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채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기억 저편, 어린 시절로 데려가는 맛이었다. 양배추와 양파, 셀러리, 당근 등 다진 야채에 볶은 고기를 섞은 후 마요네즈에 무친 소를 듬뿍 넣은 빵. 이제는 유행이 지나 잘 찾기 어려운데,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같이 영양과 정성이 넉넉하게 느껴지는 ‘그 맛’이었다. 팥앙금빵은 원두커피와 함께 먹었다. 쌀가루로 만든 빵에 팥앙금을 듬뿍 넣었는데, 빵은 졸깃하고 앙금은 팥을 삶은 정도나 단맛이 딱 적당해 자꾸 손이 갔다. 이성당의 다른 빵에서도 인공적인 맛이나 기교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든다는 ‘기본’을 지킨 빵들인데, 그 ‘촌스러움’이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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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당에는 테이블과 좌석이 많다. 군산에서 이성당은 예부터 학생부터 어르신까지 즐겨 찾는 ‘만남의 광장’ 같은 곳. 그날도 아침 일찍 이곳을 찾아 ‘모닝 세트’로 아침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이성당’을 이끌고 있는 김현주 대표와 마주 앉았다. 시어머니 오남례 씨로부터 빵집 경영을 물려받은 그. 두 달 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서 “어머니가 안 계시니 달라졌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더욱 조심조심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하루에 50번씩 빵 만드는 곳을 드나들며 꼼꼼하게 관리하셨는데, 조금만 빵맛이 달라져도 금방 알아차려 직원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주 씨는 “시집온 후 줄곧 시어머니 뒤를 쫓아다니면서 빵과 손님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것 같다”고 한다. 군산에서 나고 자란 김현주 씨는 어릴 때부터 이성당을 드나들었는데,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니가 먼저 며느릿감으로 점찍어 시집오게 되었다 한다.
“부지런하고 빈틈없는 어머니 덕에 제가 발전하지 않았나 싶어요. 어머님이 원래 칭찬을 잘 안 하시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 ‘네가 복이 많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성당이 잘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요즘 이성당은 그 어느 때보다 손님들로 붐빈다. 새만금방조제를 보러 온 김에 들르는 사람이 많아 주말이면 빵집 앞에 차들이 길게 이어진다면서 “우리 집을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을 보면 코끝이 찡해진다”고 말한다. 드라마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 <제빵왕 김탁구>를 본 적이 없다면서 “우리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데, 손님들이 그 드라마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 한다. 탁구가 빵을 대하는 ‘진심’이 이 빵집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
김현주 대표로부터 ‘이성당’의 역사를 들었다. 1945년, ‘이성당’을 시작한 사람은 고종사촌 간인 이석우 씨와 조천형 씨였다. 증권회사에 다니던 이석우 씨가 자본을 대고, 남원에서 농사를 짓던 조천형 씨가 빵집을 맡아서 운영했다. 돈을 댄 이가 이석우 씨라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하는 빵집’이란 뜻에서 ‘이성당’이란 이름이 붙었다. 조천형 씨가 김현주 대표의 시아버지. 일본인이 북향으로 지어놓은 군산시청 앞 중심 상권에 자리 잡은 이성당은 군산 사람들이 입학식이나 졸업식이 끝나면 으레 들르고, 소풍 전날 과자와 빵을 사기 위해 찾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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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는 무엇보다 재료를 중시했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구하기 위해 먼 곳까지 찾아다니고, 정육점에서도 제일 좋은 고기만 찾았다. “이성당은 최고 재료만 쓴다더라”고 소문이 났다. 1978년, 시아버지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빵집을 떠맡게 된 시어머니에게 당시 스물두 살이던 남편 조성룡 씨는 튼튼한 버팀목이었다. 남편은 “전통은 지키되, 시대에 맞춰 새로운 제품, 새로운 서비스를 계속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들어 이성당은 서울에서 제빵 전문가를 데려와 다양한 빵과 과자, 케이크를 개발하고,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는 직장인을 위해 ‘모닝 서비스’를 시작했다. 조성룡 씨는 팥의 향을 잃지 않으면서 최적의 식감을 살려 팥앙금 만드는 법을 연구한 끝에 팥 앙금 제조회사(대두식품)를 차렸고, 빵집은 오남례 씨와 김현주 씨 고부가 꾸렸다. 대두식품은 한때 우리나라 제과점의 80%에 팥앙금을 공급했다 한다.
이성당이 법인으로 전환하던 2003년, 김현주 씨가 시어머니로부터 빵집을 물려받았다. 군산시청이 신시가지로 옮겨가면서 군산의 상권이 이동해 손님이 줄던 때였다. 그는 젊은 고객층을 겨냥해 스파게티와 피자 등 식사 메뉴를 개발하고, 2006년부터는 100% 쌀가루로 만든 빵을 내놓기 시작했다. 남편이 개발해 ‘햇쌀마루’라는 브랜드로 내놓은 쌀가루를 공급받는데, 쌀빵 출시 후 매출이 계속 늘고 있다고 한다. 인공 향료는 전혀 쓰지 않고, 인공 색소 대신 과일 퓨레로 색을 내고, 이스트 대신 천연 효모로 발효하는 등 ‘건강 빵’을 지향한다는 것. 그런데 빵집 어디를 둘러봐도 이를 선전하는 문구를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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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가루가 조금 들어가도 ‘쌀빵’이라고 선전하는데, 100% 우리 쌀로만 만든다면 ‘100% 우리쌀빵’이라든가, ‘순쌀빵’이라고 알려야지요” 했더니 “아, 그런가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한다. 그는 “우리가 마케팅은 잘 몰라요. 좋은 재료로 정성껏 빵을 만들고, 손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만 알지요. ‘손님이 참 고맙다’는 생각에 언제나 손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해요. 아무리 애써 개발한 빵이라도 손님이 맛없다 하면 맛없는 거지요. 우리 집을 대표하는 빵들은 수십 년 동안 내려온 레시피 그대로를 정확하게 지킵니다. 공장장이 바뀌어도 빵맛은 바뀌지 않지요.”
그가 시집온 후 시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군산은 조그만 도시라 금방 말이 퍼진다는 것. 빵집을 선전하고 광고하기 이전에, 한 명의 손님이라도 불만족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게 모토였다. 이성당은 ‘한국 최고(最古)의 빵집’을 선전하는 홈페이지 하나 없다. 이성당을 찾은 사람들이 블로그를 통해 입소문을 내면서 유명해졌다. 분점이나 프랜차이즈점도 두지 않았다. “아직은 똑같은 빵맛을 유지하며 프랜차이즈를 할 자신이 없어서”라고 한다. 그렇다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빵집은 아니다. 김현주 대표는 “빵 만드는 기술자들이 시야를 넓히고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도록 일본의 빵집으로 연수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손님이 너무 늘어 직원들이 힘들 거예요. 빵이 금방금방 떨어져 계속 구워내야 하니까요. 원래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문을 여는데, 지난 여름에는 늦은 시간에도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10시 30분까지 문을 열어둬야 했어요. 요즘은 어떻게 하면 직원들이 덜 힘들게 일할 수 있을까, 그 시스템을 만드느라 고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을 꾸려가는 김현주 대표의 관심은 빵을 먹는 사람, 그리고 만드는 사람을 향해 있었다. 빵이 가져올 이윤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오래된 빵집’이 왕성하게 생명력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됐다.
첫댓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오래된 빵집... 응원을 보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