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 / 김명선
중국유교 5대 경전 중 서경에 나오는 오복은
카톡 즐겨찾기에 있는 s가 오늘은 오복 이야기라고 보내왔다 . 중국유교 5대 경전 중 서경에 나오는 오복은
첫째 수..장수의 복이다 둘째 살아가는 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부의 복 셋째 강령으로 몸건강 마음편안한 복이다 넷째 유호덕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 다섯째 고종명 일생을 건강하게 잘자고 고통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치는 죽음의 복
현대인이 생각하는 오복
1.건강한 몸을 가지는 복 2.서로 아끼며 지내는 배우자를 가지는 복 3.자식에게 손 안 벌려도 될만큼 재산을 가지는 복 4.생활의 리듬과 삶의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적당한 일거리를 갖는 복 5.나 를 알아주는 친구를 가지는 복
옛날과 현재의 오복은 확연히 다른듯 하면서도 어떤 공유점이 있는듯 하다 . 이렇게 매일 카톡을 주고 받는다. 대학교 입학 때 부터 같이 공부를 했고 산악부도 같은 멤버여서 친한 사이였다 남사친이란 뜻의 사전적 의미는 남자 사람 친구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 남자 친구는 아니고 성별만 남성인 친구이며 여자가 이성적인 감정없이 성별만 남자인 친구를 말한다고 되어있다 한다 . 하기야 이 나이에는 거의가 중성화(?)되다시피하여 만나거나 보면 그냥 반갑고 좋기만 하다. 학창시절에 유행하던 박 건 가수가 부른 노래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을 알았다고 점심시간에 가르쳐주기도 했고 갑자기 휴강이 되면 먹을 것을 사들고 학교 근처 이류극장에 가곤 했던 친구이다
내가 대학입학 하고서 제일 처음 찾은 서클이 산악부였다 나무계단을 내려가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은 에델바이스 사진과 삼각형 깃발이 촘촘히 벽에 꽂혀 있었다 ,
반갑게 맞이해주는 남자들 속에서 얼떨결에 원서를 쓰고 부탁한다고 인사까지 한 것 같다 . 제일 처음등산은 김해 신어산 이었다. 보통 운동화를 신고 처음 따라간 등반은 신입생환영회라고 했는데 거의가 수염이 거믓한 남학생들이었고 여선배는 셋쯤 이었고 그때 처음 s를 보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 생각만 하면 어둠속에서 밝음 속으로 발을 내딛는 느낌이다 .
당일 코스였는데 등반 다음 날은 종아리가 뭉쳐서 계단을 내려오지 못하고 뒤뚱거렸던 기억이 난다. 문리대 계단은 특히 길었는데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 계단씩 겨우 내려오느라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종아리가 매우 튼실하고 왠만한 거리를 남보다 잘 걷는 것은 그때의 연륜 덕분이다 .나이 들수록 하체가 실해야한다니..
처음 들어가서는 등반을 위한 많은 준비물이 필요했다. 등산신발부터 등산쌕, 비 오는 날 쓰는 판초, 조끼 모자 등.. 용돈은 거의 안 쓰고 등산용품 사는데 주력했다. 그 리고 고백하건대 책값에서 많이 삥당을 쳤다. 같은 책을 몇 권씩을 산 셈이다 .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아마도 우리 아이들도 알게 모르게 나와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을까?
천성산에서의 일박은 산굽이를 돌 때마다 각각 다른 형태의 색깔의 진달래 연달래가 반겨주었다. 주말에만 등반이 가능했기에 제발 비가 안 오기를 빌었다. 어쩌다 산에서나 내려오는 길에 비라도 만나면 아무리 판초를 쓴다 해도 결국은 물에 빠진 새양쥐가 되었다 . 그런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묵 찌 빠 놀이를 했다 . 시골 버스에 오르면 미리 탄 승객들은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그때 우리는 젊었다는 그 호기로움일까 치기였을까, 즐겁기만 했다. s는 항상 같이다녔기에 더 친밀감이 있었다
여름방학에는 지리산 종주 7박 8일의 산행이 계획되었다. 같이 다니던 친구는 과외한다고 시간을 낼 수없다 하고 선배 언니들은 다들 일이 있다고 장거리 등반은 못 한다고 했다. 나는 꼭 가고 싶었다. 결국은 나를 포함 8명이 가게 되었는데 내가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집에는 등산 간다고 밝히기 어려워 학교실습이라고 둘러대고 밑반찬을 조달 받았다. 다 같은 산악부 회원이었으므로 산에 오를수록 더욱 끈끈하게 엮이게 되었다 .
대장이 있어 규율이 엄격했고 하산할 때까지는 술도 엄금이었다. 선배 언니가 걱정마라고 했지만 나 역시 다들 남자라는 개념은 가져보지를 않았다. 산에서 잘 때 나는 특별히 노란색 텐트를 배정 받았고 다른 텐트는 비좁았는지 거의 모든 짐은 내 방으로 옮겼다 , 다음 날 산행을 위해서 늦게 까지 놀 수도 없었고 산행규율도 엄했다 . 저녁을 먹고나면 어느새 동전만한 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렸고 홍일점이라고 다들 각별히 떠 받들어주어서 집에서는 받아보지 못하는 대접을 받았다.
며칠을 걸어서 밤낮으로 산 만 보며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막무가내이거나 엉뚱발랄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텐트를 열고 나가면 푸른 풀밭에 진홍색 나리가 피어있던 기억.. 지금도 여름에 짙은 감색의 나리꽃을 보면 그때의 기억에 가슴이 뛴다.
산 정상에는 새벽안개가 항상 피어났고 곳곳에 나리꽃은 지천이었다 . 지금도 나리꽃 필때면 s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며 추억을 소환한다. 지리산 천불동계곡은 여름에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했다.. 더울 때 계곡에서 옷 입은 채로 풍덩 몸을 담그고 시간을 대강 정해서 내가 있는쪽 으로는 오지 말라고 대장이 지시를 해 주었다 . 참 오래 된 그 시절 그 기억.. 되돌아보는 그 시절은 짧고 아름다웠다 . 결국은 장거리 산행에는 체력이 소진되어 나는 마지막 산행에는 어느 민박집에 몸살로 누워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병에 약수를 떠 왔다고 가져다 주었던 그 친구들.. 그동안 내 짐도 나누어 져주고 했지만 역시 남학생들이 강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서로 연락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소에 근무한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가 전해주는 말은 내가 언젠가 다방에서 만나자고해서 s는 나름 가슴을 두근거리며 갔는데 막상 나는 나의 연애상대로 고민을 하면서 s에게 자문을 구하더라고 했단다. 뒤늦게 얘기를 들은 나는 웃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남사친으로만 여겼는데.. 그 또한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남사친이 되어 s는 근황을 알려온다. 부인이 몸이 좋지 않아 부엌일은 본인이 즐기면서 한다고 하며 김치담그기, 음식 만든 것을 카톡에 올린다 . 따뜻한 곳으로가서 한 달 살이를 한다고도 하며 혼란 속에 미궁으로 접어드는 우리의 봄도 카톡으로 안부를 전해온다. 그리고 나의 등단을 축하하며 골든 에이지를 멋지게 꾸며 나간다고 , 지울 수 없는 아픈 마음도 함께하며 극복하는 단단함 , 은근슬쩍 옆지기에 대한 고마움과 자랑을 섞어 넣는 능청함 , 다 좋다고 칭찬을 보내 온다.
무엇을 오래 하느냐보다 자주 하느냐 하는 마음으로 윤기나는 생활을 하고싶소. ㅎㅎ 작심삼일 이지만 ..으로 끝낸다 . 그렇다 .세월이 얼마나 흘러도 친구는 영원한 친구 , 남사친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