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게를 넘어서
예종희
말은 만사에 오해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하지만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고 표현이 가능한 사실이라면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명확하게 말하여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소통이 되지 않겠는가? 말할 수 있는 것,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는 모호하다. 경계라기보다 하나의 회색지대이다. 그래서 말의 무게는 항상 무겁다. 말하는 게 좋다, 말이 없는 게 좋다는 이 두 판단들은 수시로 일상을 침범하고 넘나든다. 그러면 어떤 장단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말은 내 입 안에 있을 때만 내 것이다. 말이 일단 입 밖으로 달려 나가면 그것을 잡아와서 다시 매어놓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최소한 중간은 갈 수 있으니 이는 익숙한 중용이란 가치와 비슷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복잡해진 현대에 함께 힘을 합쳐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 분명한 의사표현이 중요하다. 변화가 빠르고 복잡하며 더 위험해진 현대에 표현하는 게 좋은가 나쁜가는 주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즉 상황변화에 따라 말의 무게도 수시로 변한다. 주위 변화가 빨라지면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적절히 표현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래서 메타인지라는 자기 계발의 방법이 유행하는지도 모르겠다. 오해를 받고도 묵묵하게 견디는 것이 그 사람의 그릇이라 하지만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오해를 풀어야 하는가 그 오해를 견디는 것이 현명한가는 상황에 따라 그 맥락이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는 분에게 미친 새끼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계속 밀려오는 대화로 어색할 수도 있는 분위기를 묻어 버렸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민 온 이래 타인에게 처음 들어본 생생하고 험한 단어였다. 그런데 어찌 보면 지나칠 수도 있는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는 나의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내 감정이 상하지 않았을까? 대화의 맥락과 분위기를 생각해 봐도 엄연히 내가 잘못한 일이었고 혼나도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누군가가 나를 호되게 꾸중해 주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원했는지도 모른다. 만일 대화상대가 처음 본 사람이거나 내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감정이 상해 유쾌한 분위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화에서 작은 어투. 잘못 선정된 단어보다 서로 간의 분위기 신뢰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신뢰가 없는 분위기는 팽팽한 풍선과 같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날카로운 단어에 스치기라도 하면 감정은 마음 안에서 바로 터진다. 작은 실수라도 더욱 조심하게 되고 단어의 선정에 조심하며 그 방향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서로는 한없이 공손하지만, 마음이 오고 가는 소통은 없다. 같은 곳에 있지만 서로는 듣지 않는다. 듣지 않으면 소통은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누구나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에 서로 존중하며 상대의 실수를 넉넉히 소화하려는 여유가 생길 때 비로소 풍선에 바람이 빠진다. 그런 넉넉한 신뢰의 산소가 바닥에 퍼지면 조금씩 즐거운 말의 반찬이 나타난다. 같이 하면 즐거운 농담과 유머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도 질세라 자신있는 말반찬을 내보이며 함께 맛본다. 즐거운 말의 잔치가 열린다. 행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누구나 쉽게 느끼는 행복은 친한 사람들과 함께 수다 떨며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이다. 지금처럼 촘촘하게 발전한 복잡한 현대에 이제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의 문제이다. 어떠한 거대한 시대정신을 수행하는 것보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평화로이 공존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시장 자본주의가 세세하게 분업화 되고 더 정교해 질수록 우리는 관계에서 친밀감을 만드는 법을 잊어간다. 개인주의가 팽배할 수록 개인들은 소통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개인들은 소외되고 더 외로워지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상대의 삶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우리가 친밀감을 형성할 수가 있을까? 형성된 관계에서 서로 아무런 기대 없이 친밀한 감정이 유지될 수 있을까? 인권이 시대윤리로 자리 잡은 지금 서로 실수를 주고받지 않고 상대 존재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까?
상대의 실수로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상대의 부족함 만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도 깨달아 갈 수 있으리라. 이럴 때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거리를 다시 조정하게 되고 서로를 더 이해하면서 변화하는 관계의 거리를 다시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말에는 그 사람이 들어있다. 말의 무게가 그 사람의 무게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무게 있는 사람만 사는게 아니다.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신뢰감을 확인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내가 있는 시공간을 함께 해도 즐거운 누군가가 있다는 것, 이것이 행복한 삶이다.
새로운 시대에 서로 사이 좋게 공존하는 사회를 위해 새로운 대화의 질서가 만들어졌으면 하고 희망해 본다. 비록 그 질서가 완벽하지 않고 군데군데 균열이 발견되어도 그 흠과 결의 모자람이 서로의 이해와 존중으로 잘 메꿔지는 공동체를 꿈꿔본다. 조금 부족해도 다음 기회가 있고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