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아직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다. 무려 12만여 명에 달하는 파월장병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한부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은 점점 무뎌져 가고, 심지어 싸늘한 시선마저 등장한다. <월간중앙>이 고엽제 피해의 실상과 문제점을 연속 2회에 걸쳐 다룬다.
"미군이 비행기로 물을 뿌리는 줄로만 알았죠. 너무 더우니 부대원 모두 뛰쳐나와 철모고 방탄조끼고 다 벗어 던지고 발가벗은 채 맞은 겁니다. 시원하니까….” 서울 구로구에 사는 김만용(63) 씨는 몸에 온갖 병을 달고 산다. 고혈압·허혈성심질환·지루성피부염….
고통이 극심할 때는 쓰러져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유전질환을 안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스물한 살 청년시절에는 밀림 속 전장을 누비며 뛰어다닐 정도로 건강했다. 그는 파월(派越) 참전용사다. 적의 총탄이 아닌 ‘고엽제’라는 무시무시한 악마와 40년 넘게 싸우는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다.
베트남전 당시 맹독성 물질인 ‘다이옥신’을 함유한 고엽제를 온 몸으로 받아냈기 때문이다.<140쪽 박스기사 참조> 김씨의 사연은 12만여 명에 달한다는 고엽제 피해자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광복 이듬해 전라남도 곡성의 찢어지게 가난한 한 농가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진천농고에 다니다 2년 만에 중퇴하고 작은아버지를 따라 제천·음성·괴산·증평 등지의 5일장을 쫓아다니며 보따리장사를 했다. 큰아들로서 집안 살림은 물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다.
그러던 그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66년 6월. 그때 직선거리로만 3,578km 떨어진 먼 나라 베트남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소위 베트남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미국을 포함한 7개국이 파병한 국제전으로,무려 10년 가까이 계속됐다.
베트남에서 번 달러로 가족 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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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부대원들이 UH-1 헬기를 이용해 적진에 투입되고 있다.
1964년 5월9일 미국 정부로부터 병력 지원 요청을 받은 한국정부는 같은 해 7월31일 국회 동의를 얻어 파병을 확정했다.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을 포함한 군사원조단 140명을 시작으로 비전투전력(비둘기부대)이 급파됐고, 월남정부의 전투부대 파병 요청에 따라 1965년 10월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가 베트남 중부 퀴논 해안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어 주월한국군사령부 아래 육군 맹호부대(수도사단)와 백마부대(제9사단), 해군 백구부대(해군수송전대), 공군 은마부대(공군지원단), 십자성부대(100군수사령부) 등이 8년8개월 동안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총인원 32만여 명이었다.
입대 6개월차 김 일병 역시 전투의 한복판에 설 수밖에 없었다. “논산훈련소에서 후반기교육(박격포)까지 마치고 15사단으로 발령받았어요. 사단 보충대에 있는데, 1주일 지났을까? 인사장교가 부르더군요. ‘월남에 안 가겠느냐고’. 일병 진급하자마자 차출됐습니다.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서 파월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소속 사단 번호가 홀수면 백마부대, 짝수면 맹호부대로 나눴죠. 저는 백마부대로 배속됐습니다.”
그는 차출되기도 전에 이미 참전을 자원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외삼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목이 메이는 듯 마른 침을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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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0월 맹호부대 파월 환송식에서 한 군인이 아이를 안고 있다.
“외할머니께서 한 달에 한 번씩 면사무소에 가셔서 쌀이며 밀가루를 가져오시더군요. 왜 그런가 나중에 알고 보니 돌아가신 외삼촌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군에 가서 내가 죽으면 내 부모·형제가 살겠구나 싶었죠. 마침 입대할 즈음 파월이 이뤄지고 있었으니 그 생각이 더 간절했죠. 그래서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베트남에 가려고 했어요.”
1966년 12월 ‘백마 2진’을 태우고 부산항을 출발한 대형 수송선이 도착한 곳은 냐짱(나트랑)항. 훈련소에서 총 몇 방 당겨본 것이 전부인 김 일병의 귀에 밤새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이튿날 그는 냐짱 남쪽에 위치한 캄란 주둔 30연대로 향했다. 백마 30연대는 동보산전투로 유명한 일명 ‘동보부대’였다. 그는 보충대에서 3일을 보낸 후 1대대 1중대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1주일간 무전교육을 받자마자 적의 제1 타깃인 무전병으로 실전투입됐다. 고된 나날이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바로 고국에 있는 가족을 위해서였다.
“베트남에 있을 당시 환율이 1달러당 270원이었어요. 쌀 한 가마에 4,300원(약 16달러) 정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병장의 경우 많이 받는 달(31일 복무 기준)은 월급을 57달러까지 받았죠. 수당을 더 받게끔 진급은 빨리 시켜주는 편이었죠. 거기다 1년 연장복무를 신청하면 ‘고국휴가’를 보내주는데, 그 휴가를 가는 대신 휴가비 100달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두 번 연장해 3년간 베트남에 있었는데, 휴가를 한번도 안 가고 몽땅 현금으로 받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중 담뱃값을 제한 나머지를 모두 고향집에 부쳤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이 굶주리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죠.”
베트남에서 송금한 돈으로 그의 가족은 논 9마지기(5,950㎡)와 임야 1.5정(1만4,876㎡)이라는 삶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건 사투였지만 참전은 그에게 값진 경험이기도 했다. 전쟁을 치른 그로서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1969년 12월 제대한 그는 충청북도 진천의 한 정미소에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조금씩 고엽제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현상이 신체 일부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1974년 결혼할 즈음에는 머리카락을 못 감을 정도로 두피에서 진물이 흘렀다. “바짝 마른 땅에 물을 대면 땅이 일어서잖습니까? 제 두피가 꼭 그랬습니다. 살짝 잡아당겨도 머리털 전체가 뽑힐 정도였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고엽제로 인한 지루성피부염이었던 거죠.”
불치병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기도…
해가 가도 병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질환이 함께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힘겨운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 베트남전에 참전한 다른 전우들 역시 같은 악몽을 꾸고 있었다. 맹호부대 출신 석용근(63) 씨의 다리는 피부염이 너무 심해 일반인이 보기에 약간 혐오스러울 만큼 상처 딱지로 빼곡했다.
의사를 찾아가 병든 다리를 보여주면 “다리를 한번이라도 씻은 적이 있느냐”는 수치스러운 말까지 들어야 했다.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는 겨울이면 피부 발진이 더 심해졌다. 마치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극한의 고통을 맛봐야 했다. 수면제를 복용해야 겨우 잠들 수 있을 정도로 24시간 내내 병마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심지어 나환자 전문병원을 찾아가 한센병 약까지 타다 먹었죠. 하지만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원인 모를 병’이라고 말하더군요. 평생 안고 가야 할 질병이라면서요….”메콩강을 누비며 작전을 치렀다는 백구부대 출신 이창희(63) 씨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내과 질환이 많았다.
당뇨·협심증·고지혈 등 10여 개의 병명을 달고 있었다. 합병증으로 인한 투약량도 만만찮았다. 약 봉투를 찢어 두 손 가득 펼쳐 보인 형형색색의 알약은 그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대변하는 듯했다. 셔츠를 올리고 보여준 가슴에는 심장수술을 받은 흔적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하루에 3만 보 정도를 정처없이 걷습니다. 비가 와도 러닝머신을 이용해 실내에서 걷죠. 심장병에는 걷는 게 최고라고 해서요. 아픈 몸으로 매일 살기 위해 운동을 하자니 고역입니다.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입니다.”
그나마 이들은 나은 축에 속했다. 고엽제 피해자 A씨는 바깥 출입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탄처럼 새까만 얼굴, 힘이 없어 일어서지도 못하는 두 다리는 불치병을 안고 살았을 그의 시한부인생을 짐작하게 했다.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일까? 차도 없이 점점 깊어지는 병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많다고 한다. 국가보훈처 산하 법정단체인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고엽제전우회)의 김성욱 사무총장은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고엽제 후유증을 못 이겨 목을 매거나 농약을 마시는 등 자살한 전우가 부지기수”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고엽제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는 통증보다 더 큰 아픔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다름 아닌 자녀문제였다. 고엽제 피해자 B씨의 말.
“못난 아비를 둬 우리 애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날 때부터 척추가 조금 휘어 고쳐 주려고 갖은 애를 썼죠. 제가 중동에 나가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벌어온 돈도 거의 모두 우리 아이 병원비로 썼습니다. 그래도 우리 애는 나은 편이죠. 심한 경우 무뇌아로 태어나 낳자마자 죽은 아이도 있습니다.”
고엽제전우회에 따르면 상당수의 고엽제 피해자 2세들이 피부병 등을 앓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고엽제 후유증이 2세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이 사회에 알려지면서 부작용도 초래했다. 혼사가 깨지는 등의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
“얼마 전 제가 아는 전우의 딸이 결혼식 날짜까지 잡았다 파혼했습니다. 아버지가 고엽제 환자라는 이유였죠. 일반 국민에게 고엽제가 주는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다 보니 그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데…. 사실 참전함으로써 얻은 질병일 뿐이고, 2세에게 발현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자식의 앞길을 막지 않으려고 병력을 숨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죠.”
1991년 2월,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뿌린 고엽제의 실상이 처음 국내에 알려졌다. 이미 미국·호주·뉴질랜드 등 다른 참전국에서는 1970년대 말부터 보상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공공연한 사실이었음에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었다. 하소연할 곳 없이 고통받던 전국 각지의 베트남전 참전 예비역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고엽제대책본부 등의 조직을 결성하고 장외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문민정부가 막 들어선 1993년 3월 ‘월남참전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지원 등에 대한 법률’이 제정됐다. 그러나 고엽제 피해자들은 이 지원법에 절대 만족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시법인데다 보상 대상과 범위 등이 한정돼 있고 고엽제 환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방식이 너무 까다로웠던 것이다.
제대로 일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참전자들은 이유도 모른 채 사망한 전우의 몫까지 책임지기 위해 계속해서 정부와 싸웠다. 이러한 노력 끝에 지원법은 세 정권을 거치며 14차례나 개정됐다. 그만큼 혜택의 폭과 범위도 커졌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우선 후유증과 후유의증을 구분한다는 점을 꼽는다. 후유의증(疑症)이란 ‘후유증으로 의심될 만한 질환’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현행 지원법(2008년 1월 개정)에 따르면 고엽제 피해자는 질환에 따라 후유증(폐암 등 15개 질환)과 후유의증(지루성피부염 등 20개 질환)으로 나뉘어 판정을 받는다.
그런데 후유증 환자의 경우 전상(戰傷) 군인으로 국가유공자 예우를 받는 반면 후유의증 환자는 예우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만큼 정부 지원도 줄어드는 셈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후유의증 환자는 8만7,395명(2008년 3월31일 현재)으로 후유증 환자 3만2,036명의 약 2.7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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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 환자인 백구부대 출신 이창희 씨는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는 후유의증 판정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심홍방 서울보훈병원장은 “‘의증’이라는 용어는 의학적으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면서 “질환을 정의할 때는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다른 문제는 2세 환자와 관련한 것이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고엽제 2세 환자는 64명에 불과하다.
이는 고엽제 유전 사실이 알려질 경우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우려한 결과라기보다 적용 대상 질환이 너무 협소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고엽제 피해 1세들의 일반적 해석이다. 현재 고엽제 2세 중 장애등급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척추이분증·하지마비척추병변·말초신경병 등 3개 질환을 앓아야만 한다.
가장 많은 질환인 지루성피부염 등은 애초 보상 대상에서 제외된 꼴이다. 뿐만 아니라 1세가 후유증이 아닌 후유의증일 경우 해당 질환을 갖고 있어도 신청 자격이 없게 돼 있다.
‘후유의증’ 구분 등은 풀리지 않은 숙제
원초적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스스로 알아서 고엽제 환자임을 신청·등록하게 하는 제도에 대한 비판이다. 고엽제전우회의 김 사무총장은 “정부가 파병해 참전한 만큼 전쟁 중 얻은 질환에 대해 정부는 무한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면서 “정부에서 먼저 나서서 참전용사 전원에게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공문을 발송했어야 옳다”고 주장했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해 힘겨워하는 베트남전 참전용사들. 하지만 그들은 고향 땅이 사무치도록 그리운 베트남의 오지에서 국가와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1966년 3월7일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 국군 증파와 관련해 한국정부에 14개 조항의 지원 약속을 했다. 이른바 ‘브라운 각서’라고 불리는 문서에 그 내막이 담겨 있다.
외교통상부가 2005년 1월 이 문서를 공개했을 때 우리 사회 일각에서 한 차례 논란이 일었다. 군사 및 경제협조를 담보로 우리 군인을 전장으로 내몰았다는 비판 여론이 나왔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참전 군인의 희생으로 우리나라가 성장할 수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고엽제 피해자는 39년 전 파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부산항 제3부두 광장은 환송 인파로 가득했죠. 그들은 손에 든 작은 태극기를 연신 흔들었습니다. 군악대의 힘찬 반주에 맞춰 파월장병이 거대한 수송선에 열을 맞춰 몸을 옮길 때 어머니와 누이들은 오열했습니다. 먼 타국의 전장에서 혹시 아들을 잃지 않을까 염려했을 테죠.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명예로운 애칭까지 얻었지만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도 총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는 혼비백산하게 마련이죠.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싸웠습니다.”
전투 중 몸을 다쳐 후송되기도 했지만 귀국선을 탈 때 그의 신체는 건강했다. 귀환하던 날 그는 영웅이었다. <님은 먼 곳에>가 아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였다. 그런 그에게 역마살이 낀 것일까? 귀국 후 그는 독일로 갔다. 그곳에서 광부생활을 하며 열심히 마르크화를 벌어 가족에게 송금했다.
꼭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런 레퍼토리는 베트남전 참전 전우들 사이에서는 흔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런 ‘김상사’들이 이제 병상에 누워 있다. 지금도 전국 5개 보훈병원에서 수많은 베트남전 참전용사가 고엽제와 고군분투 중이다.
서울보훈병원에 따르면 1일 환자 중 약 20%가 고엽제 피해자라고 한다. 도로 곳곳에서 고엽제 환자를 긴급후송하는 고엽제전우회의 승합차형 간이 앰뷸런스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오늘 하루가 너무도 소중한 날일지 모른다. 한 고엽제 피해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단 하루를 더 살더라도 명예롭게 살고 싶습니다.”
“미군이 베트콩 소탕 위해 베트남 전역에 9,100만㎏ 뿌려…”
고엽제란?
미 공군기 두 대가 저공비행으로 베트남 밀림에 고엽제를 살포하고 있다.
'고엽제(枯葉劑)’란 말 그대로 초목을 고사시키는 강한 제초제다. 베트남전쟁에서 사용된 고엽제는 통칭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ge)’라고 불린다. 고엽제를 담은 드럼통 둘레에 오렌지색 띠를 둘렀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전쟁기간 미군이 베트남 전역에 살포한 고엽제는 약 9,100만㎏이며, 살포 면적은 약 170만ha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용 목적은 베트콩 및 월맹 정규군을 소탕하기 위한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적의 은신처인 정글을 없애고자 함이었다. 이 외에도 식량 공급원인 농작물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고엽제는 독극물인 다이옥신을 함유하고 있다. 다이옥신 1g은 2만 명에 가까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전에서 사용한 다이옥신의 양을 환산하면 170㎏(약 2,000만 드럼) 정도로 추산된다. 이는 단순히 양으로만 따졌을 때 전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 양이다.
다이옥신의 대표적 부작용으로는 신경계·피부계·내과계·호흡기계 각종 질환, 그리고 불임·유산 및 각종 암이다. 고엽제는 주로 미군 항공기(C-123)로 살포했다. 이 때문에 한국군은 주둔지역 및 작전지역에서의 직접노출에 의해 고엽제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전자들의 증언도 이와 일치한다.
무더운 날씨에 무색무취한 고엽제를 “물인 줄 알고 맞았다”거나, 모기가 극성이어서 “살충제인 줄 알고 맞았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고엽제에 오염된 식수 등을 통해 간접노출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은 각자의 신체조건에 따라 5~10년 후 후유증이 발병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후유증이 발병해도 발병 원인이나 병명 식별이 불투명한 증세를 보여 정확한 진단이나 치료가 어렵다.
고엽제의 인체 위해와 관련한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연구 결과로는 미국환경보호청(EPA)보고서·미국국립과학원보고서·젠킨스보고서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1997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정순 박사팀이 1차 역학조사를, 1999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2차 역학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아직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다. 무려 12만여 명에 달하는 파월장병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한부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은 점점 무뎌져 가고, 심지어 싸늘한 시선마저 등장한다. <월간중앙>이 고엽제 피해의 실상과 문제점을 연속 2회에 걸쳐 다룬다.
"미군이 비행기로 물을 뿌리는 줄로만 알았죠. 너무 더우니 부대원 모두 뛰쳐나와 철모고 방탄조끼고 다 벗어 던지고 발가벗은 채 맞은 겁니다. 시원하니까….” 서울 구로구에 사는 김만용(63) 씨는 몸에 온갖 병을 달고 산다. 고혈압·허혈성심질환·지루성피부염….
고통이 극심할 때는 쓰러져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유전질환을 안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스물한 살 청년시절에는 밀림 속 전장을 누비며 뛰어다닐 정도로 건강했다. 그는 파월(派越) 참전용사다. 적의 총탄이 아닌 ‘고엽제’라는 무시무시한 악마와 40년 넘게 싸우는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다.
베트남전 당시 맹독성 물질인 ‘다이옥신’을 함유한 고엽제를 온 몸으로 받아냈기 때문이다.<140쪽 박스기사 참조> 김씨의 사연은 12만여 명에 달한다는 고엽제 피해자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광복 이듬해 전라남도 곡성의 찢어지게 가난한 한 농가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진천농고에 다니다 2년 만에 중퇴하고 작은아버지를 따라 제천·음성·괴산·증평 등지의 5일장을 쫓아다니며 보따리장사를 했다. 큰아들로서 집안 살림은 물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다.
그러던 그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66년 6월. 그때 직선거리로만 3,578km 떨어진 먼 나라 베트남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소위 베트남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미국을 포함한 7개국이 파병한 국제전으로,무려 10년 가까이 계속됐다.
베트남에서 번 달러로 가족 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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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부대원들이 UH-1 헬기를 이용해 적진에 투입되고 있다.
1964년 5월9일 미국 정부로부터 병력 지원 요청을 받은 한국정부는 같은 해 7월31일 국회 동의를 얻어 파병을 확정했다.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을 포함한 군사원조단 140명을 시작으로 비전투전력(비둘기부대)이 급파됐고, 월남정부의 전투부대 파병 요청에 따라 1965년 10월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가 베트남 중부 퀴논 해안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어 주월한국군사령부 아래 육군 맹호부대(수도사단)와 백마부대(제9사단), 해군 백구부대(해군수송전대), 공군 은마부대(공군지원단), 십자성부대(100군수사령부) 등이 8년8개월 동안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총인원 32만여 명이었다.
입대 6개월차 김 일병 역시 전투의 한복판에 설 수밖에 없었다. “논산훈련소에서 후반기교육(박격포)까지 마치고 15사단으로 발령받았어요. 사단 보충대에 있는데, 1주일 지났을까? 인사장교가 부르더군요. ‘월남에 안 가겠느냐고’. 일병 진급하자마자 차출됐습니다.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서 파월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소속 사단 번호가 홀수면 백마부대, 짝수면 맹호부대로 나눴죠. 저는 백마부대로 배속됐습니다.”
그는 차출되기도 전에 이미 참전을 자원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외삼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목이 메이는 듯 마른 침을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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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0월 맹호부대 파월 환송식에서 한 군인이 아이를 안고 있다.
“외할머니께서 한 달에 한 번씩 면사무소에 가셔서 쌀이며 밀가루를 가져오시더군요. 왜 그런가 나중에 알고 보니 돌아가신 외삼촌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군에 가서 내가 죽으면 내 부모·형제가 살겠구나 싶었죠. 마침 입대할 즈음 파월이 이뤄지고 있었으니 그 생각이 더 간절했죠. 그래서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베트남에 가려고 했어요.”
1966년 12월 ‘백마 2진’을 태우고 부산항을 출발한 대형 수송선이 도착한 곳은 냐짱(나트랑)항. 훈련소에서 총 몇 방 당겨본 것이 전부인 김 일병의 귀에 밤새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이튿날 그는 냐짱 남쪽에 위치한 캄란 주둔 30연대로 향했다. 백마 30연대는 동보산전투로 유명한 일명 ‘동보부대’였다. 그는 보충대에서 3일을 보낸 후 1대대 1중대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1주일간 무전교육을 받자마자 적의 제1 타깃인 무전병으로 실전투입됐다. 고된 나날이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바로 고국에 있는 가족을 위해서였다.
“베트남에 있을 당시 환율이 1달러당 270원이었어요. 쌀 한 가마에 4,300원(약 16달러) 정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병장의 경우 많이 받는 달(31일 복무 기준)은 월급을 57달러까지 받았죠. 수당을 더 받게끔 진급은 빨리 시켜주는 편이었죠. 거기다 1년 연장복무를 신청하면 ‘고국휴가’를 보내주는데, 그 휴가를 가는 대신 휴가비 100달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두 번 연장해 3년간 베트남에 있었는데, 휴가를 한번도 안 가고 몽땅 현금으로 받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중 담뱃값을 제한 나머지를 모두 고향집에 부쳤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이 굶주리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죠.”
베트남에서 송금한 돈으로 그의 가족은 논 9마지기(5,950㎡)와 임야 1.5정(1만4,876㎡)이라는 삶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건 사투였지만 참전은 그에게 값진 경험이기도 했다. 전쟁을 치른 그로서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1969년 12월 제대한 그는 충청북도 진천의 한 정미소에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조금씩 고엽제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현상이 신체 일부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1974년 결혼할 즈음에는 머리카락을 못 감을 정도로 두피에서 진물이 흘렀다. “바짝 마른 땅에 물을 대면 땅이 일어서잖습니까? 제 두피가 꼭 그랬습니다. 살짝 잡아당겨도 머리털 전체가 뽑힐 정도였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고엽제로 인한 지루성피부염이었던 거죠.”
불치병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기도…
해가 가도 병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질환이 함께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힘겨운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 베트남전에 참전한 다른 전우들 역시 같은 악몽을 꾸고 있었다. 맹호부대 출신 석용근(63) 씨의 다리는 피부염이 너무 심해 일반인이 보기에 약간 혐오스러울 만큼 상처 딱지로 빼곡했다.
의사를 찾아가 병든 다리를 보여주면 “다리를 한번이라도 씻은 적이 있느냐”는 수치스러운 말까지 들어야 했다.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는 겨울이면 피부 발진이 더 심해졌다. 마치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극한의 고통을 맛봐야 했다. 수면제를 복용해야 겨우 잠들 수 있을 정도로 24시간 내내 병마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심지어 나환자 전문병원을 찾아가 한센병 약까지 타다 먹었죠. 하지만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원인 모를 병’이라고 말하더군요. 평생 안고 가야 할 질병이라면서요….”메콩강을 누비며 작전을 치렀다는 백구부대 출신 이창희(63) 씨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내과 질환이 많았다.
당뇨·협심증·고지혈 등 10여 개의 병명을 달고 있었다. 합병증으로 인한 투약량도 만만찮았다. 약 봉투를 찢어 두 손 가득 펼쳐 보인 형형색색의 알약은 그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대변하는 듯했다. 셔츠를 올리고 보여준 가슴에는 심장수술을 받은 흔적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하루에 3만 보 정도를 정처없이 걷습니다. 비가 와도 러닝머신을 이용해 실내에서 걷죠. 심장병에는 걷는 게 최고라고 해서요. 아픈 몸으로 매일 살기 위해 운동을 하자니 고역입니다.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입니다.”
그나마 이들은 나은 축에 속했다. 고엽제 피해자 A씨는 바깥 출입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탄처럼 새까만 얼굴, 힘이 없어 일어서지도 못하는 두 다리는 불치병을 안고 살았을 그의 시한부인생을 짐작하게 했다.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일까? 차도 없이 점점 깊어지는 병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많다고 한다. 국가보훈처 산하 법정단체인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고엽제전우회)의 김성욱 사무총장은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고엽제 후유증을 못 이겨 목을 매거나 농약을 마시는 등 자살한 전우가 부지기수”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고엽제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는 통증보다 더 큰 아픔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다름 아닌 자녀문제였다. 고엽제 피해자 B씨의 말.
“못난 아비를 둬 우리 애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날 때부터 척추가 조금 휘어 고쳐 주려고 갖은 애를 썼죠. 제가 중동에 나가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벌어온 돈도 거의 모두 우리 아이 병원비로 썼습니다. 그래도 우리 애는 나은 편이죠. 심한 경우 무뇌아로 태어나 낳자마자 죽은 아이도 있습니다.”
고엽제전우회에 따르면 상당수의 고엽제 피해자 2세들이 피부병 등을 앓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고엽제 후유증이 2세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이 사회에 알려지면서 부작용도 초래했다. 혼사가 깨지는 등의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
“얼마 전 제가 아는 전우의 딸이 결혼식 날짜까지 잡았다 파혼했습니다. 아버지가 고엽제 환자라는 이유였죠. 일반 국민에게 고엽제가 주는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다 보니 그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데…. 사실 참전함으로써 얻은 질병일 뿐이고, 2세에게 발현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자식의 앞길을 막지 않으려고 병력을 숨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죠.”
1991년 2월,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뿌린 고엽제의 실상이 처음 국내에 알려졌다. 이미 미국·호주·뉴질랜드 등 다른 참전국에서는 1970년대 말부터 보상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공공연한 사실이었음에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었다. 하소연할 곳 없이 고통받던 전국 각지의 베트남전 참전 예비역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고엽제대책본부 등의 조직을 결성하고 장외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문민정부가 막 들어선 1993년 3월 ‘월남참전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지원 등에 대한 법률’이 제정됐다. 그러나 고엽제 피해자들은 이 지원법에 절대 만족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시법인데다 보상 대상과 범위 등이 한정돼 있고 고엽제 환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방식이 너무 까다로웠던 것이다.
제대로 일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참전자들은 이유도 모른 채 사망한 전우의 몫까지 책임지기 위해 계속해서 정부와 싸웠다. 이러한 노력 끝에 지원법은 세 정권을 거치며 14차례나 개정됐다. 그만큼 혜택의 폭과 범위도 커졌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우선 후유증과 후유의증을 구분한다는 점을 꼽는다. 후유의증(疑症)이란 ‘후유증으로 의심될 만한 질환’쯤으로 풀이할 수 있다. 현행 지원법(2008년 1월 개정)에 따르면 고엽제 피해자는 질환에 따라 후유증(폐암 등 15개 질환)과 후유의증(지루성피부염 등 20개 질환)으로 나뉘어 판정을 받는다.
그런데 후유증 환자의 경우 전상(戰傷) 군인으로 국가유공자 예우를 받는 반면 후유의증 환자는 예우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만큼 정부 지원도 줄어드는 셈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후유의증 환자는 8만7,395명(2008년 3월31일 현재)으로 후유증 환자 3만2,036명의 약 2.7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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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 환자인 백구부대 출신 이창희 씨는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는 후유의증 판정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심홍방 서울보훈병원장은 “‘의증’이라는 용어는 의학적으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면서 “질환을 정의할 때는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다른 문제는 2세 환자와 관련한 것이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고엽제 2세 환자는 64명에 불과하다.
이는 고엽제 유전 사실이 알려질 경우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우려한 결과라기보다 적용 대상 질환이 너무 협소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고엽제 피해 1세들의 일반적 해석이다. 현재 고엽제 2세 중 장애등급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척추이분증·하지마비척추병변·말초신경병 등 3개 질환을 앓아야만 한다.
가장 많은 질환인 지루성피부염 등은 애초 보상 대상에서 제외된 꼴이다. 뿐만 아니라 1세가 후유증이 아닌 후유의증일 경우 해당 질환을 갖고 있어도 신청 자격이 없게 돼 있다.
‘후유의증’ 구분 등은 풀리지 않은 숙제
원초적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스스로 알아서 고엽제 환자임을 신청·등록하게 하는 제도에 대한 비판이다. 고엽제전우회의 김 사무총장은 “정부가 파병해 참전한 만큼 전쟁 중 얻은 질환에 대해 정부는 무한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면서 “정부에서 먼저 나서서 참전용사 전원에게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공문을 발송했어야 옳다”고 주장했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해 힘겨워하는 베트남전 참전용사들. 하지만 그들은 고향 땅이 사무치도록 그리운 베트남의 오지에서 국가와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1966년 3월7일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 국군 증파와 관련해 한국정부에 14개 조항의 지원 약속을 했다. 이른바 ‘브라운 각서’라고 불리는 문서에 그 내막이 담겨 있다.
외교통상부가 2005년 1월 이 문서를 공개했을 때 우리 사회 일각에서 한 차례 논란이 일었다. 군사 및 경제협조를 담보로 우리 군인을 전장으로 내몰았다는 비판 여론이 나왔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참전 군인의 희생으로 우리나라가 성장할 수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고엽제 피해자는 39년 전 파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부산항 제3부두 광장은 환송 인파로 가득했죠. 그들은 손에 든 작은 태극기를 연신 흔들었습니다. 군악대의 힘찬 반주에 맞춰 파월장병이 거대한 수송선에 열을 맞춰 몸을 옮길 때 어머니와 누이들은 오열했습니다. 먼 타국의 전장에서 혹시 아들을 잃지 않을까 염려했을 테죠.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명예로운 애칭까지 얻었지만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도 총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는 혼비백산하게 마련이죠.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싸웠습니다.”
전투 중 몸을 다쳐 후송되기도 했지만 귀국선을 탈 때 그의 신체는 건강했다. 귀환하던 날 그는 영웅이었다. <님은 먼 곳에>가 아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였다. 그런 그에게 역마살이 낀 것일까? 귀국 후 그는 독일로 갔다. 그곳에서 광부생활을 하며 열심히 마르크화를 벌어 가족에게 송금했다.
꼭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런 레퍼토리는 베트남전 참전 전우들 사이에서는 흔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런 ‘김상사’들이 이제 병상에 누워 있다. 지금도 전국 5개 보훈병원에서 수많은 베트남전 참전용사가 고엽제와 고군분투 중이다.
서울보훈병원에 따르면 1일 환자 중 약 20%가 고엽제 피해자라고 한다. 도로 곳곳에서 고엽제 환자를 긴급후송하는 고엽제전우회의 승합차형 간이 앰뷸런스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오늘 하루가 너무도 소중한 날일지 모른다. 한 고엽제 피해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단 하루를 더 살더라도 명예롭게 살고 싶습니다.”
“미군이 베트콩 소탕 위해 베트남 전역에 9,100만㎏ 뿌려…”
고엽제란?
미 공군기 두 대가 저공비행으로 베트남 밀림에 고엽제를 살포하고 있다.
'고엽제(枯葉劑)’란 말 그대로 초목을 고사시키는 강한 제초제다. 베트남전쟁에서 사용된 고엽제는 통칭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ge)’라고 불린다. 고엽제를 담은 드럼통 둘레에 오렌지색 띠를 둘렀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전쟁기간 미군이 베트남 전역에 살포한 고엽제는 약 9,100만㎏이며, 살포 면적은 약 170만ha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용 목적은 베트콩 및 월맹 정규군을 소탕하기 위한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적의 은신처인 정글을 없애고자 함이었다. 이 외에도 식량 공급원인 농작물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고엽제는 독극물인 다이옥신을 함유하고 있다. 다이옥신 1g은 2만 명에 가까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전에서 사용한 다이옥신의 양을 환산하면 170㎏(약 2,000만 드럼) 정도로 추산된다. 이는 단순히 양으로만 따졌을 때 전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 양이다.
다이옥신의 대표적 부작용으로는 신경계·피부계·내과계·호흡기계 각종 질환, 그리고 불임·유산 및 각종 암이다. 고엽제는 주로 미군 항공기(C-123)로 살포했다. 이 때문에 한국군은 주둔지역 및 작전지역에서의 직접노출에 의해 고엽제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전자들의 증언도 이와 일치한다.
무더운 날씨에 무색무취한 고엽제를 “물인 줄 알고 맞았다”거나, 모기가 극성이어서 “살충제인 줄 알고 맞았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고엽제에 오염된 식수 등을 통해 간접노출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은 각자의 신체조건에 따라 5~10년 후 후유증이 발병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후유증이 발병해도 발병 원인이나 병명 식별이 불투명한 증세를 보여 정확한 진단이나 치료가 어렵다.
고엽제의 인체 위해와 관련한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연구 결과로는 미국환경보호청(EPA)보고서·미국국립과학원보고서·젠킨스보고서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1997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정순 박사팀이 1차 역학조사를, 1999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2차 역학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