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운의 세대, '도전 5강' 그리고 서능욱.
승부의 세계는 패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패배한 자에게 상처를 핥으며 그 아픔을 곱씹을 여유는 주어질지언정 그것을 자신의 실력 이외의 탓으로 돌릴 권리는 없다. 항상 자신을 주시하며 비수를 꽂을 틈을 엿보는 도전자들에 대한 강박과 더 이상 넘어설 고지도, 목표도 없는 고독에 시달리는 것이 1인자의 숙명이자 고통이라지만, 정상에 오르지 못한 많은 이들은 그러한 1인자의 고충은 천하제일인만이 말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70년대의 춘추전국시대 이후 약 15년간 조훈현과 서봉수의 양대 산맥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던 바둑계의 판도는 오랜 기간 희대의 라이벌전 구도로 많은 이들을 열광시켰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열흘동안 메뉴가 그 밥에 그 나물이라면 식상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한동안 게임계의 최고 라이벌이었던 임요환 선수와 홍진호 선수의 결승전이 최고의 흥행카드였다지만 세 선수가 10시즌 정도 연속으로 결승에서 맞붙었다면 아마 '고마 해라, 많이 묵었다아이가'라는 생각을 하는 팬들이 많아지는게 당연한 일이겠다. 계속 똑같은 메뉴에 질리게 되면 색다른 다른 메뉴를 찾아나서는 것은 80년대의 한국의 바둑계에서도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이들이 소위 '도전 5강'으로 불리웠던, 지금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로 본선 무대에서도 이름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 기사들이며, 서능욱, 장수영, 김수장, 강훈, 백성호 등의 '도전 5강' 가운데 독특한 기풍과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산 13회의 준우승으로 가장 많이 정상의 문턱에서 좌절하여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이가 바로 서능욱 9단이다. '도전 5강'의 대부분 기사들이 50년대 중후반을 출생연도로 하고 있는 이들이며, 장수영 9단은 오히려 조·서에 비해 한 살이 많은 52년생이니 도전5강을 조훈현과 서봉수의 아랫 세대로 보기는 힘들며, 세대로 보자면 '도전'의 지위보다는 같이 천하를 놓고 다투어야할 위치에 있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조훈현과 서봉수가 워낙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기재들이다보니 당시의 기준으로 정상적인 코스를 밟아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을 거쳐서 도전기에도 간혹 모습을 드러냈던 서능욱 등의 도전 5강은 후발주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다. 이와 같은 '도전 5강'의 대두는 조훈현과 서봉수의 백년전쟁에 슬슬 식상함을 느끼던 바둑팬들에게는 새로운 활력소와 같은 신선함을 던져주었을지 모르지만 본인들은 스스로의 전성기가 조·서의 전성시대와 맞물렸던 것이 불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최소한 그들을 바라보는 팬들 가운데에서 특히 도전 5강의 선두주자였던 서능욱 9단을 바라볼 때마다 그런 아쉬움을 느낀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으리라고 짐작한다.
- 속기의 천재, 서능욱.
서능욱 9단은 1958년생, 조훈현 서봉수와 5살 터울을 지고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국민학생이 바둑을 좀 잘 둔다 싶으면 주위에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시대이긴 하지만, 서능욱 역시 아버지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운 것 치고는 그 성장 속도가 놀랍도록 빨라서 탁월한 기재로 촉망받았으며, 정식으로 바둑을 공부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에 입단의 관문을 뚫었다.
서능욱은 젊은 시절부터 그 무시무시한 속기로 유명했다. 물론 현재 정상급 기사인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이세돌과 같은 기사들 역시 제한시간이 긴 바둑, 짧은 바둑을 가리지 않고 좋은 성적을 내긴 하지만, 서능욱의 속기는 과거 속기파의 대명사였던 정창현, 김희중과 궤를 같이 하는, 제한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거의 무조건적인 속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70년대 정창현 7단이 김희중 9단이 전성기를 보낼 무렵 두 기사의 바둑은 누가 이기는가보다 누가 더 빨리 두는가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며, 심하면 아침 9시에 시작한 바둑이 불과 한시간만에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다른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를 알 수 있겠다. 속사수들의 쌍권총 결투를 구경하는 듯 했다고나 할까.
서능욱도 이에 비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 속기였다. 연구생 시절에는 심지어 하루에 바둑을 몇 판이나 둘 수 있나 시험을 해서 40판을 넘게 두었다는 일화도 있고, 서능욱 9단이 바둑팬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까닭 가운데 하나가 속기전인 KBS 바둑왕전에서 특히 강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뛰어난 속기실력은 서능욱의 뛰어난 감각과 빠른 두뇌회전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예이긴 하지만, 습관화된 속기는 서능욱의 기사생활 내내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발목을 잡아채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 반상의 손오공, 서능욱 9단
본인이 텔레비전으로 서능욱 9단을 처음 봤던 어린 시절에 해설자들이 항상 언급했던 서능욱 9단의 그 전투적 기풍이 이미지화되지 않아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특유의 검미(劍眉)와 날카로운 눈으로 그 날카로운 행마와 전투력을 이미지화했던 조훈현 9단과 웬지 어눌해보이지만 승부에 임한 현장에서는 눈에서 조용히 안광을 뿜어내며 아우라로 주변을 압도했던 서봉수 9단과는 달리 서능욱 9단은 그저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인데, 바둑판위에서는 사나운 야생마로 돌변해서 끊을 구석만 보이면 상대의 돌을 모조리 끊어 반상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고 다니는 모습이 도저히 매치가 안 되었던 것이겠다.
전투에 능한 기사는 많다. 서능욱은 사실 그 전투력만 놓고 보자면 초일류로서 한시대를 제패했던 한국의 조훈현이나 일본의 사카다, 조치훈에 비교하면 그 실력에 있어서는 떨어질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능욱의 싸움바둑이 많은 바둑팬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이유는 서능욱의 '호전성' 그 자체에서 이유를 찾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력한 전투력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기사들이 반상에서 펼치는 치열한 전투는 그 목적이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맞추어져 있다면, 서능욱의 전투는 싸움 그 자체를 위한 전투라고 본다면 본인만의 착각이라는 핀잔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한번한번의 승부로 결정되는 승리와 패배에 자신의 생계와 명예를 걸어야 하는 프로의 세게에서 그런 자세로 서능욱 9단이 지금까지 올린 정도의 성적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는 지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본인은 서능욱의 기풍이 70년대 조훈현 서봉수의 등장 이전까지 존재했던 한국바둑계의 '낭만사조적' 분위기를 많이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국 전날에 동료기사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아침 대국장으로 황급히 들어와 바둑을 두는 일도 많았으며, 얼마 되지 않는 우승 상금으로 잔치 한번 열고 나면 남는게 거의 없었다던 가난했던 바둑기사들의 이야기, 5번승부의 마지막 판의 불과 80여수가 진행된 상황에서 어차피 더 두어봤자 자신의 맘에 드는 바둑을 두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선선히 돌을 거두기도 했다는 초창기 한국바둑계의 모습은 어쩌면 승부를 위한 바둑, 그리고 프로기사의 길이었다기보다는 바둑 그 자체와 그에 얽혀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풍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서능욱은 기풍의 측면에서 이러한 낭만사조적인 경향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무난히 이끌 수 있지만, 싸움을 통해서도 승리할 수 있는 바둑에서 서능욱은 언제나 전투쪽을 선택한다. 심지어는 상대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쉽게 승리로 갈 수 있는 바둑에서 어려운 난전을 선택해 국면을 혼미하게 만드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서능욱의 바둑에서 팬들이 열광하는 부분은 바로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관전하는 입장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투의 가시밭길을 걸어 결국 상대를 KO시키는 '승부를 접어놓는' 호전성이 아닐까. 이런 서능욱의 여의봉에 80년대의 쌍두마차였던 조훈현과 서봉수도 간혹 나가떨어졌으니, 그 전투력 또한 당대의 초일류에 결코 크게 뒤처지는 바둑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 무관(無冠)의 '서능욱 불가사의'
일본 바둑계에는 '가지와라 불가사의'라는 것이 있다. 과거에 탁월한 실력과 독설에 가까운 언사로 당시의 최고수로 꼽히는 기사들의 바둑까지도 혹평하기로 유명했던 가지와라 다케오 9단이 정작 본인은 타이틀을 한 개도 따내지 못한 것을 일컬어 세인들이 '가지와라 불가사의'라고 부른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무관의 제왕'으로 첫손에 꼽혀왔던 기사가 서능욱 9단이다. 통산 준우승만 13회. 그 가운데 11번이 조훈현과의 결승전이었으며, 나머지 2회는 어느새 서능욱 등 도전 5강을 앞질러 저만치 앞으로 달아나버린 이창호와의 대결이었다. 79년의 최강자전에서 조훈현 9단에게 패배한 이후로 91년 조훈현 9단에게 다시 0:3으로 완봉당할 때까지 서능욱은 1년에 한번 꼴로 계속해서 도전무대에 명함을 내밀며 그토록 염원하던 타이틀홀더의 문턱까지 올라갔지만, 1인자 사제인 조훈현-이창호의 벽은 높고도 단단했다. 함께 '도전 5강'의 일원이었던 강훈 9단이 도전 5강 가운데 유일하게 박카스배에서 우승해서 본격기전의 선수권자가 되었던 적이 있지만, 이 대회에서 조·서가 모두 초반 탈락한 탓에 김인 9단과 결승을 치렀던 것을 생각하면 결국 서능욱을 비롯한 도전 5강은 조훈현-이창호의 벽을 넘어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도전 5강 가운데 가장 많은 인기를 모았으며, 가장 많은 준우승 기록을 남긴 서능욱 9단에 대한 팬들의 아쉬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부처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 '손오공' 서능욱의 무관세월은 '가지와라 불가사의'의 한국판인 '서능욱 불가사의'라는 말로 불리우기도 했다.
서능욱의 무관기록의 원인을 생각할 때, 물론 조훈현-서봉수의 이중 방어선과 이창호라는 벽을 서능욱이 뚫기에 역부족이었다는 분석이 가장 타당성이 있겠지만, 앞서도 언급했던 서능욱의 기풍상 특성과 속기로 인한 '덜컥수'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손부터 나가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바둑통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오른손에 염주를 쥐고 바둑을 두기까지 했겠는가. 조훈현 9단과의 도전기에서 돌을 반상에 갖다놓고서 '아차'하면서 돌을 거두어들였다가 다시 제자리에 원위치시킨 적까지 있었다고 하니, 꽤나 고질적인 습관이었으며, 결국 이런 내적인 요소 역시 서능욱이 자신의 이력에 '우승'이라는 두 글자를 새길 수 없었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다.
- 서능욱 9단 : 임정호, 김동준
이미 서술했듯이, 프로기사들의 바둑을 보다보면, 승부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승부보다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 빈삼각과 같은 우형은 절대 두지 않는다는 '미학(美學)' 오다케 히데오 9단이나 바둑의 품격과 예의, 두터움을 중시하는 김인 9단과 같은 기사들이 범인과는 다른 구도(求道)의 이미지를 준다면, 서능욱 9단은 전투적인 기풍이되, 승리를 위한 전투라기보다는 그의 바둑에서 느껴지는 공격성은 타고난 호전성을 바탕으로한 전투 그 자체를 위한 싸움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쉴새없이 끊고 붙이고 젖히는 혼미한 싸움바둑, 끊임 없는 전투를 사랑하는 스타일리스트, 그것이 서능욱 9단의 기풍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분들이 임정호, 김동준 선수를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김동준 선수는 지금 해설자로서 활동하고 있어서 방송경기에서 선수로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임정호 선수는 지금까지도 가난하게 경기를 운영하는 가운데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저돌적인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으로 팬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김동준 해설위원의 현역 시절이나 임정호 선수가 그런 공격적인 경기 운영이 가장 승률면에서 좋은 결과를 보장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유보다 자신의 그런 스타일 자체를 고수하고자 하는 고집을 느꼈던 사람이 비단 본인만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어떻게 들으면 악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볼 때 서능욱 9단은 아마 노타이틀의 경력으로 기사생활을 계속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그의 이름 석 자를 본선멤버의 명단에서 찾아보기도 쉬운 일은 아닌데다가, 이제 서능욱이 마지막으로 타이틀 무대를 밟아본 이후 강산이 한번 변할 시간이 흘렀으니 세월이 더 지난다고 해도 그리 크게 변할 것은 없을 것이며, 서능욱 9단 본인도 이제 승부시합보다는 다른 방면으로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지금도 김동준 선수의 현역시절 경기모습과 지금은 성적이 그렇게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임정호 선수의 게임 때마다 열광하는 올드팬들을 볼 때, 서능욱 9단의 싸움바둑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바둑팬들 역시 적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호쾌한 싸움바둑, 속사의 명수, 그러나 2% 부족한 그 무언가 때문에 항상 왕좌 앞에서 좌절하곤 했던 서능욱 9단. 그만이 가졌던 독특한 매력은 아마 어떤 정상급 기사도 소유하기 힘든 것이 아니었을까.
첫댓글 서능욱 사범님과 김동준 선수도 해설 분야에서도 활약하시는 것도 공통점이네요. 인터넷으로 서능욱 사범님 해설 들으면 10초에 한번꼴로 웃게 됩니다. ㅋㅋ
속기에따르는 덜컥수가 문제겠지요.속기에 강한 기사는 감각이 좋은 반면...덜컥수라는 뗄래야 뗄수없는 불과분의 관계인것 같습니다.감각과 덜컥수...영원한 미제일듯 싶구요.감각이 좋으면서 완벽한 수를 구사하면 좋을듯 한데...그게 싶지 않을듯...하지만,아마들에겐 이런 분의 바둑이 재밌죠.서능욱9단 화이팅^*^
아..손오공이란 닉네임이...부처님손바닥안의 손오공이란 뜻으로도 해석될수가 있군요..새삼 깨달았습니다. 서능욱9단..아쉽지요..음. 하필 자길 가장 많이 결승에서 이겻던 상대가 젤 친한기사중 하나인 조훈현9단이라니..흐
냉철한 형세판단과 한집두집 치밀한 계산의 바둑도 좋지만, 아마로서 저런 낭만이 넘치는 바둑을 두고 싶습니다. (실력이 안되서 못두고 있습니다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