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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강.평야를 아우르는 부산의 진산"
1. 대 상 산 : 금정산(801.5m) - 부산광역시, 경남 양산시
2. 산행시간 : 4시간 30분(우천시에도 산행 합니다)
3. 출발시간 : 2009년 2월 15일 일요일 08시(07시 50분 집결)
4. 출발장소 : 순천 기적의도서관앞(금당 동명초등학교정문)
광양읍 승차 08시 20분(광양로타리 육교 밑)
5. 산행코스 : 양산시 동면 외공 - 금륜사 - 은동굴 - 장군봉 - 고당봉 -
북문 - 원효봉 - 의상봉 - 동문 - 산성고개 - 산성마을
6. 준비물 : 회비 20,000원
중식,간식,식수등
7. 개념도
금정산은 역사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산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범어사)과 국내최대 규모인 금정산성을 아우르고 있다. 동래온천, 금강공원, 범어사, 국청사, 금정산성과 산성마을 등 명소를 두루 지니고 있다. 금정산은 해발 801.5m의 주봉인 고당봉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727m)과 남으로 상계봉(638m)을 거쳐 성지곡 뒷산인 백양산(642m)까지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원효봉, 의상봉, 미륵봉, 대륙봉, 파류봉, 동제봉 등의 준봉을 일구어 놓고 있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으나 곳곳에 울창한 숲과 골마다 맑은 물이 항상 샘솟고 화강암의 풍화가 격렬하여 아름다운 기암절벽을 쉽게 만날 수 있는 부산이 자랑하는 명산이 되었다. 또한 금정산에는 약수터가 14군데나 있어 등산객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준다. 2,300여 종류의 나무와 날짐승, 길짐승을 포함한 600여 마리의 동물이 서식하는 동, 식물의 낙원 금정산.
금정산 이름의 유래는 '동국여지승람', '동래부지' 등에 기록된 전설에 의하면 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가 3장 가량이고 물이 늘 차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금빛이 있으므로 금색어가 다섯 색깔의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으므로 금정산이라고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정산은 행정구역상 북쪽으로는 경남 양산시 동면, 동쪽으로는 부산의 금정구, 남쪽으로 는 동래구와 부산진구·연제구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부산의 북구에 접하여 낙동강에 이르고 있다. 금정산의 수리적위치는 경도상으로 동단은 동경 129°02′30″, 서단은 동경 129°07′ 30″, 위도상으로 북단은 북위 35°12′30″, 남단은 북위 35°17′30″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약 1,300여만평에 이르고 있다.
금정산은 부산의 명산으로서 산정과 산정의 치밀한 절리(節理)에 의해 파쇄된 기반암의 노출암으로 산록이 가파르고 사면(斜面)에는 거대한 자갈들이 깔려있어 경관이 마치 성곽처럼 보인다. 금정산맥은 낙동정맥의 말단부가 신생대 3기 중신세부터 일어났던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축을 가진 단층운동에 의해 포항부근에서 분기하여 부산지방에 이르러 한 단계 고도를 낮추면서 대한해협에 맞닿는 금정산맥 의 기점을 이룬 곳으로 지형적 측면에서의 가치가 크며 산지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 금정산이다.
금정산은 금정산맥의 주봉으로서 남서방향으로는 백양산(642m), 엄광산(503.9m), 구덕산 (562m), 시약산(509m), 승학산(495m) 등이 북서쪽에서 남서쪽으로 향해 고도를 점차 남쪽으로 달리고 있으며, 곳곳에 하천의 개식작용에 의해 끊어져 독립산지로서의 경관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산정사이에는 낮은 고개가 나타나기도 하고, 다대포·몰운대에 이르는 비교적 높고 험준한 산지로 부산의 지형을 배산임수로 구분하는 자연적인 장애물이기도 하다.
8. 코스가이드
경부고속도로 양산 나들목을 빠져나가 첫 교차로에서 좌회전, 시내 중심부를 통과, 고속도로 밑을 지나 팔송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도로가 오른쪽으로 휘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동면 초등학교로 방향을 튼다. 교문에서 바로 우회전하여 동네를 빠져나가 고속도로 밑을 다시 통과하게 되어 있다. 통로가 좁아서 대형버스가 지나가기에는 좀 힘이 들어보인다. 통과하자마자 우회전하여 고속도로를 따라 50여 미터 정도 올라가면 길이 90도 왼쪽으로 굽었다.
밭 사이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신작로라고 불리기에 적합하다. 갈림길에는 '은동굴, 금륜사' 표지판이 잘 되어 있다. '송정사'를 지나 본격적인 산행길이 시작된다. 경사도는 조금 더 심하다. 오른쪽 위로 바위가 있는 부분을 지나 이내 '금륜사'에 도착한다. 왼쪽의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아주 푸근한 감을 준다.
금륜사 '대웅전'을 지나쳐 바위지대를 올라서 100여 미터 정도 가면, 왼쪽 아래로 '산불감시초소'가 보이고, 산행길은 오른쪽의 지능선으로 방향을 틀어서는 올라붙고 있다.
주능선에 도달하면, 오른쪽으로는 양산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100여 미터 가량 능선을 따라 가다가 자그마한 바위를 통과하여 철제계단 2개와 줄이 매여져 있는 20여 미터 가량의 바위를 올라 조금 더 가면 727봉(726.7m)을 통과하고 저 멀리에 고당봉이 보인다. 이곳에서 장군봉 직전 봉우리와 장군봉, 억새밭 등등이 잘 보인다. 그리고 산 양쪽의 전망도 아주 좋다.
이어서 나타나는 봉우리 1개를 지나면 그 다음 봉우리는 '장군봉,' 이어서 나타나는 억새밭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든다. 이곳에서 보기에 주능선 휴식 장소에서 봉우리 3개, 고당봉 방향으로도 3개의 봉우리가 있다. 물론, 마지막 봉우리는 고당봉 정상이다. 억새밭을 지나서 숲 속으로 들어가 조금 걸어 내려가면 건천에서 솟구치는 '샘물'이 있다.
고도가 제일 낮아진 부분의 숲에는 조그마한 억새밭이 있고 이곳에서 길은 조금 더 넓어진다. 철탑 2개가 연속으로 서 있는 부분까지다. 이제 산행길은 오름길로 변한다. 첫 봉우리에 도착하여 계속 걸으면 산죽이 나타난다. 이내, '가산리마애여래입상' 갈림길에 도달한다. 직진하여 20여 미터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길로 방향을 튼다. 바위가 여기 저기 놓여 있다. 이곳이 두 번째 봉우리다.
계속 연결되는 인상적인 바위 전망대를 지나쳐서 조금 내려가면 철탑 2개가 연달아 있는 넓직한 장소에 도달한다. 갈림길이 있고 철조망도 쳐져 있다. 산행길은 철조망을 뚫고서 연결되어 있다.
줄이 매어져 있는 바위부분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면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고당봉 정상이다. 표지석에는 '801.5m' 라고 기록되어 있다. 앞을 보면 '북문'으로 연결되는 산성이 제대로 보인다.
나무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면 아주 넓고 넓은 장소가 나오면서 '수도'가 있고, 성문이 보이고, 화장실이 나타난다. 성문을 통과하면 '범어사'로 연결되고 있다. 계속 전진. 이내 길은 오름길로 변한다. 산행길은 이제 산책길로 변하고 왼쪽에는 돌로 만든 역사의 흔적들이 잔뜩있다.
15분이면 원효봉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는 크고 작은 암봉들이 도열한 의상봉 일대의 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효봉에서 의상봉까지는 10분이 채 안 걸리는데 의상봉 근처에는 부산 클라이머들이 암벽 훈련장으로 이용하는 무명바위, 은벽, 부채바위 등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의상봉에서는 망루 앞으로 난 큰길보다는 산성 바로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이들 바위의 멋진 모습들을 보다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너른 억새밭 사이로 양 날개를 펼친 듯한 바위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클라이머들의 훈련장으로 이용되는 나비바위다. 나비바위 앞에 서면 부산 시가지와 V자로 움푹 파인 수영만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북문에서 의상봉까지는 35분을 잡으면 여유 있다.
의상봉에서 다시 10분을 더가면 화룡암 갈림길이다. 갈림길을 지나서는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평지와 다름없는 능선길이다. 의상봉에서 동문까지는 40분이 걸린다. 동문에서 내려서면 포장도로를 만나는데 바로 산성고개다. 고개로는 능선 서쪽의 금성동과 산성마을을 넘나드는 시내버스가 지나다닌다. 11월 15일부터 이듬해 5월까지 산성고개에서 제2망루까지의 주능선길이 통제되므로 이곳에서 하산하거나 우회로를 따라야 한다.
기타코스
1코스
금강공원 후문-황룡사-약수정사-주능선-남문-제1망루-왼쪽아래능선-석불사(병풍사)-제1망루-수박샘-남문연못-동문-온천장(4시간30분)
2코스
금강공원 정문-임진동래의총-지능선-케이블카 정류장-휴정암-주능선-남문(사다리 넘어 왼쪽으로)-제1망루-파류봉 능선-파류봉-임마누엘기도원-금성동(이후 버스를 타고 내려와도 좋음)-동문-온천장(4시간)
3코스
경남 양산시 동면 다방리 계석마을(대명그린파크아파트)-다방봉-727봉-장군봉-억새지대-갈림길(오른쪽으로, 왼쪽은 계명봉으로 해 청룡동으로 하산하는 길)-고당봉-북문(범어사로 해 하산해도 좋다)-원효봉-제4망루-제3망루-나비암-동문(하산)-임도-대륙암-남북3거리-만덕고개(7시간-8시간)
4코스
양산시 동면 외송 동면초등학교-은동굴-송정암-727봉(1시간30분, 이하 코스3 과같음)
5코스
구서주공아파트, 외국어대운동장, 예그린아파트, 신만덕, 구만덕, 화명동 등 여러 코스가 있으나 주능선 혹은 지능선에 올라 선뒤 시간적 여유와 자신의 체력에 맞춰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6코스
금강공원 후문-황룡사-약수정사-주능선-남문-제1망루-왼쪽아래능선-석불사(병풍사)-제1망루-수박샘-남문연못-동문-온천장(4시간30분)
7코스
금강공원 정문-임진동래의총-지능선-케이블카 정류장-휴정암-주능선-남문(사다리 넘어 왼쪽으로)-제1망루-파류봉 능선-파류봉-임마누엘기도원-금성동(이후 버스를 타고 내려와도 좋음)-동문-온천장(4시간)
8코스
경남 양산시 동면 다방리 계석마을(대명그린파크아파트)-다방봉-727봉-장군봉-억새지대-갈림길(오른쪽으로, 왼쪽은 계명봉으로 해 청룡동으로 하산하는 길)-고당봉-북문(범어사로 해 하산해도 좋다)-원효봉-제4망루-제3망루-나비암-동문(하산)-임도-대륙암-남북3거리-만덕고개(7시간-8시간)
9. 주변의 명소
가. 범어사(梵魚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선탈대본산 금정산 범어사는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대사찰이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사찰로서 영남 불교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오랜 역사와 많은 고승을 배출한 한국의 명찰이다. 부지면적 27,044평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불전(佛殿) 7, 누(樓) 2, 문(門) 3, 영각(影閣) 1, 암자(庵子) 9, 요사(僚舍) 등 대소 160여동의 건물이 있고 “범어사삼층석탑(보물 제250호)”, “대웅전(보물 제434호)”, “일주문(지방유형문화재 제2호)”, “당간지주(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16호)”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범어사의 유래에 대하여는 ≪慶尙道地理誌≫·≪世宗實錄地理誌≫·≪新增東國餘地勝覽≫ 등 조선초기의 각종 ≪地理誌≫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동소이 한데 "금정산 산마루에 우물이 있어 그 물빛이 금색이고 그 속에 금색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놀았다 하여 산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그 아래에 절을 지어 범어사라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에는 다같이 범어사 창건의 구체적인 설명과 그 연대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범어사의 연혁에 관한 문헌으로는 ≪梵魚寺創建事蹟≫과 ≪古蹟≫이 한 권으로 된 목판본이 있는데 이 책으로 간행연대는 조선 숙종 39년(1700년)으로, 그리 오래된 기록은 아니나, 범어사에 오래 전부터 전해온 자료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엮은 책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이 두 기록은 내용은 대동소이하여 신라 흥덕대왕 때 왜구를 퇴치하기 위하여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간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 창건연대에 대하여 ≪創建事蹟≫은 신라 흥덕왕 때 라고만 하였고, ≪古蹟≫에서는 당 문종 태화 19년 을묘(乙卯), 신라 흥덕왕 때라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당 태화(太和) 연호는 9년까지이며, 그 9년이 바로 을묘년이므로 이는 당 태화9년(신라 흥덕왕 10년(835년))의 와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범어사의 창건연대를 우 선 이때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현재 범어사에 남아있는 석탑·석등 등 석조 유물의 양식도 대체로 이 연대와 부합되므로 흥덕왕 때 범어사 창건설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그러나 문제는 흥덕왕보다 1세기반이나 앞 시대의 인물인 의상대사를 범어사 창건에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견 모순된 기록으로 보이나,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 는 것이다.
의상대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당나라 유학에서 귀국하여 문무왕 16년(676년) 52세때 태백산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화엄의 중심도량으로 삼고 전국의 10대사찰에 전교하였다. 이것이 소위 화엄십찰(華嚴十刹)인데 그 중에 "金井之梵魚(寺)"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범어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이 때에는 이미 범어사가 이름있는 절로 손꼽히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상과 범어사는 이와 같은 인연이 있고, 또 금정산에는 의상이 수도하였다는 의상대의 전설도 있으므로 범어사의 창건과 의상을, 연대를 무시하고 결부시켜 앞뒤가 맞지 않는 설화가 꾸며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범어사의 창건시기가 의상이 화엄의 전교에 활약하던 문무왕시대까지 소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범어사에서는 그 시기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조사가 창건(≪禪刹 大本山 梵魚寺案內≫ 1947 참조)하고 흥덕왕 때 가람을 크게 개창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다만 현재의 범어사에는 이 초창기에 해당하는 석조유물이나 자료가 전무한 것이 하나의 의문으로 남는다. 이 점에 대하여 초창기의 범어사 절터를 현위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의견도 있다(≪釜山市誌≫上, 1974, pp. 293~418 참조). 가령 그렇다고 한다면 범어사에 초창기의 유물이 전무한 현실과 흥덕왕 때 창건설이 생긴 이유가 모두 해명될 것이므로 앞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기대하기로 한다.
이상과 같은 전후 사정을 감안하다면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하고 흥덕왕 10년(835년) 현위치에 크게 개창하여 대가람의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같다. 흥덕왕 때의 개창 이후 범어사의 변천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이나 전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큰 변동없이 천년의 법통을 이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일시에 회진된 뒤 10년이 지난 1602년 관선사(觀禪師)가 재건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화재로 전소하였다. 1613년 가을에 묘전대화상이 다시 역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7월에 6법당과 7요사를 준공하니, 그것이 현재의 범어사인데 그 뒤로도 사세의 확장에 따라 크고 작은 증축·수축공사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나. 금정산성(金井山城) - 사적제215호(1971.02.09.지정)
금정산성은 길이 17,337m, 성벽 높이 1.5m~3m 정도로 우리나라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광대한 성곽이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 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금정산성의 성벽은 금정산의 능선을 따라 지형의 굴곡과 높낮이에 맞춰 쌓았고, 높은 봉우리들을 이용하여 봉우리 자체가 성벽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금정산에 언제부터 성을 쌓았는지 알 수 없으나 고대에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 때부터 이미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또 일부의 유구(遺構)를 두고 신라시대에 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의 산성은 1703년(숙종 29)에 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667년(현종 8)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 들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할 계책을 강의하는 가운데 금정산성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성이 신라 때부터 있었던 성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금정산에 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여러 차례 대두하였으나, 1702년(숙종 28)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의 청에 의해 1703년에 준공하였다.
당시 완공된 성은 둘레 9,011보, 높이 1척으로,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특히 서문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시설인 적대(敵臺)를 성문 양쪽에 설치하였으며, 서문 오른쪽에는 3개의 아치형으로 된 홍예수구(虹霓水口)를 설치하여 성안의 물이 밖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1707년(숙종 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장대(將臺), 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는데, 평상시에는 중군(中軍), 승병장(僧兵將), 군기감(軍器監), 도계도(都計導), 군뢰(軍牢), 문직(門直) 등의 직책을 가진 자와 군병 등의 상비군 및 인근 사찰의 승려가,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 등 3개 읍 소속군과 3개 읍 소재 사찰의 승려들이 군사로 차출되어 방어토록 되어 있다.
금정산성은 일제강점기에 관아건물 들을 비롯하여 많을 시설물이 파괴, 몰수당하였다고 한다. 부산시에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동문·서문·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였다. 현재 4㎞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조선 후기에 도성과 주변의 대규모 방어시설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다. 금정산성 4대 성문
아치형의 동문(東門)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00m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성문은 금정산성을 굳게 지키는 역할 못지 않게 전망이 뛰어나 망루로서도 손색이 없다. 정묘년(순조 7년, 1807년) 추계(秋季)에 이르러 토목공사를 잇달아 일으켜 한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기둥과 들보를 백 리 밖에서 운반하고, 벼랑에서 낭떠러지를 깎아내는데 메고 끄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어 만(萬) 사람이 힘을 일제히 쓰니 149일만에 서, 남, 북문의 초루(성문 위의 누각)가 완성되었다.'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금정산성 증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설비문의 일부이다. 그 자신이 글을 짓고 썼다고 하니, 이것이 동문을 다시 세운 공식 기록인 셈이다.
동문은 동래읍성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한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따르면 이 동문은 1807년 음력 10월에 준공한 것이 된다. 특히 동문과 성첩(城堞)은 동래읍민이 일을 맡았고, 나머지 서, 남, 북문과 성곽은 경상감영의 71개 주(州)에서 차출한 민정(民丁)의 부역으로 이룩했다고 한다.
현재의 동문은 지금으로부터 188년 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세운 그 모습이 물론 아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받을 때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던 이 성과 성문, 군관아시설이 일제의 만행으로 파괴되어 크게 훼손된 것이다.
계곡에 세운 서문(西門)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진 것이 서문(西門)이다. 낙동강에서 대천(大川)을 따라 금정산성마을로 오르면 마을 입구에 이 문이 자리하고 있다. 계곡에 세운 성문답게 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금정산성 동문과 서문은 사제지간인 스승과 제자가 경쟁적으로 세웠다고 하였다. 동문을 스승이, 서문을 제자가 동시에 조성했다. 그 결과 제자의 실력이 스승을 능가했다는 것이 당시 주민들의 공통된 판단이었다고 한다.
실제 서문은 동문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
서문의 초루와 ㄷ자 꼴로 돌출한 성곽의 모습은 사뭇 예술적이다. 또한 서문 바로 옆으로 흘러내리는 대천(일명 화명천)에는 세 개의 아치를 이룬 수문(水門)을 크고 묵직한 돌을 쌓아 만들어 두었다.
이 수문은 금정산성에서 유일한 것으로 그 위로 성곽이 통과하게끔 해 놓았다. 좌우편에 험준한 지형의 산이 솟아있어 천연요새인 협곡에 서문과 수문을 만들었던 선현들의 지혜를 이곳에서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다.
서문이 위치한 곳은 금정산성 성곽 1만7,337m 가운데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지점이다. 그러나 이 서문 좌측은 지형이 험준하여 등산로도 없는 석문(石門) 능선이며, 바른편은 역시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미치지 않는 파류봉과 연결되는 능선이다.
서문은 그 해발고도가 낮지만, 계곡을 끼고 적을 방어하기 아주 용이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산성마을 죽전 부락 맨 끝에서 다시 서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거리이다. 화명동의 낙동강 쪽에서 보면 금정산성마을의 관문이기도 하다.
금정산성 전체의 방위 개념으로 보면 이곳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낙동강 하구로 침입한 왜적들은 화명동에서 대천을 따라 이곳으로 공격로를 열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왜적들은 바다에서 바로 상륙하기도 하였지만, 다대포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구포에서 만덕동으로 몰려오거나, 화명동에서 대천의 계곡을 따라 오르기도 하였다.
소박한 모습의 남문(南門)
금정산성 서문(西門)에서 대천(大川)의 상류를 끝까지 따라 오르면 남문(南門)에 닿게 된다. 이 남문은 동제봉(東帝峰)과 상계봉(上鷄峰)을 잇는 능선상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해 있다.
남문에서는 북쪽으로 고당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고, 남쪽으로는 백양산이 바로 건너다 보인다. 백양산과 남문 사이는 만덕고개와 만덕동이 자리한다. 지난날에는 유명한 만덕사(萬德寺)가 남문 남쪽방향에 자리잡고 있었다.
남문은 동문과 2.5km, 북문과 6.5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또 이 남문에는 산성고개에서 도로가 이어져 있으며, 금정산 유일의 케이블카 종점과 600m 남짓한 거리여서 자동차나 케이블카를 타고 찾는 사람들이 많다. 등산로도 만덕동과 상계봉 등에서 사통팔달로 열려 있다. 남문은 그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돋보인다. 언뜻 보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남문은 동문이나 서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신라(新羅)의 축조 기법이 깃들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현존 금정산성은 조선 숙종 29년(1703년)에 축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동래부지' 등의 공식 기록이지만, 신라의 기법이란 이야기가 왜 등장하는가에 대한 연유는 한번 눈 여겨 볼만하다.
'부산부사(釜山府史)'라는 일본어로 쓰여진 초고 제1권에 금정산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금정산성이 원래 신라시대로부터의 성이라는 사실은 이를 세밀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성의 4대문 가운데 동, 서, 양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수한 흔적이 완연하나 남, 북 양 문의 결구(結構)는 개수의 흔적이 있으면서도 신라의 수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의 내외에 둔병(屯兵)의 사타의 양식이 신라 특유의 축성기법인 반원형 층 단으로 세 겹, 다섯 겹으로 되었다.'
투박하고 거친 북문(北門)
금정산성 북문(北門)은 범어사에서 서쪽으로 1.6km,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의 남쪽 0.9km 지점에 있다.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 오르려는 잘록한 안부에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직사각형의 석문에 누각과 성곽을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세운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이 투박한 모습이 오히려 금정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금정산성은 임진란의 혹독한 피해를 입은 동래 부민들이 난리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은 피란겸 항전성이다. 임진란에 있어서 동래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고을에 비할 수 없이 중요했다. 나라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난리의 발생과 함께 적의 첫 상륙지점으로 제일 먼저 전화(戰禍)를 나누고 굳센 항전을 전개한 곳이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또 난리의 장기화에 따라 적의 교두보로서 오랜 수난이 계속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축성한 금정산성의 성문이라면 미적(美的) 감각을 동원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음이 오히려 당연하다. 투박하고 거칠며 모양새가 없는 북문에서 금정산성의 실체를 아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북문은 복원 작업도 다른 성문들에 밀려 부산시가 가장 뒤늦게 하였다.
라. 금정산성의 망루
제1망루
상계봉 북쪽 약 300m 지점인 해발 650m의 생기봉(生氣峰) 정상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는 금정산 전체는 물론 동해와 낙동강 하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망이 대단히 뛰어난 명당이다. 망루를 두르고 있는 돌담의 투박함이 색다르다.
제2망루
동문 남쪽 약 2.5km, 남문 동쪽 약 400m 지점의 해발 545m의 동제봉(東帝峰)에 서 있다. 다른 망루보다 다소 초라하며 별다른 장식이 없다. 그러나 이곳 역시 동래 일대와 동해까지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훌륭한 조망을 지니고 있다. 제1, 2망루는 타원형의 금정산성 남쪽 양단에 자리한 것이 특징이다.
제3망루
북문 남쪽 3km, 동문 북쪽 약 1km 지점의 암벽 단애 위에 절묘하게 얹혀 있듯이 서 있다. 해발 550m에 세워진 이 망루는 금정산의 유명한 암장인 나비암과 부채바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변의 천차만별한 풍경과 어울려 그 아름다움이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제4망루
북문 남쪽 1.5km의 해발 620m의 주능선 상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의상봉(義湘峰) 바로 남쪽으로 외성(外成)의 동 측 성곽과 중성(中成)의 동 단이 만나는 삼각점이기도 하다. 4개의 망루 가운데 비교적 무게가 실려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 금정8경(金井八景)
어산노송(魚山老松), 계명추월(鷄鳴秋月), 청련야우(靑蓮夜雨), 대성은수(大聖隱水), 내원모종(內院暮鐘), 금강만풍(金剛晩楓), 의상망해(義湘望海), 고당귀운(姑堂歸雲)
범어사, 금정산 주변의 풍치림과 돌과 물, 그리고 청량한 바람 등과 같은 자연이 일구어 내는 풍정 8가지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범어사 경내에 들어서면 어산교 주변의 숲 속 길 양쪽의 울창한 소나무 숲들이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내고 있는 모습을 먼저 볼 수 있는 데 이를 두고 어산노송이라 부른다.
그리고 범어사 본당을 기준으로 왼편에 계곡 바위 위에 세워진 대성암을 볼 수 있는 데, 그 밑으로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와 계곡, 바위 등이 어울러져 지하수로 흐르는 물소리가 아름답게 들린다고 하여 그것을 대성은수라고 부르고 있다.
그 곳 주변 계곡을 따라 500m를 지나면 금강암이란 암자가 나타나는 데 그 곳 주변의 풍치림이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 또 하나의 아름다운 경관이 하나의 장관을 이룬다 하여 이를 금강일풍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범어사 본당 오른쪽 뒤편에는 청련암이 자리잡고 있으며, 밤중에 이곳 객사에서 대숲으로 내리는 빗소리의 운치가 독특하고 그 화음이 아름답다 하여 이를 청련야우라고 부르고 있다.
청련암 뒤편에는 내원암이 자리잡고 있는 데, 이 곳은 범어사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정적이 흐르는 곳으로 이 곳에 있으면 큰절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가 신묘한 운치를 자아낸다고 하여 이를 내원모종이라 부르고 있다.
범어사 동편 산록에 보면 계명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는 데, 이 곳은 가을이면 금정산에서 가장 아름답게 단풍이 드는 곳으로, 이를 일컬어 계명추월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성암에서 11km 떨어진 원효암 동쪽 능선에 돌출해 있는 곳에 의상대사가 동해를 보며 좌선한 곳인 의상대가 있다. 이 곳은 동으로는 계명봉, 밑으로는 범어사, 멀리 회동 수원지가 둘러서 있으며 서쪽으로는 원효봉과 원효석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북으로는 고당봉이 자리잡고 있어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히고 있다. 이러한 경치를 보고, 의상망해라고 부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금정산 정상인 고당봉은 가장 높은 곳인 만큼 고당봉에 흰 구름이 흘러가다 걸려 있는 그 운치가 압권이라 하여 이를 고당귀운이라 일컬으며 범어 8경 중 마지막 8경으로 꼽고 있다.
바. 국청사(國淸寺)
예전 금정산성을 방어하던 호국사찰로 신라시대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이후 숙종 29년(1703년)에 금정산성 중성을 쌓은 후 적을 막고 나라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의미로 ‘국청사’라 칭하였다. 이름의 뜻도 ‘청청한 마음으로 수행과도 같이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다’ 혹은 ‘나라가 외적의 더러운 발길에 짓밟힘을 막고 깨끗한 국토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곳에는 당시 승병장이 사용한 ‘금정산성 승장인’이라는 철제인이 보관되어 있어 승 군작대의 사령부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곳 대웅전 안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을 비롯하여 좌협시 인문수보살과 우협시인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마. 금정산성마을
부산의 명소인 금정구 금성동에 자리잡은 금정산성마을은 일찍이 부산시민 뿐만 아니라,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친근한 곳이다. 금정산(金井山) 해발 400m의 분지에 아담히 자리잡은 산성마을로 해발 500~600m 높이의 금정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고지대라 기후가 차가와 부산의 평지보다 2~3℃가 낮고 계절도 15일 정도의 차가 있다.
마을의 면적은 7.45㎦로 금정구에서 제일 큰 동이다. 인구는 약 2,000명이며, 세대수로는 435세대 3개통 10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성동의 행정관리를 위한 금성동사무소와 유일한 교육시설로 전교생이 백여 명도 채 안되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금성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다. 그리고 도요지 두 곳과 전국에 이름난 산성막걸리 제조회사(유한회사 금정산성토산주)가 제조업소의 전부이며, 123곳의 주류 및 음식업소 등 단순한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금정산성마을은 90% 이상이 녹지로 부산시에서 20여 년 가까이 유원지 예정지로 묶어 놓고 개발을 제한하고 있어 주민들의 재산권행사 등에 막대한 불편을 주고 있는 등 주거환경이 열악한 실정이다. 휴일이면 이곳을 찿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금성동 주민들이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경영하는 음식점에서는 부산시 지정 음식인 30년 전통의 흑염소불고기와 전국적으로 이름난 부산지역 특산품인 “산성토산주”로 불리는 막걸리 등의 음식들이 있어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많이 이용된다.
참석 하실분은 꼬리말에 메모나 전화예약 바랍니다.
선비산악회 (011-633-8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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