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요4:46~54).
(마8:5~13, 눅7:1~10참조
46절. 예슈아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주님은 갈릴리 가나에 가셨다. 그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었다. 그때에 왕의 신하의 있는데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이 들었다. 아마 이 사람은 유대인인데 헤롯왕의 신하가 된 것 같다.
47절. 그가 예슈아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 사람이 예슈아 주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주님을 찾아가 청원하여 내려오셔서 자신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데 고쳐 달라고 간구를 한다. 그 사람은 다른 동료들은 주님을 믿지 아니하였지만 그는 달랐다.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주님이시라면 자신의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신뢰하였던 것 같다.
48절. 예슈아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성향이 있음을 알고 그에게 책망하시듯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은 단순히 표적과 기사만 행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그들이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이 사람이 지금 간구 하시는 분이 누구이신가를 한 차원 높여 주시기를 원하신 것 같다. 이 사람이 주님을 찾아온 것은 바른 것 이였지만 그가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고백한 것처럼 세상의 구세주 이신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보게 되는데 한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누워 몹시 괴로워하므로 그가 주님께 나아와 고쳐달라고 청원을 했다. 그 때 주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시자 그가 만류하여 이르기를“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만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극찬하신 것을 볼 수 있다(마8:5~10), 주님은 꼭 가셔야만 병을 고치는 분이 아니라 말씀만 하셔도 능히그 병을 고치시는 만유의 주 되심을 그가 알기를 원하셨다.
49절.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고쳐주시기를 재촉하듯 말한다.주님은 그런 그의 믿음이 부족하였지만 책망하시지 아니하신다. 그가 주님을 찾아와 간구한 것으로만 보시고 그 간구를 보상하신다.
50절. 예슈아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슈아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바람과 생각대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신 데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예슈아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슈아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에게 대단한 믿음이 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그 사람은 자기 앞에서 그 아들의 병을 고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어 떠한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하셨으나 다만“예슈아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집으로 갔다. 이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큰 믿음이다. 주님은 이를 기뻐하시며 이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기도란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구약에 아람군대 장관 나아만 이야기를 잘 안다. 그가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하여 많은 선물과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갔지만 엘리사는 그를 맞아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종을 통하여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러면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리라 하므로 그가 노하여 물러가며 한 말을 기억한다.“내 생각에는 그가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하며 떠날 때 그의 종들의 권유로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행하여 고침을 받은 사건을 읽어 볼 수 있다(왕하5장).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분 만유의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분 우리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다스리시며 알고 계시는 치료하시는 주님의 처방대로 따라 행할 때 그분에
게는“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다”
(사59:1).“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15:26)하셨다.
51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절.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가 자기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그 아이가 살아났다는 것을 자기에게 전하기 위하여 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 아이의 병이 나아서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이가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절. 그의 아버지가 예슈아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그는 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시간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와 온 집안이 다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기도의 응답은 꼭 우리의 생각이나 바람대로 예슈아 주님께서 하여 주셔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생활에 큰 격려가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 할 수 있고 주님은 들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신다.
54절. 이것은 예슈아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것이 지금까지의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두 번째 표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으로 한 사건은 요한이 기록하지 아니하였음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