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읽기 6: 등반 아포리즘의 재발견
등반 아포리즘에 대한 질문 하나: 길이 끝나는 곳에서...
1. “길이 끝나는 곳에서 등산은 시작된다”라는 문구를 우리나라 산서 이 책, 저 책에서 여러 번 읽었다. 김영도 선생께서도 『산의 사상』(수문출판사, 1995, 21쪽)에, “등산은 길이 끊어진 데서 시작한다는 프랑스 등산가 샤테리우스의 말 만큼 등산과 등산가의 조건을 요약한 글은 쉽지 않다.”라고 쓰셨다.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도서출판 이마운틴, 2009, 253쪽)에서도. 김장호 선생은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평화출판사, 1989, 156쪽)에서, “길이 끝나는 데서 등산은 시작된다..,시가 일상의 언어가 끝나는 이른바 그 언어도단의 경지에서 피어나듯이, 등산도 일상의 길이 끝나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쓰셨다.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평화출판사, 1989, 104쪽)에서도, 두 번째 산 시집 『북한산 벼랑』(평화출판사, 1987) 서문에서도.
1.1. 샤테리우스가 말한 혹은 쓴, 훌륭한 이 말 혹은 글의 원문을 알고 싶었다. 누가 어떤 책에서 썼는지를 찾고자 했으나 헛수고였다. 김영도 선생은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수문출판사, 2012, 390쪽)에서도, “등산은 길이 끊어진 데서 시작한다”라고 쓰면서, 프랑스 산악인 샤텔리우스라고 적었다. 불어로는 알랭 드 샤텔뤼Alain de Chatellus, 1907-1987, 알피니스트, 작가이고, 발음은 ‘샤텔뤼’이다. 그가 쓴 여러 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읽어 보지도 못했던 터라, 이 문구의 출처를 찾을 수 없었다. 구글 프랑스에서도, 인용 사전에서도 이 문구의 발원지를 알려줄 수 있는 문헌을 찾을 수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우리나라 많은 산악인들이 영국의 등반가 머메리가 한 말이라고 했고, 더 많은 이들이 이 글을 수없이 제각각 인용했다. 예를 들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등산은 시작된다고 했다. ‘머메리즘mummerism’이다. 이것은 정상 정복을 목표로 하는 등정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과정에 가치를 두는 등로주의를 가리킨다.”처럼. 이 문구는 여러 형태로 변주되어, “등산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우리가 가게 되면 그게 새로운 길이 되고, 새로운 루트가 될 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은 시작되고, 길이 끝나는 곳에 섬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을 만들고 있었다.” 등등의 갈래로 퍼져갔다. 한 네이버 불로그에는 “Mountain climbing begins at the end of the road. If we go, it will be a new road and a new route -Albert Frederick Mummery”라고도 쓰여있다. 내 실력으로, 구글에서 이 영문의 출처나 진위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시인 정호승도 <미안하다>라는 시에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라고 썼다. 영화 <히말라야>(이석훈 감독)에서도 이 대사가 나오고, SK 그룹 회장도 연설문에서 이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심지어 종교계, 교육계 인사들도. 그 문구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자는 뜻으로 쓰였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도 『일상적인 삶La vie quotidienne』(1968), 제 7장 독서에서, “저자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 독서”라고 했다. 소설가 박범신도 “현대문학을 가리켜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한 것은 루카치다.”(2012)라고 신문에 기고한 글에 썼다. 안성민 회원은 내게, 장호 선생이 쓰신 책 제목,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는 영국의 시인 존 메이스필드John Masefield(1878~1967)의 시 <바다에의 열정Sea fever> 첫 구절인 “I must go down to the seas again, to the lonely sea and the sky”를 패러디 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바다가 산으로 바뀐 것일 뿐, 그 맥락은 같다.
2. “길이 끝나는 곳에서 등산은 시작된다”라는 문구를 되새기게 된 계기는, 클로드 가르디앙Claude Gardien이 쓴, 『새로운 알피니스트들Les nouveaux alpinistes』(Editions Glénat, 2019)를 읽으면서부터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등산은 시작된다”와 이 책에 들어있는 루시앙 드비가 한 말, “Pour les alpinistes, le temps du monde fini commence”가 서로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53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등반 기술에서부터 멘탈에 이르기까지, 하나 뿐인 지구와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알피니즘과 알피니스트들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책은 1950년대부터 프랑스 산악연맹에서 고산 원정대 산파역을 했고, 특히 1950년 안나푸르나 원정대를 준비했던 루시앙 드비Lucien Devies(1910-1980)가 제기한 질문 즉 히말라야 등정의 역사 이후, 알피니스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근원적인 질문에 실천적으로 대답하는 새로운 알피니스트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서 루시앙 드비는 폴 발레리의 유명한 글을 인용하면서, 알피니스트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다. “Pour les alpinistes, le temps du monde fini commence”라고 하면서. 위 책은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2.1. 위 문구를 직역하면, “알피니스트들이여, 끝에 다다른 세상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마라,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역 부분)” 쯤 된다. 이 문구 바로 앞에서 폴 발레리는 이렇게 적었다. 오늘의 세상에는 "...깃발을 꽂을 바위도 더 이상 없고, 지도 위에 텅 빈 곳도 더 이상 없다..."고. 영문으로는 “The era of the end of the world is beginning.”이다. 프랑스에서 이 문구는 여러 개로 변주되어 쓰이는데, 그 뜻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등반) 행위의 종말을 뜻하는 경고로 쓰인다. 이 문장은 단순하지만, 동사 끝나다finir와 시작하다commencer가 붙어 있어 번역이 매끄럽지만은 않다. 끝장 난 세상, 마지막에 다다른 세상du monde fini/end of the world이란 놀라운 과학의 진보와 폭발적인 산업의 발달이 가져온 세상으로, 개발, 발전과 같은 이름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위험한 현대사회를 뜻한다. 인류에게 기술산업, 생산과 소비의 과잉, 비윤리적 과학을 성찰하라는 경구인 셈이다. 사실 이런 문장구조는 서양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고백한 글처럼,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안다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모른다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문장을 강조하는 최적의 방식이다. 이를 통해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현대 등반의 무모한 시도야말로 알피니스트가 경계해야 할 바이고, 그렇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때 알피니스트의 한탄과 위기가 야기된다는 사실이다.
2.2. “Le temps du monde fini commence”, 이 글을 맨 처음 쓴 이는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1871-1945)이다. 이 문구는 그가 쓴 책, 『오늘날 세상을 보는 시선들Regards sur le monde actuel』(Librairie Stock, 1931) 서문 35쪽에 들어있다. 그리고 1937년 파리 샤이오 궁이 새롭게 문을 열면서, 궁 전면 박공에 새겨졌다.(*참고로 샤이오 궁Palais de Chaillot은 파리 에펠 탑 뒤, 트로카데로 언덕에 있는 큰 궁으로, 문화인류 박물관을 비롯한 3개 박물관, 국립 영화기록관, 극장, 현대미술관 등이 있고, 전체적으로 미래에 관한 과학이 아니라 과거의 인류문화와 예술 속에서 삶의 흔적을 기록, 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UN이 1948년 세계 인권 선언문을 채택한 곳이기도 하다.)
2.3. 샤이오 궁이 국가적 문화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면서 개최한 전시회가 “현대사회에서 예술과 기술이라는 국제 전시회Exposition internationale <Arts et Techniques dans la vie moderne>”였다. 당대 프랑스 문학을 대표했던 시인 폴 발레리가 이 글을 쓴 의도와 정부가 이 궁의 정면에 이 글을 비문으로 새긴 의도는 한결같다. 과학, 산업, 자본주의 이후의 인류의 삶에 대한 염려였고, 샤이오 궁이 역사와 예술을 통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폴 발레리는 이 책, 이 글을 통하여 세계가 어떻게 서로 의지, 공존할 수 있는지,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나약하기만 한 지구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인간의 권리처럼 자연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했다.
3. 다시 등반으로 돌아와, 루시앙 드비 혹은 샤텔뤼처럼, 프랑스 알피니스트들이 폴 발레리의 이 문구를 사용하는 바는, 광포한 과학의 시대에, 고산 등반에 있어서 초등의 의미가 사라진 시대에 알피니스트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되묻고자 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를 위해서 아주 오래 전, 산악인 루시앙 드비는 폴 발레리의 이 문구를 경구처럼 재인용하면서, 문구 앞에 ‘알피니스트들에게Pour les alpinistes를 붙여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때부터 이 문구는 이리저리 변용되어 쓰이게 된 것이 아닐까? 프랑스 등반가 샤텔뤼, 영국의 머메리가 ‘길 끝에 산이 있고, 등산이 시작된다’는 것으로 보편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3.1 우리들도 이 문구를 이런 뜻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등반행위의 의미는 결코 틀린 것이 아니지만, 이 문구가 폴 발레리가 쓴 글의 패러디라면, 이를 우리 시대에 올바른 등반행위의 가치와 역할, 무엇보다도 고도 산업사회에 어깃장을 놓으면서 자연과 인간의 삶을 중시하는 새로운 등반문화를 묻고, 실천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나을 듯하다. 폴 발레리의 이 문구가 인류에게 과학과 진보에 관한 근원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처럼, 등반에 관해서 되돌아보는 뜻, 그러니까 등반의 앞이 아니라 등반의 뒤를 새겨보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산서회 회원 여러분, 원문 출처나 해석에 대한 의견 구합니다. 위의 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이해를 구합니다.(2020.01.30. ㅇㅊㅇ)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찾아봐야겠네요.
산서에 게재할만한 좋은글 입니다
다음편 기대합니다^^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