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장승배기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회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가 그리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녁밥 짓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나는 시골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유난히 크고 짙은 법이다.
소 먹이고 물장구치며 멱을 감던 어린 시절의 질펀한 추억들이 녹아있고 선대의 혼이 잠들어 있는 고향은 일상에 지친 마음을 안고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찾아가도 덥썩 손을 잡고 정겹게 반겨줄 것 같기에 영원한 어머니의 품이 아닌가 싶다.
반도의 대동맥인 태백산맥이 남으로 길게 흐르다가 낙동정맥으로 가지를 뻗어 팔공기맥으로 이어지고, 기맥은 다시 북으로 향하며 천천히 위천지맥을 이루다가 그 끝지점에 한 점 툭 던져진 만경산의 북편 자락이 바로 내 고향 생송이다.
지리적으로는 의성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팔공산과 화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200리(요즘 쓰면 안되는데 ㅋ) 먼 길을 거슬러 흐르다가 이곳에서 낙동강 본류와 만나 다시 남으로 흘러내리는 삼면이 온통 강으로 둘러쌓인 곳이다.
<우뚝 솟은 만경산>
낙동강의 3대 나룻터였던 유서 깊은 낙정 강나루가 있고, 용트림하는 낙동강의 물줄기는 여기서부터 더욱 넓고 깊게 큰 물구비를 이루며 흘러간다. 과거,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에 위치한 이곳은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와 관원의 행차가 유난히 많았고 남북 내왕의 길목이었기에 처참한 전쟁도 많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옛날 오가는 나그네들의 웅성거림이 들려 올 것도 같은데 지금은 과거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유원지의 번쩍이는 네온불빛만 요란하다.
강 언덕배기에는 유일하게 낙동강 칠백리의 굽이치는 물줄기를 바라보는 관수루가 있어 강변 절경이 빼어남을 자랑하고 푸른 강물은 용바위의 전설을 어슴프레 간직하고 있다. 한 겨울 추위로 시퍼런 강물이 꽁꽁 얼어버리면 소도 사람도 모두들 얼음 위로 빈동을 해서 강을 건너 다녔던 낙동강은 내 어린 시절의 숱한 추억과 애환이 숨어 있기도 하다.
동쪽으로는 위수강 너머 드넓은 안계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북으로는 낙동강 건너 삼백의 고장인 상주 땅 낙동이, 서쪽으로는 선비의 고장 선산이 지척에 있어 세 고을이 서로 손을 맞잡은듯하다.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만악산이라 불렸던 만경산을 정점으로 부채살 처럼 펼쳐진 단밀은 삼한시대에는 무동미지현이라 했고 전국에 있는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신라 35대 경덕왕16년. 757년)에 단밀현이라 하여 문소군의 소속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 이름이 그대로 이어지다가 1018년 현종 때에 상주목의 속현으로 된 후,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지금의 단밀현으로 다시 바뀌었다. 1906년에는 비안군으로 잠시 이관되었다가 한.일합방 후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시에 단서면(부제, 구서, 기동, 속상, 속하, 용암, 선상, 선하, 지내, 주중, 주하, 위성)과 단남면(송상, 송중, 송하, 율리, 생물, 낙동(정),연산, 용미, 팔등)과 단동면(단곡, 신천, 도호동)이 합쳐져서 지금의 단밀면으로 개편되었다.
<소리없이 흘러가는 낙동강의 물구비>
내 고향 마을은 만경산의 북쪽 산자락과 낙동강 푸른 물결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송상, 새마을, 송현이 합쳐져서 하나의 행정 동명인 생송 1리를 이루었다. 생송이란 지명은 단남면의 소재지였던 생물의 생자와 송상의 송자를 따서 “생송”이라 이름 지어지고 400여년 전에 해주 오씨가 처음으로 개척했다고 전하며 처음에는 “송상”이라고 불렸었다.
마을입구에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의 장승이 있어 오가는 길손들의 이정표 역할을 톡톡히 했었기에 과거에는 「장승배기」라 불렸고 어른들은 아직도 장승배기라는 지명에 더 익숙해져 있다.
사방 십리에 걸쳐 있는 마을은 1920년에 개통된 안선지방도로가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고 이 길을 따라 크고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과거에는 큰 재를 두 개나 넘어야 면소재지까지 갈 수가 있었고 낙동강의 용바위 벼랑 끝을 곡예를 하듯이 지나야 타지로 나갈 수 있었기에 교통이 무척이나 불편했었다.
이로 인해 문화적인 혜택도 늦어 1976년에야 겨우 전기가 들어왔다. 말이 좋아서 의성사람이지 의성군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으로 생활권은 거의가 상주와 선산 쪽에 두고 있다. 지금은 강을 가로질러 길게 낙단교가 놓이고 적은 비에도 물에 잠겨 고립이 되던 단밀교가 잠수교 위에 새로 놓여 교통이 아주 편리해 졌다.
강을 끼고 있기에 유난히 안개가 짙고 겨울이면 칼날 같은 강바람이 불어와 무척이나 추운 곳이지만 내 고향은 충. 효. 열의 고장이다. 마을마다 효자각과 열녀문이 세워져 충의의 높은 뜻과 효행의 덕을 기리고 있으며 파리장서사건의 독립운동과 효행으로 이름난 조부의 효자각도 마을 한가운데에 자랑스럽게 서 있다.
<조부의 효자각>
고향마을은 현재 76세대에 214명이 대부분 논농사에 의존하고 있다. 특산물은 없어도 산간지방에서 수확한 쌀은 미질이 좋아 아주 맛이 있으며 깻잎, 가지, 고추 등을 많이 경작하고 있다. 말씨는 상주지방의 영향을 받아 말의 끝에 ″~여 ″자를 즐겨 붙여 쓰는 편이다.
명승지도 특별히 자랑할 만한 곳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두메산골이지만 내가 태어나고 내 유년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땀을 간직하고 있기에 내 고향 장승배기를 죽도록 사랑한다.(2008.08.08>
□ 단밀의 재(돌곡) 너머에서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
-생송 1리(송상, 새마을, 송현) : 권재일, 권용화, 권용운(망), 신호철, 조경수
-생송 2리(생물) : 김대섭
-생송 3리(율리) : 하성호
첫댓글 마치 고향에 온 듯한 착각을 할 정도로 잘 표현하였네 맛깔스러운 글과 사진으로 만경산을 보니 가슴이 쿵캉거리며 나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가네 고마우이 고향마을 올려주어 ~~~
친구~~ 내가 생각이 나는가????? 우린 만경산 자락에서 만경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고, 만경산을 놀이터 삼아 놀았고 또 만경산을 벼개삼아 베고 누워 잠을 자지 않았던가??? ㅎㅎ~~
이 사람 알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내 에구 이게 다 나이 먹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자네 나의 픔에서 편히쉬게나 ㅎㅎㅎ
세월속에 장사없고, 모든 것이 아삼~~ 하지 않으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거지.ㅎ~ 베낭에 물 한병~ 달랑 챙겨서 산으로 갈려고 했더니만, 오후부터 비가 많이 온대서 어릴적 시골에서 처럼 웃통 훌떡~ 벗어놓고 마누라가 타 주는 커피 한잔을 홀짝이며 이렇게 컴 앞에 앉아본다네. 오늘 따라 매미의 울음소리가 더 힘차게 들리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