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님 지난 5월 20일 약속보다 늦게 찾아가서 많은 누를 끼쳤습니다. 끝까지 잘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리고 그 보답(?)으로 여기 저의 글, 딴 곳에 기왕에 실었던 것입니다만 전재하오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하회(河回)를 돌아본다> 花巖 류동주(柳東柱)
지난 1999년 4월, 영국(英國) 여왕(女王)께서 하회를 다녀가시니, 그 이름이 국내외로 유명해져서 관광차 방문하는 사람들이 증가되어 다녀온 사람마다 마을에 대한 평가를 한다. 그 중의 일부 사람들은 영국여왕이 다녀가셔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고 나에게도 가끔 그와 같은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과연 그런 것일가? 실은 여왕이 다녀가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빛나는 문화가 있어서 영국여왕이 한국 방문 길에 찾아오신 것이 아닐가? 하회를 다녀왔든 아직 가보지 안했든 하회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할 필요가 있어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하회는 안동의 서쪽 끝에 있다. 안동에서 예천(醴泉)쪽으로 국도(國道) 34호선을 따라 40리를 가면 풍산(豊山)읍이 나온다. 읍 거리를 막 벗어나는 곳에 위치한 풍산종합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좌회전하여 뚝방길, 지방(地方)도 916호를 타고 15리 가면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부터 행정구역상 안동시풍천면하회리(安東市豊川面河回里)이다. 좌회전하여 7마장을 가면 안동시의 하회관리사무소 앞 주차장에 닿는다. 입구에 검문소같은 입장객 통제시설이 있어 그리 기분이 좋지 않다.
하회는 법정명칭이다. 옛 기록에는 하외(河 ) 또는 하상(河上)이라고도 한 마을이름이다. 언제부터 하회가 있었는지는 기록으로 불분명하다.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이야기로는 임(林)씨, 마(馬)씨, 허(許)씨, 광주안(廣州安)씨로 이어져 살아오던 마을에 고려말(조선초) 풍산류(豊山柳)씨가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회 주변에 광주안씨의 묘가 다수 있고 '하회탈'이 허도령이 만든 것이란 말이 있으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현재는 100호내외의 가구중 절반을 넘는 가구를 점하는 풍산류씨의 집성촌이다. 풍산류씨(별칭 하회류씨)는 13세기초 풍산 상리(上里)에 살았는데, 조선조 초, 전서(典書)를 지낸 류종혜(柳從惠)가 친구, 배상공(裵尙恭)전서와 함께 하회로 옮겨왔다는 기록이 하회입구에 있는 비석에 적혀있다. 풍산류씨와 문화류(文化柳)씨와의 관계는 기록상 분명치 않다. 하회로 이거(移居)한 뒤 류씨는 안동의 유력자와 통혼하여 기반을 다지고, 과거(科擧)를 통하여 훌륭한 동량재(棟樑材)를 배출하였다. 명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의 요직과 서북방면의 국방요지인 의주, 정주목과 황해관찰사를 역임한 류중영(柳仲영;호 立巖), 2년뒤 문과에, 다시 重試에서 장원으로 입격하여 정주, 종성 등지의 목사와 평안관찰사를 역임한 류경심(柳景深;호 龜村)의 종형제가 살았던 곳이고, 입암의 자제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그 백씨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등이 대표적 인물이고 그 외에도 병산서원에 배향한 수암(修巖) 류진(柳袗), 화천서원에 배향된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숙종조에 호당에 든 우헌(寓軒) 류세명(柳世鳴), 정조조에 종형제가 함께 문과에 합격하여 정경과 아경을 지낸 류상조(柳相祚), 류이좌(柳台佐) 등 많은 현관(顯官)과 학자를 배출하였다.
하회는 낙동강이 풍산들을 곁에 두고 산협(山峽) 사이로 S자로 감아 돌아가며 좌우 곳곳에 암벽과 숲을 자나, 하회 마을 앞에 이르러서는 서애, 형제바위, 부용대, 입암, 화천을 거쳐 부계 등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꾸며 놓았다. 조선 영조 때의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보면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같지 아니하며 강가에 사는 것은 시냇가에 사는 것과 같지 않다.....시냇가에 사는 것은 영남에 있는 예안(禮安)의 도산(陶山)과 안동(安東)의 하회(河回)가 으뜸이다..."
라고 썼다. 이어서 그는 "진절경야(眞絶景也)"라고 썼고 '고계거 유차이처 실위일국제일(故溪居 惟此二處 實爲一國第一)"이라고 전국의 지리를 돌아보고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평하였다. 내가 초등학교시절 소풍 때면 우리마을(하회)을 두고 달리 가 볼만한 곳이 없어 늘 마을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상례이었다.
근자에는 유홍준(兪弘濬)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와 지명관(池明觀)의 「韓國 民主化에의 길」(日文), 그리고 서수용(徐守鏞)의 「안동하회마을을 찾아서」등에서 하회의 아름다움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하회는 훌륭한 인물을 많이 낳았고, 자연도 절경이지만, 그와 더불어 기백년 지켜온 문물(文物)과 건축물(建築物)이 또한 아름다운 곳이다. 하회가 많은 유가 집성촌 중에서 더 유명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보(國寶)로 지정된 것이 2점, 보물(寶物)이 4점, 사적(史蹟)이 1점, 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가 10점이다. 국보는 고려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하회별신굿에 쓰이는 『하회탈 및 병산탈』과 서애 류상국(柳相國)의 저서인 『징비록(懲毖錄)』이다. 보물은 『서애종가문적(西厓宗家文籍)』(11종 22섭)과 『遺物』(14종, 18점), 겸암종가인 『立巖古宅』, 서애종가인 『충효당(忠孝堂)』이며 사적은 『병산서원(屛山書院)』이다. 중요민속자료는 『북촌댁(北村宅)』,『원지정사(遠志精舍)』,『빈연정사(賓淵精舍)』,『옥연정사(玉淵精舍)』,『겸암정사(謙菴精舍)』,『남촌댁(南村宅)』,『주일재고택(主一齋古宅)』,『하동고택(河東古宅)』,『류시주가(柳時柱家)』와『하회마을(약16만평)』이다. 특히 충효당은 서애선생이 임난 수습 후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할 때 10년 정승을 지내고도 돌아 갈 집 한 칸이 없었던 일을 안타깝게 여긴 제자들이 선생의 사후에 돈을 모와 지어 드린 집으로써 충효와 청백을 신조로 살았던 분의 모습을 회상케 하는 집이다.
하회탈은 풍산류씨가 세거(世居)하기 이전 만들어져서 세전되어 온 것이라고 한다. 이 탈의 용도는, 옛날 양반들이 술과 쌀 등을 모두어 동리 하배들을 하루 놀게 해 주었는데, 노는 사람들에게 그 날, 하루는 탈을 쓰고 무슨 말을 하든지 탓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면죄부]와 같은 도구이다. 시제 말로 치면 일년에 한두 번 굿 놀이를 통해 스트레쓰를 풀게 하는, 노무관리상 필요한 도구인 셈이다. 탈은 마을 남쪽의 화산의 중턱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당집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류씨집 자녀는 쓰지 못하게 하였었다.
약 30년 전, 향토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전직 교사, 류한상(柳漢尙)선생(전 안동문화원장)이, 이 탈의 문화적 중요성을 막연하나마 인식하고 당시 문화재위원회에 탈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해 주기를 희망하였으나,
묵살 당하였다. 그 뒤 주한미문화원의 맥다갈드선생에게 소개하였더니 와서 보고 영문으로 조사보고서를 작성, 소개하여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되엇고, 마침내 문화재로 지정된 곡절이 있다. 그 뒤 중앙박물관에서 연구차 빌려간다고 하고는 내어놓지 않고 서울에 보관되고 있다. 1998년 가을 안동시가 주최한 「국제탈 페스티발」때 하회에서 이 탈을 전시하려고 하니 중앙박물관에서 탈의 귀향(?)에 즈음하여, 손궤 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라고 요구를 하여 안동시장의 보증(?)으로 가져왔다. 서울서 안동까지 경찰관의 호위 하에 수송해오고 하회에서는 충효당의 영모각(永慕閣)에서 서애선생의 유품과 같이 잠을 자고, 밖에는 경찰관이 24시 경계를 서는 등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하회는 조선시대에는 풍산현에 속해 있다가 한일 합방 후 일제의 식민지 초기에 풍산현을 '풍동(豊東)', '풍북(豊北)', '풍서(豊西)', '풍남(豊南)'의 네 면으로 가라 놓았을 때 풍남(豊南)에 속했다가, 다시 전자 2면은 '풍산(76山)'으로 후자는 '풍천(豊川)'으로 통합되었는데 하회는 '풍남면'의 면사무소 소재지가 되었다. 일제의 통치와 사회의 변천에 따라 하회의 옛 모습이 다소 변화를 가져왔다. 그 예로 면사무소 터는 1984년 공매처분 되어 지금은 [학록정사(鶴麓精舍)][고 류찬우(柳纘佑)씨 사저]로 바뀌었고, 오랜 역사를 가졌던 초등학교는 1979년 폐교되어 안동시에서 매입하여 철거한 뒤 지금은 옛날 학교 정문 곁이었던 자리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만이 옛 모습이 그리워 찾아드는 손을 조용히 바라본다. 이 나무는 만송(萬松) 림 심었을 당시 함께 심어진 나무라고 전문하였으니 어느덧 반세기를 지켜온 귀한 역사의 주인인 셈이다. 이 학교는 지금부터 200여년 전 당시 상하촌 양파의 어른들이 뜻을 모아 서당을 차린 곳을 서양 문물이 들어 올 때 사립학교로 바뀌었다가 이어 3·1운동의 끝에 조선총독부가 소위 황국신민(皇國臣民) 화 정책의 일환으로써 보통학교를 전국의 요소에 설치면서 풍남보통학교로 바뀐 역사적 터이다. 이 학교를 졸업한 자로서 이 자리를 옛날 동리 청소년을 훈육하기 위한 유서 깊은 터임을 상기하면서 다시 한번 이 곳에서 조상의 숨길을 그 야단치던 모습이 재현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안동시가 왜 사드려서 집을 헐었는지 동민은 알 길이 없어, 옛 인연을 빙자하여 문화적 용도로 사용할 것을 조건을 달아 동민에게 환부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오늘날, 하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출입에는 입장료를 징수하게 되는 불편, 사람이 찾아드니 상행위가 일어나는데 그로 인한 마을의 이미지 손상, 여왕의 방문 후 갑짜기 늘어난 방문객과 그에 수반한 마을의 황폐화, 방문객이 돈 내고 들어 왔다고 문 닫힌 남의 집 안방까지 들여다보려는 비례(非禮), 그리고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빈집의 보존문제 등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쌓여 있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써 ①현재 거주하는 사람만이 아니고 문화재를 소유한 출향인을 포함한 광의의 주민으로써 마을보존회를 구성하고 문제 해걸을 위한 대응책 강구 ②일일 출입인수의 통제 ③마을내 상업구역의 집단화 특히 음식점의 마을에서 컨고개 부근으로 이전시키고(용지는 마을에서 구입 후 현 행위자에게 배분) 마을부터 샤틀버스의 무료운행 ④마을내 건축물의 통제와 보존을 위한 기본계획과 년차별 정비계획을 용역 발주 ⑤입장료(?)를 마을에게 배분하는 비률을 타지의 문화재관람료수준으로 변경하고 '보조금' 또는 '보상금'을 주어 계획과 집행 보존의 재원으로 활용케 할 일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전통을 존중하되 현대와의 조화를 꾀하여 하회의 아름다운 마을과 그 문화를 승계 전승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