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관하여
나무라고 발음할 때 나는 두 가지가 연상된다.
우선 나무 관세음보살이 연상되어 마음이 평온해 짐을 느낀다. 물론 이 염불의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으로 수목(樹木)인 나무와 관련이 없고 동일한 발음이 가져온 연상일 뿐이다.
다음에는 같은 중고교와 대학을 다녔던 벗 고 장지석시인의 부친 장서언시인의 연작시 "나무"와 그의 고모부인 이양하교수가 쓴 명수필 “나무”가 연상되고, 더욱이 이렇게 화창한 봄날을 맞으면 연분홍 벚꽃에 싸인 그 분의 수유리 별장이 망막에 떠오른다. 그러나 나무에 관해 글을 쓰기로 했으니 옛 추억은 접어두자.
이미 뛰어난 수필 "나무“가 있으니 내 얕은 재주로 나무에 관해 달리 제대로 된 수필을 쓰기는 힘들다. 그래서 다만 이교수의 ”나무“에서 글월 몇 개를 뽑아 그것들에 대한 내 소감을 적어 보기로 한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이교수는 나무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는 본성을 가졌다고 하여 안분지족의 현인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식물의 고정성에 대해 국수나무라는 예외가 있어 흥미롭다. 이 나무는 현재 자리가 불만족스러우면 새로운 자리를 엿본다. 그래서 가지가 활처럼 휘어져 땅에 닿게 하고 그 가지에서 뿌리가 생긴다. 그런 다음 새 뿌리에서 또 다른 새 줄기가 생겨서 올라온다. 이렇게 국수나무는 천천히 이동한다.
그리고 달리 생각해 보면 고대 농경사회에서 농민 특히 부녀자들은 땅에 매여 사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나무와 농민들은 고정성에 있어서 오십 보 백 보가 아닐까?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오늘 오전, 산책 도중에 벤치에 앉아 바야흐로 한 해 최대의 명절인 개화기를 준비하느라 바쁜 벚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가지들마다 조그마한 꽃봉우리들이 오련히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아니면 성급한 내 눈의 착각일까?
꽃이 피어나려면 많은 물이 필요한데 그렇다면 그 물을 가지마다 끝까지 운반해야 하지 않는가? 수령이 삼사십년은 넘는 나무들이라 우듬지까지 대략 칠팔 미터는 족히 된다. 땅 속의 뿌리도 땅 위의 그것만큼 벋어내려 갔을 터이니, 나무는 땅 속에서 물을 빨아들여 무려 십오 미터를 운반하는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적이 있는, 나무에 귀를 기우리면 나무속에서 작은 일꾼들이 영차! 영차! 소리를 지르며 열심히 일을 한다는 글이 딱 들어맞다고 느껴진다.
가난한 사람들과 게으른 자들은 차라리 나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나무는 광합성을 해서 스스로 양식을 만들어 내니 배고픔에 시달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원한다. 그러나 나무도 살기 위해서 햇빛과 물, 그리고 각종 영양소를 필요로 한다. 나무에게 그것들은 쌀, 푸성귀와 고기 그리고 불이며, 광합성 결과 만들어진 당분은 밥과 반찬이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명제는 인간과 다름없이 나무에게도 적용된다고 하겠다.
내가 이렇게 짧지 않은 분석 끝에 힘들여 확인한 사리를 이교수는 두 줄 글로 명쾌하게 밝혔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한다.”
식물학이 발달함에 따라 나무들도 상호간에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음이 밝혀졌다. 나무들은 땅속에서는 물을 얻기 위해 서로 겨루고 육상에서는 햇빛을 더 쪼이기 위해 경쟁한다. 어느 수종 사이에는 체질상 서로 싫어하는 상극관계가 성립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과실수 대 향나무, 아카시아 대 소나무, 호두나무 대 밤나무, 오리나무, 뽕나무, 가죽나무다.
나무는 뿌리나 잎, 줄기에서 이웃 나무의 성장과 발아를 억제하는 해로운 화학물질을 분비한다고 하는데, 소나무, 편백나무, 잣나무 등이 내뿜는 피톤치드도 그것에 속한다.
이렇게 나무는 자기 생존과 자손 번식을 위해 치열하게 상호 경쟁하는 점에서 우리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나무에게도 공생하며 좋아하는 친구나무가 있고, 반면 칡과 겨우살이처럼 숙주에게 빌붙어 기생하고 종내 주인인 나무를 고사시키는 악한도 있다. 나무들이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공감한다는 생각은 단지 그러하기를 바라는 믿음일 뿐이 아닐까?
“사람은 가다 장난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 자기 소용 닿는대로 가지를 쳐 가고 송두리째 베어가곤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나무는 물리적 손상이 일어나면 자스몬산이라는 호르몬을 방출하여 이웃 나무에게 경고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상처에서 진액이 흘러나와 상처를 도포하여 병균의 감염을 막는다. 이렇게 상처를 치료하는 점에서 나무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런 나무를 송두리째 베어 죽일 때 나무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을까? 만약 선악을 초월한 산처럼 큰 거인이 있어 우리 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죽일 때 인간이 원망을 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거인이 알까?
나는 고목을 신령스런 존재로 믿고 그 앞에 기도하는 정령숭배자는 아니지만 나무에게도 상당한 의식과 기운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 생활의 필요에 따라 나무를 베어 사용하는 행위는 가축을 도축하여 식용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허용되기는 하되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하고 그런 행위에는 합당한 예의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칠십년 전 우리나라의 산들은 붉게 헐벗은 민둥산들이었다. 정부는 어린이들에게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메아리가 살게스리 나무를 심자.”라는 동요를 부르게 하며 녹화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였다. 그 덕택으로 현재 전 국토는 나무들의 푸른 잎으로 덮게 되었고 이는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흔해지면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함이 인지상정일까, 요즈음 나무가 흔해지면서 사람들이 나무를 너무 허술하게 대하는 것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관청에서는 굵은 푸라타나스 가로수를 베어내고 벚나무를 심는가 하면, 하천 둑의 사면에 자라던 관목을 모조리 뽑아버렸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수종 선택을 잘못했다고 해서 키 큰 교목인 히말라야 시다의 허리를 잘라버려 불구로 만들었다.
우리 아파트의 1층에 사는 전직 대학교수는 정원의 산수유와 대나무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고 베어내는데 전력을 투구하여 과업을 완수한 다음 오래되지 않은 최근 하세했다. 삼국지의 간웅, 조조가 신목을 베어낸 다음 득병하여 죽었다는 고사를 상기케 하는 대목이다.
우리 베이비 붐 세대가 인총이 많다고 해서 험한 취급을 받지만 각개인의 내재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님과 같이, 나무들이 많아졌다고 그 본질적 가치가 저하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나무가 적었을 때와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나무들을 귀하게 여겨야 마땅하다. 나무를 무단히 베면 나무는 죽으며 원망하며 그 원망이 쌓여 죄업으로 돌아오니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이교수는 나무의 여러 가지 덕을 꼽으셨는데 내가 보기엔 중요한 한 가지를 빼놓은 것 같다. 바로 나무의 침묵이다. 만약 세상의 나무들이 명상 중의 스님이나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수사들처럼 묵언수행하지 아니하고 하루에 몇 마디 말을 한다면 이 세상은 소음으로 엄청 시끄러워질 것이 틀림없다. 사람이 묵언수행을 하면 마음이 고요하게 되며 정화된다고 하는데 일생을 두고 침묵하는 나무들은 얼마나 마음이 깨끗할까 부러울 따름이다.
이렇게 이교수의 명수필 “나무”의 몇 대목에 대해서만 주석을 달 듯 내 소회를 적다보니 문득 나의 생활도 나무의 삶과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 한 시간씩 산책하는 개울가가 활동영역이니 국수나무보다 조금 넓을 뿐이고, 모임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간혹 술친구 셋과 만나니 이는 나무가 달, 바람과 새를 벗으로 삼는 것에 비견되지 않는가?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일에 힘씀과 같이 나도 젊었을 때에는 돈 벌고 자식 낳는 일에 열심이었고 은퇴 후에는 글을 써보겠다고 노력도 했다. 최근 두문불출 집에 머물며 종일 가도록 아내에게 몇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니 이것도 나무의 침묵과 닮았다고 보겠다.
이교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불교의 윤회설을 믿지 않으며, 내가 죽으면 재가 되고 흙이 될 뿐임을 안다. 그러니 이교수처럼 아무 나무, 또는 매죽헌처럼 봉래산 제1봉의 낙락장송이 될 소원을 품지 못한다. 그저 인간으로 살면서도 나무와 비근하게 살아 보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자 한다.
이 글을 읽은 어느 독자는 이양하씨의 "나무"는 문인의 눈으로 보고 시인의 마음으로 쓴 산문인데, 이 자(者)는 알량한 과학 지식을 메스로 삼아 해부하려고 했으니 전혀 잘못된 어프로치라고 지적할 지 모른다. 나는 이 비판에 전적으로 승복한다.
나는 약간의 지식을 얻는 대신에 문인의 눈과 시인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애석한 일이다. (끝)
첫댓글 나무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던 사항에 관한 재미있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아무도 글쓰기라는 험한 일을 하려고 하질 않아 카페가 적막하군요. 그래서 잡문이나마 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