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시기(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사람의 집에는 <육군 특별 징원병 명예지가>라는 명패가 부탁되었다. 이렇게 병사로 군 생활을 한 자 중에는 없지만, 장군을 지낸 엄청난 친일파들이 대한민국'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놀라운 일이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을 중심으로 한 부산 경찰서 투탄 의거가 이루어졌다. 약 석 달 뒤인 1920년 12월 27일에는 최수봉을 중심으로 한 밀양 경찰서 투탄 의거가 실행되었다. 식민지 통치의 최첨병 폭압 기구인 경찰서를 재차 타격한 의열단의 거사는 영남 일대 항일 민심을 다시금 격동시켰고, 전투적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키면서 각오를 새로이 다지게 하였다. 일제 경찰은 언제 또 그런 양상의 폭탄 거사가 터질지 몰라 불안감에 떨며 노상 전전긍긍하였다.
“때가 무르익었소. 제1차 암살 파괴 계획 때 가장 많은 동지들을 체포한 부산 경찰서와 밀양 경찰서에 대해 보복을 했으니, 이제는 왜적의 심장을 겨누어야 하오. 왜적은 의열단이 경찰서만 줄곧 노릴 것으로 보고 향후 한참 동안 전국의 경찰서를 지키는 데 주력할 것이오. 우리가 총독부를 습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게요.”
의열단 본부에서는 조선총독부를 쳐서 왜적과 전면전을 벌이자는 논의가 무르익었다. 김익상이 나섰다. 어릴 때부터 일제에 큰 원한을 품고 살아온 김익상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목재 상사를 경영하다가 일본인에게 속아 가산을 탕진한 후 아들 익상이 21세 때인 1915년에 사망하였다. 그때부터 김익상은 일제에 큰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익상이 13세 때인 1907년에 세상을 떠났다. 형이 일찍 병사한 관계로 장남 노릇을 해야 했던 김익상은 가세가 빈곤해지자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의 직원이 되었다. 그는 고용살이를 할 때에도 차별 대우에 시달려 더욱 배일 사상을 굳게 기르게 되었다. 그래도 꿈은 잃지 않아 주위 사람들에게 늘 ‘장차 비행사가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히며 웃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정말입니까, 사장님?”
김익상은 자신이 기계를 다루는 기관사로 일하는 광성상회의 사장을 향해 기쁘게 웃었다. 사장은 신기해했다.
“거 참, 다들 싫어하는 곳으로 가라는데 너는 어째서 좋아하는 거냐?”
막 지점을 개설한 만주 봉천으로 발령을 내었는데도 익상이 무척이나 반겼으니 사장이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였다. 봉천이라면 독립운동을 하러 가거나, 아니면 먹고 살 길을 찾아서 가족 이주를 하는 곳이다.
김익상은,
“아, 예! 서울 아닌 곳에서 살고 싶어서요.”
하고 얼버무렸다. 사장은 미심쩍은지 또 묻는다.
“네 딸은 한 살밖에 안 되었잖냐? 아이와 부인을 두고 혼자 봉천으로 가도 괜찮겠어? 속으로는 나를 욕하는 것 아냐?”
“아이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내로 태어났으니 넓은 땅에서도 한 번 살아봐야지요. 평생 봉천에 있을 것도 아니잖습니까? 몇 년 내로는 서울로 다시 불러주셔요. 꼭이요! 약속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봉천 안 가고 사표 낼 겁니다.”
사장에게 진심을 밝힐 수는 없다. 김익상은 내심 광동으로 갈 계획이었다. 봉천에 가서 어떻게든 회사 돈을 빼돌려 그것으로 여비를 마련한 다음, 항공 군관 학교가 있는 광동으로 달아나버릴 심산이었다. 그것을 어찌 사장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여튼 네가 좋아하니 다행이로구나.”
사장은 멋도 모르면서 익상의 환한 얼굴을 보며 덩달아 웃었다.
김익상은 항공 군관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광동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학교가 폐교되어 있었다. 직장의 공금을 빼돌린 것은 이종암과 유사하고,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못 다니게 된 것은 김원봉과 비슷한 김익상은 터덜터덜 상해로 돌아와 영국계 회사에 검표원으로 취직을 했다.
김익상은 상해에서 처음으로 의열단의 존재에 대해 들었다. 의열단의 국내 암살 파괴 계획 추진, 부산 경찰서장 폭사, 밀양 경찰서 투탄 거사를 듣는 순간 김익상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의열단의 존재를 알려준 오성룡의 손을 잡고 목이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의열단이 있다는 것을 내가 왜 그 동안 몰랐을까요? 일개 회사원으로 허탄하게 살아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의열단이 내게 말하는 듯합니다. 일생을 허비하지 마라! 가족의 한을 갚고 나라의 원수를 갚아라! 지금부터는 새로운 삶을 살겠습니다. 지하에 계시는 부모님께서도 틀림없이 잘했다고 칭찬하실 겁니다.”
김익상은 오성룡에게 ‘고맙소!’ 하고는 그 길로 북경으로 내달아 바로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 동지들이 총독부 폭파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안 그는 어려운 소임을 자원하여 맡았다.
1921년 9월 10일,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폭파를 목표로 북경을 떠날 때 김원봉 이하 의열단 단원들이 모두 역까지 전송을 나왔다. 누군가가 김익상에게 농 삼아 작별 인사를 했다.
“장사일거혜壯士一去兮불복환不復還이라 했으니 언제 또 만날 건가?”
장사가 한번 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옛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사람은 김익상이 아니라 김원봉이었다. 박재혁 동지가 순국했고, 최수봉 동지도 순국했다. 황상규, 곽재기, 이성우, 김병환, 신철휴, 윤치형, 배중세, 김기득, 윤세주 등 많은 동지들이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면서 고초를 겪고 있다. 김익상도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인가!
정작 김익상은 껄껄 호탕하게 웃으면서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한 주간 내로 총독부를 폭파하고 돌아올 테니 술상이나 거하게 잘 차려주시오.”
모두 웃었지만 마음들은 못내 심란하였다. 거사가 성공할 것인가, 김익상 동지는 무사할 수 있을 것인가….
김익상이 탄 기차는 이내 단둥에 이르렀다. 이제 기차를 바꿔 타면 금세 압록강 철교를 건너 국내로 들어서게 된다.
김익상은 학생복 차림이었다. 보따리 안에 폭탄 하나와 권총 둘을 넣고, 교복 사타구니에도 폭탄 하나를 숨기고 있었다. 여차하면 자폭을 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기차에 오르면서 김익상은 어디에 착석을 할까 유심히 살폈다. 그는 젊은 일본 여자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앉아 있는 자리로 대뜸 걸어갔다.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하는 ‘일본인’ 학생이 옆자리에 앉으니 그녀는 마음에 흡족했다.
검문을 하는 순사가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못 떨리는 마음을 지긋이 억누르면서 김익상은 지금까지 보다 더욱 밝고 활달하게 옆자리의 모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두 남녀는 마치 청춘 부부인 양 시종 웃어댔다. 어린 아기를 가진 젊은 본토인(일본인)부부로만 여긴 순사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
남대문역(서울역의 당시 이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검문을 하는 순사들이 쫙 깔려 있었지만 아기를 안고, 젊은 일본인 ‘아내’와 함께 유유자적 걸어 나오는 김익상을 조선 사람으로 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남대문역에서 좀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와서 일본인 부녀와 헤어진 김익상은 동생 김준상의 집으로 갔다. 남편이 봉천으로 간 후 시동생 집에 의탁해 지내던 아내 송씨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당신은 어찌 된 건가요? 광성상회 사장이 와서 당신 욕을 마구 퍼부으면서 연락이 오면 반드시 자기한테 연통을 넣으라 하던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연통을 넣지 않으면 총독부에 고발을 하겠다고 했어요.”
총독부? 경찰서도 아니고 총독부? 아내의 말을 들으며 김익상은 속으로 픽 웃었다. ‘내일이면 총독부 건물이 사라질 텐데 그땐 어디에 고발을 하시려오?’ 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으므로 김익상은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아, 별일 없소. 봉천에 갔더니 도무지 일할 만한 곳이 아니었소. 광성 사장이 내게 거짓을 말한 거요. 그래서 사장에게 통지도 않고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버렸소. 사장으로서는 회사 업무에 마비가 왔으니 나를 괘씸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요. 뭐, 고발 사항이 될 수도 있고…. 아무튼 새로 구한 직장은 영국인이 경영하는 회산데, 봉급도 훨씬 많이 주고, 사람을 아주 신사적으로 대해준다오.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더니 과연 그렇더이다.”
변명을 하던 김익상이 문득 돌아앉더니 보따리에서 돈을 꺼내어 아내에게 준다.
“그 동안 번 돈을 조금 모았소. 절대 누구에게도 이 돈에 대해서는 말을 하면 아니 되오. 물론 내가 왔다는 것도….”
아내가 되묻는다.
“그럼 다시 중국으로 가는 겁니까? 왔단 말은 왜 하면 아니 되지요? 그리고 돈을 꺼내면서 돌아앉기는 왜 돌아앉아요?”
뜨끔한 김익상이,
“돌아앉은 것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보따리에서 냄새가 나서 그렇소. 며칠 내내 찻간과 길거리에서 먼지를 덮어쓴 보따린데 당신과 아이의 눈코 앞에 내밀면 뭐가 좋겠소. 그리고… 내가 왔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면 안 되는 이유는 광성상회 사장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지니 그렇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으니 절대 발설하지 마시오. 마지막으로, 이번에 온 것은 영국인 회사에서 서울에 지점을 낼 만한가 알아보라고 출장을 보내서 온 것이오. 그러니 돌아가야 할 수밖에…. 몇 년 더 일하면 제법 돈을 모을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서울로 돌아와서 사업을 할 것이오.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하였다.
김익상이 본래 ‘언어 동작이 심히 쾌활명랑’한 사람이라 아내 송씨도 그러려니 넘어간다. 기차에 나란히 앉아서 왔던 일본 여인도 그렇고, 압록강 철교와 남대문역에서 검문을 했던 순사들도 그랬다. 송씨는 ‘남편이 학교는 많이 안 나왔지만 머리가 좋아서 일본말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니 앞으로는 더 잘 살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김익상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날 밤 김익상은 폭탄과 권총이 든 보따리를 자신의 베개로 썼다.
다음날 아침, 자신이 왔다가 갔다는 말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된다고 아내와 동생에게 신신당부한 김익상은 집을 나섰다. 그는 전기 공사에 쓰는 기구들을 가득 넣은 가방을 둘러매고 왜성대에 있는 총독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이제 내 생애도 오늘로 끝이 나는 겐가….’
김익상은 문득 슬퍼지고, 불안해지고, 흔들리고, 어쩐지 망설여져서 총독부 정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한참 심호흡을 하고 나니 마음이 적이 편안해지는 듯하여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총독부 정문에 다다르니 보초를 서고 있던 헌병이 눈을 부라린다.
“누구냐?”
김익상이 곧장 대답한다.
“전기 공사하러 온 수리공이오.”
다시 헌병이 추궁하듯 되묻는다.
“아까 저 앞에선 뭘 하고 있었나?”
김익상이 잽싸게 대꾸한다.
“아, 총독부에 들어가려면 복장을 단정히 하고 마음가짐도 반듯하게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옷매무새 살피고, 마음도 좀 가다듬었지요.”
헌병이 피식 웃으면서 전기 수리용 가방을 한번 쳐다보더니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낸다.
김익상은 건물 2층으로 올라가 비서과 문을 열고 폭탄 하나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옆방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그런데 폭발음이 들리지 않는다. 이런 낭패가! 불발탄이 된 모양이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제대로 터져야 할 텐데….
김익상은 회계과 문을 열고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순간, ‘콰콰쾅!’ 하는 엄청난 폭음이 총독부 건물을 뒤흔들었다. 일본인 직원들의 비명소리, 유리창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소리, 천정이 내려앉는 소리, 사무 집기들이 날아가는 소리… 폭탄 터지는 굉음에 얹혀 온갖 소리들이 난무하니 총독부는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회계과 바닥이 15cm나 파였고, 파편들은 온 사방으로 튀어 총독부 직원들을 모조리 바닥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한참 후, 각 방에서 있던 직원들이 폭탄 소리가 멈추자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더러는 허리를 굽힌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나오기도 하였다.
아래층에서 있던 헌병과 순사들은 황급히 2층으로 달려들었다. 김익상은 계단을 내려가며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부나이(위험해요)! 아부나이! 앙앗짜 이깡(올라가지 마우)!”
김익상이 손을 좌우로 흔들어대자 일인 헌병과 순사들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벽 쪽에 몸을 반쯤 숨기자 가운데에 길이 트였다. 김익상은 헌병과 순사들 사이를 줄곧 ‘아부나이! 아부나이!’ 하고 소리를 내지르면서 유유히 걸어 총독부를 빠져나왔다.
김익상은 신의주로 가는 기차 안에서도 총독부 폭탄 투척 호외를 보며
“칙쇼! 후떼이 센징가 마다 곤나 고도오 앗따나(빌어먹을 불령선인이 또 이런 짓을 했구나)!”
하고 소리를 질러 일경과 밀정들의 눈을 속였다.
의열단 본부로 복귀한 김익상이 큰소리를 쳤다.
“내가 이곳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한 주간 내로 총독부를 폭파하고 돌아올 테니 술상이나 거하게 잘 차려주시오.’ 했었는데, 술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김익상이 조선총독부로 가기 위해 북경을 떠난 날은 1921년 9월 10일이었고, 다시 북경의 의열단 본부로 돌아온 날은 같은 해 같은 달 17일이었다. 김익상이 정말 일 주일 만에 큰 성공을 거두고 살아서 돌아오자 의열단 본부는 연회를 열어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환영사에서 김원봉은,
“김익상 동지가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함으로써 일제가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를 펼쳐 식민 체제가 안정되어 가고 있으며,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이 크게 수그러졌다는 선전이 허위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소. 심장부가 처참하게 뚫렸으니 일제가 더 이상 무슨 논리로 세계 만방과 조선 민중들을 기만하려 들 수 있겠소!”
하면서 김익상의 총독부 투탄이 가지는 의의를 되새긴 후, 커다랗게 차린 술상을 김익상 앞에 내려놓으며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우리 의열단 단원들은 장사일거혜壯士一去兮필복환必復還이오! 장사일거혜壯士一去兮불복환不復還은 이제 의열단에 없는 말이오!”
단원들이 일제히 ‘맞소! 정말 그렇소!’ 하며 맞장구를 치고 크게 웃는다. 술자리는 심야까지 이어졌다. 환한 달빛으로 가득 찬 창밖 뜰이 대낮처럼 밝았다.
----------
이상은 정만진 장편 《소설 의열단》 중 170∼178쪽 내용이다. 김익상 지사는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이후에도 많은 활약을 펼치다가 끝내 일제에 피체되었다. 일제 법원은 1923년 11월 6일 지사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런데 마침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이 1924년 1월에 예정되어 있던 시점이라 대사령이 실시되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지사는 그 황태자가 일본왕이 된 1926년 12월에 다시 대사령이 내려져 징역 20년형으로 재차 감형되었다. 지사는 20년형을 모두 마치고 1943년 귀국했다. 그런데 일제 경찰에 까닭도 없이 연행되었고, 그 이후 아무도 지사를 본 사람이 없었다. 1943년 6월 6일쯤 일제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측될 뿐인 독립지사 의열단 김익상!
6월 6일은 현충일이다. 물론 김익상 지사 타계일로 여겨지는 날이 6월 6일이라고 해서 이승만 정부가 그 날을 현충일로 정한 것은 아니다.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한 데 대해 어느 누구도 명확한 설명을 못한다. ‘엿장수 마음대로’였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6월 6일을 국가 지정 기념일인 현충일로 정했는지 아무도 모르다니! 친일 반민족 행위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온갖 파렴치범들이 권력 상층부에 앉아 있는 등, 대한민국에는 정말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