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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시작》 2011년 겨울호
시의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시인
대담 이은봉 · 이은규
《육조단경》의 한 장면, 혜능 선사가 보니 두 젊은 스님이 깃발 앞에서 논쟁이 한창이다. 한 스님이 흔들리는 그것을 ‘깃발’이라 말할 때, 다른 스님은 ‘바람’이라고 말한다. 혜능이 흔들리는 것은 그대들의 ‘마음’이라 깨우친다. 경전의 종이냄새가 피어오를 것 같은 오후, 마음에 “오래된 책을 숨기고 있”(이은봉,「책바위」中)는 시인을 멀리서 가까이서 만나다.
● 시와 마을공동체의 복원
이은규: 이은봉 선생님 안녕하세요, 입동 즈음 근황은 어떠신가요?
이은봉: 올해 2월부터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으로 복무하고 있지요.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직은 올해 ‘연구년’이라는 이름으로 쉬고 있고요. 한국의 대표적인 문인단체인 한국작가회의에 대해 몸으로 연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은규: 잘 알겠습니다. 이제 여는 질문을 드려볼까 해요. 선생님의 최근 발표작에서 ‘막은골(杜谷)’ 혹은 ‘모듬내‘라는 지명이 자주 호출되는 중요한 연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은봉: ‘막은골(杜谷)’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이에요. 유년시절 이래 내 문학의 원초적 ‘장소’라고도 할 수 있지요. 문학적 감수성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이상, 꿈, 희망 등을 키워준 곳이 이 마을 ‘막은골’입니다. 내 마음의 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지요. 한자로는 막을 杜 자에 골짜기(고을) 谷 자, 곧 두곡(杜谷)이라고 쓰는데, 속칭으로 ‘망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듬내’는 이 마을 ‘막은골’의 왼쪽으로 흐르는 시내의 이름입니다. 한자로는 모을 濟 자에 내 川 자, 곧 제천이라고 쓰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냥 모듬내라고 부르지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름 내내 맑은 물이 늘 흐르던 곳이었어요. 여름에는 미역을 감던 곳이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던 곳이지요.
이은규: ‘모듬내’라는 어감이 참 좋아요. 올 여름《시와시》에 발표하신「모듬내 참게-막은골 이야기」라는 작품에서도 그 풍경을 만날 수 있지요.
이은봉: 맞아요.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던 지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내 고향마을인 이 ‘막은골’에는 마을공동체가 완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이농현상이 심화되어 급속히 훼손되기는 했지만 모듬내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농촌마을의 미풍양속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이른바 세종시가 건설되면서 내 고향마을인 ‘막은골’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요. 어쩌다 한 번 가보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어 눈을 뜨고 볼 수조차 없어요. 마구 파헤쳐져 있어 이제는 마을의 형체 자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요. 산은 깎여지고 들은 메워져 고향마을이 아예 없어졌어요. 자본주의의 첨병인 ‘개발’이라는 괴물이, ‘발전’이라는 아수라가 내 고향마을 ‘막은골’을 통째로 잡아먹어버린 것이지요.
마을공동체는 수많은 설화를, 수많은 추억을, 수많은 역사를 거느리고 있지요. 설화와 추억과 역사가 언어로 이루어지는 만큼 마을공동체는 수많은 언어와 더불어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들 수많은 언어가 다 서정의 보고이지요. 자본주의의 첨병인 개발에 의해, 건설에 의해 마을공동체가 파괴되면서 마을공동체와 함께 해온 수많은 언어도, 서정의 보고도 파괴되고 소멸된 것이지요. 너무도 아쉽지요. 산이 없어지고 논밭이 없어지면서 산의 이름, 논밭의 이름, 골짜기의 이름, 바위의 이름, 모퉁이의 이름 등이 다 없어졌지요. 이들 언어를 이제 누가 기억하겠어요. 내 마음 속에는 아직 이들 언어가 살아 있지만요. 그래서 일단은 자본주의의 꼭두각시인 ‘개발’이, ‘건설’이 다 파괴시킨 내 고향마을을 시로 복원해보려고 해요. 고향마을과 함께 고향의 언어가 사라지기 때문일까요. 최근에는 모든 개발은, 모든 건설은 다 나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해요.
이은규: 좋은 전쟁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TV에서 4대강 관련 보도가 나오면 예사롭게 지나칠 수 없으실 것 같습니다.
이은봉: 아무래도 그렇지요. 예를 들어 TV에 여러 차례 나온 세종보 있지요. 얼마 전에 가보니 금강의 ‘돌새부리’ 앞에 세워져 있더군요. 그런데 세종보에 임해 있는 ‘돌새부리’를 이제 누가 알겠어요. 그곳에 얽힌 추억과 기억과 꿈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돌새부리 옆 미루나무밭은 단오 무렵, 그러니까 한해 농사를 시작할 무렵 ‘막은골’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한바탕 풍장을 치며 축제를 벌이던 곳이에요. 커다란 개를 잡아 하루 종일 온 동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놀던 곳이라는 얘기에요.
그러니 슬프지 않을 수 있어요. 딱하지 않을 수 있어요. 안쓰럽지 않을 수 있어요. 이제는 누구도 다시는 공주군 장기면 일대, 연기군 남면 일대의 그 아름답던 풍광을 즐길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런 연유로 세종시의 건설로 사라진 이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막은골 이야기’라는 연작시를 통해 되살려 보려고 하는 것이에요. 세종시가 들어서기 전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로 인해 파괴되어가고 해체되어가는 내 고향의 모습을요.
‘막은골 이야기’라고 부제를 붙이고 있지만 이 연작시가 ‘막은골’만 한정해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막은골’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긍정적인 가치를 시로 그려보고 싶은 것이지요. 마을 공동체말로 모든 공동체의 기본이고, 원형이 아닌가요. 하여튼 나는 이 ‘막은골 이야기’ 연작시를 통해 자본주의 경제의 실체인 개발이며 건설이 갖는 의미를 되물어보려고 해요. 지금 이곳의 생태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처해 있는 미래와 관련해서요.
이은규: 첫 질문부터 의미 있는 답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자필 연보에 따르면 초등학교 때부터 스스로 시를 썼다고 나와 있는데요. 시와의 만남 그리고 유년시절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은봉: 유년시절에는 초록의 세상에서 살았지요. 물론 남들과 조금 다르기는 하겠지만요. 우리 집에는 꽃이 참 많았어요. 철 따라 복숭아, 맨드라미, 백일홍, 채송화, 다알리아, 칸나 등의 꽃이 만발하는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경제적인 면에서는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요. 사범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의 내 삶은 좌절과 상처, 그에 따른 고통의 체험이 많았지요. 첫 번째 좌절과 상처, 그에 따른 고통은 당암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왔지요.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유치원이라는 교육과정이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아무튼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내게는 그때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어요. 당연히 내년에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입학식이 한 달 정도 지난 뒤에 아버지한테 목털미를 잡혀 초등입학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몸과 지능이 덜 발달되어 있어 학교에 다니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그래요. 몸집이 작아 같은 학년 친구들한테도 얻어맞기 일쑤였지요. 내가 초등학교 갔을 때는 이미 기초적인 학습이 다 끝난 뒤였어요. 한글은 물론 숫자도 모르는 채 갑자기 끌려갔으니 기초적인 지식을 터득할 수 있을 때까지는 말 그대로 지옥을 살았지요. 공부 욕심은 많은데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아주 고통스러웠지요.
이은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초등학교 입학은 한 존재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가능성이 많아요. 여러모로……. 선생님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이은봉: 맞아요. 2학년이 되었을 때는 3월 개학한 이후 한 달 가량 집에서 쉬다가 4월 전근을 가신 아버지를 따라 아산군 인주면 금성리의 금성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그곳 마을 붓당골에서 아버지와 하숙을 하며 지냈는데, 그때 최초로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바둑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나를 하숙집에 팽개쳐 두고 바둑을 두러 갔다가 새벽에 들어오기 일쑤였거든요. 그러니 부지런히 책이나 읽을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책이라는 것이 있어야지요. 교과서 외에는 책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어요. 더구나 서정이나 서사가 들어 있는 책은 국어책 밖에 없었어요. 그때그때 배우는 국어책을 하루에 100번씩은 읽었을 거예요. 너무 심심했거든요. 너무 외로웠거든요. 국어책은 아예 다 욀 정도였지요.
3학년 때 다시 고향마을의 초등학교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내 몸과 마음이 좀 더 커 있었지요. 그래도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덩치가 너무 작아 걸핏하면 친구들한테 손찌검을 당하고는 했어요. 이런 체험이 나를 더욱 책과 가깝게 하지 않았나 싶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나 스스로「돗자리」라는 시를 쓴 것도 이런 체험과 무관하지 않았나 싶어요. 골방에 기대어 세워놓은 ‘돗자리’를 보고 그와 같은 제목의 시를 불현듯 썼으니까요.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온 ‘돗자리’였지요.
이은규: 소년 시인이셨네요.(^^) 때로 어떤 기억은 한 점, 색(色)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볼 때 떠오르는 색채 이미지가 있으신지요.
이은봉: 중학교는 공주 읍내에서 다녔어요. 공주중학교에요. 공주중학교에도 꽃이 아주 많았지요. 따로 온실이 있기도 했고요. 팬지꽃, 베고니아, 꽃양귀비 등이 화단에 가득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는 학교 뒤인 중학동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때도 참 외로웠어요. 시골에서 공주 읍내로 유학을 와 아는 친구들이 없었거든요. 집에서 공주교육대학이 멀지 않았거든요. 1960년대 중반의 공주교육대학은 나무 아름다웠어요. 봄에는 새빨간 장미꽃이 학교를 가득 덮었지요. 특히 울타리에 핀 넝쿨장미꽃은 장관이었어요. 장미 몇 송이를 몰래 꺾어다 소주병에 물을 부어 꽂아 놓고는 했죠. 가을에는 공주교육대학에서 국화전시회를 했는데, 화분에 담긴 샛노란 국화들도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싶은데요. 봄에 봉황산과 월락산을 헤매고는 했는데, 환한 대낮에 바라보는 진분홍 진달래꽃은 아주 매혹적이었지요. 6월의 하얀 찔레꽃도 그렇고요. 중학교 2학년 때는 시골집에서 공주의 중학교까지 통학을 했어요. 집 뒤쪽으로 1.5km 정도 걸어 나가야 공주 읍내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가을이 되면 길가의 구절초꽃이 너무 아름다웠지요. 구절초꽃을 꺾어 모자에도 꽂고, 앞자락에도 꽂고 했지요. 그러고 보니 빨갛고 노랗고 하얀색이 한꺼번에 떠오르는군요.
● 오롯한 시적 발자취를 따라 걷다
이은규: 꽃은 언제나 현기증의 아름다움을 안겨다주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시적 유전자에 관해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선생님 시세계의 내·외적 자장 안에 선대 문인들께서 어떤 면면으로 자리하는지요.
이은봉: 김소월, 백석, 이용악, 오장환, 김수영, 김현승 시인 등의 시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이분들의 시 외에도 김광균, 정지용, 박용래, 김영랑, 신동엽, 신경림 시인 등의 시를 좋아했지요. 물론 영향을 받은 부분은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김소월의 시로부터는 부사나 형용사의 운용방식, 그리고 리듬 처리방식에 관해 배웠고요. 백석, 이용악, 오장환, 신경림 등의 시에서는 서사, 곧 이야기를 응용하는 방식을 배우지 않았나 싶네요. 김수영과 김현승의 시로부터는 형이상학이나 관념, 시대정신 등 주제의 운용방식을 등을 배운 듯싶고요. 박용래의 시와 김영랑의 시로부터는 밝고 환하고 순수하고 무구한 서정을 배우지 않았나 싶네요. 신동엽의 시로부터는 민족적인 것, 근원적이고, 시원적인 것을 배운 듯싶고요. 고향의 선배 시인들인 박용래와 신동엽의 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민중적 정서가 아닌가 싶네요. 백석과 박용래의 시로부터는 언어운용방식, 특히 문장운용방식 등을 배웠고요. 백석과 박용래의 시는 어휘를 선택하는 방식도 그렇지만 통사를 운용방식이 매우 독특하지요. 통사를 운용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시의 아우라를 만든 것이 이들 시인이지요.
배우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어요. 마음을 바꾸면 모든 것이 다 스승이지요. 서정주 시전집도 수없이 읽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서정주도 시의 스승이지요.
이은규: 시적 스승이 다양하세요.(^^) 혹시 등단 ‘등단=설레임’이라는 등식이 가능한지 모르겠는데요. 1984년 1월 창작과 비평 17인 신작시집『마침내 시인이여』에「좋은 세상」외 6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해 말씀 부탁드릴게요.
이은봉: 우리 세대의 시인들에게는, 특히 내게는 ‘등단=설레임’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여유가 없었어요.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내게는 1970년대 말 일간지의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것은 물론《현대문학》,《문학사상》,《한국문학》 등의 월간지로 등단하는 것도 관변문예지로 등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과도할 정도로 순혈주의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창작과비평》이나《문학과지성》으로 등단을 해야 그간의 규격화된 관변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등단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던 싶은 무렵에《창작과비평》,《문학과지성》등이 폐간되어버렸지요. 잘 알다시피 이 일은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왔습니다. 따라서 시인이 되는 것에 설레고 어쩌고 할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동인지나 무크지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는 것 자체가 폭압의 전두환 군사정권과 맞서는 일이었거든요. 그 무렵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하는 시전문 무크지『마침내 시인이여』(1984)에 신작시 7편을 발표했는데, 그것을 등단으로 삼고 있지요. 하지만 당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만들던 종합문예무크지《삶의문학》에 이미 시와 평론을 발표하고 있었어요. 종합문예무크지《삶의문학》을 만들어 전두환 군사독재에 의해 강제로 폐간된《창작과비평》,《문학과지성》등을 대신하려고 한 것이지요. 편의상 평론의 등단지면을《삶의문학》5집(1983)으로 삼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지요.
이은규: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986년 첫 시집『좋은 세상』을 간행하셨는데요. 후기에 “우리의 역사를 위해, 이 보잘 것 없는 시집이 널리 읽히고 두루 쓰이길 바란다”고 적고 계셨습니다. 또한 3년 뒤 제2시집『봄 여름 가을 겨울』의 후기에서는 “자유와 해방과 사랑과 혁명을 바로 실천하”려는 시적 도정을 강조하고 계세요. 당시 가장 절실했던 시적 고민에 대해 여쭤 봐도 될까요.
이은봉: 당시에 내게 가장 절실했던 고민은 예술성과 정치성의 결합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것이었지요. 시의 감염성이라고 해도 좋아요. 어떻게 하면 시가 독자들로 하여금 당시의 현실, 곧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바른 자각을 할 수 있도록 하겠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지요. 시가 역사의 발전을 위해 쓰이기를 바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지요. 제 고민은 결국 시가 어떻게 예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운동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은 이내 시를 시답게 만드는 특징인 형상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태어나느냐, 하는 창작방법의 문제에 매달리게 했지요. 그때 깨달은 것이 시를 시답게 하는 형상성이 이미지, 이야기, 정서를 자질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대중성 문제와 겹쳐지면서 시에서 서사를 확보하는 문제, 곧 이야기를 담아내는 문제와 연결되었지요. 이은규 시인이 내 시집의 후기에서 인용해 말한 자유, 해방, 사랑, 혁명 등은 시정신이라고 해도 좋고, 시의 내용이라고 해도 좋은 텐데요, 당시에는 이것들이 시의 이미지, 이야기, 정서와 곧, 형상의 자질들과 정확하게 결합된 채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창작방법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지요.
이은규: 미와 정치, 그리고 시적 형상화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해오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돌발질문인데요.(^^) 시인으로서의 삶이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으신지요.
이은봉: 글쎄요. “시인으로서의 삶이 운명적으로 다가”왔다는 표현이 내게는 적절치 않은 것 같네요. 너무 힘들고 괴로워 시인의 길을 피하고 싶었던 적이 있기는 하지요. 그래도 그것이 시인의 길을 열망했던 만큼 크지는 않았던 듯싶네요. 아직까지는 별로 질리지 않는 것이 시이거든요. 모든 것이 다 질리는데, 시는 늘 새롭거든요. 물론 이제는 시를 그만 써도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이내 다시 시가 써지거든요. 그럴 때는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해요. 이렇게 자꾸 태어나는 시를 원망해보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내가 좋아 내 몸을 통해 세상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시인걸요. 이처럼 내게 시는 억지로 쓰는 경우보다는 저절로 써지는 경우가 많아요.
● 파라다이스, 더 좋은 미래
이은규: “자꾸 태어나는 시”, 부럽습니다.(^^) 그럼 다시 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1994년에 제3시집『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1996년에 제4시집『무엇이 너를 키우니』를 간행하셨지요. 저는「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호박넝쿨을 보며」등의 시가 기억에 남습니다. 1990년대 선생님 시의 시적 발자취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각 시집의 변화 지점을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이은봉: 1994년에 간행한 제3시집『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쓴 시들, 그때의 암중모색 담은 시들을 수록하고 있지요. 이른바 6월 항쟁 이후의 절망감을 담고 있는 시들인 셈이지요. 이 시집에는 가야 할 길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쩔쩔매던 마음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지요. 특히「계룡산」연작시는 어떤 근원 같은 것에, 어떤 어머니 같은 것에, 어떤 리비도 같은 것에 뿌리를 둔 채 가야 할 길을 탐구하던 마음을 담고 있지요. 그런 연유로 부정적 자아가, 절망적인 정서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요. 1996년에 간행한『무엇이 너를 키우니』에는 1990년대 초중반에 쓴 시들이 주로 수록되어 있어요. 이 시집에는 199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보편화된 생태적 가치가 싹을 틔우고 있지요. 이 시집에 이르면 화자가 훨씬 개인적인 존재로 드러나지요. 상대적으로 공적인 자아이기보다는 개적인 자아가 자리를 잡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시집에 이르러 ‘각자’에 대한 자각이 심화되는 셈이지요.
이은규: “쩔쩔매던 마음”이 있었기에 “각자에 대한 자각”이 심화된 것 아닐까요.(^^) 그런가 하면 2000년대에는 2~3년 간격으로『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길은 당나귀를 타고』,『책바위』라는 시집들을 간행하셨어요. 이 시기 선생님의 시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근원적 측면을 주목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은봉: 이들 시집을 쓸 때쯤에는 훨씬 자유로운 영혼을 지닐 수 있었지요. 역사와 시대의 압박을 좀 더 덜 느낄 때 쓴 시들을 수록하고 있다는 뜻이에요.『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는 정통 생태시를 담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자연과 인간과 우주가 이루는 상호 관계망으로 시를 포착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길은 당나귀를 타고』는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의 정서적 체험을 담고 있어요. 하루하루 고통으로 자지러지던 날들로 하여 벌떡벌떡 쓴 시들이 수록되어 있지요.『책바위』는 근대가, 자본주의가 만드는 나쁜 정서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좋은 정서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려낸 시집이에요. 부정의 정서와 긍정의 정서, 마이너스 정서와 플러스 정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시집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은규: 마지막 강조에서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이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최근에 한 계간지에서 선생님의 시론「시, 그리고 기타 여러 것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광맥, 마음, 택일, 각자, 자세, 도시라는 항목을 통해 독특한 시론을 펼치고 계셨어요. 이 중에서 ‘각자’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각자론’의 출발과 진행과정에 대해 여쭙니다.
이은봉: ‘각자’는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70년대 말 《삶의문학》의 전신인 《창과벽》동인들과 장난을 치다가 발견한 말, 깨달은 말이에요. 그때 친구들 중의 누군가 이런 농담을 했어요. 전인순 시인이 아닌가 싶은데요.
“동인지도 만들고 하니, 이제 우리도 호 하나씩 짓지요?” “호? 그래 각자 호 하나씩 짓지, 뭐!” “그럼 형이 먼저 말해 봐요?” “각자 호 하나씩이라! 으음 나는 뭐 ‘각자’라고 하지.” “에이 장난치지 말고요.” “장난치는 것 아니야. 상징성이 많은 말이잖아, 각자라는 말……. 지금의 이 자본주의 사회는 각자 자기가 알아 자기의 삶을 책임지는 개인 중심의 사회잖아.” “깨달은 사람, 覺者라는 뜻이 아니고요?” “覺者는 무슨 놈의 覺者? 실은 刻字라는 뜻이야. 아니, 各自라는 뜻이야. 아니 아니, 恪子라는 뜻이야!” “그런데 恪子는 또 뭐에요?” “삼가는 아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이지! 下心을 갖고 있어야 성숙한 사람이 되잖아.”
이른바 ‘각자론’은 이런 농담 끝에 태어났어요. ‘각자론’의 출발할 무렵의 에피소드도 대강 이런 정도에요. 조선조 후기에 이르면 성장한 개인의식을 지닌 몰락한 사대부들 사이에 자호를 이용해 자신의 처지를 희화하거나 풍자하는 일이 종종 있었어요. ‘각자론’의 출발도 그렇게 이루어진 셈이지요. 일종의 근대성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자본주의와 근대, 그리고 그에 쉽게 부화뇌동하는 나 자신을 희화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대부분 비평가들은 그런 복선에 대해 잘 모르더군요. 그런데《유심》11/12월호의 특집 평론「각자(各自 刻字 覺者)의 시학」에서 김수이 선생이 꼭 집어 잘 설명하고 있더군요. 아주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세요.
이은규: 네. 꼭 읽어볼게요. 마지막 돌발 질문입니다.(^^) 만약 시간여행을 통해 작고문인을 만나게 된다면 어느 시인에게 어떤 질문을 드리고 싶으신가요?
이은봉: 나는 내 시가 백석의 시와 좀 닮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인간적인 기질의 면에서도 좀 그런 것 같고요. 백석 시인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백 선생님! 色은 알았지만 空은 몰랐던 것 아니에요? 선생님이 북에 남은 것은 그래서지요?” 이런 질문은 제8시집『첫눈 아침』에 수록되어 있는 시「백석론」에 이미 다 나와 있어요. 불교에 아주 관심이 많았던 것이 백석이지요. 그래도 不二의 개념은 확실히 터득하지, 실천하지 못했던 같아요.
이은규: 백석 시인이 그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궁금해지네요.(^^) 다시 시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작년에 제 8시집『첫눈 아침』을 간행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임지연 평론가의「‘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와 ‘무엇을 할 수 없는가’라는 시적 질문」을 읽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번 시집과 관련된 글 중에서 가장 충일한 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시간’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글을 전개하고 계신데,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은봉: 내가 근본적으로 유토피아를 지향하기보다는 파라다이스를 지향한다는 임지연 선생의 생각에 동의를 해요. 유토피아가 미래의 시간이라면 파라다이스는 과거의 시간이거든요. 나는 인간의 미래를 별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인류는 결국 자신의 욕망 때문에 파멸하고 말 거예요. 그래요. 시간이 문제이지요. 과거를 더 많이 간직하는 것이 더 좋은 미래를 만드는 일이 아닌가요.
이은규: 네. 시간에 대한 고민은 언표 그대로 끝나지 않을 고민이지요. 이번 절기, 한 잡지에서 선생님의「혼자 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라는 시를 읽었어요. 저는 “비밀 한 줄 쓰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와 닿았습니다. 선생님의 다음 시집에는 어떤 비밀들이 담겨 있을지 궁금한데요. 다음 시집 구상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은봉: 어떤 광맥에서 캐낸 시들을 묶어 먼저 시집으로 낼까요? 한참 생각을 해봐야겠네요. 요즈음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내 시의 광맥은 앞서 이야기 나눴던「막은골 이야기」연작시에요. ‘근원적인 것’을 물어보는 시들, 그러니까 과거의 시간이 만들었던 파라다이스를 따져보는 시들이지요. 그와 경향이 좀 다른 자연생태의 서정을 담은 시들을 먼저 묶어 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아니 바람의 이미지를 탐구한 시들을 먼저 묶어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고요. 삶과 생활의 노래를 담은 시들을 묶은 시집을 그보다 먼저 낼까 하는 생각도 있고요. ‘언어’를 화두로 삼은 미발표 시들도 시집 한 권 분량이 되거든요. 하여튼 좀 더 고민해 볼게요.
이은규: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늘 건안건필 하시길 빌며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시작》 2011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