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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또 49일재 지난 날 아닙니까? 그래서 전국 사찰에서 49재를 또 지냈잖아. 또 불교는 또 그런데는 아주 (하하) 잘~ 맞아. 그 뭐 사람 무슨 뭐 슬픈 일이라든지 무슨 문제가 생겼다던지 뭐 돌아가셨다던지 이런데는 꼭 목탁소리, 요령소리가 잘 어울려. 그리고 49재 이런 것들이 또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위로하지 달리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하~ 사람 마음 위로하는데는 참 그 불교의 목탁소리, 요령소리 그 천도재 지내는 그런 그 행사 이게 참 아주 잘 어울려요. 특히 한국의 정서에는 그보다 더 좋은게 없어요. 그 참 유수한 사찰에서 49재 지낸거 아주 잘한거에요. 그런거
④ 光明無有邊(광명무유변)이요 說法亦無量(설법역무량)이라 광명도 끝이 없고, 광명도 가이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 그『화엄경』에는 이 경전 우리가 보는 이 교재는 하나의 수단이고 이것을 통해서 세상이 그대로『화엄경』이다. 그대로 팔만대장경이다 라고 하는데 눈을 뜨도록 안내해주는게 바로 이 우리가 배우는 이『화엄경』이여. 가짜『화엄경』이거는 진짜 가짜『화엄경』이고 진짜『화엄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렇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눈을 뜨는 그런 그 힌트는 어디서 찾느냐? 가짜『화엄경』에서 찾는거야. 우리가 들고 있는 이 종이와 먹으로 된 가짜『화엄경』에서 힌트를 찾어. 그럼 그 힌트를 통해서 진짜 세상『화엄경』을 이해하고 거기서 이제『화엄경』을 깨닫는거죠. 야~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게 또 이런 교재로써 비록 가짜『화엄경』이지마는 가짜『화엄경』이 또 필요한거여. 이것이야말로 방편이라. 이것이야말로 光明無有邊 그 가르침이 끝이 없고 說法亦無量이라 설법도 거기에 하나하나 사건이 큰~ 설법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뭐 거기도 맞춰서 설명하는 것은 아주 작은 설명이고 그 사실 자체가 무한한 설법이라. 그 사실 하나하나가 무한한 설법이여. 거기서 뭐 한 사람의 사연만 가지고도 경전 한 권 충분히 거기서 표현히 가능하지요.
佛子隨其智(불자수기지)하야 불자가 그 지혜를 따라서 能入能觀察(능입능관찰)이라 금방 이야기한 내용을 그대로 표현해놨네. 불자가 그 지혜를 따라서 능히 그 속에 들어갔고 그 사실 속에 들고 그 사건 속에 들어가서 능히 관찰한다. 아~ 이런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환~하게 보는 거죠. 관찰하는거여. 그래 그런걸 봐도 이 불법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그 사건만으로 보는거야. 그 사건으로 보고 마는거라.
그 학생들이 이제 제일 숫자가 많아서 학생중심으로 이제 모든 것이 보도도 되고 그렇게 하니까 학생 이외 일반인들도 수십 명이 있었잖아요. 근데 그 유가족들은 분통을 터트리는거야.“왜 신문에 한 번도 나지않고 방송에 한 번도 나지않고 우리도 죽었는데 죽은 것을 안 알아주느냐!”야~ 사람 마음이 또 그런거야. 똑같이 죽었는데 어느 놈은 알아주고 어느 놈은 안 알아주는, 죽었는데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그건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무 의미 없는거야. 알아주든, 알아준다고 살아나나. 안 알아준다고 뭐 살아나나. 근데 안 알아준다고 분통을 터트리는거야.
야~ 그렇게 그래서 난 또 크게 깨달았어. 그 취재를 한 한 장면을 딱 봤어. 잘 안 나왔거든요. 일반인들 40명인가 50명인가 있잖아요? 그 유가족들은 좀 많습니까? 근데 왜 한 번도 언론에 보도를 안 해주느냐? 우리도 죽었는데... 그것도 또 참 우리 인간 심리를 거기서 이제 해석해 들어가기로 하면은 끝이 없는 해석이 나옵니다. 그 사실은 그게 잘못됐다 뭐 옳다 이런 뜻이 아니라 그건 뭐 인간의 마음으로써 당연한거에요. 안 알아준다고 분통터트리는 것도 당연한거라.
그러나 사실 따지고보면은 이것도 허망한거 저것도 허망한거. 다~ 허망한거요. 다 허망한거라. 그래 최종법은 적멸법이라. 적멸법. 일체법이 다 적멸로 돌아간다. 경전에 그런 말 참 많죠. 실컷 설명하다가도 적멸이다. 諸法從本來(제법종본래)로 常自寂滅相(상자적멸상)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한 자리다. 적멸한 자리다. 고요한 자리다. 거기에서 나와서 한참 출렁거리고 파도치다가 결국 그 자리로 적멸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세상사고 인생사다. 그러니까 참 부처님이 그런걸 일찍이, 그래서 뭐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그 인생이 살맛 없도록 괜히 인생의 어떤 그 꿈이나 어떤 희망같은 것을 좀 상쇄시켜버리는 그런 뜻도 있지마는 또 그게 사실인걸 어떡합니까! 그게 사실인 것을. 긴 여행을 하고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잖아요. 결국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걸 뭐 아무리 여행이 좋다 하더라도 안 돌아갈 수 없는거야. 안 돌아갈 수 없는거.
能入能觀察이라 그 사실, 그 사건 또 그 진실, 그 실상 속에 능히 들어가고 그 실상을 능히 잘 관찰한다. 佛子는 隨其智하야 우리 불자들은 모두 공부했잖아요. 불법공부 했잖아. 그래 불법가지고 불법으로써 얻은 지혜가지고 그런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어떤 불교적인 안목으로 부지런히 관조해야 돼. 관찰해야 돼.
⑤ 佛身無有生(불신무유생)호대 而能示出生(이능시출생)하시며 불신은 생기는게 없어. 따로 어디 탄생이 없어요. 그러면서 能示出生이라. 능히 출생한 것을 보여. 생기는 것이 없는 가운데도 생기고 생기면서도 또한 본래로 생김이 없는 것. 생멸이 없는 것을 또 이해해야 된다. 그래서 不生不滅(불생불멸) 그런 말을 하잖아요.
그 다음에 法性如虛空(법성여허공)하니 諸佛於中住(제불어중주)로다 법성은, 법의 성품, 진리는 허공과 같애.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 우리가 아까 외웠죠. 법의 성품은, 진리의 성품은 원융해가지고 두 모양이 없다. 허공이 두 가지 모양이 없잖아요. 또 허공을 나눌 수도 없어. 허공을 쪼갤 수도 없고, 그저 허공은 그야말로 원융해. 법성은 그와 같다. 諸佛於中住라 모든 부처님은 법성 속에 머문다. 법성 속에 머문다. 사람부처도 역시 법성 속에 있고 일체 삼라만상 산천초목도 다 법성 속에 있고
그래서 ⑥ 無住亦無去(무주역무거)호대 로대 머뭄도 없고 또한 가는 것도 없어. 處處皆見佛(처처개견불)하니 곳곳에서 다 見佛 부처님을 본다. 곳곳에서, 부처님이 어디 이동하는 것도 아니여. 일체가 다 그래서 산천초목이 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그것이 또『화엄경』을 푸는 열쇠 중의 하나죠. 溪聲便是廣長舌(계성변시광장설)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 소동파, 소동파라고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거사분인데 그 분이 깨닫고나서 溪聲便是 시냇물소리 지금같으면 뭐 차소리, 바람소리 뭐 물소리 전부가 그대로 부처님의 아주 훌륭한 설법이다. 그러면 저 산천초목이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處處皆見佛이여. 곳곳에서 다 부처를 보는거죠. 거기에 뭐 따로 불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부처로 보는거. 산은 산 물은 물대로 부처로 보는거.
光明靡不周(광명미부주)하야 광명이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어. 참~ 광명을 발휘하고 있어. 다 그 가치 다 하고 있어. 그 나름의 가치를 다 발휘하고 있어. 名稱悉遠聞(명칭실원문)이로다 그 명칭이 모두모두 멀리멀리 들린다. 이게 뭐 특정한 사람을 두고 소문이 난 것처럼 표현은 그렇게 됐지마는 따지고보면은 특정한 존재 아닌 것이 없어. 낱낱이 다 특정한 존재여. 다~ 다 소문난 유명한 존재고
⑦ 無體無住處(무체무주처)하며 어떤 실체, 고정된 체가 없다. 고정된 체가 있다고 하면은 법당에 있는 부처님만 부처라고 딱 못박아 버리면은 그건 이제 죽은 불교, 죽은 불교가 되는거죠. 그래서 고정된 실체가 없고 머문 곳도 없어. 어디에 딱 있다. 불당에만 있다. 그건 말도 안되는거죠.『화엄경』의 안목에서 보면은, 다른 아주 소승불교 안목에서 보면은 뭐 법당에만 있다 뭐 아니면은 3000년 전에 아니 2700년 전에 인도 가비라국에서 태어난 싯다르타 태자가 성불한 바로 그 사람 한 사람만 부처다. 뭐 이런 식으로 또 그 고집할 사람들도 있어요. 고집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그거는 아주 좁은 소견, 소승적인 안목이에요. 無體無住處 이게 이제『화엄경』의 안목이라.
亦無生可得(역무생가득)이라 또한 태어남을 가이 얻을 수가 없어. 생멸이 본래 떨어진 자리. 그래서 無相亦無形(무상역무형)이라 형상도 없고 또한 相도 없고 또한 形도 없음이라. 형상이 없다. 그런 뜻이죠. 所現皆如影(소현개여영)이로다 나타난 바가 다 그림자와 같더라.
⑧ 佛隨衆生心(불수중생심)하사 부처님이 중생의 마음을 따르사 爲興大法雲(위흥대법운)하야 이게 참 이런 것이 좋은거죠. 중생을 위해서 큰~ 법의 구름을 일으켜.『화엄경』같은거죠. 뭐 팔만대장경이 다 해당되면서 그 가운데 우리 손에 있는 이『화엄경』. 큰 법의 구름이 이렇게 種種方便門(종종방편문)으로 가지가지 방편문으로 示悟而調伏(시오이조복)이로다 깨달음을 보여가지고 다 조복하게 한다.
그 나름대로 다~ 그 나름대로 근기 따라서 수준 따라서 다 온갖 방편문을 보여줘가지고서 팔만대장경 안에 있는 방편문도 많은데 2700년 동안 이 민족 저 나라로 옮겨 다니면서 흘러 들어오면서 또 그 백성들 그 민족 또 그 나라의 어떤 관습에 따라서 또 새로운 방편을 무수히 만들어 내는거요. 지금 이 시대에 만들어진 방편도 또 많고 또 앞으로 가면은 세월이 흘러가면 또 어떤 방편을 만들어서 또 중생들의 그 어떤 그 어떤 속을, 중생들의 욕망과 좋아하는 바를 채울지 아무도 모르는거요. 어떤 방편이 나올지.
사실은 뭐 호국불교니 등등 중간에 생긴 불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대개 근본불교, 불교의 그 원형을 다 벗어나가지고 다 벗어나가지고 어떤 그 시대상황에 중생들이 필요로 하는 그런 불교를 중생들이 스스로 만들어서 그 불교를 믿는거야.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대다수가. 그런데 우리가 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불법을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이게 이제 뭐라고 할까? 원론주의자들이라고 할까? 불교원론주의자들. 불교의 그 원형, 원형을 그대로 우리가 공부할려고 하는 그런 뜻이죠. 그래서 어떤 시대상황에 맞춘 그런 불교하고는 늘 조금 이제 괴리감이 있고 좀 그런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걸 이제 기대하고 왔던 사람들은 이제 몇 번 와보고는‘아이 이거 내가 알고 있는 불교가 아니다.’이런 생각을 하는거죠. 진짜 불교의 원형인데
그래 種種方便門으로 示悟而調伏이다
⑨ 一切世界中(일체세계중)에 낱낱 세계 가운데 見佛坐道場(견불좌도량)하사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있는 것을 본다.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있는 것. 세계 가운데서, 이걸 봐야 되는데 꼭 법당에 가서 불상으로 조각해 놓은 것만 볼라고 하는거요. 불상으로 조각해 놓은 것만, 야~ 이것 참 언제 우리가. 또 우리는 相見衆生(상견중생)이라. 형상을 봐야 뭔가 마음이 나는 중생이라. 見物生心(견물생심)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그 좁은 안목에 딱 갇혀 있는데 그 좁은 안목을 깨트리고 우리가 나와야 되는거죠.
바다에 가서 컵을 가지고 물 한 컵 딱 이렇게 뜨면은 고 컵 안에 있는 물만 물이라고 이렇게 하는데 싹 쏟아버리면은, 쏟아버리거나 컵을 막 깨버리거나 하면은 그대로 넓은 바닷물이 그대로 내가 아는 바닷물이 되는거지. 딱 컵에만 딱 떠가지고‘아 요것인데, 부처가 요건데’라고 딱 고집해버리면은 고거에 갇혀 버리는거죠. 마 고걸 어디에 감춰버리면은 꼼짝달싹 못 하는거야. 근데『화엄경』에서는 그거 아예 그 취급하지 않는거라. 그래서 형상이 없다 라고 그러고 일체 세계 가운데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것을 본다.
大衆(대중)이 所圍遶(소위요)다 대중이 다 거기에 그 에워싸고 있다. 이걸 다 보는거여. 그리고 거기서 照耀十方國(조요시방국)이라 시방 세계를 다 환히 비치고 있다. 이게 이제 우리가 쉽게 납득이 안되죠. 이제 납득이 안되니까 깝깝하죠. 그래 이제 책 덮어버리고 책 그냥 집어던져버리든지 불살라버리든지 하고는 저기 산으로 들로 그냥 쫓아나가서‘야~ 일체 세계 가운데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있다. 대중들이 다 에워싸고 있다. 그 많고 많은 보살이 꽉 부처님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면서 거기서 아주 광명이 난다. 照耀十方國이라 시방 세계를 그 부처님과 그 대중들이 환히 빛내고 있다. 이게 뭘까?’
요 한 구절 요 한 게송 잘 기억하세요. 이걸 화두로 한 번 삼아보면 됩니다. 화두로 삼아보면, 요 화두를 가지고 一切世界中 見佛坐道場 大衆所圍遶 照耀十方國 요 화두를 가지고 도대체 뭘 부처님이 두고 한 소리인가? 뭘 두고 한 소리인가? 이런 그 궁금증, 이런 사유를 하게 되면은 어느날 눈을 뜨게 되요. 우리는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 뭐 화장실에 가도 부처님이요 부엌에 가도 부처님, 안방에 가도 부처님, 거실에 가도 부처님, 집안에 있어도 부처님, 밖에 나가도 부처님, 한국에 있어도 부처님, 외국가서도 부처님, 산에 가도 부처님, 들에 가도 부처님 결국 그런 차원까지 우리가 이르러 가는거죠. 그런 차원까지. 야~ 우리가 그런 차원까지 이르러 갔다하면 이건 대단한거죠.
결국은『화엄경』은요 차원이 높다고 하는게 바로 그 점입니다. 그런 차원까지 우리를 끌어올리는거요. 우리의 안목을, 우리의 눈을. 이미 뭐 그런 차원에 가있는 분들도 여기 많이 계실거요. 아마? 그러면서‘야~ 그래 그래 맞아 맞아.’하고 고개 끄덕거리면서 참 부처님이 어찌 저렇게 알고 했는가! 이렇게 생각하신 분들도 계실 줄 믿습니다. 당연히 있어야 되고요.
⑩ 一切諸佛身(일체제불신)이 일체 모든 부처님 몸이 皆有無盡相(개유무진상)하시니 다 無盡相 다함없는 모습이 있어. 다함없는 모습. 끝이 없다 이 말이여. 다함이 없어. 예를 들어서 불상을 가지고 뭐 우리가 천 불을 조성하고 만 불을 조성했다 한들 그거 몇 개겠어? 사실은, 몇 개 안되잖아요? 일만 불을 조성했다 해도 일만 부처님 밖에 안되잖아. 그럼 나머지는 어쩌란 말이여? 나머지는? 부처님 조성해놓은 그 형상만을 부처님이라 하면은 그 밑에 탁자는 어떻게 하고? 요령, 목탁은 어떻게 하고? 또 법당은 어떻게 하고? 자꾸 이제 밖으로 펼쳐서 나가보면은 더 이제 오리무중이 되는거야. 그래 거기에 갇혀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제발 거기에 갇혀있지 말라는거죠. 눈을 확 뜨고 열라는거지.
示現雖無量(시현수무량)이나 나타나는 것이 비록 한량이 없지마는 色相終不盡(색상종부진)이로다 그 색상은 마침내 다함이 없다. 아~무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지적하고 지적하고 산천초목 삼라만상 춘하추동 사시절 일체가 다 부처님이다 그렇게 해봤자 그거 그 가지곤 역시 부족한거죠. 그동안 말로 이제 하자니 그렇게 이제 표현하는 것입니다.
4, 西方의 香焰光菩薩
爾時衆中에 復有菩薩摩訶薩하니 名香焰光普明慧라
承佛威神하사 觀察十方하고 而說頌曰
此會諸菩薩이 入佛難思地하사
一一皆能見 一切佛神力이로다
智身能遍入 一切刹微塵하사
見身在彼中하야 普見於諸佛이로다
如影現衆刹 一切如來所하사
於彼一切中에 悉現神通事로다
普賢諸行願을 修治已明潔일새
能於一切刹에 普見佛神變이로다
身住一切處하야 一切皆平等하니
智能如是行하야 入佛之境界로다
已證如來智하고 等照於法界하야
普入佛毛孔의 一切諸刹海로다
一切佛國土에 皆現神通力하야
示現種種身과 及種種名號로다
能於一念頃에 普現諸神變하야
道場成正覺하고 及轉妙法輪이로다
一切廣大刹을 億劫不思議어늘
菩薩三昧中에 一念皆能現이로다
一切諸佛土에 一一諸菩薩이
普入於佛身호대 無邊亦無盡이로다
그 다음에 이제 西方(서방)의 香焰光菩薩(향염광보살)이라. 香焰光菩薩이라. 爾時(이시) 대중 가운데 復有(부유) 다시 있었다.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이 있었으니 이름이 香焰光普明慧(향염광보명혜) 참 이것도 좋네요. 향기 불꽃 빛 널리 밝은 지혜. 어디 한 구석에만 밝은게 아니고 한 가지 이치에만 밝은게 아니고 普明慧 아 이거 불명 좋다. 普明慧라고 없지? 이 자리에. 어느 한 분야 밥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반찬도 잘 한다 이 말이야. (하하하) 가정 살림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게 나가면 장사도 잘 해. 뿐만아니라 주부 9단만 아니라 불법공부에도 9단이다.『화엄경』공부에도 9단이다. 그 뜻입니다. 普明慧 아~ 이 좋은거에요. 그러면서 향기 불꽃 광명이 나니까. 香焰光普明慧 오늘부터 이름 바꾼다고 야단이네. (하하하) 하하하 承佛威神(승불위신)하사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을 설해 말했다.
① 此會諸菩薩(차회제보살)이 이 법회 가운데 있는 여러 보살들이 入佛難思地(입불난사지)하사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難思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에 들어갔다. 여러분들 오늘 공부한 것 가지고 충분히 들어갔어요. 一一皆能見(일일개능견) 一切佛神力(일체불신력)이로다 낱낱이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다 능히 본다. 무엇을? 일체 부처님의 신통력을 다 본다.
저 나무는 어찌하여 저렇게 생겼는고? 잎은 어찌하여 저렇게 벌레가 먹었는고? 이것 전부 부처님의 신통력이야. 차는 어찌하여 저렇게 잘 굴러가는고? 어찌하여 저렇게 고장이 나는고? 거기에는 전부 원인이 있는거라. 굴러가는 것은 굴러가는대로 이유가 있고 고장난 것은 고장난대로 이유가 있고 얼굴 생긴 것이 저렇게 생겼던지 이렇게 생겼던 무슨 감기가 들렸든 무슨 뭘 다쳤든 전~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잖아요. 원인이 있잖아요.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결과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고 앞에 딱 한 면만 딱 보고 온갖 마음 다 일으키는거야. 예를 들어서 누가 큰 집에 산다.‘아 저 사람은 어디서 사기를 쳤나? 뭘 해서 저렇게 큰 집에 사는고?’이 생각만 하는 경우가 있어.『화엄경』공부하는 사람들이야 안 그렇지마는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거요. 그 사람들은 거기 살만한 사전준비를 충분히 했어. 금생만 한게 아니여. 전생부터 해왔어. 전생부터
그 조그만한 뭐 10평짜리 전세방에 사는 사람도 전생부터 그 10평짜리 살려고 준비해왔어. 그거 알아야 돼. 그거 알아야됩니다. 전생부터 준비해온거여. 10평짜리 살려고, 그 생각을 우리가 할 줄 아는 사람이 우리가 불자인거여. 그래서‘나는 아 20평에, 전세라도 20평에 살아야지.’하면은 그러면 20평에 살 준비하는거요. 지금부터. 그러면 머지않아서 20평에 살게되는거여. 그러니까 뭐 아주 으리으리한 아파트 사는 사람은 전생부터 준비해온 것이고 전생부터 지금 어제까지, 오늘 이 시간까지도 준비하고 끊임없이 그 지킬려고 준비 노력하고 있고, 10평짜리 전세에 사는 사람은 전생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10평짜리 살려고 꾸준히 노력해왔어. 그 나름대로 자기 안목대로 자기 소견만치 그렇게 해온거요. 그걸 우리가 생각할 줄 아는게 그게 지혜라. 그게 이제 불자의 안목이요. 그럼 절대 원망도 없고 시기질투도 없고 마음이 불편할 까닭도 없고, 불편할 까닭이 없는거라.
그래서 시골에 형제들이 외지에 나가서 돈 벌어가지고 설에 이제 설에 이제 부모님들 이제 보러 한 번 와가지고 보니까‘야~ 저것이 하고 차이가 좀 난다.’그냥 마음이 좀 떨떠름 해. 두 번째 가가지고는 부모님들에게 용돈주는 것도 차이가 나니까 부모들도 또 이제 태도가 또 달라지지. 그 다음에 안 가. 세 번째는 안가버려. 아예 고향에 안 가버리고“나는 고향없다.”이런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근데 그걸 우리 불자들은 그런 사실들을 환하게 꿰뚫고 있어. 있는 줄 알고 있어. 나는, 믿고 있어. 환하게 꿰뚫고 있어야 돼. 그러면 아무 불편할게 없잖아요. 아 그 사람은 아 사기를 쳤던지 뭘 쳤던지간에 나중에 어떻게 될망정 그럴만한 조건과 그럴만한 업을 지어서 오늘날 그 위치에 와있다. 이렇게 알면 간단하잖아요. 아주 간단한거요. 그렇게 간단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어가지고 잠깐 눈 앞에 것에 그냥 미혹이 돼서, 그걸 이제 불교에서는 미혹이라 그래요. 눈이 탁 가려가지고 캄캄한거지. 그래가지고 눈 앞에 것만 탁 보고 그것가지고 판단하고 거기 이제 시기질투하고 부끄러워하고 이제 그러는거여. 아~무 문제없는거여. 아무 문제없어. 알고 보면은
그래서 지혜가 필요하고 자꾸 법문을 들어야되고 공부를 해야되고, 불교공부를. 부처님은 그런 이치를 환~하게 깨닫고 우리 중생들에게 그 이치를 가르친 것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참 이치. 참 이치를 가르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불교가 위대한 것입니다.
뭐 엉뚱한거 뭐 횡재하기를 바라거나 무슨 이치에 안맞는거 그런거 일확천금하는거 그런 것 가르치는데가 아니잖아요. 근데 불교를 빙자해서 또 그런거 가르친데가 많다. 그런거 가르친데가 많아. 신도들도 많이 모여. 신도도 아니지 뭐. 거기 일확천금할려고 모인 사람들 아닙니까! 그~ 기도한다고 해가지고 기도해서 뭐 어떻게 한다 뭐 영험 받는다고 허~ 그런게 지금 이렇게 밝은 세상인데도 그런 불교가 막 세상에 횡행(橫行)해요. 너무 많아요. 그것도 불교TV에서는 또 광고 그 저기 뭐야 돈 준다고 그런걸 광고를 버젓이 하고 있다. 끊임없이 그런 광고 나온다. 왜냐? 돈 주니까. 정법이 문제가 아니야. 돈이 문제니까. 운영할려면 월급줘야되니까. 직원들 월급줄라니까 할 수 없이 그런 광고 받아가지고, 거기에 이제 사주(社主)들이야 그런거 알겠지. 그 정도는 알겠지마는 운영할라니까 할 수 없이 그런 사법(邪法)을, 정법이 아닌 사법을 광고도 하는거여.
그래서 능력이 되면은 좀 정법만을 세상에 그 보여주는 그런 그 좋은 방송국, 불교방송국 하나 채렸으면 좋겠어요. 텔레비전 방송국. 그 대만같은데서는 그 불교방송국이 있는데 광고 하~나 안나가고 전부 신도들이 시주한 돈으로 운영해가지고 전부 정법만을 가르키는 그런 방송국이 두 개나 있어요. 그 한 단체에서 두 개씩 세워. 그리고 저기 저저 인도네시아 거기 회교국가인데도 거기도 갖다가 방송국을 채려가지고 정법을 펴게 하고 그렇습니다.
此會 보살대중이 入佛難思地 불가사의한 지혜에 들어가서 낱낱이 다 능히 본다. 부처님의 신통력을 본다. 일체 부처님의 신통력을 본다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보고 듣고 하는 이게 일차적인 부처님의 신통력입니다. 一切佛神力하는 여기에 전부 해당 다 되요. 우리가 지금‘아 저 스님 공부시간 다 끝나가는데 빨리 끝낼 생각 안하고 (하하) 뭘 이야기가 저렇게 저렇게 긴가?’아이 무슨 신통력으로 그런걸 생각하지? 야~ 생각해보면 참 신기해요. 무슨 신통력으로 그런걸 다 생각하냐고? 그냥 멍청하게 앉아있지. (하하) 그 생각을 다 하냐고?
하~ 예를 들어서 공부하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미안해서 죽을 지경인거야. 그~ 미안해가지고 어쩔 바를 몰라하는거. 무슨 무슨 신통력으로 그런 작용을 하느냐고? 기가 막힌 신통력 아닙니까! 전화가 우는 것도 신통력이지마는 (하하) 그걸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하~ 어쩔 바를 몰라하고 그래가지고 막 그냥 부랴부랴 전화를 끌 줄 아는 그 뛰어난 신통력입니다. 이걸 높이 사야되요. 사람의 가치는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에 있어요. 착한 일한다고 가치있는거 ....... 고건 조그만한 가치야. 착한 일도 할 줄 알고 나쁜 일도 할 줄 아는 그 능력을 부처님은 부처라고 부릅니다. 그걸 최고의 가치라고 보는 것입니다. 선악하고 관계없어. 선악문제는요 저기 유치원 선생들이 더 잘 알아. 유치원 선생들이 유치원생들에게 선악을 더 잘 가르쳐. 부처님이 뭐 선악 그거 몰라가지고 선악 가르칠려고 그 6년고행하고 그런 분 아니에요.
부처님의 정법을 우리가 하나하나 파고 들면은 그와 같습니다. 한 게송만 더 하면은
② 智身能遍入(지신능변입) 一切刹微塵(일체찰미진)하사 부처님의 몸은 능히 두루두루 들어간다. 어디에 들어가는고 하면? 일체 세계 먼지 속에, 일체 세계를 가장 작게 만들었을 때 微塵 그래요. 작은 먼지 고 작은 먼지 속에 부처님 몸이 다 있어. 아니 작은 먼지가 그대로 부처님 몸이야. 근데 큰 먼지야 더 말할거 없죠. 큰 먼지 여기 한 200먼지가 있네요. (하하) 또 그 먼지 속에는 또 무수한 먼지가 또 들어있는거지. 전부가 그 전부 불신(佛身)이다 이 말입니다. 불신이 能遍入 했잖아요. 불신이 우리 몸에 들어왔다면 들어오고 자시고 할게 뭐 있나요? 그대로가 불신이야.
60조 세포 속에 또 60조 세포가 있다고 내가 자주 이야기하는데 그 360조, 조라는 숫자가 얼만지 모르지? 자주 자주 이야기하니까 무심히 듣기는 하지마는 이루 말 할 수가 없는거여. 우리 지구상에 사람이 70억 밖에 안돼. 70억. 억(億)위에가 조(兆)라. 근데 억 조, 60억조 60억조 세포, 60조 세포, 360조 세포 거기서 또 육육(六六)은 삼십육(三十六)해가지고 그 360조 세포가 우리 몸에 있다 이 말이여. 그것이 모두 불신이다.
見身在彼中(견신재피중)하야 몸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아서 普見於諸佛(보견어제불)이로다 널리 모든 부처님을 본다. 그래서 부처님으로 본다 이거여. 그 우리는 불신이니까 그런 신통, 기묘한 신통력을 발휘하고 그러므로 그대로 불신이다.
이『화엄경』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뭐 참~ 뭔 소리인지 모를 것 같으면서도 뭔가 또 시원하고 오리무중인거 같은데 또 툭 터졌고 그래서 부처님을 특별히 무슨 뭐 어디 영험있는 도량 찾을 것도 없고 그런 그 좁은 소견, 소승적인 소견에 떨어져있으면은 그러면은 그 도량에 안가면은, 갓바위에 안가면은 그럼 어쩌란 말이요? (하하) 갓바위만 영험있다 그러면 갓바위 안갈 때는 어쩌란 말이여?
그 임제스님 법문에 어떤 신심있는 무착스님이라고 하는 이가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계신다해서 문수보살 친견할려고 일보일배(一步一拜)하면서 올라갔잖아요. 몇 년이 걸려서 간거여. 장안에서 오대산까지 일보일배하면서, 티벳승들 티벳사람들 그렇게 하는거 많이 보잖아요. 차마고도에서 많이 봤지. 그런데 임제스님이 딱 나타나가지고“문수보살 그 오대산에 없다. 오대산에 네가 그렇게 정성들여서 일보일배하면서 문수보살 친견할려고 가는데 문수보살 없다.”그랬어.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그렇게 온 정성 다해서 가는데 문수보살 거기 없다.
예를 들어서 차마고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면은 저기 청해성에서 출발했던가요? 청해성에서 출발해가지고 그 포탈라궁전, 티벳 포탈라궁전에 그 관세음보살한테 간다고 갔는데 포탈라궁전에 관세음보살 없다 말이야. 그 관세음보살 어디 있느냐? 죽자고 절하고 있는 네가 관세음보살이다. 임제스님이 그랬어요.“너야말로 절하고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너야말로 문수보살이다. 너 외 어디서 무슨 따른 문수를 친견하느냐!”그랬어요. 그랬습니다. 그런 그 선사들의 그 안목이 이『화엄경』의 견해하고 상당히 잘 조화를 이룹니다. 맞아 떨어져요.
우리가 대승불교를 공부하고 정법을 공부하고 또 불교의 안목이 그동안 뭐 절에 투자한, 불교에 투자한 시간과 돈이 얼마입니까? 그래서 이제 우리가 수준이 좀 높아져야되는데, 그 높아진 수준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화엄경』에서 이야기하는 이러한 내용들입니다. 얼른 가슴에 와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걸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고
그 아까 그랬죠. 一切世界中에 見佛坐道場이라 세계 가운데 부처님이 도량에 이렇게 앉아있다면 그럼 이 책도 부처란 말인가? 아 당연하지. 근데 우리 눈에 그렇게 비치지 않는거지. 그걸 사유해야 돼. 그걸 화두로 생각해야 돼. 그걸 사유하면서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깰 때 그렇게 생각하고 그러면, 그 나는 늘 화엄성중을 부르잖아요. 화엄성중. 잘 때도 화엄성중 깨도 화엄성중 어디 산책할 때도 화엄성중 운동할 때도 화엄성중. 일체가 화엄성중이니까. 부처이면서 화엄성중이다. 그런 뜻입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一切世界中 見佛坐道場 大衆所圍遶 照耀十方國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살림살이가 진짜 화엄경이다.
고맙습니다. _()()()_
佛隨衆生心하사 爲興大法雲하야 種種方便門으로 示悟而調伏이다
고맙습니다. _()()()_
諸法從本來로 常自寂滅相..
一切世界中에 見佛坐道場이라..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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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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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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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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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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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걸 우리 불자들은 그런 사실들을 환하게 꿰뚫고 있는 줄로 나는, 믿고 있어.
환하게 꿰뚫고 있어야 돼. 그러면 아무 불편할게 없잖아요.
아 그 사람은 아 사기를 쳤던지 뭘 쳤던지간에
나중에 어떻게 될망정 그럴만한 조건과 그럴만한 업을 지어서 오늘날 그 위치에 와있다.
이렇게 알면 간단하잖아요. 아주 간단한거요.
그렇게 간단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어가지고 잠깐 눈 앞에 것에 그냥 미혹이 돼서,
그걸 이제 불교에서는 미혹이라 그래요. 눈이 탁 가려가지고 캄캄한거지.
그래가지고 눈 앞에 것만 탁 보고 그것가지고 판단하고
거기 이제 시기질투하고 부끄러워하고 이제 그러는거여. 아~무 문제없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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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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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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