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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교회생활(10) / “주님 안의 하나 된 지체들.”
+ 본 문 : 고린도전서 12편 12절 - 31절 (신약 p.278)
+ 서로 사랑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우리교회를 사랑합시다.’
먼저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2장 12절 - 31절(신약 p.37)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함께 봉독할 말씀속에서 성령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아멘!
함께 봉독한 말씀은 ‘주님 안의 하나 된 지체들’ 에 대한 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의 하나 된 지체들!’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한 대는, 약 2만여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의 부품만 고장나도, 나머지 19,999개의 부품은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 부속 하나 때문에 자동차는 제 구실을 못하고, 그 결과 자동차는 달릴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갖추고 있어도, 우리에게 주님이 없다면,
우리는 모양은 분명히 사람 모습이지만, 그 결과는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 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이신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부터 불행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뜻 안에 있는 자기를 믿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행복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은혜 안에 살면서, 자기를 발견하고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전적으로 부모의 사랑에 의지해서 생을 영위해나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때때로 이런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 슬퍼하고, 고독해하고, 눈물 흘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 된 저와 여러분은,
항상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병들었거나 건강하거나, 실패했거나 성공했거나, 살거나 죽거나,
모든 것이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격하며, 그 안에서 사는 행복한 사람임을 알고 삽니다.
+ 찬양 / 찬송가 310장 1절을 함께 부른 다음, 계속해서 말씀을 듣겠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 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은 나는 확실히 아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은사가 있음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은사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은사만을 부러워하면 불행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낳습니다. 시기 질투보다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사람, 반대로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지으셨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한 처지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행복이 있고, 아이를 낳았으면 낳은 대로,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제쳐놓고 다른 일에만 가치가 있다고 덤벼드는 사람처럼,
바보스러운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내게 주어진 것,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나이 들어서 젊었을 당시만을 생각하고, 그때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또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이 든 사람은 든 대로, 젊은 사람은 젊은 대로,
여성이면 여성대로, 남성이면 남성대로, 지능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지금의 자신이 어디에, 어떤 처지에서 살아가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족하게,
여기는 사람, 남의 세계를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많되, 내가 부러워할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 참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자족하는 사람이요. 자족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소홀히 여기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겠다고 덤비는 사람,
그런 사람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나의 나됨은 모두 다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큰 뜻 안에 '나' 라는 작은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전체가 아닙니다. 부분입니다.
나는 머리가 아닙니다. 지체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지체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각 지체 하나 하나의 기능은, 몸 전체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하나 하나의 지체는,
전체의 완성품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지체 하나하나 자체에는 존재 의미는 없습니다.
이러한 지체의 기능은 나의 요구나 희망사항이나, 욕망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내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놓일 자리에 놓인 것이 가장 큰 행복이요.
그 놓인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주어진 은사를 극대화하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입니다.
나는 전체가 아닌 하나의 지체입니다. 어디까지나 전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지체입니다.
건전한 그리스도인은 “나는 사랑 받고 있다는 소속감,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느끼는 가치감,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 처리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속감, 가치감, 자신감, 이 세 가지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재물과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가졌어도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각자 깊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구속하셔서, 나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소속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온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는 내가 필요하다.“ 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 된 나는 예수님께 꼭 필요한 존재요,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 역시 예수님께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멘! 믿습니까?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예수님께 꼭 필요한 존재이기에,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적든 많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간에, 예수님께는 내가,
꼭 필요합니다. 이런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바울처럼 고백하게 됩니다.(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아멘! 믿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주님 은혜로 살아왔고, 주님이 은혜를 주실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자신감에서 사명감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없이는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힘주실 때에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 보기에는 나 자신이 엄청 초라해 보여도 주님 보시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여기서 하나 더 알아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께 필요하듯이, 동시에 저 사람도,
하나님께 필요하기에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듯이, 다른 지체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분명히 말씀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손이 발을 필요 없다,
발이 손이 필요 없다 못할 것이요, 눈이 코더러 너는 뭐하느냐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지백체가 다 필요합니다. 어느 지체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지체 하나하나가 다양하게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필요를,
우리가 아는 것과 동시에, 그러면 나 자신은 어느 부분에 속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형은 탕자를 반갑게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태도가,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을 어째서,
그렇게 반가이 영접합니까? 어째서 이 탕자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얘야, 너는 형으로서 내게 필요하고,
이 아들은 둘째아들로서 내게 필요하다. 너 보기에는 나쁜 동생일지 몰라도 내게는,
똑같이 소중한 아들이란다. 이 아이는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다.“
여러분!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장애인 자식이 효도한다.” 똑똑한 자식 저 잘났다고,
모조리 흩어져 나가도, 마지막까지 집에 남아서 효도하는 자식은 남 보기에는 변변치,
못해 집에 남아 있는 장애인 자식이, 결국 늙은 부모와 함께 살며 봉양한다는 말입니다.
똑똑한 사람, 하나님께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지체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정말로 자신의 위치를 알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필요로 하십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주신 은사대로 크게 쓰십니다.
오늘의 본문 22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그렇습니다. 오히려 비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많이 쓰입니다.
요즘 우리가 많이 쓰는 말로 누구나 고급인력이 되려고 하지만, 실제로 고급인력은,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고급인력이 된다면, 세상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의 실력을 가진 인력이 폭넓게 사회를 지탱해주어야만, 그 사회가 유지됩니다.
손가락을 놓고 말해봅시다. 엄지손가락만 중요합니까? 다섯 손가락이 다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큰 인격 안에서, 어느 부분에 속해 있습니까?
혹시라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이름도 빛도 없이,
한쪽 구석에서, 손처럼 발처럼, 무릎처럼, 발가락처럼 그렇게 섬길 수는 없습니까?
진정한 지체의 영광은 나 하나야 어떻게 되든, 머리이신 예수님만 영광 받으면 됩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며, 예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누누이 설명하는 가르침입니다. “천하게 여기는 그것이 더 귀하고,
아름답지 못한 그것이 아름다움을 얻게 되고, 부족한 것이 존귀하다.“ 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지체는 천하든 귀하든, 모두 다 하나님의 손에 조화롭게 쓰임 받고 있음을 압시다.
18세기 초, 성 바오로 대성당을 지을 때의 일입니다. 이 건물의 설계와,
감리를 맡은 크리스토퍼 렌 공이 인부들의 작업 상황을 살펴보려고 공사현장에,
나갔는데 석공들이 열심히 돌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뭘 하고 있나요?” “보면 모르겠소?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짜증내며 말합니다.
다시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입에 풀칠하자고 일하는 중이오.” 하고 대답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무얼 하고 있나요?”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이 부족한 사람이 그래도 석공 일을 배워,
이렇게 거룩한 성전을 짓는 일에 한 몫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영광스럽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대답은 제각각입니다. 어째서 입니까?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체의 영광은 머리에 있습니다. 지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우리의 수고를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때, 그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잔치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는데 머리가 둘이요. 손발이 각각 넷이다. 이 아이는 한 아이냐, 두 아이냐?“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분명 이쪽 머리를 때렸는데 저쪽 머리가 아프다고 울면,
이 아이는 한 아이다. 그런데 한쪽이 울 때, 다른 쪽이 울지 않으면 두 아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가정에서 남편이 아플 때에는, 아내의 마음도 아픕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울 때, 남편 기분 좋아하면 그들은 둘입니다.
다른 사람이 슬플 때 함께 슬퍼하고, 다른 사람이 기쁠 때 같이 기뻐하면 한 몸입니다.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 없이,
팔 한 짝이 잘려나갔습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사람의 팔을 이식하여 온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팔을 제공해준 사람은 살인강도 전과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팔을 전과자의,
팔이라 하여 더럽다고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수술을 통해 그 사람의 몸에 붙어 있으면,
그 팔은 살인강도 전과자의 팔이 아니라, 이식 받은 그 사람의 몸의 지체인 것입니다.
과거에 그 손으로 무엇을 했건, 그 사람의 몸에 붙어 있으면 그 손은 그 사람의 지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과거가 어떻든 간에, 현재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예수님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소중한 지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소중한 지체요,
온 세상이 무어라고 하든 나는 존귀한 존재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소중한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다함께,
지체된 영광을 누리도록 주님의 몸 된 우리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주님이 너는 내 자녀라 하시며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