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적'은 묵을 숙(宿) 자에 원수 적(敵) 자를 써서 "여러 해 전부터의 적수"라는 뜻입니다. 이 '숙적'도 '오랜 적' 같은 말로 바꿔 쓸 수 있을 겁니다.
안녕하세요.
어제 '석패'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오늘도 좀 이어보겠습니다.
'석패'는 안타까운 패배로 '아쉽게 졌다'고 쓰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완패'는 완전할 완(完) 자에 깨뜨릴 패(敗) 자를 써서 완전하게 깨짐을 뜻합니다. 실력 차이가 너무 크고 두드러져 깨끗하게 진 것이죠. '완패' 또한 '크게 져'나 '아주 져' 같은 말로 바꿔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일본과 동메달을 두고 다퉈야 합니다. 언론에서는 일본을 '숙적'이라고 쓰더군요. '숙적'은 묵을 숙(宿) 자에 원수 적(敵) 자를 써서 "여러 해 전부터의 적수"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관계를 잘 나타내는 딱 좋은 말 같습니다. 이 '숙적'도 '오랜 적' 같은 말로 바꿔 쓸 수 있을 겁니다.
우리말 편지에서 가끔 잊혀가는 순우리말을 소개합니다. 그럴 때 가끔 받는 댓글이 그냥 있는 말을 쓰면 되지 왜 굳이 사라져가는 말을 찾아서 외워야 하는지를 따지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말은 살아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쓰지 않으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 말에는 우리 넋과 삶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우리 문화가 되죠.
석패, 완패, 숙적을 써도 거의 다 알아먹습니다. 그러나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 아이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저에게 물어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쉽게 져, 아주 져, 오래된 적으로 풀어서 설명해줍니다. 그럼 애들은 알아듣습니다.
이제 말을 배워가는 초등학생들이 왜 굳이 석패, 완패, 숙적을 배워야 하죠. 걔들이 쓰는 쉬운 말을 쭉 쓰도록 하면 안 될까요? 그게 깨끗한 우리말이잖아요. 굳이 어려운 말을 배워야 한다면, 한자말보다는 순우리말을 찾아서 배우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가을에 피는 꽃 하면 코스모스 꽃이 생각나죠?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해 원래부터 이 땅에서 자라난 우리 꽃처럼 생각됩니다. 이 코스모스의 순 우리말이 '살사리'라고 합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고 살살대는 모습에서 '살사리(살살이→살사리)꽃'이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분은 순 우리말이라고 하고, 또 다른 분은 북한에서 쓰는 문화어라고도 하고...
그래서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살사리꽃'을 뒤져봤습니다. 매정하게도, "'코스모스(cosmos)'의 잘못."이라고 나와 있네요. 한마디로 잘못된 말이니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럼, 해바라기는 왜 그냥 뒀죠? "선플라워(sunflower)의 잘못'이라고 해야 하고, 토끼풀은 "클로버(clover)의 잘못'이라고 풀어야 하지 않나요?
외래어나 한자어에 밀려 순 우리말이 없어진 게 한두 개가 아니지만, 국가기관, 될 수 있으면 우리말을 살려 쓰고, 없는 말도 만들어내야 할 국립국어원에서 오히려 우리말을 죽이고 있는 이 꼴을 어떻게 봐야 하죠?
우리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살사리꽃'을 쓰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살사리꽃이 북한에서 쓰는 문화어라서 쓰면 안 된다고요? 저는 국가정보원 아닌 국가정보원 할아비가 와도 저는 코스모스보다는 살사리꽃을 쓰겠습니다.
이제 곧 방송과 신문에서 살사리꽃이 활짝 핀 길을 소개하겠죠? 그러면서 '코스모스 만개'라는 꼭지를 뽑을 겁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코스모스 만개'라고 제목을 뽑지 마시고, '살사리꽃 활짝'이라고 뽑아 주세요. 만개(滿開, まんかい[망가이])가 일본말이란 것을 다 알고 계시잖아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