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영화모임’ 10년, 즐겁고 유익한 만남
함께 본 영화 줄잡아 1백 30여 편, 때로는 야외 나들이도 즐겨
일요일에 만나 여가를 즐기기 어언 10년. 영화를 자주 본다고 ‘일요영화모임’으로 통했던 이 모임은 2008년 늦가을 말레이시아에서 손자를 돌보던 이상호 회우 귀국을 계기로 종로 3가의 ‘서울극장’ 또는 피카디리 극장이나, 실버 극장으로 탈바꿈한 명보극장 낙원극장 등에서 지용우 이상호 최귀조 정운종 회우 넷이서 영화를 감상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지용우 고문이 작고한 뒤로 매사에 역동적인 장 옥 회우가 합류해 모임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지만 말이 영화모임이지 볼만한 영화나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을 때는 점심을 같이하면서 이런 저런 세상이야기로 시간을 죽이거나 서울 근교 유원지 등으로 나들이 하는 재미가 마냥 쏠쏠하다.
심금 울린 ‘님 아 그 강을 건너지 마 오’
지금까지 화제의 개봉작만을 골라 본 영화는 최귀조 회우가 10년 동안 수첩에 꼼꼼히 기록해 놓은 영화제목만 해도 1백 30여 편, 돌이켜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우리들이 감상한 영화들을 나름대로 대별해 본다면 안보 경각심을 일깨운 ‘연평해전’ ‘인천상륙작전’ ‘태극기 휘날리며’ ‘강철비’ 등에서부터 위안부등 한‧일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 ‘귀향’ ‘덕혜옹주’ ‘박 열’ ‘밀정’ ‘암살’ ‘명량해전’, 아이 캔 스피크(나문희 주연), 역사의 현장을 재조명한 ‘왕이 된 남자 광해’ ‘사도세자’ ‘왕자의 난’등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고민과 결정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한 ‘남한산성’은 우리가 당면한 오늘의 안보·외교상황에서 무엇이 정답인지의 문제와 보는 시각에 따른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의 모순된 단면을 극명하게 묘사한 영화였다. 안전사고를 다룬 ‘판도라’나 ‘타워링’ ‘타이타닉호의 최후‘ 등도 기억에 새롭고 특별히 눈시울을 적신 영화 ‘워낭소리’ ‘님 아, 그 강을 건너지 마 오’ ‘죽여주는 여자’ ‘덕구’는 생각만 해도 진한 감동이 가슴에 용솟음친다.
76년을 함께 산 노부부의 삶이 묻어난 ‘님 아, 그 강을 건너지 마 오’ 는 핵가족시대 효도의 개념이 사라진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단순한 노부부의 삶과 사랑과 이별의 의미를 넘어 사회에 던지는 진솔한 메시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원로 배우 이순재와 아역 배우 정지훈 군의 연기가 돋보인 ‘덕구’도 실화를 영화화한 다큐로 우리 사회 다문화 가정의 애환을 극명하게 대변해 주면서 끝내 손수건을 꺼내 들게 한다.
‘죽여주는 여자’, 노년과 죽음 앞에 장사 없어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하며 근근이 몸을 팔며 살아가는 65세의 ‘박카스 할머니’ 소영(윤여정 주연)이 한 때 그의 단골 고객이자, 뇌졸중으로 쓰러진 송 노인으로부터 자신을 죽여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고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다 그를 진짜 죽여주면서 얘기가 전개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고령화 사회 임종이 눈에 보이는 노인들과 70살이 가깝도록 몸을 팔며 살아가는 가난한 여자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닥쳐올 노년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한다.
또한 가슴 아픈 실화를 바탕으로 한 공지영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도가니’, 따뜻하고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며 관객을 사로잡은 ‘수상한 그녀’ ‘라라랜드’, 우리시대 정치적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 ‘노무현입니다’ ‘택시운전사’ ‘1987년’‚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변호사’ ‘부러진 화살’ ‘재심‘, 한동안 화제를 모았던 ‘국가대표2’ ‘히말라야’ ‘설국’ ‘부산행’ ‘국제시장’, 불법선거운동을 다룬 ‘특별시민, 권선징악의 대명사 ’신과 함께‘‘등 일일이 논평하기로 들면 책 몇 권을 써도 모자랄 것 같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 살인 장면이 전부인 ‘아저씨’, ‘살인자’ 속고 속여야 정상인 사기꾼 세계를 적나라하게 그린 ‘꾼’은 생각할수록 입맛이 쓰다.
우리가 본 영화 중엔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나 ‘저것도 영화라고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영화도 없지 않아 보고 난 뒤의 실망감으로 성토의 대상이 된 영화도 적지 않다. 젊은이 취향엔 맞았는지 모르나 우리들 노인 세대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누가 봐도 반 교육적인 영화를 보고난 뒤엔 어김없이 혹평이 뒤따랐다. 영화관은 때로 혹한이나 폭염을 피할 수 있어 좋았고 적당히 오수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도 적격이라면 지나친 비유일까. 사실 집에서 TV 리모컨이나 들볶고 무료하게 소일하기보다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나 엔도르핀 생산 면에서 유익한 여가 선용임에 틀림없다.
그동안 시간이 안 맞아 함께 보지 못하고 혼자 본 영화도 꽤 있다. 국민의 알권리를 강력하게 표출시킨 ‘더 포스트’, 히틀러와의 타협을 과감히 배척한 처칠수상의 결단력, 그가 의회에서 행한 명연설이 돋보인 ‘다키스트 아워’ 는 정말 안보곤 후회막급일 뻔한 외화였다.
1만 원 짜리 한 장이면 족한 힐링 요법에 심취
마음 맞는 사람과 영화를 본다는 것은 서로가 좋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어 즐겁다. 혼자서는 싫증나고 집중력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공유 하며 보고 즐기게 되면 자연 재미도 배가 되게 마련이다.
영화 속 폭력이나 잔인한 살인 장면을 보고 함께 분노하거나 지나친 애정표시에 눈살을 찌푸리며 가벼운 흥분을 느낄 때도 없지 않았지만 우리들 모임이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함께 시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자화자찬 같지만 우리의 만남은 우정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 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데 드는 경비가 궁금할지 모르나 대체로 1만 원 짜리 한 장이면 족하다. 일반극장 영화 관람료 4천원(실버극장은 2천원)에 점심 커피 합쳐 6천 원, 야외로 번지거나 노래방 신세를 질 때는 추가 비용을 감내해야 하지만 언제나 더치페이, 장시간 힐링한 보람으로 치면 분명 남는 장사가 아닌가.
야외 나들이로 즐겨 찾은 곳은 이상호 회우의 풍부한 관광지 정보가 주효했다. 두물머리, 세미원, 서울의 숲 공원, 자작나무 숲길, 송도, 월미도 등 서울 근교 나들이에서부터 풍물시장과 재래시장 투어로 보고 맛 본 즐거움은 노년의 여유와 풍요로움 바로 그것이었다.
가끔 호프집을 선호하거나 노래방으로 직행하기를 강권(?)했던 지용우 선배,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전선야곡’이나 ‘바닷가에서’, ‘오 솔레미오’ 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끝으로 지용우 선배가 2015년 어느 날 ‘서울의 숲 공원’을 다녀온 뒤 나에게 보내 온 ‘숲으로 오라’ 詩 한 수를 소개한다. “그대여, 세상사 시끄럽고 권태롭거든 숲으로 오라/ 새벽이슬에 흠뻑 젖은 풀 섭 오솔길 헤치며 오라/천고의 침묵을 간직한 숲은 그대 마음의 안식처/숲에는 야생화 향기가 있고 물소리 교향악이 있다/그대여, 정든 님과 헤어져 영혼이 외롭거든 숲으로 오라/ 대신 숲의 妖精이 그대를 그 너그러운 품에 안아 주리라/ 숲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구별 없이 그대를 맞아 주리라
(글 정운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