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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
올해 연세가 69셉니다.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구요.
그때 시절엔 다 어렵게 사셨기 때문에 가정 형편상 합격을 해놓고도 상급학교
에 진학을 못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끔 내가 공부만 많이 했으면 장관자리라도
한 자리 하셨을 것이라고 큰소리 치신답니다.
내년이면 칠순 잔치를 하셔야 할텐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 백곰이 직업도 없고 철도 덜 들어 결혼은 커녕 저와 같은 자식이
있다는 것이 남에게 알려질까봐 걱정하십니다.
그래도 매우 성실하십니다. 성년이 된 후 군대 시절부터 운전으로만 현재까지
50년 넘게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개인택시를하고 계신데 수입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으신다고 걱정하신답니다. 내가 빨리 돈벌이를 해야 될텐데.....
아버지는 아주 오래 전 자신이 3살때에 아버지를 여의셨습니다.
그래서 신세 타령을 하실때는 자신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어렵게
자라셨다고 한탄하신답니다. 그러니 백곰 너는 행복한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종종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하시는 모습에 저의
마음이 찡할때도 있곤 합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할머니는 저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다섯 분의 아들 형제를
어척스럽게 키우셨습니다. 큰 아버지가 일찍 결혼을 하셔서 큰 어머니가
시동생 네명을 키우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도
형수님께서 많이 고생하셨다고 말씀 하신답니다. 할머니는 85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큰집에 갔을때 속주머니 속에서 박하 사탕이나 꼬깃꼬깃 아껴둔 용돈을
주신 기억이 납니다. 제가 철이 없을때 돌아가셔서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가 더 잘 해드려야 했을텐데 말입니다.
아버지의 청춘 시절은 연애만큼은 화려했다고 합니다.
한 인물(아버지의 젊었을때 사진을 보면 정말 잘 생겼음)하신 아버지는
결혼하고 나서도 종종 바람을 피셔서 어머니를 마음 아프게 하셨답니다.
어머니께서 바람피는 것도 한때라 생각하시고 지혜롭게 대처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전북사회복지연구소에 다니는 걸 처음엔 반대하셨습니다.
적응을 못 할거란 생각에 너는 쓸모가 아무데도 없으며 모든걸 포기하고
가만히 집에 있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세상에 자식 잘 되는 것을 막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냐만 아버지는 저의 살아온 모습에 너무 실망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식비도 잘 주시고 많지는 않지만 용돈까지 주신답니다.
제가 연구소에 처음 등록하고 식비에 고민하고 있을때 소장님,선생님들께서
깊은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지금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제가 연구소에서 잘 적응하고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무척 기뻐하십니다. 오전, 오후 프로그램에
다 참여하고 마무리 모임을 마치고 나면 뭔가 오늘 하루도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점점 변화되는 저의 모습(전엔 없었던 활기와
뭔가 해야겠다는 의욕 등등)에 힘이나시나 봅니다. 모두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2.어머니
어머니는 올해 연세가 65셉니다. 아버지와는 네살 차입니다.
최종 학력은 역시 초등학교 졸업이구요. 어머니는 외가집(전북 남원-아버지와는
윗동네 아랫동네에 사셨음) 동네에선
그래도 가장 부자라고 소문난 집안이었는데 외할아버지가 하도 완고하신
분이라 여자는 많이 공부할 것 없다고 상급학교에 진학을 안 시키셨답니다.
나는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어머니께서 공부를 많이 하셨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실까를. 어머니하고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어머니에게는 하나의 아픈 상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께서 저의 어머니만 낳으시고(외할머니께서 제가 갓난아기였을때 굉장히 어여뻐 하셨다고 합니다)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자
작은 할머니를 얻으셨습니다. 작은 할머니가 두딸만을 낳고 결과적으로 아들이 없자
외삼촌을 양자로 삼으셨구요. 근데 저의 어머니께서 성장 과정 속에서 겪었을 남모를 아픔이랄까(이것도 어머니 자신만의 아픔일테고 어려움이었겠지만)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가끔씩 어머니의 잠든 모습을 보고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어머니나 이모들, 그리고 이모의 형제 자매들과도 친형제 이상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십 년전쯤 이웃 집사님의 전도를 받고 현재 믿음 생활을 잘 하고 계신답니다.
아버지는 쉬는 날(한 달에 한번정도-개인택시는 사흘 일하고 하루씩 쉼)에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같이 가기를 소망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아버지의 박봉을 쪼개가면서 살림을 꾸려온
어머니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3. 큰 누나
우리 큰 누나는 마흔 세살이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매형과의 사이에
딸만 둘을 두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이렇게.
큰 누나는 고등학교때 아이큐가 150이 넘어서 한땐 천재라고 불렸습니다.
이리여자고등학교를 시험봐서 들어갔으니 공부는 꽤 했었나봐요.
그리고 송정근 선생님! 저희 누나도 군산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셨어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희 매형의 사업이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승합차 두 대를 할부로 구입하면서 저의 아버지께서 보증을 서셨는데
몇 십만원도 안되는 할부금도 못내어 삼성 캐피탈에서 아버지께
빚 독촉 전화가 오곤 합니다. 보증은 친척 뿐만아니라 형제간에도
해서는 안된다는 소장님의 말씀이 딱 맞습니다 .
매형의 사업이 하루빨리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큰 누나네는 종교가 카톨릭입니다. 집안 제사와 사업상 마시는
술 때문에 성당을 택했다고 하네요. 또 하나 저의 누나 이름이 금순이예요.
'굳세어라 금순아!' 헤헤...
소장님,선생님, 조카들이 하루하루 다르게 커서 그런지 요즘 조금은 무섭습니다.
작년 겨울에 조카가 '외삼촌은 대학 나왔어요',하고 묻길래 서울에서 전문대학
나왔다고 했더니 '그럼 왜 집에만 있어요?' 하고 묻더군요.
가슴이 뜨끔 했습니다. 마음은 조카들에게 용돈이라도 많이 주고 싶은데
현실은 영 아니니.... 새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많이 도와 주십시요...꾸벅..
4. 작은 누나
저희 작은 누나는 마흔살이구요(저희 형제는 모두 세살 터울임), 초등학교 서무과 과장입니다. 매형과는 원광대 캠퍼스 커플로 만났구요. 두 사람 사이에 역시 딸만 둘 두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다섯살 유치원생 이렇게요.
매형은 건설회사에 다니시다가 그만 두시고 지금은 건축업을 하고 있습니다.
둘이 버니까 생할은 풍족하실 것 같은데 저에게 용돈 한 번 주신 일이 없습니다.
용돈 주면 쓸데없는 곳(주로 술을 마셨음)에 낭비한다는 어머니의 당부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역시 종교는 카톨릭입니다. 저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인간적으로 신부님이
목사님보다 훌륭하시다네요....
5. 여동생
저희 여동생은 서른네살이구요,매제는 저보다 한 살 윕니다. 매제의 직업은 초등학교
서무과 직원이구요, 안팎으로 인정받는 성실하고 믿음 좋은 사람입니다.
여동생은 시집가기 전까지 군산실업전문대학 유아교육과를 나와서 유치원에 근무했습니다.
제가 재수 시절, 전문대학에 다닐 때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고마운 동생입니다.
현재 둘사이에 딸하나 아들하나 두고 있구요, 딸이 여섯살, 아들이 다섯살 연년생입니다.
종교는 기독교고요, 주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가정이길 바랍니다.
6.나
저는 지금 생각할때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병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제가 기억할 수 없는때에 시작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진단명은 서울에 있을때에는 '사회 공포증'. '공황 장애' 였고
지금은 '정신 분열증'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에
저는 남모르게 혼자서만 고민하며 병을 키워 왔습니다. 그것이 정점에 달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때입니다. 대인 공포. 대인 기피로까지 발전한 제 증상은 그로인해
고등학교를 자퇴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오랬동안 저는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아픈 가운데서도 공부는 계속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고졸검정고시 통과해서
1993년, 서울인덕대학 영어과에 입학했습니다. 입학을 앞두고 전 이런 증상을 가지고선 도저히 원만한 대학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처음으로 신경정신과를
찾게 되었습니다. 약물치료와 부분적인 행동치료로 많은 증상의 호전이 있었고
대학생활은 그럭저럭 즐겁게 보냈습니다.
95년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준비와 만족할만 하지 못한 출판사 생활과
다시 고향 익산에 내려와서 방황하고 낭비한 시간이 거의 십 년이 다 되가네요...
그렇지만 이젠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북사회복지연구소"가 저에겐 선생님이자 친구입니다.
앞으로 하나하나 올라서는 저의 모습이고 싶습니다.
어제 진경 씨가 화장실에서 막 울었을때 왠지 가슴이 아팠습니다.
진경 씨의 작은 가슴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제가 진경 씨에 대해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기에 어떻해야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8살이면 고등학교 2, 3학년일텐데 진경 씨의 진로를
어떤 방향으로 잡아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장님, 선생님들이 함께하시니 진경 씨 뿐만 아니라 우리 회원 한 사람 한 사람도
밝은 미래가 다가 오리라고 믿습니다. 글이 너무 길었죠. 저에 대해 작은 부분 이나마
이해가 되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리플 달아줄 분이 계실지...헤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백곰 유인기 올림.
첫댓글 삶에 대한 꿈, 희망이 보여요.. 아자!! 아자!! 화 이 팅
알고 보니 대가족 이셨군요. 여동생도 있고 부럽네요. 인기형 화이팅.
사회복지사님 고맙습니다. 동원아 고마워. 힘내!
리플~
리플 달았어요... ^^*
송샘 리플 잘 받았습니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