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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3일 주일
[(녹) 연중 제31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31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신 주님이시며 주님밖에 다른 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은총을 주시어,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영원한 대사제이신 성자의 복음,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시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6,2-6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2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평생토록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그분의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오래 살 것이다.
3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되고 크게 번성할 것이다.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7,23-28
형제 여러분, 이전 계약의 23 사제들은
죽음 때문에 직무를 계속할 수가 없어 그 수가 많았습니다.
24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25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내가 중심이기를 멈추고, 상대가 나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향한 이기주의적 움직임을 포기하고, 다른 이를 향하여 내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민범식, 『하느님 길만 걸으세요』, 156-165면 참조). 그래서 만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나에게 있다면 그 사랑은 아직 성숙한 사랑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기쁘기 때문에, 내가 충만해지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면 아직도 내가 중심에 있고 그 사랑은 나를 향한 움직임입니다.
반면에 사랑하는 상대의 행복을 바라고, 상대의 완성을 위하여 기꺼이 나를 희생할 마음이 있다면,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자신의 중심이 되고 자신이 상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보다 하느님께서 먼저이시고, 이웃이 먼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바치신 것은 참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포기하신 ‘너-중심적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상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상대가 불행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고, 상대가 행복하면 내가 불행해진다는 사고로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상대가 중심이 되는 진정한 사랑 안에서 아주 쉽게 이해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여기는 사랑이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하느님을 말로만,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선입견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수시로 예수님과 충돌하는 사람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하면 다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서도 참다운 신앙인, 예수님께 우호적인 사람들도 꽤 있었습니다. 참 진리를 찾기 위해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는 참으로 열려있는 율법학자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다가온 율법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보여준 말투나 태도는 다른 율법학자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복음서에 통상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율법학자들은 떠보기 위해, 논쟁하기 위해, 사슬에 얽어매기 위해 악의적인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율법학자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다른 스승과는 확연히 다른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어 좋은 의도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참으로 기본적인 질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정말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당시 유다교에는 총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가 하는 것은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어떤 계명은 굉장히 무겁고 부담스런 계명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계명은 가볍고 지킬 만 했습니다. 적극적인 계명이248개였고 소극적인 계명이365개였습니다.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착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장 4절을 인용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말로만, 입술로만, 기도문 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 적당히,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다 투자해서 성심성의껏 사랑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조금은 불성실하고 미온적인 태도, 소극적이고 미지근한 신앙에 일침을 가하는 따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은 세상에 반은 하느님께 걸쳐놓은 우리 삶의 모습을 반성케 합니다.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을 가르쳐주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절친한 친구들, 동료들, 좋은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보다 보편적이고 확장된 의미의 이웃입니다.
착한 사람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의롭고 깨끗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부정한 사람들,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 원수들조차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관대하고 폭넓은 이웃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을 뒷받침하는 토대입니다.
그간 할례나 안식일 규정, 정결례와 관련된 율법에 목숨을 걸어왔던 율법학자들에게는 뼈아픈 일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이자 최우선 순위는 사랑이라는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만천하에 선포하십니다.
사랑의 계명과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다든지, 율법의 근본을 흔든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원래의 자리로 환원시킨 너무나도 합당하고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이웃보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에게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계명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면 계명은 왜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가르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그래야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2023년 38년 동안 중증 장애인인 딸을 돌보다가 수면제를 먹인 뒤에 살해한 60대 어머니에게 법원이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선처했습니다. 검찰은 징역 12년을 구형했는데, 어머니는 최후 진술에서 “버틸 힘이 없었고 끝내자는 생각이었다.”라면서, “딸과 같이 갔어야 했는데 혼자 살아남아서 정말 미안하다.”라고 오열했습니다.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저절로 솟아나면 부모에게 키워질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사랑은 실체가 없고 개념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더라도 그들도 부모에게 사랑받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받아야만 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실 때 중요한 부분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그 부족한 부분을 이웃에게 채우려 해서 나중에 본인은 사랑했다고 말하겠지만, 자녀들에게나 이웃에게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최고야 원장의 『벼랑 끝, 상담』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20대 중반에 무역회사에 다니며 이미 팀장의 자리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의 싸움만 보며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해의식이 컸던 엄마가 큰 문제였습니다. 엄마는 모든 분풀이를 딸에게 해대고 있었습니다. 딸이 수학 95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는 그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내가 이런 점수 보자고 이 고생하며 키웠냐?”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죽도록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직장에 취직해서 독립했을 때도 딸을 찾아와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면 자해하며 풀었습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서 남자친구는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고 그렇게 많은 남자가 떠나갔습니다. 남자가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해하며 피 흘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유일하게 지금 이 남자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기에 여자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고야 원장은 그녀에게 남자를 위한 공간을 제공해 달라고 했습니다. 집 안에 텐트를 하나 마련해서 그 안에 남자친구가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자유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잘 됐을까요? 나중에 다 부숴버렸습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면 남자친구에게 사랑받아야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것에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십일조’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자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행복한 아내가 되어야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아내의 겨울’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노동으로 하루살이 하던 정호는 경기 침체로 넉 달째 일을 못 나갑니다. 그 남편을 위해 고깃집에서 일하다가 사장이 줬다며 아내가 불고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보다 먼저 남편에게 주었고 그 안에 씹다 버린 껌이 노란 종이에 싸여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자녀 몰래 그 껌을 집어삼켰습니다.
남편은 숫기 없는 아내가 몰래 남들이 먹다 남긴 고기를 모으느라 고생했을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배부르다며 밖으로 나온 남편은 아내의 구두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자녀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랑이기에 순수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자녀들의 자존감을 높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이고 그 나라의 행복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레바논에 ‘UN 평화유지군’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평화유지군은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군대라고 합니다. 절대적인 강자인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이스라엘은 평화유지군을 향해서 공격했고, 탱크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평화유지군이 부상했다고 합니다. 유엔은 이스라엘에 강력하게 경고했고, 평화유지군에게 속했던 나라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레바논에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군인들은 평화유지군에 남아서 끝까지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서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위험할지라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을지라도 레바논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유엔에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아일랜드 군인들이 레바논에 남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아일랜드도 영국으로부터 침략받았던 약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가정 방문 중에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년은 3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가서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말렸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년은 우크라이나로 떠났고, 안타깝게도 청년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한 후에 사망했습니다. 무엇이 청년을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미국에 있으면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죽음의 덫이 놓여있는 우크라이나로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은 더 높이 날아오르려는 갈매기의 꿈과 같은 겁니다. 그것은 벗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부모님도 이제는 슬픔을 딛고, 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은 목숨을 바쳐서 이웃을 돕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들숨이 있어야 날숨이 있습니다. 한동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흙 속에 있는 씨앗은 물과 햇빛을 받아야 싹이 나옵니다. 사랑받는 아이는 면역력도 강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남을 생각하며 감동할 수 있고, 자신의 애정을 특별한 존재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느낌은 사랑받는 것보다 한결 흐뭇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도, 역경도, 굶주림도, 죽음까지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의 애정을 남에게 투사하고 나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의 사랑은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과 비교할 때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든, 받기 위해서든, 남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거나 받는 존재에게 실망하거나 배신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네 번째 보편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는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애정을 받고, 남에게 투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면, 사랑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을 부르는 이름은 생명, 자연, 대지, 우주, 기, 하느님처럼 문화와 민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떤 단계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식어 하느님 아버지를 잠시 외면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기다리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식어 버리면 그들 역시 사랑이 식어 버리곤 합니다. 2024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 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 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 수도자
사회 정의의 수호성인.흑인의 성자.
’빗자루 수사’,’흑인의 성자’라고 하는 마르티노는 1579년 페루에서 스페인 귀족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색인의 설움을 겪었던 마르티노 성인은 이발사겸 외과의사의 견습생이 되었고, 그 후 도미니코회 재속 제3회원으로서 수도복을 입었고, 다시 리마의 도미니코회인 로사리오 수도회에 정식 입회하여 평수사가 되었다.
평수사인 마르띠노는 이발사, 외과의사, 의류수선 등의 여러 직책을 담당했지만 아무런 무리없이 일을 했으며, 병자 치료를 도시 주민에게까지 확대하였고, 또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소외된 이들, 병자와 노예, 고아들, 심지어는 벌레나 동물까지도 사랑했던 그는 수많은 기적들과 함께, 하느님 앞에는 흑인이나 어린이나 모두가 평등함을 깊은 신앙과 겸손한 삶으로 실천했다.
어느 날은 그의 원장이 빚에 몰려 곤경에 처한 사실이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저 가련한 종이고, 수도원의 재산이니, 저를 파십시오."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도 엄격한 생활을 영위했고 성체에 대해 큰 신심을 지녔다.
그는 리마의 성녀 로사와 가까운 친구였고, 성 요한 마시아스와도 가까웠다.
그는 외국 선교사가 되어 순교하기를 열망했으나, 자기 육체에 대한 순교로써 만족해야 했다.
그는 일개 평수사에 불과했으나 1639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고위 성직자와 쉬족들이 그를 운구했다.
1962년에 시성되었으며, 사회 정의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실비아 (Silvia)
신분 : 과부
활동지역 : 로마(Roma)
활동연도 : +592/594년경
같은이름 : 씰비아
전설에 의하면 성녀 실비아는 시칠리아(Sicilia)에서 원로원 의원 가문에서 태어났고, 로마 근교에서 태어난 그녀의 남편 고르디아누스(Gordianus)는 성 펠릭스 3세(Felix III, 9월 22일) 교황과 성 아가피투스 1세(Agapitus I, 4월 22일) 교황을 배출한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녀 실비아는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 교황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다.
574년경 남편 고르디아누스가 사망하자 아들 성 그레고리우스는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던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었는데, 오래 전부터 수도생활을 갈망해 왔던 성녀 실비아는 이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더 세웠다고 한다.
성녀 실비아는 로마에서 작은 거처를 마련한 후 은둔생활을 하다가 592년 혹은 594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