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 1세(390~461). 교황(재위 : 440~461). 성인. 교회학자. 축일 11월 10일. 대(大) 레오(Leo Magnus)로 숭앙되고 있다. 서방 전통 그리스도론의 완성자로서 동방의 칼체돈 그리스도론에 대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① 시대 : 당시 로마제국은 동 · 서로 분리된 지 반세기가 지났으며, 서(西)로마제국은 궤멸 직전에 있었다. 아틸라(Attila)가 거느리는 훈족(族)은 유럽 전체를 유린, 동 · 서 양 로마제국은 전전긍긍하는 상태였다. 이에 쫓긴 게르만 여러 민족은 제국 내에 침입, 특히 북아프리카 여러 교회는 가이세리쿠스(Geisericus)가 이끄는 반달족에 의해 황폐화하였다. 전체 교회는 밖으로는 아리우스파(派)의 게르만 만족(蠻族)과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마니교, 프리실리아누스파(Priscillianism), 펠라지우스파, 반(半)펠라지우스파,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에우티케스(Eutyches) 등의 이단(異端)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사도적 신앙의 기반 위에 올려놓은 것이 그였다.
② 생애와 사상 : 교황 성 첼레스티노 1세(재위 : 422~432) 때 집사(執事)로 취임. 다음 성 식스토 3세(재위 : 432~440) 때 펠라지우스 배격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정치 · 외교 수완이 뛰어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명장 아에시우스(F. Aetius, 396?~454)와 정적(政敵) 알비누스의 세력다툼의 조정을 위해 갈리아로 갔는데, 때마침 성 식스토 3세가 죽자 그는 소환되어 교황에 취임하였다. 교황이 되자 로마 교회의 신적(神的) · 성서적 권위에 입각한 수장권(首長權)을 극단적으로 주장하고, 점차 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 지방까지도 로마 교회의 재치권(裁治權) 아래에 두었다. 후에 에우튜케스 논쟁으로 마침내 동방교회에 개입, 처음에 콘스탄티노플에 플라비아노(Flavianus)에게 보낸 <레오의 교서>는 칼체돈 신조(信條)의 기초가 되었다. 에우튜케스 및 네스토리우스파를 드디어 쫓아냈으며, 또한 정치면에 있어서도 민완(敏腕)을 휘둘러서 교황의 위신을 높였다. 유럽 전체를 석권하고 있던 훈족의 아틸라왕과 북이탈리아의 민치오 강변에서 회견, 이를 설득해서 도나우강 건너로 물러가게 하였고(452년), 또한 아프리카의 반달족의 로마 침입 때에도 장군 게이세리쿠스를 설득시켜서 로마 시내를 살육과 병화로부터 모면케 하였다(455년). 교리면에 있어서는 정통주의자이므로 이탈리아의 펠라지우스파와 마니교, 스페인의 프리실리아누스파, 동방의 에우튜케스주의 등의 이단을 단호히 배척하였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신인이성 일인격’(神人二性一人格)[칼체돈신조]을, 교회론에 있어서는 로마 교회의 ‘전체 지상의 교회 위에 위치하는 수장권(Principatus Ap.)’을 강조하였다.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공의회 개최권을 황제에게 허락했지만, 영적(靈的) 영역에서는 항상 교회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저작으로 96편의 설교, 173통의 서한이 남겨져 있다.
[참고문헌] E. Caspar, Geschichte des Papsttums I, Tubingen 1930 / F.X. Seppelt, Der Aufstieg des Fernandez, Leipzig 1931 / O. Bardenhewer, Geschichte der altkirchlichen Literatur IV, Freiburg 1924 / W. Kissling, Das Verhaltnis zwischen Sacerdotium und Imperium, 1920 / C. Fernandez, La gracia segun San Leonel Grande, Mexico 1951 / Trevor Jalland, The Life and Times of St. Leo the Great, London 1941.
Leo, 9세(1002~1054). 교황(재위 : 1049~1054). 성인. 본명 Bruno. 독일 알사스의 귀족가문 태생. 클뤼니의 교회개혁운동의 중요 추진자. 툴(Toul)에서 공부한 후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1026년). 교황에 선출되자 먼저 추기경단을 개혁하고 힐데브란트(Hildebrand, 후의 그레고리오 7세) 기타 교회개혁에 호의적인 인재를 모으고 그들의 협력하에 클뤼니 개혁정신에 입각한 교회의 정화 · 혁신에 착수하였다. 특히 1049년의 부활절 교회회의에서는 성직자의 독신제를 강조했고, 이어서 파비아 · 랑스 · 마인츠 등지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성직의 매매, 기타의 악폐를 금하는 회칙을 반포하는 등 다년간에 걸쳐 타락했던 교회 기강의 회복에 힘썼다. 또한 1050년 부활절의 교회회의에서 툴의 베렝가리오(Berengaius)의 성체론(聖體論)을 단죄하였다. 그 후 노르만인과의 싸움에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가(1053년), 석방된 지 얼마 후에 죽었다. 그의 재위 중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결정적으로 분리하였다(1054년).
Leo, 10세(1475~1521). 교황(재위 : 1513~1521). 본명 Giovanni de Medici. 율리오 2세의 후계자. 교황의 세력과 메디치가(家)의 권익증강에 힘썼다. 프랑스 국왕 프랑스와 1세와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고(1516년), 프랑스 국내의 사제임명권과 사제에 대한 과세권(課稅權)을 왕에게, 주교임명으로 인한 세(稅)를 교황에게 주기로 하였다. 또한 브란덴부르크공(公) 알브레히트(Albrecht)와 교섭하여, 그가 마인츠 및 마그덴부르크의 대주교를 겸한다는 조건으로써 영내에서 대사(大赦)로 인해 거두어진 액수의 절반을 교황청에 납부케 하였다. 이것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비에 충당하려는 것이며, 대사에 대한 설교를 테첼(J. Tetzel)이 담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해서 루터(M. Luther)는 <95개조 논제(論題)>를 내놓았다(1517. 10. 31). 이에 대해 교황은 대칙서(1520. 6. 15)로써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 파문에 처하고, 또한 보름스 국회에 루터가 불려 나감으로써(1521. 4. 17) 루터가 즉각적으로 처리될 것을 원했으나,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루터의 운동은 진전되어 나아갔다.
Leo, 13세(1810~1903). 교황(재위 : 1878~1903). 원명 Vincenzo Gioacchino Pecci. 이탈리아 아냐니 부근 태생. 사회문제 · 성서연구 · 재일치문제 · 외국전도 등에 폭 넓은 발언을 하여 로마 교회의 근대화에 공헌이 컸다. 로마 신학교 및 로마 귀족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 및 교황사실(私室)의 성직자(1837년), 베네벤트 총독(1838년), 스폴레토 및 페루지아 총독(1841년)을 거쳐 교황대사로 벨기에로 가서(1843년), 교육 투쟁에서 그곳 여러 주교를 지지하였다가 정부의 요구에 따라 소환 당하였다(1846년). 추기경 및 페루지아 주교를 거쳐 비오 9세 때 추기경(1853년)에 임명되고, 교황청 회계원 장관(1877년)으로서 교황의 공위(空位)시대에는 교황청을 섭정(攝政)하고 있었는데, 교황선거회가 3회째 선거에서 오히려 그를 완충적인 중간당 지도자로서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 때문에 단절되었던 독일과의 관계를 복구하고, 벨기에 · 미국 · 영국 · 러시아 · 일본 등 근대 국가와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이탈리아 · 프랑스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사회문제에 관한 여러 방면에서의 중대발언 가운데서, 사회노동 문제에 관한 회칙 (1891), 가톨릭 원리와 근대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다는 회칙 (1901)가 유명하다.
그는 과학과 예술의 장려에 큰 공적이 있었다.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지도자로 받들어야 한다고 했으며(1879년 8월 4일의 회칙 Aeterni Patris), 토마스를 그리스도교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하였다(1880년 8월 4일의 회칙 Cum hoc sit). 또한 로마에 토마스학원을 세우고, 토마스의 저작을 새로이 출판케 하였다(1879년). 바티칸문고를 역사 연구를 공개하고(1883년), 고고학 · 자연과학의 연구를 촉진했으며, 여러 가톨릭대학을 보호하였다(워싱턴, 스위스의 프리부르, 루방). 교회일치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고, 유럽에 있어서의 포교사업 후원의 강화, 동방교회, 인도 · 중국 · 인도지나 · 타이 · 영령 말레이 · 일본 · 태평양 제도 · 아프리카 · 미대륙 등의 포교사업에 대한 원조에 있어서도 뛰어난 포교교황이었다(포교구 48, 주교구 248개 신설).
어린이 같이 순진하면서도 외교적으로 총명하고, 약한 육체에 천재적 정신을 간직하고, 철학적 신학적으로 높은 교양을 갖추고, 라틴어 시인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사회철학이나 국가이론에 있어서도 고전(古典)으로 평가받는 레오 13세는 교회와 교황권을 다시 최고의 도덕적 위용(威容)으로까지 높였다.
[참고문헌] J.B. Schuster, Die Soziallehrs nach Leo XIII und pius XI, 1935 / P. Jostock, Die Sozialen Rundschreiben, Freiburg 1948 / E. Hocedez, Histoire de la theologie au XIX siecle III, Bruxelles-Paris 1947 / Lentner, Der Christ und der Staat. Grundsathzliche Feststellungen in den Rundsschreiben Leos XIII und ihre Gultigkeit fur die Gegenwart, Wien 1952.
출처 :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dic_view.asp?ctxtIdNum=4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