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장 경호원 생활
이영국
1. 신병훈련
1) 죽어도 살아도 김정일을 위해
1978년 6월, 경호원 신병훈련이 시작되었다. 김정일 친위대로 선발된 신병들을 한 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총인원은 150명 정도였다. 중대는 다시 5개 소대, 소대는 4개 분대로 나누어졌다. 당시 우리는 김정일 경호원으로 뽑힌 첫 선발대였다. 그래서 신병훈련 교관은 호위사령부에서 교관 일을 했던 사관들이 맡았다. 분대장, 부소대장, 소대장들은 호위사령부 태생들이 맡았다. 이들은 김정일 친위대를 잘 만들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받고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 이전까지 김정일을 경호하는 인원은 한 개 소대 안팎이었다. 나는 신병훈련 중대 2소대에 배치되었고, 우리 분대장은 김광필 중사였다. 신병훈련 장소는 평양시 중구역 서성동에 있었다. 지금 평양시당 옆에는 당역사연구소가 있는데, 70년대 초반까지 그 정면에 국가과학교육부가 있었다. 그곳 5층에서 신병훈련을 6개월간 받았다. 신병들에게는 개인무기로 각자 자동보총, 단도, 보병삽, 방독면 등이 지급되었다.
가장 중요한 훈련은 역시 사상교육이었다. 김정일의 사상으로 무장하기 위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김정일 동지는 어린 시절부터 어떤 분인가?’를 가르쳤고, 혁명적 수령관,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 영도 예술, 당 정책, 주체사상 원리 학습 등을 진행하였다. 당시는 주체사상이 북한 사회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김정일에 대한 학습도 강하게 하던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다. 그리고 김정일을 ‘건설의 천재’, ‘예술의 천재’라고 이야기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김정일을 찬송한 시, 노래 등을 쉼 없이 들려줬다.
김정일이 묻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방법도 교육내용 중 하나였다. 그밖에도 김정일이 현지 시찰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들과 15호 연구소 격술영화, 사회안전부 격술영화, 프랑스, 이탈리아 합작영화 등을 보여줬다. 김정일이 외국인들을 만나는 장면들을 자주 보여주고는 연구토론을 하게 했다. 특히 김정일과 주체사상에 대한 자료를 매일 과제로 주어 암송시키고 저녁 늦게까지 그날 과제를 못하면 잠을 재우지 않았다.
이렇게 사상적인 학습을 많이 시키고 저녁마다 김정일이 경호사업과 관련하여 준 지시들을 무조건 통달, 숙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경호원의 사명이라든가 경호사업 경험담들에 대한 책들을 연구, 숙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사상사업의 목표는 “친위부대원은 김정일밖에 누구도 모른다”는 입장을 지니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죽어도 살아도 김정일을 위해 충성을 바친다”는 생각을 뼛속 깊이 박히도록 만들었다.
당시 교관들은 “김정일은 우리 인민의 수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위대한 지도자”라고 강조했고, “우리가 김정일을 잘못 모시면 노동자들은 우리를 뜨거운 용광로 속에 처넣어 죽이고 농민들은 똥굴에 처넣어 벌할 것”이라고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지금도 꿈속에서 다시 생각날 정도로 “오직 김정일의 신변안전을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었다. 그것만이 당과 조국에 충성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흥미로운 것은 그때부터 김정일은 자기 형제, 친척관계에서 ‘곁가지 원칙’을 내세웠다. 자신의 의붓동생인 김평일, 김영일,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까지 모두 곁가지 대상으로 몰았다. 나무에는 튼튼한 기둥이 있는데 그들은 단지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내리는 지시에는 불복종하도록 시지를 내렸다. 그들에 대해 자그마한 환상도 가지지 말데 대한 학습만도 강하게는 15일 동안 토론하고, 대논쟁을 거듭하였다.
어떤 환경에서도 오직 김정일만을 믿을 것이며 김영주, 김평일, 김영일, 심지어는 김일성까지도 믿지 말라는 것이 친위대의 원칙으로 됐다. 당시 우리의 나이는 17살이었다. 한창 머리가 커지면서 똑똑하고 의협심도 많고 사회적 저으이감, 충성심 등이 높을 나이 아닌가. 사상교양을 하면 그 모든 것이 한치도 틀림없는 진실처럼 여겨지고 머리 속에 쏙쏙 잘 들어왔다. 더구나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다가 경호부대에 가서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살게 되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고 김정일이 너무도 위대해 보였다.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이 모든 것이 말짱 헛것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2) 힘든 경호원 신병훈련
육체적인 훈련과목은 주로 경호전술, 사격, 태권도, 대열훈련, 수영, 화생방, 병기학 등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경호전술은 주로 주야간을 나누어 보초 서는 방법, 야간에 감시활동 인접보장, 통행암호 대조방법, 근무교대, 순찰근무, 차단근무, 잠복근무, 수색 등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보초근무는 감시를 원형방어, 지그재그 감시, 먼 곳에서부터 가가이까지, 우로부터 좌로 머리만 돌려 수행하도록 하였다.
수상한 사람이 접근시 주간에는 15m 앞에 세워놓고 감시를 강화하면서 위병소에 연락을 보내 처리하였고, 야간에는 전투준비를 갖추고 통행암호를 대조하여 잘 모를 때에는 그 자리에 세워놓고 감시를 강화하면서 위병소에 연락, 처리하였다. 예를 들어 15~20m 전에 접근하면 ‘섯’이란 구령을 하고 누구인가를 확인한 뒤 위병소에 보고하여야 하는데, 제기된 상황을 자의대로 처리하여서는 절대로 안됐다. 근무수행 중에는 주간이나 야간이나 항상 어깨종을 하고 차렷 자세를 취하도록 되어있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돌려 감시하여야 하며 자기 보초구역 주변이라고 하여도 이탈하여서는 안 된다. 만약 근무구역을 조금이라도 이탈하였을 시에는 엄하게 처벌받게 된다. 보초근무와 감시를 하는 훈련은 일주일에 1일씩 실천훈련을 시켰다. 사격훈련은 100m 거리에서 속사하는 것이 기본이다. 1분동안에 8발을 쏘아서 6, 7점짜리 과녁평가를 하지 않고 8, 9, 10점 짜리 과녁만 계산하여 우, 량, 급, 낙제로 평가한다.
좌우 15° 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목표와 뒤로 뛰는 목표를 사격하는데, 목표물 200m 앞에서 뛰어와 숨이 턱에 닿는 상황에서 자세를 잡고 바로 사격하여야 한다. 그 외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 목표를 사격하는 훈련,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오는 목표를 사격하는 훈련, 사람의 머리를 조준하여 사격하기, 탱크 사격, 수류탄 던지는 방법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을 받았다. 사격에서 ‘불합격’은 그냥 성적의 낙제가 아니라 사상투쟁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죽자살자 사격연습을 해야만 하고 시험장에 들어서면 굉장히 긴장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사격훈련장에서 바지에 오줌을 싼 일도 있다. 태권도 훈련은 주로 발차기, 전투격투, 단도잡고 격투, 각종 낙법, 권투 등을 가르쳐주었다. 기본 동작 훈련이 끝나면 대형동작으로 넘어가 1:14명까지 실전같이 훈련한다. 발 타격연습, 손 타격연습, 나무 두드리기, 콘크리트 두드리기, 발끝 두드리기 등을 교육하며 그날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면 저녁까지 무조건 완수해야 잠을 잘 수 있다.
태권도 옆차기 훈련을 할 때는 한 쪽 발은 땅에 대고 다른 한쪽 다리로는 옆차기를 하되, 옆차기를 하는 발은 100회를 할 동안 땅에 닿으면 안 된다. 중대에서 한 사람이라도 발이 땅에 닿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했다. 또 60°각도로 경사진 산을 오리걸음으로 걸어 고지까지 올라가야 한다. 낙법훈련은 앞 낙법, 뒤 낙법, 옆 낙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뒤 낙법이 가장 힘들다. 이것을 하루에 40번 이상씩 하여 내장이 뒤집히고 머리가 울리면서 쓰러지는 현상들이 많이 나타났다.
행군훈련은 매일 4km 강행군을 25분 동안에 끝마쳐야 했다. 또 매주 100리 행군이 있었는데, 모래배낭 25kg을 짊어지고 초저녁에 떠나서 새벽에 돌아온다. 주로 토요일 저녁에 갔다가 일요일 새벽에 돌아왔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것이 ‘4km 강행군’이다. 모래배낭을 메고 거기에 온갖 전투 장비를 다 차고 4km를 25분 동안에 갔다와서 혀를 물고 쓰러지면 포도당 주사를 놓고 다시 뛰게 하엿다. 이때는 정말로 죽고 싶은 생각까지 났으며 목구멍에서 쇠비린내가 나는 지경이었다.
사탕을 입에다 물고 뛰면서 침을 삼키지 못하고 밖으로 줄줄 흘리던 그 모습들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수영훈련은 7일 동안 연이어 진행되었는데 수영을 4km 하여야 하고, 보트를 저어 10km를 가야 했다. 수영훈련 전에는 백사장에 모래를 쌓아놓고 그 위에 배를 대고 개구리형, 나비형, 파도형 연습을 계속하면서 몸에 익숙해진 다음에야 물에 들어간다. 몇 개 조를 묶어 못하는 사람을 담당하여 훈련을 한다. 훈련생들이 수영을 할때는 교관들이 배 위에서 확성기를 들고 소리지르며 뒤따라왔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훈련생이 보이며 배에 실어 포도당 주사를 놓는다. 그리고는 다시 물에다 집어넣는다.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대열훈련 중 가장 힘든 것은 정보훈련이었다. 김정일이 러시아 의장대의 걷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우리도 저렇게 하라고 하여 정보훈련을 혹독하게 시겼다. 주로 아침과 점심시간, 저녁에 훈련시간이 끝난 뒤에 200m를 훈련했는데 땅에서 발바닥까지 정확히 50cm, 보폭은 90cm를 유지하여야 했다.
무릎을 쭉 펴고 발끝은 수평으로 들어 절도있고 천천히 걷는 훈련을 진행하였다. 이것을 단 몇 분만 해도 보통사람들은 바로 다리에 경련이 나서 쓰러져 버릴 것이다. 우리도 초기에는 훈련을 너무 무리하게 받아서 저녘에 잠자리에 들면 다리에 쥐가 올라와 움직이지 못했다. 화생방훈련은 방독면을 쓰고 산을 뒤어 올라가다가 내려오는 것을 4km이상 하고, 방독면이나 해독제가 없을 때 자체 신변기재로 생화학 가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교육받았다. 병기훈련은 주로 AK소총, 투척기, 발사관, 1973년식 기관총 등의 사격 및 구조, 작용원리, 고장시 조치법 등을 배웠으며 수류탄 공격과 방어, 원리들을 교육하였다.
3) 너무 힘들어 자다가 매트리스에 오줌을 싸기도
친위대의 기본 훈련복장은 승마복에 전투 모자였다. 훈련복은 면과 혼방을 섞은 섬유로 러시아 경호부대 옷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신병훈련 기간 중 하루 일과를 대강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침 기상은 5시에 하는데 5분 동안에 부대 운동장에 모인다. 곧이어 거기서 400~500m 되는 거리인 김일성 광장까지 뛰어가 목소리를 틔우면서 소리를 치고 그 자리에서 태권도 동작을 연습한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병실에 들어와서 침구류를 정돈하고 뉴스 독보 시간을 갖는다.
김정일에게 세계에서 보내온 편지, 송시, 노래 등의 자료를 가지고 아침 독보를 실시한 다음 운동장에 모여서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친 후 상학준비 검열을 하고 정보행진으로 김정일 만세를 부르며 상학 장소에 가서 훈련을 받는다. 실내 훈련 때는 교양실에서, 야외훈련 때는 훈련장 및 산에 가서 훈련받았다. 점심 식사를 하고 1시간 후에 다시 오후 훈련을 진행한 다음 저녁 6시부터 무기를 정비하고 저녁 식사를 한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군중문화모임을 하게 되는데, 노래 부르고 춤도 추는 오락을 9시까지 진행한 다음 세탁시간에 세탁을 하고, 청소정돈 및, 저녁 점검을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친다.
보통 저녁 10시에 취침하였다. 밤이 되면 하루 동안 훈련 때문에 피곤하여 곧바로 잠을 자야 하겠는데,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기상동작을 반복하여 20~30분 정도 한다. 그러니 잠자리에 누우면 누가 코르 떼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취해있었다. 이렇게 피곤하다보니 아침 기상을 하면 바지를 뒤집어 입고 나와 사람들을 웃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깔개(매트리스)에 오줌을 싸는 경우도 있었다. 오줌을 싸면 그 처벌로 깔개를 메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고 해빛에다 말리곤 하엿다. 신병훈련 기간에 병이 나서 훈련이 끝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고향에 가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을 잘못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밤에 없어지는 현상들도 있었다 한다. 신병훈련은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사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말이다. 그 속에서 검증되고 합격한 자만이 김정일의 경호원으로 될 수 있었다.
2. 경호부대 소개
1) 2호위부는 호위사령관도 손댈 수 없는 부대
김정일의 경호부대는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비밀리에 부쳐지고 있다. 공식 명칭은 ‘당중앙위원회 호위부 비밀대오(6처)’이며 부대창건일은 1980년 1월 22일이다. 북한에서 친위대라는 명칭은 국가안전보위부나 인민무력부 특수부대 등 각종 조직과 군대에서 자처를 하였으나 김정일로부터 정식으로 ‘친위대’칭호를 받고 경호를 담당하는 부대는 오직 호위부 6처뿐이다. 창건일에 김정일은 직접 금과 은으로 된 1973년식 경중기관총 두 자루를 친위대의 상징으로 건네주며 수여식을 진행하였다.
금으로 만든 경중기관총에는 김일성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은으로 된 기관총에는 김정일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북한 땅에서 김정일밖에 모르는 경호부대인 ‘친위대’가 생기게 되었으며 베일에 쌓인 채 지금껏 운영되고 있다. 김정일은 1972년도부터 경호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1개 소대 규모로 군복을 입지도 못하고 사복을 입고 근무하였으며, 경호부대라고 칭하지도 못했다. 군복은 판문점에서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나 전국이 전쟁준비 상태에 들어가던 1976년에 얼떨결에 입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김일성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호위사령부에서 일부를 선발하여 김정일을 경호하는 부대의 틀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자기 경호원을 꾸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 김정일은 먼저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안에 간부 5과라는 자기 직속 부서를 만들어 놓고 자기가 의도하는 대로 경호부대를 확장하였다. 나를 비롯하여 선발된 150여 명은 그때 처음으로 ‘김정일만을 위한’ 경호원으로 뽑힌 것이다.
김정일 경호부대를 초기에는 ‘2호위부’라고 불렀다. 호위사령부의 1호위부가 김일성을 위한 부대라면 2호위부는 형식적으로 호위사령부 소속이지만 호위사령관도 손을 댈 수 없는 부대였다. 김정일이 단독으로 운영하여 국가정무원이나 인민무력보, 호위사령부가 일체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다른 부서로 통하는 전화선 자체를 절단하여 오직 김정일의 지시만 받고 움직이도록 하였다. 우리가 첫 번째로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간부 5과 대상으로 선발되면서부터 2호위부는 범위가 대대적으로 넓어져 갔다. 그것은 김정일의 권력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과 일치했다.
김정일은 우선 김일성이 1976년까지 국가사업을 보던 조선노동당 본 청사를 개축, 확장하는 공사를 실시했다. 여기에는 공병1여단과 노동당 재정경리부 산하 3과, 8과 소속 노동자들이 동원되엇다. 이 공사가 1979년 1월 1일에 완공되면서 그동안 이곳 경호경비를 맡았던 호위사령부 호위대대를 철수시키고 2호위부 호위중대가 담당토록 하였다. 또 전에는 김정일이 사는 관저만을 ‘16초소’라 하여 2호위부에서 지켰지만, 경호대상이 늘어나면서 2호위부 범위도 확장되고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부서로 자라났다.
2) 1980년 1월 22일 친위대 창설
2호위부의 무기 및 전투 기자재는 당시 2경제(북한의 ‘군수경제’를 이르는 말) 담당비서인 연형묵이 직접 맡았다. 김정일 친위대는 무기 자체가 호위사령부 무기와 달랐다. 겉보기에도 위풍이 있어 보였고, 무기 기관은 일체 니켈도금으로 되어 있었다. 외관에는 특이하게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호위하지!’라는 구호를 새겨 넣었다. 이밖에도 철갑모를 비롯한 일체 전투 기자재를 특이하고 깔끔하게 만들어 공급하였다. 친위대의 식사 및 피복 등 각종 물자는 모두가 중앙당 재정경리부에서 당 자금으로 보장하였다.
부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최상품으로 지급되었다. 2호위부가 운행하는 차량은 일본산과 독일산이었는데 이것도 당 자금으로 산 것들이었다. 2호위부가 운행하는 차량은 일본산과 독일산이었는데 이것도 당 자금으로 산 것들이었다. 2호위부가 확장되면서 1977년경 김일성이 가지고 있던 각종 별장까지 호위사령부에서 인계 받았다. 이어서 중앙당 재정경리부 11과를 새로 내오고 11과가 일체의 지방 별장을 운영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당시 2호위부 호위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며 김정일의 집무실 근무를 기본으로 수행하였다.
이 정도의 틀이 완성되자 김정일은 공식적으로 자기 친위대를 완성하여 1980년 1월 22일 ‘당중앙위원회 호위부 6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6처 안에는 행정 및 당위원회를 만들었다. 김정일은 6처가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도록 특혜를 주었다. 6처는 처장 아래에 착전과, 훈련과, 호위과, 행사과, 5과, 후방과, 운수과, 5호 문헌 편집사 등의 행정부서가 있었다. 또 6처 당위원회는 당비서 아래 조직지도과, 선전과, 대열과를 두어 당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김정일이 하는 일에 감시체계가 있지 않을 수 없다. 6처 안에 보위과를 따로 두어 통제 감시를 하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각 부서의 역할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호위과 : 호위과는 김정일을 바로 옆에서 따라다니며 김정일의 지시를 매과에 전달한다. 이들이 김정일 경호의 제1선이다. 호위과는 6처장, 당비서, 책임부관, 부관, 책임서기, 서기, 책임운전수, 대기차 운전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무는 김정일 경호 및 보장사업을 수행한다.
△ 행사과 : 행사과는 김정일이 국가회의를 주재하거나 지방을 시찰할 때 행사장에서 1선 근무를 맡는다. 군복을 입을 때도 있고 사복을 입을 때도 있다. 행사 기동중대가 3선을 수행한다.
※ 4선은 국가보위부 행사과가 담당하고 5선은 사회안전부 행사과가 담당하였다. 6선은 지방보위과, 7선은 지방 사회안전부가 담당 수행한다. 이처럼 김정일 경호는 여러 층으로 물샐 틈 없이 이루어진다.
△ 작전과 : 김정일이 행사시나 지방 시찰시 노력, 물자, 전투기술기재를 보장하며, 일체 행사경비에 대한 계획을 수립한다. 또한 행사에 들어가지 않은 일부 지방 별장, 당중앙위원회 본 청사에 근무하는 16대기①, 21지구에 근무하는 16대기②를 계획 통제한다.
사전에 계획을 주도 세밀하게 세우며 정황 발생 시 외부와 협동까지 할 수 있다. △ 훈련과 : 경호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직접 지방이나 각 초소들에 다니면서 지도 검열한다. 만약 지방에 검열 나갔다가 김정일의 행사가 진행일 때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내려간 초소에서 올라오지 못하고 길게는 2달까지도 근무수행을 도와주어야 한다. 김정일은 절기에 맞게 지방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김정일이 어느 지방에 와있다는 비밀이 새면 신변에 위험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매체들(언론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은 김정일의 이동스케줄을 미리 말한 적이 없고 김정일이 그 자리를 뜬 후에야 뉴스를 통해 공개한다. 모두가 김정일의 신변안전을 위한 조치들이다. 만약 김정일의 지시를 어길 때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죽음을 면치 못한다. △ 후방과 : 후방과는 2호위부 각 부서 및 초소에 부식물과 보급품 등을 분배한다. 분배되는 물자의 종류와 양은 초소마다 다른데, 지방 별장은 전용기차로 매달 공급된다. 김정일은 매달 2~6번씩 인민들이나 조총련이 충성심을 표현한다는 명목으로 올려 바치는 식품, 선물 등을 분별하여 경호원들에게 공급해준다.
△ 운수과 : 각 초소들의 차량을 관리 운영하도록 지도, 검열, 통제한다. 연료를 보장하고 고장시 수리하는 일, 행사에 참여했던 차들에 대한 정비도 운수과의 몫이다. 행사 보장치들에 대한 정비 검열 뒤 중앙당 선물차 수리반과 합의를 하고 보장하는 사업을 한다.
△ 5호 문헌실 : 김정일을 촬영하고 기록 영화를 창작하여 중앙당 선전부에 넘기는 일을 한다. 만약 김정일이 지방 시찰을 나갔다면 시찰이 끝난 다음 그 자료를 중앙당 선전부에 넘겨주는데, 신문 사진 밑에는 온갖 거짓말들이 사진 설명이랍시고 적혀있다. 5호 문헌실은 당역사연구소와 같이 조작하는 한 개 부서에 불과하다.
3) 최고의 복장과 무기를 지급
경호원의 개인복장은 승마복에 가죽 혁대, 평상모, 가죽 장화, 암호 표식(마크)등으로 이루어졌다. 경호원 복장은 독일에서 천을 수입하여 노동당 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 피복부에서 직접 만들어 지급한다. 가죽 혁대와 장화는 몽골에서 수입하여 특수 제작한 것이다. 그거 수입할 돈이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인민들에게 ‘충성의 외화벌이’ 하라고 닦달하여 긁어모은 돈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토끼 키워 바치고, 청년들은 산에서 뒹굴고 긁히면서 송이 채취하고, 노인들은 바닷가에서 조개 잡고, 아낙들은 손이 부르트도록 사금 채취하여 만들어낸 돈··· , 전 인민을 노예로 부려먹으며 피 뽑듯 갈취해낸 그 돈이 온통 김정일 개인 지갑에 들어가 이렇게 쓰이는 것이다.
암호 표식은 ‘만수대 창작사’에서 제작하였다. 당 마크에 백두산을 형상화하고 그 밑에 김정일의 백두산 초가집을 새겨 넣었다. 직경이 6cm정도 되는 마크인데 배경은 적색, 녹색, 흰색 등 3가지가 있다. 분기 및 정세에 따라 김정일이 지시를 내리면 바꾸어 단다. 경호원 복장은 크게 하복, 동복, 춘추복이 있다. 여름 복장은 바람이 잘 통하도록 천 자체를 설기설기 짠 것이며 가을 복장은 모 테트론으로 짠 것이다. 겨울옷은 순수한 모로 만들었고 모직 외투, 솜동복까지 갖추고 있다. 김정일 경호원은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에도 김일성의 경호원보다 더 나으면 나았지 덜한 대접을 받지는 않았다.
우리는 특수 중에 특수로 취급되었다. 김정일은 “나를 경호하는 경호원은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외모(옷차림)로 보든, 누가 보아도 패기와 정열이 차 넘쳐야 한다. 그래야 나쁜 놈들이 얼씬하지 못하고 달려들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승용차를 타고 나갈 때나 정원을 거닐 때 종종 경호원들의 옷차림이 자신의 얼굴을 대신한다면서 “외화를 들여 최고의 복장을 만들어 보장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경호원들의 팔에 부착된 암호표식을 보면 자기도 마음이 든든하고 위풍에도 돋보인다고 흡족해했다.
경호원들이 사용하는 무기 또한 일반 군대의 무기와는 달랐다. 앞서 이야기했듯 친위대의 무기 및 장비는 당중앙위원회 비서였던 연형묵이가 국방공업을 보면서 직접 맡도록 과제를 주었다. 자동소총은 외관만 보아도 호위사령부나 인민무력부와 색상이나 디자인 자체가 달랐다. 김정일의 말에 의하면 “친위대의 무기는 총 100자루에서 1자루를 찾아내는 식으로 세밀하게 선택하여 100% 합격품만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무기 색깔은 니켈 광택으로 늘 번쩍이게 하고 그 위에 ‘김정일 동지를 목숨으로 호위하자!’라는 구호를 은백색으로 새겨 넣었다. 총 끈은 소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재질은 역시 최고급이었다.
경호원이 소지하는 모든 무기는 경호원 각자의 눈과 손에 맞게 주문되었다. 공장에서 무기가 나오면 일인당 200발을 사격하여 가늠자를 본인에게 맞추어 주었다. 또한 모든 무기는 특수강으로 만들어 15m 안에서 사격하여 총알이 뚫지 못하도록 시험을 거친 후, 고급 도색까지 칠하여 북한군의 일반 무기와는 다르게 특수 제작하였다. 경호부대 발사관(유탄발사기)은 국내산이 실속이 없다하여 중국에서 제작하여 들여오게 하고 장교들에게는 체코제 9.6mm짜리 권총과 탄알을 수입하여 지급하였다. 쌍안경은 독일에서 16배짜리를 김정일의 상징인 백두산을 새겨 넣고 만들도록 주문하여 매 경호 초소마다 공급하였다.
3. 경호원들의 생활
1) 오직 김정일의 사상으로 무장
신병훈련 때만 사상훈련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친위대의 정식 요원이 되고 나서도 김정일 경호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사상’이었다. “경호원의 내면세계는 한 점의 티끌도 없이 깨끗하고 고결하며 도덕이 바르고 규율생활과 명령지휘체계가 확고히 서있도록” 늘 교육받았다. 선발과정에서부터 경호원은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직계를 따져보면 가족 및 친척관계가 11촌까지 걸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야 한다.
일제시기부터 6.25전쟁 때, 60년대, 70년대, 현 시기까지 가족 및 친척관계를 다 뒤져본다. 북한에서 말하는 알짜 노동자, 농민성분으로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직한 가족의 자녀를 뽑는다. 모래밭에서 바늘 찾듯이 걸러내는 과정을 통해 정신적, 사상적으로 전혀 걸릴 것 없는 사람만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김정일의 경호원은 규율생활에서나 명령지휘체계에서나 오직 “알았습니다”라는 대답밖에 없어야 한다.
옷차림에도 엄격한 규정이 있다. 친위대 구성 초기 김정일은 매일 저녁 경호원들에 대하여 옷차림부터 예절, 경호임무, 수행방향, 사격, 태권도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후방사업, 위생사업에까지 세세하게 지적하여 주었다. 북한에서 말하는 김정일의 지시 보고를 ‘말씀’이라고 하면서 저녁 식사 후 경호원들을 모아놓고 노트에 필기하고 암송, 연구 토론하도록 하여 오직 김정일의 사상만으로 경호원들을 준비시켰다.
김정일의 지시는 경호원들이 지켜야 할 준칙이었고 부대 전반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김정일은 경호원들 앞에서 종종 직접 교육을 했고, 친근감을 드러내기 위해 반말하며 툭툭 말도 건네고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농담도 했다. 김정일이가 어느 날 우리에게 “군인들이 예절에 밝아야 하며 경호원들은 더욱 예절이 밝아야 합니다. 경호원들의 예절은 나와 잇닿아 있습니다. 예절을 자각적으로 지키도록 강하게 교육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에게는 “동무들이 경호원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있어야 경호원들이 나를 잘 경호할 수 있습니다. 나이 어린 그들이 밤잠도 추위도 더위도 마다하지 않고 나를 경호하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그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쪽으로는 채찍질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부추기는 김정일의 이런 태도를 보면, 그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나니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름대로는 노련한 조직 장악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2) 칭찬을 받기 위해 생사람을 죽이다
행사경호에 들어가면 김정일 친위대는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당중앙위원회 비서, 인민무력부장, 호위사령관이라 할지라도 김정일 경호원의 요구에 맞게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가 비록 친위대 하전사(사병)라 해도 말이다. 만약 경호원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행사장이나 별장에서 행사가 진행 중이더라도 무조건 사격할 수 있다. 사람이 죽어도, 오히려 경호원은 훈장을 받는다. 김정일의 72별장에서 1985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 별장은 함경남도 낙원군의 바닷가에 있었는데, 인근 마을의 어선이 바다에서 조업을 하다가 경호원들의 단속에 걸렸다. 경호원이 단속하자 어부들이 배에 시동을 걸어 도주하려 했는데, 그때 명철이라는 이름의 전사와 소대장 김성철이가 보초소에서 사격을 가했다. 이 일을 김정일에게 보고하자 김정일은 자기 경비구역 안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있어서는 안 된다, 단호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오늘 처리를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리고는 경호원 두 사람에게 훈장을 수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경호부대 사람들은 사람을 죽였기에 마음에 졸이고 있었는데 훈장까지 받게 되니 하늘로 솟아오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후 경호원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나중에는 사람을 죽이고도 서로 자랑하는 데까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나아갔으며, 지휘관들은 그때마다 칭찬하고 훈장을 달아주었다. 씁씁한 것은 사망자의 가족에 대한 처우이다. 가장이 죽었든지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으니 그 가족은 깊은 슬픔과 비통함에 잠겨 있을 것이다.
이때 김정일은 해당 군당 책임비서에게 지시를 내려 사망자에게 애국자라는 칭호를 주고 가족에게는 냉동기(냉장고)와 칼라 TV를 내주는 희극을 연출했다. 이것을 ‘병 주고 약 준다’ 는 표현으로 다 말할 수 0있을까. 이런 일도 있었다. 경호부대 차단 초소에 북한 군대 차가 길을 잃고 접근해 오는 일이 발생했다. 경호원이 ‘서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운전사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동소총으로 사격하여 군인 운전수가 즉사했다.
현장 사진을 한 장 찍어 시신은 그 주변 병원 사체실에 들여놓고 사고로 처리했다. 근무를 선 경호원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한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 다가오다 어처구니없이 총에 맞아 죽는 일도 있었다. 15m 앞에서 서라는 구령에 응하지 않자 바로 사격하여 생사람을 죽인 것이다. 한번은 김정일의 전시 참모부가 자리를 잡은 평양시 용성구역에서 시내에 나간 경호가(‘평양 05’ 번호를 단 차)가 교통위반을 했다.
안전원(경찰)이 단속하자 응하지 않고 도주하여 경호차는 용성초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연히 교통 오토바이는 이를 뒤따라 왔는데 초소 앞에서 서지 않고 돌진하다 총을 맞고 안전원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사회안전부에서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 할 수밖에 없었는데 김정일이 사회안전부장 백학림에게 전화를 하여 죽은 안전원들에게 애국자 칭호를 주도록 하면서 여론을 무마시켰다.
3) 표정이 어두우면 근무에서 제외
경호원들의 일상생활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단조롭다. 근무를 서고 김정일의 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 기본이고, 잠자고 훈련하는 것이 고정적으로 반복된다. 그래도 늘 밝은 표정을 유지하여야 한다. 경호 근무에 들어갈 때 얼굴 표정이 나쁘면 그날 근무는 진입이 금지된다. 어두운 마음상태에서 근무를 서다가 만에 하나 우발적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근무조마다 매조에 한 명씩 보위부 밀정이 있는데, 그에게서 매일 얼굴 표정이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시간당 보고를 받고 근무에 투입한다.
근무에 들어가기 전에는 언제나 옷차림 정돈, 생활규칙사항 통달, 무기, 탄알을 검열한다. 이때 자그마한 틈이라도 보이면 근무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자체 근무 연습 또는 김정일의 사상학습을 시킨다.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근무 중 제기된 사소한 결함도 총화를 짓고 잠을 1~2시간 자고 난 후 훈련을 한다든지 김정일밖에 그 누구도 모른다는 숭배심으로 재무장하는 일상생활을 계속한다.
경호원들 사이에는 서로 존칭을 쓴다. 자신이 상급이라 하더라도 하급에게 존대어를 써야 한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는데 김정일이 “상하간에 평상시 말투가 좋지 않으면 서로 감정이 나서 총질을 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경호원들 서로가 죽이고 죽는 문제라면 괜찮겠지만 자칫하면 자신도 죽을 수 있음을 염려해서 취한 조치일 것이다. 또 경호원들은 호상(서로) 내부에서는 토끼가 되고 밖에 나가서는 호랑이가 되자고 단결력을 고취시켰다.
4) 5과 소속 여성하고만 결혼
경호원들은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우선 만 30세 이상의 장교만 결혼을 할 수 있다. 배우자는 아무나 될 수 없고 중앙당 5과소속인 김정일의 타자수, 교환수, 관리원들 중 하나여야 한다. 경호장교가 되어서 30대가 되면 중앙당 5과에 가서 결혼 신청을 하게 된다. 그러면 결혼 적령기에 이른 5과 소속 여성들의 사진 20장을 책상 위에 뒤집어 놓고 제비뽑기 식으로 한사람을 선택한다. 사진속의 여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때 본인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2년 동안은 결혼하지 못한다.
2년 후에 이와 같은 식으로 다시 대상자를 선택하여 결혼하여야 한다. 결혼이라는 것이 서로 얼굴이라도 한번보고 애정도 쌓아야 하건만 연애과정이란 것은 꿈도 꾸어보지 못한 채 그저 우연에 의해 짝지어져 살아야 하니 경호원들의 삶이란 짐승과도 같다. 물론 그 대상이 된 여성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린 원래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보다 라고 운명으로 여기며 가정을 꾸린다.
불만이 있다하여 말 한마디 잘못하면 가문이 망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살아가는 처지를 보면 기가 막힌다. 결혼하고도 1주일에 한 번씩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김정일의 지시로 생겨난 경호규정이다. 김정일은 경호원들이 자기를 하나님처럼 믿고 경호사업을 잘 수행하자면 일주일에 한 번씩 들어가는 것이 좋으며 집에 들어가서 아내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것은 안일, 해이된 표현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경호원들은 자기에게 충성하는 것을 삶의 전부이자 기쁨으로 간직하라는 소리다. 결혼을 하면 중앙당 재정경제부에서 본 청사 주변에 40평형의 주택을 분양해준다. 김정일의 집무실 주위에 경호원들의 집이 빙 둘러쳐 있는 식이다. 집의 구조는 침실, 어린이 학습실, 어린이 침실, 주방, 화장실, 서재실, 현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집 장식은 일체 일본에서 수입자재로 장식해 놓았다.
가전제춤도 거의 일본제품으로, 칼라 도시바 TV, 녹화기(VTR), 냉동기는 물론이고, 녹음기, 피아노, 부부침대, 소파, 삼면경대, 이불장, 옷장, 가시장(찬장), 에어컨 등으로 최상의 대우를 해줬다. 월수입으로만 놓고 볼 때 노동당 책임부부장 월급 수준인 160~250원 정도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반 주민에 비하여 4배 이상의 월급이었다. 의료지원은 보건위원회에서 의약품을 무상으로 공급하였고, 6개월에 한 번씩 온 가족이 종합검진을 받도록 했다. 병이 있으면 남산 진료소, 봉화진료소, 김만유병원 등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고 고급 약을 보장해줬다.
자식들의 교육문제에서도 특혜를 받았다. 북한에서 이름 있는 학교라면 금성 1고등, 금성 2고등, 김일성종합대학, 고급당학교 등인데, 이런 주요 학교들에 시험을 치지 않고 입학하여 무상으로 공부하도록 보장해주었다. 가정에서 필요한 기타 물자도 중앙당 재정경리부 물자공급소에서 지급하는 고위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물자를 공급받았다. 물론 물건 값은 대단히 쌌다. 이밖에도 김정일에게 들어오는 각종 선물을 나누어주면서 물질적으로 북한 내에서 비할 바 없을 정도로 만족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하면 뭐하나. 경호원들의 정신적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근무하고, 쉼 없는 사상무장훈련으로 철저히 준비되어야 하며 언제나 긴장된 자세로 자그마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말과 행동 하나가 언제나 신중해야 하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늘 칼날 위를 걷는 기분으로 살아간다.
4. 김정일 현지 시찰시 경호방법
1) 행사기차는 세 차례 출발한다
김정일이 지방시찰 나갈 때에는 2시간 전에 당중앙위원회 호위부장인 6처장에게 어느 쪽으로 간다는 방향을 알려준다. 그러면 다시 호위과와 행사과, 기동중대, 시찰지역, 별장 경호부대에 비밀대호(암호)로 지시가 내려간다. (호위과장은 100번, 행사과장은 123번 하는 식으로 비밀대호로 지시가 내려간다.). 중앙당 재정경리부 4과(김정일 요리사)와 김정일 기록영화 촬영 및 녹음 기사들, 재정경리부 11과에서 관리하는 해당 지방 별장에도 행사 지시가 떨어진다.
2시간 전에 지시가 내려지기 때문에 시끌복잡하고 바쁘게 움직일 것 같지만 의외로 조용하고 신속하게 준비가 이루어진다. 비밀 보장을 위해서다. 김정일은 자신이 그 별장을 쓰던 안 쓰던 늘 행사치를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고 말하고, 행사지시가 내려져도 해당 별장을 들볶지 말고 차분히 준비하라고 일러두고 있다. 그래서 지시를 받은 별장도 겉으로는 평시처럼 조용하다. 이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외부에 노출되지 않을 것 아닌가.
각 지방 별장 경호부대들에는 항상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무기전투기술기재와 탄약을 준비하고 있으며 부식물, 차량 연료 등은 한 달 이상의 예비물자까지 비축해두고 있다. 자기 물자 뿐 아니라 행사보장을 위한 호위과와 기동중대 물자까지 예비로 가지고 있다. 행사발령이 떨어지면 호위과, 행정과, 기동중대는 무기전투기술 기재와 탄약, 식량, 부식물을 차에 싣고 기동태세를 갖춘다. 그리고 평양시 용성구역 열차 호위부에 가서 이것을 옮겨 싣고 열차 경호를 서면서 대기상태에 들어간다.
요리사와 촬영기자들 역시 김정일의 식사 및 촬영기자재 등 필요한 물자들을 빈틈없이 실어놓고 대기상태에 들어간다. 물품 준비가 끝나면 열차 편성을 한다. 우선 본 열차가 떠나기 전에 선발 차를 2시간 전에 출발시킨다. 이때 역량과 기재편성은 3분의 1씩 분할하여 배치한다. 철도부에서는 이 선발차를 ‘만대’라는 암호로 부른다. 철도부에서 ‘만대’가 출발하면 북한철도는 출반지로부터 목적지까지 전 구간의 전원을 끄고 일반 열차를 정지시킨다.
그 상태에서 6시간~8시간 동안 철도 주변의 모든 것을 대피시킨다. 주민들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영문도 모른 채 발이 묶여 있어야 한다. 행사 선발 차가 떠나서 2시간이 되면 본 행사 기차가 출발하고, 본 차가 떠나서 2시간 되면 행사 후발 차가 출발한다. 이렇게 되면 행사관련 열차는 3차례나 출발한다. 행사차량 앞뒤마다 또 내연기관차(견인기)가 한 대씩 배치된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김정일이 탄 열차인지 알 방도가 없다.
2) 인(人)의 장막을 치는 철통 경호
김정일이 가려고 하는 지역에서는 2시간 전부터 행사장 주변을 수색하고 차단 또는 근무 증강이 이루어진다. 행사가 진행되면 지방에 있는 현지 경호원들이 1선을 형성하고 평양에서 내려온 경호원들이 2선과 3선을 이루어 경호한다. 또한 보위부 행사과는 4선, 사회안전부 행사과는 5선, 각 지방 보위부, 사회안전부는 6선을 담당한다. 행사장 주변에 동원된 인원도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로 세우고 어떠한 금속도 몸에 착용하지 못하도록 탐지기로 확인한다.
겹겹이 방어막을 쌓아 개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지구상 최고 수준의 경호일 것이다. 경호 근무가 시작되면 보초소가 서로 보이게 지그재그형으로 또는 톱날식으로 보초소를 배치한다. 보초소에는 전화와 신호기재들을 설치하고 지형을 고려하여 기관총을 배치한다. 근무는 물론 주야간을 이어서 쉼 없이 이어지는데 야간이 되면 보초소 거리간격을 10m 이하로 하여 구간을 확대시킨다.
근무자는 자동소총에 탄알 150발을 채워 넣고 방독면을 착용하며 야간에는 철모를 쓰고 근무한다. 주간에는 4교대, 야간에는 3교대로 근무전환을 한다. 너무 덥거나 추운 날에는 1시간 간격으로 교대하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2시간 근무를 서고 2시간은 대기 및 순찰에 동원된다. 근무를 마치면 1시간 30분 잠을 자고 30분 동안 근무에 다시 들어가기 위한 연구 및 준비를 한다. 근무를 수행하면서 졸리거나 불편하면 위병장(근무 조직자)에게 전화 또는 신호를 통하여 제기를 하면 근무를 교대시킨다.
근무 나가기 전에 지형을 연구하고 근무 준수사항, 자기 임무를 요해한 다음 투입된다. 통행 암호와 주의 상황을 받고 나가며 모든 정황은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순찰병들과 위병장의 승인 하에 처리하게 되어 있다. 행사장 출입자는 반드시 출입증을 검열하여 지정된 명단에 있는지 확인하고 위병장의 지시에 따라 출입시킨다. 이러한 근무를 총괄하여 지휘하는 사람은 호위부 6처장이다.
행사장 주변에 일반 부대가 주둔하고 있을 시에는 그 부대에서 소유하고 있는 일체의 무기를 탄약고에 집어넣어 봉인한다. 그리고 이 탄약고를 경비하는 근무도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 요원들이 내려와 수행한다. 무기반출은 일체 금지된다. 대포를 갖고 있는 부대이면 모든 포신을 아래로 내리고 군인들이 얼씬하지도 못하게 한다. 군인들은 병영에서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김정일이 움직이는 행사는 사전에 보도되는 법이 없다. 여느 나라들처럼 오늘 대통령이 어디를 방문할 것이라는 보도는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다. 행사가 있었다면 5호문헌 편집기자들이 행사 끝날 때까지 기사를 발표하지 못한다. 김정일이 행사장을 뜬 다음에야 신문, 방송으로 공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지 시찰시 기본은 기관차로 이동하지만 거리가 짧거나 도로환경이 좋을 때에는 자동차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동 사항을 미리 알려주지 않고 불시에 차량이 들어오며 행사 직전까지도 행사를 하는지 모르게 암암리에 진행된다. 해안에서 행사가 있다면 배로 갈 때도 있다. 배로 갈 때는 선발배, 후발배, 본배(충성호)로 기동하며 모든 배에는 최신형 무기와 포가 실려있다. 경호 근무에 투입되는 사람들은 반드시 행사장을 등지고 근무를 수행한다.
행사장으로 헛눈길을 팔면 경호원 상호간에 통제를 한다. 김정일은 경호원 한 명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발생한다고 하면서 “경호사업의 한 치 실수는 혁명을 망쳐먹는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만약 친위대가 행사시나 평상시에 당 마크(암호 표식)를 달지 않으면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분실되었을 때에는 당사자의 행사 근무를 중지하고 심지어 행사 자체를 철수하는 경우까지 생길 수 있다 김정일이 자신의 신변안전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예이다.
5. 경호원 시절 에피소드로 본 김정일
1) 종잡을 수 없는 성격
김정일의 지시는 북한 땅에서 누구도 거역하지 못한다. 어느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늘 있었던 일이지만 김정일이 갑자기 “적들이 혁명의 수뇌부인 나를 노리고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경호원들이 근무 수행 중 긴장성을 늦추지 말고 자그마한 현상도 소홀히 처리해서는 안되며 차단 근무시에는 자동차나 승용차의 모든 부분을 다 검열하고 차에 폭탄장치를 설치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도 철저히 검열하고 통과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자신의 지시가 없이는 누구도 집무실이나 집(관저), 별장들에 출입을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바로 그 다음날 문제가 발생했다. 중앙당 본 청사(김정일의 집무실) 근무를 수행하는 차단초소인 47초소에 호위사령관인 전문섭이 번호판 없는 ‘벤츠’를 타고 들어온 것이다. 그 당시 근무를 수행하던 차단초소 3곳에서는 호위사령관 차를 김정일의 차로 착각하고 김정일의 집무실까지 무사통과시켰다.
그날 저녁 김정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차단근무를 섰던 경호원 6명을 처벌할 데 대한 지시가 내려와 그들은 한 달 동안 근무가 박탈되고 계급은 하전사(사병)로 강직되었다. 낮에는 대열훈련을 시키고 밤에는 사상투쟁을 벌이면서 고생을 죽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차형을 분간하지 못하면 김정일의 차를 세워도 좋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것이 온 부대에 통지되어 한동안 사람들을 몹시도 귀찮게 했다.
그런데 김정일의 지시가 일관성이 있으면 무조건 그렇게 하면 되겠는데 가끔 오락가락 하는 경우가 있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김정일 본인의 차까지도 세워서 검열해도 좋다는 지시가 내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김정일이 들어오는 데 근무자가 김정일의 차를 세우고 검열하려 하였다. 김정일은 승용차에서 내려 근무를 잘 수행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때 근무자 이름이 철룡이라는 대원이었는데 부소대장 직위에서 곧장 소위가 되고 김정일의 표창장까지 받았다.
철룡이는 경호원의 본보기로 전 부대에 소개되었다. 매일 저녁마다. 김정일의 지시가 떨어지니 오늘은 또 무슨 문제가 제기될까 조마조마하며 보내던 시기였는데 그날은 좋은 일이 생겨 부대원 모두가 제일처럼 함께 기뻐했다. 그런데 기쁜 날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한 경호원이 차단근무를 수행하다가 김정일 차가 들어오자 차를 세우려했다. 철룡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차가 멈추지 않기에 길 한복판으로 날아들면서 규정대로 총을 뽑아 들었다. 차가 급제동하고 김정일이 내렸다.
칭찬을 할 줄 알았는데 김정일은 “자기 차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욕설을 퍼붓고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당시 김정일이 상당히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던가 보다. 당시 근무를 서던 경호원은 이 일로 인해 사상투쟁 무대에 올라갔다. 거기서 잘못했다고 하면 됐을 것을,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고 반박하였는데 이것이 김정일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갔다. 다음날 보위과에서 나와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후로 그를 본 사람이 없다. 경호원들 사이에는 그 누구도 살지 않은 쑥섬으로 가족까지 몽땅 추방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2) 김정일 차가 나타나면 허겁지겁 도망가던 간부들
한번은 김정일이 호위사령부가 자신의 지시를 받지 않고 김일성의 지시만 받는다고 노발대발했다. “수령의 후계자에 대한 관점이 똑바로 서지 않았다”, “당중앙의 영도를 압박하겠다는 것은 변질된 것이다”. “당에서 혁명을 하자고 호위사령부나 국가기관들, 법기관, 인민무력부를 내온 것인데 지시를 안 받겠다는 것은 잘못된 일” 이라는 등 온갖 말을 늘어놓으며 그 자리에서 노동당 지도부 그루빠(그룹)을 호위사령부에 투입하여 지도검열을 하게 했다.
그 결과 호위사령부 기구가 대폭 개편되었다. 호위사령부는 김일성을 잘 경호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면서 호위사령부에 소속되었던 예술단과 체육단을 해체시켰다. 또 숱한 간부들을 철직, 해임시키고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곳으로 추방했다. 김일성은 1976년 가을에 당중앙위원회 본 청사를 나간 뒤 김정일의 집무실에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김정일이 이렇게 제 아버지까지 누르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니 중앙당 책임부부장들이 슬슬 김정일을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김정일은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해나가면서부터 자기 지시를 따르지 않는 일꾼은 무조건 철직시켰다. 일꾼들은 본 청사에 김정일의 차만 들어오면 호랑이 앞의 강아지처럼 겁에 질려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었다. 당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당중앙위원회 집무실로 통하는 인도 곳곳에 초인종과 불신호를 달아놓게 했는데, 김정일이 들어오면은 온 정원이 환하게 사방에서 불꽃이 튀고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본 청사 안의 일꾼들은 그때마다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였다.
북한은 연료사정이 곤란하여 중앙당 책임부부장들까지도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당 본 청사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물론 책임부부장들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김정일이 탄 차가 나타나면 자전거를 어깨에 둘러메고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바빴다. 그 나이 많은 삶들이 자전거를 끌고 허겁지겁 숨다가 넘어지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바라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김정일이 얼마나 독재적이고 무지막지한지 경호원들이나 당중앙위원회에서 함께 일보는 사람들까지도 ‘고양이 앞의 쥐’ 신세이다. 김정일의 지시는 봉건왕조시대 폭군들의 말과 행동보다 더 가혹했다. 노동당 비서였던 김용순도 검덕광산에 혁명화 대상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승급되어 지금은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으로 대남 사업을 보면서 김정일의 옆에서 쪽도 못 펴고 절대 복종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북한에서 김정일은 신이다. 아니, 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떠받들어진다. 북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신보다 위대한 신’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불쌍하고 가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참하게 죽기 싫다면 말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북한의 고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다.
한번은 김정일이 호위사령부가 자신의 지시를 받지 않고 김일성의 지시만 받는다고 노발대발했다. “수령의 후계자에 대한 관점이 똑바로 서지 않았다”, “당중앙의 영도를 압박하겠다는 것은 변질된 것이다”. “당에서 혁명을 하자고 호위사령부나 국가기관들, 법기관, 인민무력부를 내온 것인데 지시를 안 받겠다는 것은 잘못된 일” 이라는 등 온갖 말을 늘어놓으며 그 자리에서 노동당 지도부 그루빠(그룹)을 호위사령부에 투입하여 지도검열을 하게 했다.
그 결과 호위사령부 기구가 대폭 개편되었다. 호위사령부는 김일성을 잘 경호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면서 호위사령부에 소속되었던 예술단과 체육단을 해체시켰다. 또 숱한 간부들을 철직, 해임시키고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곳으로 추방했다. 김일성은 1976년 가을에 당중앙위원회 본 청사를 나간 뒤 김정일의 집무실에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김정일이 이렇게 제 아버지까지 누르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니 중앙당 책임부부장들이 슬슬 김정일을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김정일은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해나가면서부터 자기 지시를 따르지 않는 일꾼은 무조건 철직시켰다. 일꾼들은 본 청사에 김정일의 차만 들어오면 호랑이 앞의 강아지처럼 겁에 질려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었다. 당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당중앙위원회 집무실로 통하는 인도 곳곳에 초인종과 불신호를 달아놓게 했는데, 김정일이 들어오면은 온 정원이 환하게 사방에서 불꽃이 튀고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본 청사 안의 일꾼들은 그때마다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였다.
북한은 연료사정이 곤란하여 중앙당 책임부부장들까지도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당 본 청사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물론 책임부부장들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김정일이 탄 차가 나타나면 자전거를 어깨에 둘러메고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바빴다. 그 나이 많은 삶들이 자전거를 끌고 허겁지겁 숨다가 넘어지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바라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김정일이 얼마나 독재적이고 무지막지한지 경호원들이나 당중앙위원회에서 함께 일보는 사람들까지도 ‘고양이 앞의 쥐’ 신세이다. 김정일의 지시는 봉건왕조시대 폭군들의 말과 행동보다 더 가혹했다. 노동당 비서였던 김용순도 검덕광산에 혁명화 대상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승급되어 지금은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으로 대남 사업을 보면서 김정일의 옆에서 쪽도 못 펴고 절대 복종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북한에서 김정일은 신이다. 아니, 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떠받들어진다. 북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신보다 위대한 신’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불쌍하고 가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참하게 죽기 싫다면 말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북한의 고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다.
3) 타자수, 교환수 아가씨들은 머리핀을 꽂지 못한다
김정일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특히 자기 신변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그래서 경호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당중앙위원회 2호위부는 대외적으로 친위대 칭호를 받은 자기의 부대라는 의미에서 1호위부 대비할 수 없는 만능 경호원으로 되어야 한다고 김정일이 늘 말하였다.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면 2호위부는 1호위부와 사격 경기와 태권도 경기, 쌍방훈련을 자주 진행하였다.
어느 날은 당중앙위원회 호위부 지하 사격장에서 사격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1호위부 성원들이 각자 자기 총을 가지고 와 사격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김정일이 총은 6처에서 보장하니 1호위부는 빈 몸으로 와서 사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것은 자기는 자기 친위대만 믿지 누구도 믿지 않으며 그들 속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의미였다. 사격장에 들어올 때도 몸수색을 철저히 하고 사격 경기를 시작했다.
사격장 진입과 사격시, 사격이 끝난 다음에도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고 항상 감시를 했으며, 사격장을 나가는 순간까지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규정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격 경기에서 이겼다는 보고를 받고 나서야 김정일은 정말로 믿음이 간다고, 자만하지 말고 백발백증의 명사수가 되어야 한다고 칭찬했다. 2호위부와 대남연락소간의 간의 사격 경기, 쌍방훈련도 있었다. 김정일은 그때에도 “연락소 성원들은 남한을 들어갔다 왔다 하는 사람들이니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그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그들에게 보위사업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엄격히 단속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연락소 직원들은 대남 공작원으로 파견되는데, 혹시 그 중에 체포되어 2호위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또 이미 남측에 포섭되어 역공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연락소 직원들에 대해서도 철저한 수색이 이루어졌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감시가 계속되었다. 그들은 김정일이 자기들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김정일의 속마음은 이처럼 전혀 다르다.
한번은 김정일이 대남연락소에 이색적인 과업을 준 적이 있다. 호위부와 함께 15일 동안 경호근무를 함께 서면서 당중앙위원회 본 청사를 연구하고 한번 침투해 보라는 것이다. 대남연락소는 이것을 김정일이 자신들에게 주는 최고의 신임이라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하였지만 들어갈 구멍을 찾지 못했다. 나중에는 김정일의 승인을 받고 헬기를 띄우며 연구를 하였어도 끝내 본 청사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연락소 직원들은 남한의 청와대는 자기 집처럼 드나들 수 있지만 당중앙위원회 본 청사는 철통같아 들어갈 수 없다고 포기하였다. 김정일은 무척 흡족해 했는데, 그러나 이것으로도 본 청사 경호에 대한 믿음이 서지 않아 당중앙위원회 호위부장에게 알리지도 않고 호위사령부를 비상 소집했다. 적들이 불시에 침입할 경우 본 청사에서 경호부대가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장군인 경호부장도 의미를 모르고 휴식하다가 김정일 명령이 떨어지자 전투준비를 하고 경호부대를 지휘했다. 당시 경호부대는 본 청사의 화점(벙커), 비상시에는 사용하는 자기진지를 차지하고 심지어 본 청사 지붕에 포를 걸고 완전 전투준비가 끝나기까지 불과 15분이 걸렸다. 김정일은 “15분이면 너무 늦다”고 하면서 “적 특공대가 들어와서 그 시간이면 다 붕괴된 상태”라고 했다.
김정일은 자기 자신도 믿지 않을 만큼 의심이 대단히 많았다. 심지어 자기 옆에서 일보는 타자수나 교환수까지도 몸에 금속으로 된 물체를 일체 가지고 다니지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보니 교환수나 타자수 아가씨들이 머리에 핀도 꽂지 못하여 머리를 다 풀어놓고 다녔다. 김정일은 이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다.
4) 경호원에게 쏟아붓는 지극한 정성
이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는 김정일이지만 자신의 경호원인 친위대만은 전적으로 신뢰하고 혜택을 베풀었다. 물론 정말로 믿어서 그러는 것인지, 믿는 척 하는 것인지 그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 없어 모르겠다. 김정일이 행사에 나가면 일반 인민군대는 일체 총을 다 무기고에다 넣고 포신을 내려야 한다. 주변 군용비행기까지 봉쇄하며 국가 보위부나 보위사령부 요원들도 1000m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규정을 세워 놓았다.
그런데 경호원들은 김정일 1m 앞에까지 경호를 서면서도 자동소총에 탄알 150발을 가득 채워 넣고 있다. 김정일앞에서 받들어 총 경례까지 하지만 총을 직접 건네 받고 탄알까지 열어보는 김정일의 모습은 경호원들에 대한 믿음의 상징인 것이다. 김정일은 “친위대가 마크(암호 표식)를 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마음이 든든해지고 믿음성이 간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앞서 잠깐 소개했지만 친위대는 혹시 마크를 잃어버리면 온 부대가 색상이 다른 암호 표식으로 바꾸어 단다.
그리고 잃어버린 마크를 찾을 때까지 비상에 걸린다. 김정일은 아침운동을 많이 한다. 그때마다 여자 수행원들이 따라 다니는데 그들이 김정일에게 안기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한다. 경호원들이 앞에 있는데도 보기 흉한 행동을 별다른 내색도 없이 천연스럽게 한다. 소문이 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것 또한 김정일의 경호원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 경호원들은 스스로 쑥스럽기 때문에 근무방향을 돌리며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근무를 수행한다.
김정일은 “앞으로 나의 경호원들을 데리고 당과 국가, 군대를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회에 나가서 대학을 무조건 다니도록 해당 당조직에서 과업을 주고 당정권, 군대기관에서 간부로 등록하였다. 친위대 출신들이 당, 정부기관의 주요직에 현재까지 많이 들어갔으며 당위원회에 간부로 등록되어 간부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회안정부나 국가보위부에도 많은 수가 있다. 아직까지 북한 땅에서 경호사업을 하다가 제대한 후 막노동하는 사람은 없다.
물질적인 혜택도 엄청났다. 명절마다, 아니 거의 매달 특이한 훈련기자재와 식품에 이르기까지 각종 선물을 주는 것이다. 경호부대에 1월1일이 되면 자기가 직접 사인한 신년장을 줬다. 예를 들어 ‘새해를 축하합니다. 19xx년 1월 1일. 김정일’ 이런 식의 신년장을 매사람에게 전달했다. 식품으로는 귤 한 박스, 사과, 배, 파인애플, 통조림 등을 선물로 줬고, 가정에는 양복기지, 내의류, 백두산 불로주, 기러기 고기, 노루, 꿩, 곰 고기까지 다양하게 선물했다.
국가적 명절인 2월 16일(김정일 생일), 4월 15일(김일성 생일), 8워루 15일(조국해방기념일), 9월 9일(공화국 수립일), 10월 10일(당창건일) 등에도 고정적으로 선물을 줬고, 계절마다 물고기류, 육류, 햅쌀, 과일에 이르기까지 선물이 안 오는 달이 없을 정도였다. 내가 근 11년 동안 경호생활을 하며 받은 선물만 계산해도 5톤 트럭 한차는 되는 양일 것이다.
정말로 경호원은 중앙당 간부가 전혀 부럽지 않은 배려를 받고 살았다. 세상에는 김정일의 경호원들처럼 특혜를 받고 사는 경호원도 없을 것이다. 김정일은 자기 경호원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아끼지 않았다. 지금도 인민들에게 세계 최고의 몹쓸 짓을 하면서 경호원들에게는 세계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있을 것이다.
5) 친위대는 투표에도 참가하지 못한다
북한의 선거는 빈껍데기 선거이며 거짓선거이다. 북한 땅이 온통 독재이다 보니 선거도 자요가 없고 김정일이 선택한 사람을 지지해주는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선거에서 반대표를 던지면 외딴 곳으로 추방되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투표소에서 국가보위부 요원들이 감시하며 주민들의 무조건 찬성 투표하도록 눈을 번뜩인다.
선거에 참가하지 않는 것도 반국가행위에 적용되어 정치범이 된다. 형식적일지라도 어찌 되었든 권력을 연장하는 기쁜 날이기 때문에 선거를 하는 행위는 경건하여야 하면서도 흥겹게 진행된다. 그러니 옷도 함부로 입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정복에 김일성 배지를 달아야 하며 투표용지도 정중히 집어넣는다. 주민들이 좋아하지도 않는데 형식적으로 방송차를 가져다 놓고 춤을 추게 하면서 사회주의 낙원이라고 방송신문 매체마다 떠들어댄다.
이러한 선거를 100%참가에 100% 찬성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갑자기 선거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친위부대에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선거가 3번 있었지만 한번도 선거에 참가할 의무를 가지고 참가한 적이 없다는 것 때문이다. 북한 헌법에는 만 17세 되면 선거에 참가할 의무를 가지고 참가할 수 있으며 공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물론 김정일의 명령이면 헌법이든 헌법 할아비든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헌법 규정을 무시하고, 일반 국민들은 하기 싫어도 꼭 해야 하는 선거를 ‘해서는 안 되는’ 예외 집단이 있으니 바로 경호원들이다.
우리는 선거에 왜 참가하지 못하는가 하고 물어보면 김정일이 북한 땅에서 가장 핵심계급인 알짜배기로 경호원을 뽑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선거에 참가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둘러댄다. “8000명 이상이 되는 경호원 집단에서 선거를 하지 않은 것도 김정일의 배려”라는 엉뚱한 변명까지 섞어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실지로는 경호부대의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선거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선 선거에 참가하면 부대 명칭이 밝혀지고 사회적으로 노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인원수까지 밝혀질 우려도 있다. 그래서 경호부대원은 누구도 선거에 참가시키지 않는다. 경호부대는 특수 대상이어서 북한주민등록에도 따지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만약 무슨 일이 있어 신분을 조사하다가도 그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이렇듯 북한 땅에 살면서도 북한 사람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호원이다.
6) 재정경리부 8과, 11과 직원들
조선노동당 재정경리부 8과는 김정일이 사용하는 건물을 건설하고 보수하는 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부서이다. 8과에서 건설한, 내가 알고 있는 건물만 대강 열거해 보아도 다음과 같다. 노동당 본 청사(김정일 집무실)시사실, 전시 참모부인 평양시 용성구역에 있는 21지구(55과), 함경남도 낙원군에 있는 72호 별장, 낙원군에 있는 회의실, 함경남도 흥남구역에 있는 37호실 별장, 황해남도 신천군에 있는 향산 2별장, 남포시 달천 별장, 황해북도 정반산 별장, 함북도 경성 별장, 양강도 삼지연 별장, 남포시 창성 별장, 평양시 중구역 16대기(관저 1초소), 16대기 미림(관저 2초소), 평안남도 평성시 자모산 별장, 양강도 백두산 별장···.
이것들은 북한 땅에서 김정일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고 유희시설이다. 건물과 유희시설에 대한 설명은 이 책 4부에서 다시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이것을 다 재정경리부 8과에서 취급하고 처리하며 보수까지 도맡아 한다. 만약 건물에 이상이 있다든지 약간 손봐야할 구석이 있어도 누구도 손대지 못하며 오직 재정경리부 8과만이 담당할 수 있다. 김정일이 드나드는 건물이니 그 구조나 특성도 보안사항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8과에 취업하면 건물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하여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8과에 종사하게 된다.
건설자재는 모두가 수입품이다. 일본,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덴마크산 등 세계 각지에서 최고 품질의 것만을 구입해오다 보니 건물 하나에만도 수억 달러의 막대한 자금이 투자된다. 건물의 부지는 보통 사방 4~10km 되는 구간에 마련되고, 14층 정도의 높이에 사방 50~100m 주변을 건물들로 둘러싼다. 김정일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쓰는 별장을 따라오자면 100년이 걸려도 안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다닌다지 않는가?
노동당 11과는 김정일만이 들어가는 별장, 건물에서 근무하는 전문 관리인과 기술자들을 관리하는 부서이다. 11과는 역시 재정경리부에 소속되어 있다. 지방 별장들의 관리원과 기술 정비원들은 지방에서 생활하지만 거주지는 평양시 해방산 구역으로 되어 있고 모든 혜택을 다 받고 산다. 11과 직원들은 북한에서 인재들이 모이는 부서이다. 한 개 별장의 직원만 200명이 넘고, 그 가족들까지 합치면 800명은 족히 될 것이다. 이들은 김정일 별장 옆에서 대를 이어 가며 김정일의 휴흥 및 봉사시설에서 종사하며 산다.
김정일이 별장에 내려와서 15일~2달 정도 지내다 가면 부식물 찌꺼기와 물품만도 엄청난데, 이들은 이것을 재활용하여 생활하기도 한다. 별장 안에서 얼마나 소비가 심한가는 실로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북한에 에너지가 부족하여 공장기업이 멈추었지만 별장들이 소비하는 전기량은 북한에서 손꼽히는 생산시설인 무산광산에서 소비하는 전기량과 맞먹는다. 김정일이 별장을 쓰지 않아도 별장 건물이 손상가지 않게 하기 위해 전기를 풀가동 한다. 별장 주변에는 연기를 피우는 일이 절대 없어 일체 전기로만 돌리게 되었다. 내 생각엔 김정일 별장의 전기만 끊어도 북한 전기문제의 40~50%는 풀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