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소리
입력 2013-09-09 06:56:36l수정 2013-09-09 07:58:57
예상했던 그대로다. 국회가 이석기 의원 체포에 동의해주면 반대급부로 국정원 개혁 국면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국정원이 정치를 주도하는 유신통치가 재림하리라는 예측은 한치의 어긋남 없이 실현되고 있다.
새누리당은 관 속에 들어갔던 이석기 김재연 의원 자격 심사를 다시 꺼냈고, 소속 의원 153명 전원의 서명을 받아 이석기 의원 제명안을 제출하여 민주당을 압박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민주당의 국정원 개혁 요구를 일축하며 작년 선거연대로 종북세력을 국회로 진입시킨 민주당의 반성문 제출을 요구했다. 법무부는 차관 직속으로 '위헌정당·단체 관련 대책 TF'를 구성하여 청와대의 의도가 통합진보당 해산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도 이전의 공안 조작사건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혐의 입증을 자신한다던 국정원과 검찰은 수사가 아니라 언론플레이만 하고 있다. 이 의원이 묵비하고 있다는 것을 언론에 흘리고 언론은 그것도 뉴스감이라고 중계한다. 피의자의 기본권인 묵비권조차 뉴스가 되는 세상이다. 자백하면 공소보류 검토, 관련자 80여명 소환 예정, 김미희 김재연 의원 소환 임박 등의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 내란죄 입증에 자신이 없었던지 뜬금없이 여적죄 적용을 검토 중이라고 흘렸다가 한나절 만에 여적죄 적용은 않기로 했다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러다간 도대체 피의자들을 무슨 죄명으로 기소한다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여론재판으로 일단 구속부터 시켜놓았으나 혐의 입증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황당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매카시 선풍이 불고 있다. 정해걸 새누리당 실버대책위원장은 이 의원 체포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은 31명의 동료의원들에 대해 “국회의원의 10%가 넘는 31명이 종북 아니면 간첩들”이라고 비난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누드 사진이나 감상하던 주제에 심재철 의원까지 나서서 이 의원 제명을 외치고 있다. 새누리당의 매카시 선풍에 맞춰 보수단체들은 백색테러로 답하고 있다. 상이군경회 회원들이 통합진보당사에 난입하여 당직자를 폭행하더니, 고엽제전우회는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지역사무실을 급습해 '종북이 아니라면 확약서를 쓰라'며 협박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서울시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추적 60분>이 방영 연기된 데 이어,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가 상영 이틀 만에 상영 중단되었다. 개봉관에서 상영 중이던 영화가 갑자기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사태는 군사독재 정권에서도 있어본 적이 없는 사상초유의 일이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전면 부정되는데도 언론과 지식인들의 비겁과 침묵이 지속되고 있다. 무죄 추정의 원칙, 법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 사법부의 독립을 부정하는 피의사실 공표 및 공무상 비밀 누설에 대해 떳떳하고 당당하게 비판하는 언론과 지식인이 드물다. 설사 발언한다 해도 “나는 이석기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지만”, “경기동부의 낡은 진보는 잘못된 것이지만”라는 단서와 사족을 반드시 달아야 하는 자기 검열이 보편화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행태는 임기 초기라는 점이 다를 뿐 유신독재나 전두환 독재 말기와 다르지 않다. 1979년 김영삼 의원은 “미국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라는 인터뷰 내용을 빌미로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제명당했다. 1986년 신민당 유성환 의원은 “우리나라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는 국회에서의 발언 때문에 구속되었다. 국회의원의 면책특권 따윈 깡그리 무시되었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야당이 야성을 상실한 것이다. 1979년 김영삼 제명에 신민당은 의원직 총사퇴로 맞섰고, 1986년 신민당은 유성환 의원 체포 동의를 거부하여 민정당이 독자 통과시켰다. 그러나 2013년 민주당은 체포 동의안에 부역하더니 종북 세력과 선을 긋는다며 청계광장 촛불에도 불참하고 대전역으로 내려갔다. 127명의 국회의원을 갖고도 2중대 취급을 당하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김영삼 제명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유신통치의 막을 내리게 했다. 유성환 의원이 제명당하고 다음 해 6월 항쟁이 일어나 전두환 독재가 종식되었다. 한국의 현대사는 독재정권의 공안탄압과 용공조작에 맞서 싸운 투쟁의 역사였다. 70~80년대에는 좌경용공으로, 90년대에는 친북좌파로, 현재는 종북으로 명칭을 달리하며 공안탄압을 해왔지만, 독재통치는 몰락했고 민주주의가 승리했다. 작금의 공안정국은 통합진보당에 국한된 탄압이 아니라 진보민주개혁세력 전반에 대한 탄압이다. 공안탄압에 안전지대는 없다. 분열은 죽음이고 단결이 살길이다. 뒷걸음질은 패배로 귀결되고 정면돌파만이 승리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