 다친데 없고 옆 좌석 동생은 이마를 약간 다쳐서 가까운 병원에 입원해 있어, 나는 지금 미아리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나왔어 그런데 아반테는 폐차시켜야 한대." 그때서야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보험회사 직원이 곁에 있다기에 바꿔달라고 하였다. 보험사 직원에게 찌그러진 차를 견인하고 미아리에서 인천까지 와달라고 부탁했다. 지원이에게는 다친 데 없으니 눈 감고 마음 편히 옆 좌석에서 자라고 했다. 보험사 직원에게도 간절히 부탁하였다. 지원이는 무사히 왔다. 아반테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져 있었다. 아 그런데 지원이는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었다. 나는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반테는 사, 나흘을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마을 주차장에 머물다가 폐차장으로 떠났다. 아반테는 제 몸을 다 찌그러뜨리면서 주님의 딸 지원이를 보호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을 겪고 나서 우리는 매일 아침기도가 얼마나 소중한가하고 느꼈다. 우리 모두는 그날, 그날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늘 마지막 날이라 준비하고 최대한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날마다 지상의 재해는 여기서 저기서 펑펑 터지니 오늘 하루도 기쁘게 살아야겠다.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새벽 지원이가 미아리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보살펴주셨음을 저는 압니다. 감사드립니다. 택시 기사님도, 지원이도, 지원이 동생 노랑이도 모두 무사히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원의 교통사고로 수고하신 보험직원 분들과 경찰관님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그 분들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축복 내려주소서. 주말 행복한 시간 보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복이
아파트에 살다 주택으로 이사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아주 어린 강아지가 아장 아장 집으로 들어와 마치 제 집을 찾아오듯 왔다며 딸 지원이와 남편은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다. 길 잃은 아기 강아지가 집에 들어와 줄곧 아빠를 따라다닌다며 "여보 내가 움직일 때마다 강아지가 나만 따라다녀" 라며 말 속에 웃음이 가득하다. 지원이가 강아지 사진을 보냈는데 몹시 귀여웠다. 두 사람은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내가 어렸을 때도 강아지를 여러 마리 기르던 추억이 생각난다. 뽀삐, 메리, 해피, 복실이도 있었다. 모두 마당에서 키웠다. 메리는 아주 영리한 진돗개였다. 당시 해병대 작은 아버지께서 공을 저수지 물속에 던지면 잽싸게 헤엄쳐가서 공을 물고나오는 것을 어린 눈으로 보며 나는 행복했었다. 해피는 참으로 사랑스러웠는데 어느 날 학교 다녀오니 할머니께서 해피가 갑자기 죽어 뒷마당에 묻었다 하셨다. 그때부터 강아지를 집에서 기르는 것이 두려웠다. 지원이는 오래 전부터 집안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다. 나는 이다음에 마당 있는 집에서 살면 기르라 했었다. 딸도 남편도 강아지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으나 오랫동안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강아지를 키우지 못했다. 마침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온 데다 길 잃은 강아지가 집에 들어왔으니 부녀는 흥분 할 일이었다. 강아지 주인은 오랫동안, 아니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랑 살았는지 궁금했으나, 딸과 남편은 주인 잃은 강아지이고 아무도 찾으러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네 분들도 함께 모여 있었는데 서로 키울 생각은 없으신지 복덩이 들어왔다 생각하고 우리더러 기르라 하였다. 우린 결국 강아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강아지의 이름도 지었다. 엄마, 아빠, 언니, 집까지 생겼으니 복이 많다 하여 ‘복이’로 이름을 지었다. 지원이와 함께 인근 애완견 용품매장에 가서 필요한 것들과 먹이를 준비했고 옆집 애완견 전문가님이 예방주사도 놔주었다. 지원이와 남편은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강아지의 새 용품으로 양치를 시키고 빗으로 털을 빗고 몸을 씻기고 야단이었다. 깨끗하게 씻긴 후 지원이는 복이를 큰 타올에 감싸 안고 거실에 서서 “엄마 나 복이랑 자도 돼?” 하고 묻는 모습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몹시 행복해 보였다.
복이는 우리 집에 온 첫날부터 지원언니 침대에서 호강하며 잤다. 아침에 복이가 쉬를 해서 침대 커버랑 모두 벗겨 세탁했고, 복이는 한동안 거실을 활보하며 재롱과 귀여운 짓에 우리는 매일 행복했었다. 지원이는 복이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정성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원이가 학업과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외출이 잦아지고 귀가가 늦어지면서 복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지원이가 자라는 만큼 복이 또한 무럭무럭 자라 거실에서 앞마당으로 새로 이주를 했다.
옆집에서 근사한 집도 한 채 주어 복이 삶은 넉넉했다. 시간 나면 엄마 아빠 언니랑 셋이서 집 뒤 원적산 공원도 산책 하였다. 복이는 날이 갈수록 쑥쑥 자라 거처를 앞마당 에서 뒤뜰로 옮겼다. 가끔씩 줄을 풀어 주면 거실 앞에 앉아 두발로 방충망을 득득 긁으며 옛날이 생각난 듯 집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몸부림을 쳤다. 복이 눈빛이 애처로웠다.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듯 떼를 쓰면 가슴이 미어질 듯하였다. 마치 어린 아기를 밖에 쫓아내고 문을 닫은 것처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름가고 가을이 오고, 한 달 뒤, 두 달 뒤, 복이는 점점 몸집이 커져가고 시간은 덧없이 흘러갔다. 복이가 급속하게 자란 탓에 이웃집 전문가님은 복이가 진돗개 후손 같다고 했다. 복이가 자랄수록 우리 모두는 복이를 소홀히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복이는 몸집만 컸지 마음은 아직 어릴 텐데 우리 모두는 전보다 사랑도 정성도 덜 하였다 게다가 뒤뜰에 거처를 옮겨 두니 겨우 끼니때나 한 번씩 만났다. 복이는 우릴 보면 너무 반가워 큰 덩치로 마구마구 달려들어 밥 주는 일도 겁이 났다. 날씨가 추워져 가니 배변 치우는 일도 다 내 몫이 되었다. 두 사람은 매일 바쁜 듯 거의 눈인사만 했다. 복이는 점점 우렁찬 목소리로 짖어대어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큰 소리로 짖을 때면 "복아 조용해 그렇게 짖으면 너와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알려줘도 못 알아듣고 겨울 한밤중엔 더 짖었다. 12월 막바지 깊어가는 밤눈이 펑펑 내려 소복이 쌓인 어느 날 밤 복이는 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요염하게 누워 우리가 있는 창문 쪽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우리와 눈만 마주치면 반가워서 목줄이 곧 끊어질 것처럼 마구 날 뛰었다. 눈이 소복이 쌓이거나 햇빛 따뜻한 날도 복이는 늘어져 잠을 잤다. 그 모습이 아주 늘씬하고 매력적이었다. 어쩌다 산책 시켜주려고 밖에 데리고나오면 지나가는 아무 사람이라도 꼬리치고 달려든다. 제 몸이 커졌다는 것을 모르고 아직도 자신이 어린강아지인줄 아는 것 일게다. 식성도 좋아 못 먹는 것이 없었다. 복이는 과일을 참 좋아했다. 지원이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간식 단감 치즈 멸치 바나나 등을 복이와 나누고 있었다.
그날도 복이는 담 넘어 여성들만 거주하는 아파트를 향해 사슴처럼 긴 목을 하고 한참씩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가까이 기척만 들리면 마구 짖어대었다. 급기야 아파트에서는 창문을 열고 우리와 복이에게 거친 언어를 보냈다. 우리는 비상대책 회의를 해야 했다. 잘 돌보지 않은 지원이와 남편에게 이제 더 키우고 싶어도 복이와 헤어져야한다는 것을, 복이를 집에서 떠나보내야 할 상황이 왔음을 알렸다. 그런데 어디로 보내야 할지 망설일 때 마침 애견전문가님이 천안에서 형님이 농장을 지키는 개가 필요하다 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전문가님은 동네에서도 평생 이웃들을 잘 도우며 사신분이다. 복이의 갈 곳이 정해졌음에도 막상 복이와 헤어지려니 안타까운 마음에 차일피일 두어 달을 더 끌다 추위가 가고 봄이 올 무렵 복이는 1년여를 우리와 함께 살다가 떠났다.
복이를 데려가는 전문가님께 내가 우리 모르게 가만히 데려가 달라고 하였다. 복이가 짖지 않는다. 떠난 것 같다. 그래도 뒤뜰 보기가 두려웠다. 창문을 가만히 열어보니 복이는 떠나고 없었다. 나는 달려 나갔다. 집 앞 아랫길도 옆길도 쫓아가 봤지만 양쪽 길은 텅 비어 있었다. 복이가 떠난 자리에 와보니 반쯤 남은 물그릇 속엔 슬픔과 우리를 향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고 밥그릇엔 복이가 우릴 향한 서러운 그리움이 남아있었다.
복이 집안엔 복이 이불인 무릎담요가 냉기 가득한 찬바람을 휑하니 안고 있었다. 며칠 지난 뒤 복이가 보고 싶다고 지원이가 내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도 눈물이 맺혔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살아있는 그 무엇과도 연을 함부로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아오면서 수차례 겪었음에도 우리는 또 슬픈 이별을 복이로 하여 뼈저리게 깨달았다. 복아 어디로 가든지 좋은 곳으로 가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네 명 다 살아라. 복이는 지금쯤 어느 곳에서 잘 살아가고 있겠지. 복이가 떠난 후 우리 가족들은 복이와 이별의 슬픔은 가시지 않아 아저씨께 복이 안부를 물으니 엊그제 농장 다녀왔는데 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믿느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복이 팔자는 상팔자로 태어났으니 잘 살 것이라는 것을…….
나의 어머니
아무래도 어머니께서는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 같다.
그때는 생각을 못했는데 어머니랑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몸 불편하시기 전에 어머니는 영화도 좋아하시고 외식도 나보다 더 좋아하시고 외출하시는 것도 정말 좋아하셨다. 벚꽃이 흐드러지던 어느 봄날 우리는 지원이를 등에 업고 김밥을 싸들고 광주 서구에 있는 진흥원 벚꽃을 보려고 두암동에서 버스를 타고 가서 돗자리를 펴고 그곳에서 사진도 찍고 보온병에 따뜻한 물과 차디찬 김밥도 맛있게 먹으며 벚꽃놀이를 하고 왔다. 성륜사 관광버스도 타고 지원이랑 셋이서 오대산도 가보고 강화도 가고 그랬다. 매일 어머니는 내일 어디 가자고 하시면 좋아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계시면서 또 계셨다. 그래선지 혼자사시는 분은 또 아니었다. 자식 육남매가 아주 자잘하게 늘 어머니 관심을 끌었다. 그중 내가 가장 많았겠지만 어머니가 나와 산 세월이 길어서였을까. 병원에 계실 때도 가장 많이 나를 찾았다. 서울에 살 때 인천에 살 때 금방 다녀오면 엄마는 전화 하셔서 "아이 언제 오냐." 하고 물으셨다. 병원에서 헤어질 무렵이면 어머니는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병원 문 앞에 서 계시며 비틀거리는 몸 가누기도 힘드실 텐데 종이인형처럼 몸이 흔들렸는데도 손을 흔드셨다.
내가 광주를 떠나오고부터 어머니는 많이 외로워하셨다.
나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 서울에 오셨을 텐데 이제야 어머니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때는 함께 계시는 친구 분과 서울에 같이 오셔서 평창동에 계셨다. 어머니는 평창동에 계시고 나는 항동이라 너무 멀기도 했지만 평창동 가족들과는 낯설어 내키지 않았다. 어머니도 우리 집에 오실 때 꼭 친구 분과 같이 오시니 우리 집에 오래 계실수도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다시 광주로 가시고 그곳에서도 딱히 누구와 의지 할 수 없는데다가 친구 분이 병원에 입원하니 어머니도 입원 하셨다가 영영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한 많은 우리 어머니, 다시 살아오시면 지원이랑 나랑 여기저기 다닐까, 어머니는 우리 셋이 사는 것을 가장 행복해 하셨는데. 잠시 잠깐의 선택들이 인생을, 일생을 꼬이게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어머니는 나와 지원이도 못보고 가셨다. 우리가 가고 있는데 산소 호흡기를 뺐다고 들었다. 지원이와 나는 결국 장례식장으로 갔다.
어머니는 우리 앞에서 수의를 입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내가 슬픈 게 아니다. 아버지와 둘이서 자식을 일곱이나 낳았는데 아버지는 한국에 안계셨다. 어머니는 2014년 2월 29일 밤 돌아가셨다.
추운 겨울인데도 우리는 추운 줄 몰랐다. 나는 어머니를 가톨릭으로 장례를 하고 싶었지만 많지 않은 지인들은 인천에 있고 광주 동생들은 불교였다. 그래서 동생들은 불교식도 안하고 유교식으로 한다고 했다. 나는 주장할 그 무엇도 없었다. 뜻밖에 광주 사는 세 명의 동생들 손님들이 장례식 내내 연일 장사진이어서 흐뭇했다. 나는 알려도 먼 곳에서 올 만한 사람들도 없을 것 같아 아예 알리지 않았다.
왜일까, 지금은 어머니의 웃는 모습만 생각난다. 눈물이 자꾸 나는데도 엄마는 막 웃으셨다. 웃음은 전염된다고 나도 따라 막 웃었다.
광주에 사는 득락이, 운이, 경란이, 손님들로 가득하여 어머니의 장례식은 잘 마쳤다. 그날엔 막내 작은 아버지도 오셨었는데…….
막내 작은아버지
불과 두서너 달 전, 광주 시제 모시는 자리에 작은 아버지가 오셨다. 작은 아버지 성함은 최종상님이시다. 강화 최씨 우리 집안 제일 어른이셔서 시제 때마다 빠짐없이 참석해주셨다. 조카들을 격려해 주시는 모습과 건강해 보이시는 게 너무 좋다고 주위 친척 모두가 한마디씩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날씨는 쾌청하였고 초록의 숲들이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마련한 그날, 시제 모시는 처소에서 작은아버지는 “야 경순아 우리 집 가볼래" 하고 말씀하셨다. 아마 시골집을 새로 사셔서 내게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새로 산 집에 멋진 정원과 분수를 만드신 걸 카카오톡에 사진까지 올리셨다. 그날은 따라가 보고 싶었다. 내가 예순이 넘었는데도 작은아버지는 여전히 어린 조카 이름 부르듯이 ‘야 경순아’ 하셨다. 하지만 차를 운행하는 사람이 바빠 작은아버지와도 일찍 헤어졌다. 특별한 일 없어도 이따금 인천 사는 우리에게 전화 하셔서 안부도 물으시고 "강서방 공사 좀 소개시켜 주게나." 하시며 염려와 사랑도 보여주셨다. 지난번 시제 날, 우릴 반기시고 어서오너라, 이리 앉아라 말씀하신 후 이것, 저것 먹으라고 챙겨주셨다. 또 우리 남편에게도 "강서방 술 좋아하지" 하면서 따라주셨다. 아래는 막내 작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편지글이다.
막내 작은 아버지 최 종상님께 드리는 편지
참 오랜 시간 항상 웃는 얼굴과 행복한 모습으로 사신 막내 작은 아버님, 기쁨을 주는 아들 최 동규를 늘 자랑스러워하셨죠. 드물게 뵈었지만 작은아버지 의복이며 모습이 예전보다 깔끔하고 더 좋아지셔서 막내 작은엄마의 깊은 보살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끔씩 우리를 만나면 지갑이 통통하다 자랑하시고 우리 아들 최동규가 매일 아침 용돈 넣어주고 오늘 안에 다 쓰라 말해도 돈 쓸 일이 없다며 껄껄껄 웃으시던 작은 아버지, 맑고 행복해 하시던 모습이 그립습니다. 떠나시는 그 순간까지 행복한 마음으로 사시다 가시니 그나마 남은 저희들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너무 빨리 가셨어요. 저번에 뵐 때만해도 조카들보다 더 젊어 보이시던 우리 작은아버지 최종상님, 백세까지 끄떡없을 것이라 믿었는데 이 맑고 좋은 계절에 너무나 갑자기 어찌 이리도 급히 갑작스런 이별의 슬픔을 마주하게 되었을까요. 아, 사랑하는 나의 막내 작은 아버지 최종상님. 우리 아버지 때문에 우리들은 더욱 작은 아버지 최종상님께 항상 죄송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작은 아버지 최종상님께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마음들이었으니까요. 참으로 애달픕니다. 작은 아버지와 나, 둘만의 추억이 많았는데... 우리 어렸을 때 기억나시죠. 작은아버지 5학년, 제가 초등 1학년 때, 그리고 작은아버지가 6학년 때 운동장 고무줄 끊어다 동그랗게 몰아 경순아 부르시고는 창밖에서 제 자리로 던져주시고 쏜살 같이 달아나 버리시던 그때. 그때는 작은아버지가 우리삼촌이었어요. 운동도 잘하셔서 전교생이 제게 꼼짝을 못했었죠. 저는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작은 아버지 덕분에 공주가 되어 있었어요. 작은아버지 빽 으로요. 내가 중학교 때, 작은 아버지는 태권도 사범으로 우리학교에 오셔서 아이들을 가르치셨죠. 저는 삼촌이 하얀 태권도 도복에 검은 띠를 맸을 때가 너무 멋있었어요. 남학생들은 또 한 번 저를 보면 서로 잘 해주려 하였고요. 태권도 사범 선생님 최종상님의 조카이니까요. 그러다 작은 아버지는 군에 가시고 저는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죠. 그 후 작은아버지께선 작은 어머니와 결혼하시어 지금껏 평생을 알콩달콩 장모님 사랑 가득 받으시며 평탄하게 사셨지요. 제가 어머니와 딸과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을 때, 작은아버지께선 어린 아들 동규의 손을 잡고 저희 집에 자주 오셨지요. 큰 형수인 우리 어머니가 작은 아버지를 위해 소주 한 병, 막걸리 한 병, 담배 한 갑 사들고 올 때, 형수 손길 보시며 행복해하시던 그 얼굴 그 웃음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작은 아버지, 나의 어머니, 좋으신 우리 할머니와 나와 함께 넷이서 조그만 둥근상에 둘러앉았고, 동규는 아기 지원이를 재롱으로 놀아주었죠. 제가 그때부터 막걸리 맛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만나 더 할 수없이 행복해 하셨고요.
그렇게 그냥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계기로 할머니는 작은 아버지 댁으로, 어머니는 영광으로 가게 되었죠.
작은아버지 최종상님은 우리 할머니인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시느라 많이 힘드셨지요. 얼마안가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고 할머니께 효도한 복을 받으신 작은 아버지께서는 득락이, 경란, 운이와 함께 렌트 사업을 시작하셨죠.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네요. 조카들은 렌트 사업에 손을 떼고 작은 아버지 끝까지 혼자 남아 렌트 사업을 지키시더니 사랑하는 아들 최동규에게 가업을 물려주셨죠. 최동규는 사업에 일가견이 있었고, 오늘날 작은 아버지 여생을 평탄하고 풍요롭게 발전시켜준 자랑할 만한 아들이 되어있습니다.
땅에 놓기도 아까워하시며 어디든 함께만 있어주어도 가슴을 설레 하시던 아들 최동규. 이 세상 그 어떤 아버지의 사랑도 작은 아버지가 아들 동규를 사랑한 만큼 크지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그런 아들 동규를 두고 가시니 마지막 인사말도 못 건네시고 또 오늘 상주가 되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아버지를 하루 아침에 잃은 이 가혹한 슬픔을 우리는 함께 나누고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항상 조카들인 우리에게 너희 작은 엄마도 나 만나서 고생 많았다며 늘 안쓰러워 하셨었지요.
윤화, 성화 두 딸 자랑도 많이 하시고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고 가슴에 애틋하게 품고 계시는 작은아버지셨지요. 그 사랑을 가족들이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더 슬프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통곡을 합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운 우리 어머니와 함께 만나 소주와 막걸리를 네 분이서 정답게 '짠'하시고 웃음 가득 건배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여기 남은 우리들은 슬픔을 접겠습니다.
네 분이서 저희 자손들 잘 살기 바라는 그 뜻대로 서로 우애하고 나누고 배려하고 아끼며 잘 살겠습니다. 그럼, 작은 아버지 최종상님 고운 웃음 지으며 안녕히 가셔요. 꼭 하늘나라로요. 그곳에 다 막내 작은아버지,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큰형수님이 함께 계시니까요...
우리 모두는 작은어머니와 동규, 윤화, 성화와 서로 안부 물으며 잘 지내겠습니다.
조카 최 경순 올림
< 최경순 시, 수필 >
제목: 그리움
님은 죽어 하늘로, 나는 살아 이 땅에,
하늘에 님은 허다한 날
내 사는 모습 내려 보실제
언제 어머니가 나와 함께 살으셨는지
기억마저 잊고 사는데
어쩌다 삶에 지쳐 허허로운 날
하늘 보며 웃어봅니다.
코스모스 꽃을 좋아하셨던
님의 기억
살아계실 때 잘못했던
수만 가지들
언젠가 이 딸도 하늘로가
그리운 어머니 뵈련만은
제목: 여름날
갑자기 소나기 메마른 땅 위에
뚜두둑 뚜두둑 반가이 내린다.
기-인나날 34~36오르내리더니
여름 큰 비 되어 불볕으로 달구어진
대지를 식히우고 부우옇게 쌓인 먼지들
빗물이 강물 되어 온 세상을
말끔히 씻어주는 반가운 소낙비
제목: 그대여
웃어요 귀하디 귀하게요
웃으면 근심도 사라져요
남의 허물 입 밖으로 내지 마요
적게 가졌다고 움츠리거나
뒤돌아 보지 마요 적게 가졌기에
임의 삶이
아름다운 숲속의 정원이어요
신비로운 오솔길
편해지고 싶으면
많이 가지려 수고 하지마요
재물은 바람을 잡는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요
많이 모으려 애쓰지 마요
하늘에 한가로이 흐르는
흰 구름 보아요
인생은 다 그렇답니다
떠도는 바람이어요
웃어요 가벼이
가진 게 없으면
마음도 몸도 가벼워요
제목: 말
말을 많이 한 날은
부끄럽다
많이 아는 것도 아닌데
종일 쏟아냈던 말의 내용들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말이 입 밖으로 나가면
나의 존재도 사라진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말면
내 안에 는 후회뿐
말이 내안에 갇혀있을 때
나는 평화롭다
말을 말자 나보다
지혜롭지 않은 이가 누구
그래도 말이 하고 싶거든
선한행위를 위해
지갑을 열 때처럼 하자
제목: 가을이면
미친 듯이 시를
한가위가
며칠 남지 않은 이 때
그럴싸한 시가 아닌
모두가 그렇지 하는 시를
차지도 덮지도 않은 이때
신선한 바람과
가을향기 맑은 곳에서
님 떠나 꽃 뿌리 우는
소월님처럼,
잎새의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동주님처럼,
사철 발 벗은 아내를 그리는
지용님의 마음처럼
이 세상 어느 세월에도 없는
타는 듯 붉은 노을빛 닮은
뜨거운 시를 쓰고 싶다!!
제목: 청개구리형제
맑은 여름 햇살
초록 피마자잎
비갠 뒤 더욱 눈부시다
의좋은 형제
윤기 흐르는
넓은 초록잎 위에서
정겹게 속삭인다
천천히 느긋하게
소풍하듯 가자고
바쁠 게 뭬 있냐고
빠름이 좋은 것만
아니라고
서두르다 세상 밖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한가로운 오후
초록햇살 받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책을 한다
느리다는건 때로
행복하다고
제목: 그녀
황토방 아궁이
벌건 장작불 지피며
고구마 네댓 개
장작 숯불에 던지며
혼자 말로
이젠 잊을라네
황토방 바닥에
몸을 지지며
바람 나 집 떠난
휭한 남편 잠자리 향해
이젠 장작도 보일러도 아껴야겠네
그녀는 영혼 없는 푸념을 한다
제목: 새해 새벽 첫날
새해 새벽 첫날 아무도 없는 빈 들
눈보라와 함께
살을 에는 듯 차가운 대숲에
몸을 맡긴 채
새해 첫날 첫새벽
집 뒤꼍 대숲바람 아픈 흐느낌
처음은 늘 떠나고
다음 사랑은 기다린다
새벽 첫사랑 의 추억과
새해 새날 차가운그리움
뒤 돌아봐 또 하나의
사랑 거기 있으니
제목: 산곡동 덕화원짜장면
산곡동엔 짜장면집 덕화원이 있다
항상 들어도 정겨운 짜장면
덕화원은 산곡동 근로자 영단 주택단지 내
가장 오래 된 중국집이다
1964년 주택 앞뒤를 사들여
중화요리 집으로 개조를 해 현재
그의 아들부부가 대를 이어 20여 년째
여전히 성업 중이다
덕화원 창업자
고향은 중국 산동성 용성 이라고 들었다
그 머나먼 곳에서 한국 인천부평에 자리를
잡기까지는 많은 사연들이 있었으리라
60년대 연인들끼리 영화보고나면
레스토랑 아니면 중국집 그리고 다방
오늘 덕화원 들려 그 특유의 짜장면 냄새를
맡으며 후르륵
부평구 산곡동 덕화원 맞은편 봉다방 주인마담은 70이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고우셔서 마담의 품위를 잃지않았다 마담이 끓여준 커피와 쌍화차 사랑하는 운숙언니와 마셨다 인근에 극장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없다
제목: 봄
봄도 좋아요 꽃도 좋아요
봄밤의 설렘이 더욱 좋아요
봄 빛깔에 짙은 꽃향기 봄은 밤이라야
꽃은 봄이라야 제 아리따움을
농염하게 피고 지지 뉘라 할 것 없이
봄을 만난 이는 모두 그러하지요
봄밤에 향기 짙은 그리움
밤 벚꽃 홀로 슬퍼요
제목: 길1
보지 않아요
아무도
마음 없이 길을 걸어요
발을 딛고 선 땅엔 무심해요
아름답고 풍요로운
온통 좋은것
허영과 호사에만
매달려 있어요
고개 숙여 땅을 보아요
온갖 노고로
우리의 발걸음 을 받쳐주는 길
우리가 밟아 온 땅
긴 세월 밟으며 걸어온 길
그대 이제
아름다운 겸손을 목에 두르고
길 위에 겸허하게
고개숙여 입 맞춰요
사랑, 행복, 기쁨,
희망, 평화 이 모든 것
그대 겸손히 고개 숙이면
그 길 위에 있어요
제목: 또 하나의 나
하루하루 평탄하게 살아감도
예순이 넘으니 맨발이네요
발바닥 상치 않게 조심조심 걸어야 해요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음도
젊을 때야 가슴이 뜨거워
내가 너무 많을 수도
내 안에 옳지 않은 마음 있다면
용기 내어 그 가지들 잘라내어
내 나이 알맞은 마음행동
자리 잡기를 모래 한 알 만큼씩이라도
하루 한날들 노을빛 같은
아름다운 예순의 황혼을 꿈꿔 보아요
제목: 참새의 아침
월요일 오전 문학수업 하러 가는 길
걸음을 재촉하다 멈춘다
몇 미터 앞 아스팔트 길 위에
귀엽고 앙증맞은
아주 작은 참새 떼들
쪼아먹을 게 무에 그리 많은지
길 가장자리에 옹기종기모여 앉아
연신 바닥을 쪼아대는 작고 귀여운
참새 떼들
작은 발을 요리조리 움직이는 모습에
내 마음 빠져 가던 발길 멈추고
한참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에 근심도 외로움도 평화로이 걷혀간다
길가에 무리지어 앉아 있는
귀여운 참새 가족들보며
이 아침 새들에게
평화로이 웃는 날을 선물 받는다
제목: 그곳은
예순이 넘어서야 선연( 鮮 然 )하네 고향집돌담
회색기와 낮은담 그 아래 흐르는 작은 개울
물빛 에 햇빛 반짝이며
나 어린소녀 되어 재잘 거리듯
물소리 따라 유년 청춘 중년
그리고 예순이 그 겨울바람에 함께 흐른다
언젠가 이담에
내 고향 이끼 낀 돌담집 안방 건넌방
사랑채로 이루어진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했건만
울안에 온갖 꽃들과 과실나무들
화단 넓은 옛 고향집
꿈속에서나 살아볼까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 되고 말았네
제목: 안부
천지의 꽃잎들이 쏟아지는
싱그러운 오월향기 가득한 때
저만치 보랏빛 라일락꽃송이들
하얀 아카시아꽃으로 젖어들 즈음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초록의 계절
옛님의 안부를 나직이 묻나이다
잘 지내시온지요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님의 안부를 물을수 있는
그리운 미쁜 마음 헤아리소서
저도 염려지덕에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찬란한 계절 육십 해가 넘어도
잊히지 아니하오니 님이여
이즈음 기쁜 날들 가득 하소서
이만 총총
제목: 사모곡
무릇 무릇 익어가는 가을 앞에
처연히 피어있는 하얀 꽃 무리지어 피고 져도
꽃 이름 몰라 그 옛날 가을햇볕아래 날 기다리며
서 계시던 흰 저고리 검정치마 나의 어머니
오랫동안 부재중인 아버지를 그리며
큰 딸인 내게 많이 기대셨지
슬픔 같은 하얀 웃음꽃처럼 웃으시며
날 향해 다가오시던
그리운 나의 어머니
제목: 곡성역
호남선 타고 곡성에 사는 여동생 집에 간다
무궁화호 기차를 타면 서두르지 않아 좋다
쉬엄쉬엄 역마다 숨어있을 재미있는 옛이야기
들 짙은 초록의 물결 가르며 도란도란 속삭이듯
종착역 순천인 호남선타고 곡성역에서 내린다
어느새 예순이 넘어버린 세월 앞에서 고왔을
모습 간곳없어도 처연히 받아 드릴나이
전주에서 내려 볼까 남원에서 내릴까
생각하다가 결국 목적지인
곡성역에서 내린다 캐리카를 끌고
시원한 여름 바람을 가르며 탁 트인 곡성역
햇빛이 눈부시게 나를 반긴다
마음이 만신창이 되었을 동생이
언니이~~하고 반긴다
나는 곡성의 품안으로
동생의 슬픈 마음 밭으로
푹 쓰러지듯 안긴다
제목: 그리움
생시같이 선연하다
고향집 낮은돌담 회색기와
그 아래 작은개울
햇빛에 반짝이며
흐르는 물소리
아홉 살 순이 거기에
기 인 생애
바람에 보내고
언젠가 먼 훗날
이끼낀 돌담 마당 넓은집
안방 건넌방 사랑채 있는곳
나 다시 돌아가리 꿈 꾸었건만
울안 꽃나무 화단 예쁜집
이제 이룰수 없는 꿈 되고 말았네
미루나무
고향의 마을냇가
미루나무 숲
님의 자취 그윽한데
열 여덟 순이
별과 달
빛나던 그밤
온 천지 님의 모습
가득했던 날
이별의 인사
다시 만날 기약없이
그렇게 헤어져
긴세월 흘렀네요
푸르던
미루나무 숲
달빛 반짝이며
흐르던 맑은개울
그 긴밤
님은 가고 순이 남아
미루나무 숲 맴도는
바람 속 에서
그 날 먼 훗날
그 바람
그 물결 흐르는 소리
오래 오래 님 기다렸던
미루나무 숲
제목: 가난한 아침
3
잠시 전을 폈다
접은 듯
어두운 겨울하늘
비, 바람 앞을 가린다
산 처럼 쌓인
방물에 포장을 덮는
그의 등이 무겁다
잘 다녀오라던
아내의 눈빛
떠올리며
빈 주머니
서글픈 귀가
눈보라 속 하늘 향한
그의 눈빛 슬프다
리어카 짐을 끌고
한 발 한 발 옮길때마다
절렁절렁 방물소리
소시민의 자화상을
뒤로하며
파란 신호등은
발길 재촉한다
제목: 옛 임
그 봄날
개나리
울타리 지나는 이
임 인 줄 알았어요
못 본지 삼 년
그토록 그리운 임의 모습
어느 봄 날 해질 므렵
어둠이 푸르스름이 깔리는
저녁 므렵
버스 차창 밖에서
걸음 걸이도 옷 매무새도
임 닮은 그런 사람이
가고 있었어요
임을 본 그 밤은
내내 가슴이 먹먹 했어요
다음 정류장 에서 내릴걸
그리고 반대로 가 볼걸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던 임을
얼마 간 시간이 흐른후
우연히 길 가다
님의 친구를 만났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
이별 후 오랜시간
슬픈 침묵의 방황끝에
먼 하늘 나라 가버린지 삼년이라고
그럼 그날
내가 얼핏 본
님의 모습은 누구인지요
제목: 길2
사람들은 위만 보아요
하늘 향해 높은 곳만
고개 굳어 숙일 수 없어요
목마르고 허기지다 아우성
길을 내려 볼 수도
고개 숙여 보면 너무 많이 가져
높은 곳을 향한 고개
숙여지지 않아요
자신의 두 발
의지하고 있는 길
내려다 볼 수 있다면
가장 넉넉한 이가
자신임을 알텐데
높은 곳만 보느라
땅 있다는 것 조차 몰라요
여전히 높은 곳만
바라보며 더 많은 것을
갖고싶어
난 가진게 없어
난 너무 초라해
오늘도 휘항찬란한
도시 한복판 에서
부자들의 외침소리
고개가 굳어
숙여지지 않아요
자신이 가진 것을
누려 볼 수도 없어요
고개가 굳어
자신의 발을 받쳐주는
길 땅에 경배를
드릴 수 없어요
물질 만능의 팽배 로
고개를 숙이면
아래를 내려보면
죽을것 만 같아
두려운 것이지요
겸손함으로 낮은곳을 보며
그대 너무나 많이 가졌음을
제목: 봄은 아직
봄은 아직 발부리만 내밀고
온갖 봄 꽃 들 은
천지에 피어 꽃샘 바람은
겨울옷을 입으라네요
겨울옷을 봄처럼 입고
노오란 개나리 울타리
자목련 백목련
매화 벚꽃 무리지어 피는
꽃길을 지나는데 꽃이
겨울더러
가만히 속삭여요
내년에 다시 만나자고
꽃들의 속삭임
귀에 들려요
계절도 꽃샘바람
이별 슬픈데
하물며 사람의 이별이야
제목: 꿈길에서
오월은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달. 연두 빛 닮은 푸른 오월, 언제나 분꽃처럼 시름없이 웃으시던 어머니 시간은 푸른 궁전에서 멈췄습니다.
궁전 문 앞에서 날개달린 푸른빛 천사 옷 입으시고 종이 인형처럼 힘없는 몸을 비틀거리며 언제 올지 모를 딸과 손녀딸을 하염없이 기다리셨을 자식들과 함께 사시고 싶어도 몸과 마음 반쪽이 병상에 홀로계신 영감님께 묶여 여섯 자식 중 오늘은 누구하나라도 애미 보러오는 자식 있을까 기다리고 기다리셨을 잠자리 날개 되어 단 한번 힘차게 날아보지도 못하시고 푸른 날개 옷 입으신 채 자식들을 그리다 그리다가 2014년 3월1일 오월은 아직 멀었는데 어머니는 그 푸른 하늘나라로 가시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푸른 오월 열여덟 고운 순정 안고 막내 아씨로 유년을 보내고 성장하시어 십리 되는 이웃마을로 꽃가마타고 시집오시어 새댁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첫딸인 나를 임신했을 때부터 일곱의 아이를 낳을 때까지 꾸준히 어느 한 해도 쉬지 않고 어머니의 가슴을 멍들게 하셨는데도 오랜만에 집에 오는 남편에게 맛있는 불고기 반찬에 융숭한 맞이하였음을 나는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온 날은 달기도 맵기도 한 빨간 양념 불고기 석쇠 위에 올리고 숯불에 구우면 온 동네가 그 맛난 냄새와 맛을 보았으니까 그토록 휘휘 돌아 다녀와도 아기씨들은 우리 엄마에게만 뿌리운 것만으로 다행스런 일인지 한 많은 설음으로 일생을 속울음 하시다 나쁜 남편은 죽거나 없어지면 차라리 잊고서 악착같이 사실수도 있으련만, 가정도 돌보지 않으면서 지아비라고 있으니 자유롭지도 강하지도 못했던 어머니는 딸 다섯 두 아들 낳으시고 딸 하나는 세 살 때 하늘나라 보내고 남은 육남매 모은 자리에 오늘 그렇게 유언 한마디 없이 훨훨 하늘나라로 가시다니 밤마다 꿈인지 생시인지...
어머니는 우리 집에 와계시고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런 웃음으로 나와 지원이를 보시며 어머니와 같이 웃고 같이 놀던 장소들 그곳에도 어머니가 계시고 지금도 우리 집에 문득문득 와계시니 그토록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랑 살고 싶어 하시더니 꿈길인지 생시인지 지금은 어머니가 푸른 궁전병원에 계시지 않고 우리 집에 와 계시니 차라리 마음이 편안합니다. 가끔씩 생시에 어머니가 그리워 어머니 헨드폰으로 전화를 했더니 신호는 꾸준히 가는데 고객이 받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매번 내게 전화하셔서 왜 안 오느냐 언제 오느냐 매일같이 기다리시던 어머니 어제 갔다 왔는데도 잊어버리시고 또 왜 안 오느냐 언제 오느냐 부족한 큰 딸과 손녀딸 지원이를 그리도 애타게 보고 싶어 하시더니 끝내 우릴 못 보시고 열흘 넘도록 의식 없이 계시던 어머니를 우린 이제 내드립니다. 어머니 그곳 하늘나라에서 이제 몸 편히 마음 편히 쉬시어요. 그리고 어머니 자식들 모두 모두 부부 금실 좋아 행복하게 살도록 지켜봐 주셔요. 이제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제목: 소탐대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다.
얼마 전 나는 동생네와 태안 안면도 창기리 펜션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침 중추절 연휴가 길어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 우린 자가용이 없는 관계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집 앞에서 버스, 부평구청역에서 전철, 터미널에서 태안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태안에서 안면도 창기리에 가는 버스를 다시 갈아탔다. 가는 날, 도로는 딸기밭이었다. 인천서 태안도 평상시 보다 두 배는 넘는 시간에 태안에서 안면도 역시 두 배가 훨씬 넘어, 우린 집에서 9시에 나섰는데 창기리까지 도착 하고보니 오후 5시가 다 되었다. 펜션 있는 곳에서 한참 나와야 하는지 동생이 차를 갖고 나온다는데, 또 그 낯설고 쓸쓸한 정거장에서 사십 분 넘게 정거장에서 기다리게 되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우린 만났다. 동생도 낯선 지역이고 마침 창기리 정거장이 두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쪽으로 갔다가 차가 막혀 그제야 왔다고 "많이 기다렸재, 배고프재, 얼른 가세" 했다. 기나긴 승차로 배도 고프고 피곤도 하여 그날은 펜션에서 일찍 쉬고 싶었는데 이른 저녁을 먹고 밤 바닷가에 꽃게 잡으러 가자고 했다. 먼 길 왔으니 동생이 불꽃 재료를 듬뿍 준비해서 추억이나 만들까 하고 나갔다. 우리는 불꽃놀이도 즐기며 스마트 폰 후레쉬로 뻘밭을 비치고 고동이랑 아기 꽃게도 잡았다. 그리고 동생의 댁이 늦었지만 안면도 빛의 축제가 유명하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가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씻고 자려다가 일어나서 다시 차를 타고 나갔다. 빛의 축제 매표소는 이미 마감이었다. 우리는 네온 싸인 불빛들이 형형색색 온갖 모양의 불빛축제를 밖에서 배회하며 보다 돌아왔다. 그리고 피곤하여 곧 잠들었다.
다음 날 일찍 또 바닷가에 갔다. 그리고 물 빠진 쪽으로 다가가 고동이랑 조개, 꽃게를 잡다가 나는 요긴한 물건을 발견했다. 방금 물 빠진 바닷가 바위틈에 호미와 물갈퀴 겸용인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꽃게보다 반갑게 주웠다. 갑자기 우리 집 텃밭에서 요긴하게 쓰겠구나 싶어 주워서 숙소로 돌아왔다.
호미를 비닐에 넣어 잘 싼 뒤 가방 안쪽으로 넣으려고 가방 안에 있는 소지품을 모두 꺼내었다. 그리고 가방 맨 아래에 호미를 뉘였다. 다시 소지품을 넣었다. 그때 집어넣을 때 이십 만원 하는 다 초점 안경을 빠뜨린 모양이다. 나는 인천으로 바로 올 계획이었는데 동생이 광주 자기 집으로 가자했다. 나 또한 바로 헤어지기 섭섭하여 바쁜 일도 없어 추석연휴를 운이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갔다. 광주집에 도착해서 안경이 필요해 찾으니 없다. 운이가 차 안을 찾아봐도 없다고 한다. 난 5천원짜리 호미를 갖기 위해 이십 만원짜리 안경을 버린 것이다. 호미를 주웠을 떄, 가방에 넣을 때 사실 생각을 했다.
"그냥 여기 두고 가도 또 누군가 사용하겠지, 그냥 두고 가자" 했다가 "아니야 새것이기도 하지만 바닷가에서 주웠으니 가지고 가서 우리 밭 풀 뽑을 때 요긴하게 쓸 거야, 아니야 돈도 얼마 안 되는데 필요하면 사지 뭐 하러 갖고 가" 마음속에서 놓고 갈까 가져갈까 주고, 받고 하다가 결국 호미를 가방에 넣고 20만원이 넘는 다초점 안경을 숙소에 놓고 온 것이다. 그곳으로 전화해보니 이미 청소했지만 안경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때로 우리는 작은 것에 욕심을 내어 큰 것을 잃는 경우가 일상을 살다보면 종종 있다. 이번 일도 그와 같은 소탐대실이었다. 즐거웠던 여행은 잃어버린 다초점 안경으로 잠시 마음이 씁쓸했지만 깨달은 것도 있다. 어리석고 우매한 우리들은 작은 것에 목숨 걸다 큰 것을 잃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 사람아 자신이 욕심내는 것, 행여 소탐대실은 아닌지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자녀를 위한 기도
오, 하느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대전에 나와 기도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의 딸 아들 지원이와 정진이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 감사와 기쁨이 가득하기를 부족한 이 어미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디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지원이에게 알맞은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배우자 정진이를 보내주시고 이제 새 생명 잉태의 축복까지도 딸 지원이와 사위 정진이 두 사람에게 끝없는 은혜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리옵니다. 앞으로 주님의 딸 부부가 천생연분으로 부귀영화 누리며 살게 하소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모든 위험에서 구해주시고 지혜로움을 주시어 자신들과 가정이나 학교와 교회, 이 사회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을 딸 부부에게 맡기시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하시는 만큼 저 역시도 딸 부부를 소중히 귀하게 여기며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하느님 항상 이 둘과 함께 하시어 사람들과의 만남이 은혜로운 인연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넉넉한 마음과 기쁨으로 봉헌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이웃과 함께 사랑하고 베풀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딸 지원이에게 맺어주신 배우자 정진이와 함께 신실한 믿음을 갖게 해주시어 축복받는 가정 이루며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도 가득 가득 은혜로운 축복으로 한 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딸 부부가 주님의 섭리가운데 세계 속에서 빛나는 훌륭한 삶을 아버지 허락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딸 지원이와 배우자 아들정진이 이 둘의 건강하고 축복된 삶 안에서 귀한자녀도 허락하시어 주님의 뜻 안에서 기적의 은혜 베풀어 주소서 하느님 아버지 귀하고 어여쁜 주님의 딸이 건강한 한 생을 지혜와 감사와 기쁨이 많은 일생이 되도록 은총의 축복을 허락하소서. 날마다 주님의 자녀 최지원, 진정진과 그 자녀들과 동행하시어 한평생 함께 하여주소서. 강하고 담대하여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지원, 정진이에게 걱정, 염려, 불안, 두려움이 떠나가게 하소서. 지원, 정진이에게 건강한 몸과 마음에 복의 복을 주시어 지경을 넓혀 주시고 지원이와 정진이 에게 근심과 환난을 뿌리째 뽑아 불태워주소서. 이모든 기도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녀에게 전하는 말
사랑하는 나의 딸 사위 지원, 정진아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면 자신도 사랑과 존중을 받는다.
친한 친구라도 남의 허물을 전하는 사람과는 속내를 보이지 마라.
*행복의 기준은 나 자신을 확실히 이해하고 파악하여 스스로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참 좋은 사람이다. 라는 말을 들으려 애쓰지 마라.
이해관계 없어도 사람은 뒤에서 사람을 욕하게 마련이다.
누구 앞에서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말하거라.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젊었을 때 기반을 닦아 놓아야 늙은 후에도 존중받는 삶을 살게 된다. 음식을 먹을 때는 존귀한 사람처럼 정갈하고 곱게 소식 하거라. 예, 아니오 가 분명한 삶을 살아라.
*사회에서 훌륭하게 살아남고 싶거든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양심에 떳떳하게 정당하게 살아라. 사람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 그분께 의지하고 항상 기도하며 살아라.
*너희 안에 평안이 있을 것이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고 자신이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두려워말고 당당하게 살아라.
*나의 딸 사위 지원정진아 너희들의 몸은 하나님의 지체이니 항상 거룩한 몸으로 주일을 잘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중심으로 서로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돌보아라. 지식은 풍부하게 몸가짐은 겸허히 하라 말은 바르게 사용하고 명확히 발음하라.
*우정이란 쉽게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한 후가 아니면 진정한 우정을 얻을 수 없단다. 마음이 강한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라. 마음이 강한 사람은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이겨낼 수 있단다.
*상대방의 말은 귀가 아니라 눈과 가슴으로 들어라.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떳떳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언행은 부드럽게 의지는 굳게 이 양쪽을 겸비할 수 있는 사람은 팔방미인이다.
*말을 쉽게 하지마라. 한마디 말이 너희의 일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서명을 할 때는 이름을 크게 써라. 누구의 인생이든 쉽고 행복하지만 않다. 때론 광막한 광야를 헤맬 때도 있을 것이요, 벼랑 끝에 홀로선 듯 외로울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에도 너희 마음 중심에는 늘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말기 바란다.
너희 둘은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이고 또 너희들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 되어 살아갈 것을 엄마는 믿고 항상 기도한단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나의 딸 지원이와 사위 정진에게 엄마가 씀
2017년 9월
자서전을 마무리하며
모세의 인생이 40년 주기로 세 번 크게 변화되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최초 애굽의 왕자로 시작하여 40년, 그 후 40년 살인 후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로 40년, 그 후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살았던 모세의 생애처럼 나는 장년기에 문학을 선택했다. 현재는 남편이 지은 집에서 살고 있다. 남편은 전원주택처럼 집을 짓는다며 삼 년 전에 낡은 주택을 사들여 집을 다 털어내고 예쁜 편백나무를 사용해 새 집을 지었다.
주위 사람들이 도시 안의 전원주택이라며 부러워하고 좋아했다. 사람들이 우리 집을 다녀갈 때마다 본인도 이런 집에 살고 싶다고 마음에 들어 했다. 나이가 들수록 몸과 마음은 약해지나, 내면으로는 강하려고 노력하는 우리 부부는 60에서 70을 향하는 이 때, 무남독녀 외동딸을 시집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2017년 지난 8월 26일 토요일 정오에 하나님이 맺어주신 좋은 짝을 만나 시집을 갔다. 노년에 하나님께서 내게 귀한 축복을 선물해 주셨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또 시인의 꿈, 수필가의 꿈을 꾸게 해주셨다.
그리고 딸이 다니는 주안교회 복지센터에서 자서전 쓰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하루하루 공으로 살지 않고 봉사나 섬김도 나의 일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늘 기도한다. 봉사와 섬김을 통해 지금 나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새롭게 깨달았다. 신앙, 건강, 가족, 재산, 명예 이런 것들이 어떤 의미일까,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얻을 수 있다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하나는 나, 나의 딸 지원이, 나의 아들이 된 내 사위, 양가 가족 모두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이웃을 사랑함이 진실 되어 진다는 것. 못다 한 이야기 인생을 정리하며 기록해야 할 한마디는 사람의 인생은 일장춘몽이다. 내 손에 쥐어진 재물이라도 내가 다 못 쓰고 가는 법이다.
우리 나이에 매일 밥 한 그릇씩 내가 대접한다 해도 죽는 날까지 몇 사람이나 만나고 몇 그릇이나 살 수 있을까. 시도해봤는데 매일 사줄 수도 없다. 매일 만남도 쉽지 않지만 모두 선약 있고 바쁘다 한다. 또 나도 밖에 나가지 않아 한 사람도 못 만나고 여러 날 휙휙 보내 버릴 때도 많다. 지난 며칠 동안 나의 삶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나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신앙생활 했을 때, 지금 당장 내가 식사 대접하고 싶은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선뜻 지갑을 열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을 주심도 감사드립니다.
딸을 낳았을 때, 딸이 아팠을 때 명동성당에서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을 때 또 명동성당 옆 백병원에서 모든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들과 3개월간 한 가족처럼 지내며 기독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 모두 서로 머리를 맞대고 두 손을 모아 무릎 꿇고 생후 5~6개월에서 13~14개월 어린 아기들의 심장 수술 성공을 기도하며 한 가족처럼 음식을 나누고 기쁨과 아픔을 서로 나누었던 1989년 겨울. 그때 일들이 정말 뜨겁게 감사드린다.
종교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딸이 나눔을 좋아하고 솔로몬의 지혜, 다윗의 용기, 따뜻한 할머니의 마음을 닮아 건강하고 어여쁘게 자라 성장하여 감사하고, 시집을 가서 행복하게 살기에 감사합니다. 나의 어머니가 참 좋으신 분 이어서 감사합니다. 내 형제들이 서로 위하고 아끼고 나눔을 좋아하여서 감사합니다. 내 주위의 이웃이나 성당 형제자매님들이 가족처럼 따뜻하며 모두 다 선한 사람들이어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잘 웃는 착한 사람이어서 감사합니다. 우리 딸이 좋은 배우자를 만난 일이 가장 감사합니다. 내 일생 스물여덟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살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딸 하나를 낳아 길러 시집까지 보내게 된 일이 최고로 감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사람입니다. 추운 밤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면 따뜻하지요. 내게 하느님은 그러신 분입니다. 동지섣달 밤을 누가 길다 했을까요. 좋은 사람과 함께하면 그 밤도 너무 짧지요. 겨울이 추운겨울이 우리 곁에 왔네요. 하얀 눈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계절 고운 정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거리에 쌓인 낙엽들이 비에 젖어 눈에 덮이는 그래서 더욱 어여쁜 동지섣달입니다. 평생에 이름 날 일 하나 없는 내가 자서전이라니요. 그래도 썼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이 시간, 자서전을 쓸 수 있게 도와주신 주안교회 주안복지재단과 애녹재 여러분들과 저희들의 강의를 맡아주신 박기남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자서전을 쓰기로 시작했으나 그동안 예상치 않았던 딸의 혼사가 있었네요. 대사를 치르다 보니 앞뒤로 많이 정신 뺏기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맨 처음 시작할 때 지나간 옛 시절을 뒤돌아보게 되어 그립고 아름다웠던 또 슬프고 힘들었던 옛 시절을 떠올리게 되어 가슴이 떨려오기도 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책을 마무리 한다면 무엇보다도 저의 딸과 사위, 그리고 남편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위태위태하던 어린 아기 우리 딸 지원이가 지금 어여쁘고 건강해서 착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시집을 가고 이제 임신까지 하게 되어 무어라 말할 수 없이 행복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오랜 세월, 서로 휘청거리기도 하고 사랑도 했다 원망도 했다 하면서 지금까지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에게도 이 지면을 통해 고맙고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육십여 년생 살아오면서 감사하고 고마운 분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부모 형제 친인척 친구 등 주변에 고맙고 감사한 분들을 많이 만나 한 세월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탄한 일생을 살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첫댓글 담양 최경순
유년의 기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