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면에서 보성과 경계를 이룬 예재(禮峙) 를 바라보고 가노라면 쌍봉(雙峰) 이란 마을이 있다. 여기서 산골을 따라 수려(秀麗) 한 산세를 완상(玩賞) 하며 6㎞쯤 올라가면 골 깊숙한 곳에 아담한 절이 논위에 터를 잡고 있다. 여기가 국보와 문화재로 지정을 받고 있는 쌍봉사(雙峰寺) 이다. 신라때 시호가 철감선사(澈鑑禪師) 란 분이 있었는데 이는 서기 798년대의 스님으로 속성(俗姓) 은 박씨요 법호(法號) 는 쌍봉(雙峰) 이며 신라 경문왕(景文王) 께서 시호를 하사하였다. 한주(漢州) 땅 양반의 후예로서 18세에 출가하여 당나라에 가 남천보원(南天輔元) 에 법을 받은 고승으로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세상에 법을 폈다. 「 중생을 깨우쳐 주어야 겠다. 」 고 생각하여 법도량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살피다가 우연히 지금의 이양면(梨陽面) 증리(甑里) 구역인 중조산을 찾게 되었다. 철감선사는 능주 고을을 들어서서 살펴보니 이양면의 산수가 역류로 남출북류(南出北流) 함을 기이하게 여겨 찾아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실인즉 용이 구름을 타고 하강하는 듯한 기상이었다. 철감선사는 마음이 밝아오고 정신이 다시 깨우쳐지는 듯 하여 지팡이를 끌고 장엄한 용세를 따라 한없이 찾아 올라가다 지금의 쌍봉사터에 이르렀다. 그 깊고 깊은 산골에 기와집으로 성쌓듯 둘러놓고 진시황의 아방궁을 연상케하는 만금 부자가 터를 지키고 사는 것이었다. 이를 본 철감선사는 크게 실망했다. 「 부자(富者) 가 왜 이 깊은 곳까지 찾아와 터를 잡았을고?」 궁금하게 생각하여 그 집을 찾아들어 하룻밤 쉬어 갈 심산으로 주인을 찾았다. 「 여보시오, 주인나리,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만 쉬어 갑시다.」 얼굴이 관운장처럼 잘 생긴 주인은 「 그렇게 하시오.」 쾌히 승락을 하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 좌우 산세를 살펴보니 뒷산이 사자가 누워있는 형상이오 집터는 범선(帆船) 의 형국으로 되어있어 필시 물이 귀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집의 모든 거동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과연 종들이 물을 대문 밖에까지 나가 산골의 흘러가는 물을 물통에 짊어지고 들어왔다. 선사는 그것을 보고 은근하게 물었다. 「 여보 주인, 저 머슴은 아침에 무슨 일을 저렇게 합니까?」 「 예, 다름아니라 여기에 먹을 물이 귀하여 시냇물을 먹고 삽니다. 」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 여기는 속가의 터가 아니라 불가의 터입니다. 이 터는 속인보다 도인을 배출할 도량이오니 불가에 돌려주시면 제가 다시 좋은 터를 잡아 드리겠읍니다. 이곳은 물이 귀하여도 여기에 샘을 파서는 절대 폐망하는 법입니다.」 하였다. 과연 옛날부터 우물을 파 보았으나 물이 좋지 않고 집안에 큰 재앙과 괴변의 흉사가 그치질 않았던 터였다. 그래서 샘을 다시 메워버리고 지금은 산골물을 먹고 있는 형편이었다. 주인은 귀가 번쩍 띄어 「 대사님! 좋은 터가 있읍니까?」 「 예. 들어오는 길가에 좋은 터를 보아 놓았읍니다. 부귀는 물론 물도 좋을 것입니다. 」 주인은 그 다음날 아침을 먹고 대사의 인도로 쌍봉마을편으로 내려갔다. 그 터를 찾아가 주위를 살펴보니 역시 마음에 흡족하게 생각되어 터를 다듬고 기와집을 지으며 우물을 파보니 과연 옥수가 솟아 올랐다. 부자는 그뒤 철감선사를 지극히 받들면서 절을 세우는데 모든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철감선사는 지형이 범주(帆舟) 형이므로 돗대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대웅전을 부득히 삼층 목조건물로 높이 세워 범선에 돗대를 걸었다. 배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배가 갈수 없으므로 그 터에 샘을 파면 흉변이 일어나 폐망하게 된다. 철감선사는 뒤의 지세(地勢) 가 사자형국(獅子形局) 인고로 사자의 입을 찾아갔다. 다른 곳에는 물이 없으나 사자의 입에는 항상 침이 마르지 않을 것임으로 자세히 살펴 사자의 혀를 찾아가 땅을 파 보았는데 신기하게 여기서는 맑은 물이 솟아났다. 이 물로써 식수를하며 동서남북에 각각 암자를 짓고 선객(禪客) 들의 수도처로 정하니 사문(沙門) 도반(道伴) 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기록에는 근 칠십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며 그중 명부전(冥府殿) 의 십이대왕은 모두 인도에서 모셔와 정교하고, 채색을 중국의 물감을 사용하여 우아한 예술품이었다고 한다. 현재 국보 제287호 288호로 지정되어 있는 철감선사탑과 탑비는 문양(紋樣) 의 조각이 가히 신공(神功) 이라 할 수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사를 금치 못하게 한다. 이조말엽의 큰 스님이신 천봉(天鳳) 스님께서 이 절에 잠시 머무르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 이 대웅전이 세번 칡덩굴로 덮어야 이 법당에 목탁소리가 그치지 않으리라 .」 하셨다. 이 말씀은 곧 큰 난을 세번 겪어 이 절이 비어버린 다음에는 세상이 화평하여 쌍봉사가 융성하리라는 뜻이었다. 과연 한말의 왜란 때 절이 비어버렸는데 어느 해 봄에 전 대통령 윤보선(尹潽善) 씨의 조부께서 우연히 화순에까지 산렵을 나와 이 쌍봉사 골짜기를 헤매다 노루 한마리를 쫓게되어 노루를 따라 뒤쫓아 가다보니 이 노루가 칡덩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칡덩굴을 젖혀 살펴보니 부처님이 모셔 계시는 법당이었다. 이분은 깜짝놀라 「 이것은 여기 모신 부처님을 보살펴주도록 불보살께서 저에게 계시를 내려 주신 것이다. 」 라고 생각되어 이 절을 크게 중창(重創) 하였다. 그 공덕으로 윤씨 비각이 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비만 남아 있다. 그뒤로도 과연 천봉스님의 예언과 같이 6.25동란까지 세번이나 대웅전이 칡덩굴로 덮혔다고 한다. 지금도 이 부근에는 칡덩굴이 유달리 많아 칡덩굴 없애기에 여름 일손이 바쁘다고 한다. 이젠 지난 경인년처럼 슬픈 전쟁의 비극은 없을련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될 뿐이다. 이조 세종대왕께서 전라도 능성 쌍봉사(全羅道綾城雙峰寺) 라 어필사액(御筆賜額) 하였으나 근래에 분실되었고 본도 관찰사 김방(金倣) 의 원력으로 삼창을 하여 여러 스님들이 영정을 모셔왔는데 병화에 소실되었다. 지금도 옛 남암자리에는 기왓장이 많이 남아 남암의 약수는 성시(盛市) 를 이룬 환자로부터 신통한 영약이 되었다고 하던데 이제는 사람들의 발자취는 찾을 길 없고 잡목과 갈대잎만 우거져 있다. 절을 찾아 들어가는 길손에게 옛 장자(부자) 가 살던 터라고 쌍봉마을 늙은이들은 지금도 손으로 가르쳐 말한다. 고요한 산골에 무심한 공양주 보살의 빨래방망이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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