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韓屋 짓고 삽니다 … 西村의 '파 교수'
한국인보다 한옥을 더 사랑…
'서울 西村의 동네아저씨' 로버트 파우저 교수
양반다리가 편한 남자 26년前 한국 와 영어강사… 혜화동 작은 집에 방 구해 햇살이 방 안까지 은은하게… 한옥의 속살에 매혹되다
말을 즐기는 집 '語樂堂' 사람냄새 나는 西村에 둥지… 마음 맞는 도편수와 함께 나무·기와 찾아 전국 순례… "韓紙가 숨쉬는 걸 느껴요"
서울 경복궁 옆 큰길 뒤편의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면 도심 한가운데라고는 믿기 어려운 풍경이 나타난다. 고풍스러운 한옥이 들어선 꼬불꼬불한 골목을 느리게 걷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 사이사이 예술가 공방, 작은 식당과 카페, 갤러리들도 있다.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서촌(西村)이다. 1200여채의 한옥이 밀집한 북촌과 달리 1930년대 이후 지어진 도시형 한옥 500~600채와 현대식 건물이 혼재해 있다. 행정구역상으론 종로구 체부동, 청운동, 효자동, 통의동, 옥인동 일대다.
미국 미시간주 출신인 로버트 파우저(Robert Fouser·53)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이 좁은 골목길에 있는 한옥에 산다. 수수한 옷차림에 사람 좋은 미소는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모습이다. 그는 한옥 중간중간에 얼굴을 내민 세탁소, 쌀집, 슈퍼, 분식집 주인과 인사를 나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파 교수'라 부른다. 20일 파 교수와 함께 빈대떡집에 들어섰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반색을 하며 막걸리를 내왔다. 아주머니는 "우리 파 교수님은 초등학생처럼 또박또박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데 그 말투가 참 친근하다"고 했다.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교수(오른쪽)가 서울 서촌 체부동의 낡은 한옥을 리모델링해 지은 한옥‘어락당’. 은은한 불빛이 유리창호를 통해 마당으로 새어나오고 있다. 마당 앞 회벽 담장에는 한글타이포그래픽 디자인 작품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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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교수의 출퇴근길은 그가 가끔 안내를 맡는 서촌 한옥 답사 코스이기도 하다. "이달에는 천재 작가 이상의 집과 시인 노천명의 한옥, 도시형 한옥의 원형이 남아 있는 동양화가 이상범 가옥 등을 둘러보고 수성동 계곡 공원, 통의동 갤러리 등을 거닐었다."
파우저 교수는 이제 대부분의 한국인은 불편해하는 한옥의 매력에 푹 빠져 서촌에 둥지를 틀었다. 낡고 허름한 체부동 한옥을 대수선(집의 원형인 뼈대를 살려 수선하는 것)한 후 지난해 초 입주했다. 대지 70㎡(약 21평)에 건물 40㎡(약 12평)의 작은 집이다. 그는 "마당을 가득 채우는 햇살과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인왕산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며 연신 자랑한다. 언어학자인 그는 리모델링한 한옥 이름을 '어락당(語樂堂)'이라 지었다. "'말을 즐기는 집'이란 뜻으로, 말을 배우고 사용하는 '말의 흥'을 느끼고 진지한 소통을 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2012년 10월 상량식(上樑式)은 동네잔치나 마찬가지였다.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리고, 떡과 막걸리를 이웃과 함께 나눴다. 파 교수는 평생 처음 상량문을 썼다. 상량문엔 원래 집을 짓게 된 경위와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축원(祝願) 등을 담는다. 하지만 그는 한국과의 인연, 학력, 경력 등에 대해 쓰고 부모님에 대한 감사로 끝을 맺었다.
◇"생활은 불편했지만 몸이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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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옥의 매력을 처음 발견한 건 26년 전. 1988년 가을 고려대에서 1년간 영어 강사로 일하게 되자, 청년 로버트 파우저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작은 한옥에 방을 구했다. 연탄으로 난방을 하고, 마당에 공동 화장실이 있는 집이었다. 처음 해보는 한옥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연탄불을 자주 꺼뜨려 동네 구멍가게에 번개탄 사러 다니기 바빴다. 욕실이 없으니 물을 데워 부엌에서 목욕을 해야 했다. 동네 대중목욕탕에 가는 건 아무래도 쑥스러웠다.
낯선 땅, 낯선 집이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미국 청년은 한옥의 속살을 발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미국 집과 달리 햇살이 방 안쪽까지 은은하게 들어오고 몸도 개운해지는 듯했다. 마당에 나무 향 그윽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좋았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1988년 한국에 왔을 땐 한옥에 살아보고 싶어 일부러 한옥을 찾은 것인가.
"아니다. 서울에 머물 곳을 알아보다 학교에서 가깝고 가격 조건이 맞아 들어갔을 뿐이다. 별생각 없이 살기 시작했다가 그 매력에 푹 빠졌다. 몇 년 후 찾아가 보니 내가 살던 한옥은 헐리고 없었다. 1990년대 초 불어닥친 연립주택 신축붐에 밀려 철거된 것이다. 나름 역사가 있는 집인데 쉽게 부수는 게 안타까웠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아버지가 2차대전 직후 일본 교토(京都)에 2년 동안 머물며 미군 부대 내 건물을 설계하는 일을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줘 자연스럽게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에서 어학연수를 했고,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을 공부했다. 대학 다닐 때는 일본 문화의 뿌리인 한국에 관심을 갖게 돼 한국어도 배웠다."
―영어가 모국어인 외국인에게 한국어 배우기는 쉽지 않다던데.
"이미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에 한국어가 일본어와 어순이 비슷하고 한자어에서 나온 말이 많아 접근이 쉬웠다. 대학 졸업 후인 1983년엔 한국에 와서 서울대 어학당에서 또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당시 건축학도였던 일본인 친구와 북촌 같은 한옥 밀집 지역을 즐겨 찾았다. 사실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버지 영향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할머니 집을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파우저 교수는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살았다. 1987년 한국에 와서 카이스트와 고려대 등에서 영어 강사를 하다가 1990년대 중반 일본으로 가서 가고시마대와 교토대에서 영어와 영어 교수법을 가르쳤다. 가고시마대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2001년 아일랜드의 더블린 트리니티대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서울대 국어교육과에서 외국인 교수로선 처음으로 한국어 교수법을 가르치게 되면서 그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도 한옥에 살고 싶어 적당한 집을 물색하다 서촌 지역 누하동 한옥을 골랐다.
로버트 파우저 교수(오른쪽)와 그의 한옥‘어락당’의 리모델링 공사를 총괄한 황인범 도편수(왼쪽)가 서촌의 한옥들을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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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 더 많은 북촌에 살고 싶지 않았나.
"북촌은 2000년대 초부터 한옥 보수·신축붐이 일어 가격이 크게 올랐다. 관광객이 몰려 기존의 한적한 분위기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반면 서촌에선 좀 더 '사람 사는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1년 만에 북촌으로 이사했다. 내가 살던 한옥 앞에 7층 빌딩이 들어서면서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옥 밀집 지역의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빌딩 신축 허가가 나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동네에선 안 산다'며 이삿짐을 쌌다."
◇한옥 지역에 빌딩 들어서자 이사
파우저 교수는 한옥 지킴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헐릴 위기에 처한 작가 이상(1910~1937)의 집 철거를 유보하는 주민 운동에 참여했고, 서촌 한옥과 골목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주민 토론회를 열고 책자를 만들었다.
―외국인이 한옥 보존 운동에까지 참여하다니 한옥 사랑이 보통이 아닌가 보다.
"누군가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주변에서 안 하니 내가 나서기로 한 것이다. 외국인도 거주민 아닌가. 2012년 여름 미국 뉴욕에서 난개발 반대 시민운동으로 유명한 제인 제이콥스가 살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는 북촌처럼 전통이 깊은 곳인데, 도시 한복판에 있어 개발 압력이 높았다. 그리니치빌리지가 보존된 것은 1960년대 이곳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주부인 제인 제이콥스가 이웃 주민들과 힘을 합쳐 막아낸 게 계기가 됐다. 주민들의 참여가 그만큼 중요하다."
그는 북촌으로 간 지 3년 만에 다시 서촌으로 이사했다. 그는 "북촌은 이미 상업화된 반면, 한적한 서촌은 한옥 보존 운동 등 할 일도 남아 있고 아는 사람도 많았다"며 "몸은 북촌에 있었지만 마음은 서촌에 있었다"고 했다. 이번엔 서촌 지역 체부동의 낡은 한옥(1936년 건립)을 사서 신축에 가까운 리모델링을 했다.
―한옥을 좋아할 순 있지만 거의 다시 짓는 건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전통 한옥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다른 한옥에 살면서 아쉽게 느꼈던 점들을 보완해 내 스타일에 맞는 집을 짓고 싶었다. 전체 공사비는 1억5000만원이 들었는데, 서울시에서 한옥보전지구 내 한옥을 신축·수선할 때 주는 지원금 4800만원을 받아 큰 도움이 됐다."
―리모델링은 어디에 주안점을 두었나.
"생활하는 데 불편을 줄이면서도 1930년대 도시형 한옥의 미학을 되살리고 싶었다. 아기자기한 문양의 화방벽(火防壁·전통 건축에서 돌·벽돌 등을 쌓아 방화 성능을 높인 벽)을 쌓고, 투명 유리에 사군자 등을 그려넣은 스리유리와 표면을 오톨도톨하게 만든 곰보유리 등을 재현했다."
파우저 교수는 서촌 한옥 보존 운동을 하며 만난 황인범 도편수(45·공사 현장을 책임지는 목수)에게 공사를 부탁했다. 한옥에 현대적 생활공간을 만들기 위해 건축가를 디자이너로 참여시켰다. 설계 3개월, 공사 5개월 해서 총 8개월 정도 걸렸다.
문화재수리기능자 제3702호 대목(大木·건물을 짓는 목수) 자격을 가진 황 도편수는 2010년 이후 서촌에서 6채의 한옥을 신축·대수선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황목수는 원래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지만 "내 몸에 맞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나무를 만지며 몸을 쓰는 목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는 목수 일을 배우기 위해 무작정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사찰을 돌며 일자리를 찾다가 1997년 순천 선암사 문화재 보수 공사 현장에서 심부름을 하며 목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지리산 실상사 약수암, 설악산 백담사 요사채, 가평 현등사 2층 목탑을 비롯해 전국의 문화재 수리 현장에서 목수로 일했다.
황 도편수는 "험난한 건축 과정을 건축주와 시공자가 갈등 없이 유지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던 파 교수와의 사이가 틀어질까 봐 처음에는 망설였다. 하지만 한옥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확인한 후 같이하게 됐다"고 했다. 한옥 정보 교류 모임 '한옥 3.0' 회원이기도 한 두 사람은 이틀이 멀다 하고 만나 어떤 한옥을 지을지 머리를 맞댔다. 기와 굽는 공장과 좋은 나무를 찾으러 전국을 떠돌았다.
'어락당'의 모체가 된 한옥은 1930년대 소위 '집장사'들이 만든 도시형 한옥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급속히 늘자 좁은 도심에서 기존 필지를 여러 개로 쪼개 20평 정도의 개량 한옥을 대량으로 짓는 바람이 불었다. 조선시대 전통 한옥의 외형과 내부 구조를 유지하기보다는 거주하는 사람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변형된 형태다.
―현대 주거 방식은 입식(立式)인 반면, 한옥은 좌식(坐式)이 기본이다. 현대 주택에 익숙한 사람이 한옥에서 살려면 기존 생활 방식을 일정 정도 포기하거나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하지 않나.
"어락당은 서재와 부엌 테이블은 입식으로, 거실과 침실은 좌식으로 했다. 기존 생활 방식을 포기한 게 아니라 입식과 좌식을 병행하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할까."
―좌식 생활을 하려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야 할 텐데.
"얼마든지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 일본 교토에서 있을 때 다다미방에서 생활한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잠도 침대를 쓰지 않고 바닥에 이불 깔고 잔다."
―추위는 한옥에서 가장 취약한 부문이다. 개량 한옥에 난방 설비를 갖춘다 해도 아파트에 비하면 여전히 춥다.
"당연히 아파트보다 춥다. 바닥과 벽 단열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천장이 문제다. 하지만 천장마저 단열재로 막히면 완전히 고립된 공간으로 변할 것이다. 춥다는 건 바람이 들어온다는 것인데, 그 덕분에 한옥은 아침에 환기를 하지 않아도 집 안 공기가 탁하지 않다. 한지 창호가 숨 쉬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아파트는 아무리 청소해도 화장실에 곰팡이가 피지만 공기 순환이 잘되는 한옥은 그렇지 않다. 한옥에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유행을 따르거나,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1년도 못 버티고 나간 사람을 많이 봤다."
―또 다른 고민은 수납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물건을 버리면 심플한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집 안에 TV를 놓지 않는다. 복잡한 일상을 가득 채운 것을 하나둘씩 버리면 생활 방식도 달라진다. 어느 한옥에 갔다가 마루가 온갖 가구와 가전제품들로 가득 찬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려면 왜 굳이 한옥에 사나."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리모델링해 지은 한옥‘어락당’내부. 한옥 가운데 있는 거실에서 복도와 주방을 바라본 모습이다. 천장에 서까래와 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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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어에만 관심, 한자 교육 등한시"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13년씩 살았다. 양국 국민의 스타일도 누구보다 잘 알겠다.
"얼큰한 매운탕과 새침한 스시를 떠올리면 된다. 한국인들은 낙천적이고 감성적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내성적이고 섬세하며 계획적이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한국의 외국어 교육에 대해 할 말이 많을 텐데.
"한국에 외국어 교육정책이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잦다. 입시는 물론, 입사 때도 영어를 스펙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 영어, 영어 하지만, 왜 영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외교관이 되거나 외국 사람을 상대하는 건 아니다. 반면 한자의 경우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우는 데 필수적인데 정작 학교에서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어의 바탕이 되는 라틴어 교육을 중요시하는 것도 자기 언어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다. 영어에만 쏠리지 말고,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별로 해당 언어를 잘하는 인력을 골고루 육성하는 외국어 교육정책이 필요하다."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 한국어 교수법을 가르치는 게 특이하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배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와 문화는 별개가 아니라 같이 가는 건데, 외국인이 한국인과 만나 한국 문화를 배울 기회는 거의 없는 게 문제다. 한국인과의 스킨십을 늘려야 한국어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는다."
파우저 교수는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를 체험하며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배우는 한국어 학습 커뮤니티를 구상하고 있다. "한국 아주머니들과 김장을 하며 한국 요리에 대해 알아보고 문화재 답사를 하며 한국 역사를 배우는 '체험형 교육'이 될 것"이라고 했다. '더 한옥'이란 모임 이름도 미리 지어 놓았다.
◇"'파란 눈의 외국인'이란 말에 상처"
파우저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기사에 '파란 눈' '노랑머리' '원더풀' '이방인' 등의 말을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통상적으로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 아닌가.
"그런 말은 한국인과 외국인을 구별하고, 외국인을 '타자(他者)' 내지 이질적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신문에서 나에 관한 기사를 쓰며 '파란 눈의 외국인'이라고 쓴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한 적이 있다. (눈을 보여주며) 내 눈이 파란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 '파란 눈' 하면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섹시한 젊은이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미시간주 출신인 데다 그런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 말이 나온 문화적·사회적 맥락도 모르고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것이다. 외국인을 지칭하는 상투적 표현을 무심코 쓰는 경우가 많은데, 당사자는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는 "내가 한옥을 좋아하고 서촌을 좋아하는 것도 국적(國籍)과 아무 관계가 없다"며 "나는 남의 나라 전통 가옥(한옥)을 좋아하는 유별난 외국인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골목에서 얼굴 마주치는 동네 아저씨로 이웃과 어울려 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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