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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寒岡先生의 生涯
이회서당 출신 최영수(崔榮銖)씨의 중산산고집(重山散稿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 이우성(李佑成) 교수가 지은 아래 자료를 발견하고 여기에 그대로 옮겨 둔다. 지은 연대는 미상이다. 문장 전체에 한자가 너무 많아 독자가 보기에 불편할 것 같아 될 수 있는 한 한글로 바꾸었음을 부연해 둔다. 특히 양천허씨 참의공종회 종원들은 최소한 우리의 학맥을 알고 있을 때 타성의 자손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1543(중종38)에 경상도 성주(星州) 유촌(柳村)에서 탄생하여 1620(광해군12)년에 동 팔거현(八거縣) 사양정사(泗陽精舍) 현 칠--곡군 칠곡면 사수동에서 세상을 떠난 한강 정구(鄭逑)선생은 자가 도가(道可)이며, 본관은 청주였다. 원래 그의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으나 그의 부친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손으로 현풍 외가에서 와 있으면서 성주의 성주이씨(星州李氏)와 결혼하여 드디어 성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유년시절에 벌써 영채(英彩)가 발월(發越)했던 선생은 10세에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독서에 열중하였고, 13세에 성주향교에 교수로 와 있던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주역(周易)을 배우면서 건곤이괘(乾坤二卦)를 읽고는 나머지를 모두 유추하여 통달했다고 한다. 22세에 과거응시를 위해 상경한 적이 있었으나 느낀 바 있어 과장에 들지 않은 채 귀향하여 그,길로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31세 때에 조정에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으로 부름이 있었고, 이로부터 7년동안에 건원참봉(健元參奉)과 의형(義興).삼가(三嘉).지례(知禮) 등의 현감의 발령이 있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으며, 창평산(蒼坪山) 선영 곁에 집을 지어 한강정사(寒岡精舍)라 -이름하고 거기에서 거처하면서 학도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한강'(寒岡)이라는 호는 그 때부터 사용한 것 같다. 38세에 다시 창년현감으로 발령이 났을 때 비로소 부임하여 1년 반동안 지방행정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내직인 사헌부지평(司憲部持平)으로 발령된 것을 기회로, 다시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왔다. 이 무렵에 회연(檜淵) 옆에 초당을 마련하여 천석(泉石)과 송죽(松竹)을 애상(愛賞)하고 특히 매화를 100주 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명명하였다.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본인이 내용을 번역한 것임)小小山前小小家, 조그마한 동산앞에 집한채가 있었는데,
滿園梅菊逐年加. 滿園梅菊 해를따라 그루수가 더해가네.
更敎雲水粧如畵, 그뿐인가 구름과물 화장한듯 그림이니,
擧世生涯我最奢. 이세상에 이런사치 나를빼고 또있을까.
이 시는 선생이 백매원을 두고 읊은 것으로 세속적 부귀영화를 등진 대신, 이 자연미를 마음 껏 향유하는 자기의 생활을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럽다라고 말한 것이다. 옥산(玉山) 이우(李瑀)는 율곡의 아우이며 서화로 유면하였는데 그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의 생활환경과 운치를 알려주고 일반산수와 포도가(葡萄架) 및 수초부로(水草鳧鷺)의 그림 몇 폭을 그려 줄 것을 부탁한 것도 이 때였다. 이러한 정감과 세계를 배경으로 했을 때 선생의 학은 그만큼 유연하고도 무르익은 경지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 뒤에 외직으로 동복(同福).함안(咸安).통천(通川) 등 고을을 거쳐 임진난중에 강릉부사(江陵府使).강원감사(江原監司).성천부사(成川府使) 그리고 난후에 충주목사(忠州牧使).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역임하였고, 내직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좌승지(左承旨).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광해초에 대사헌(大司憲)으로 특진되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말았다.
선생의 사환경력을 보면 내직은 항상 사퇴를 일삼았으나 외직에서는 대체로 부임하였다. 아마 중앙정부에서 보다 지방에서 전성의 장으로 책임있는 행정을 해보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특히 임진난 중에서 외직을 통하여 국사와 민정에 진력하는 한편, 각 지방의 전몰장병을 매장.추도하고 나아가 역사상 외적을 격퇴한 최춘명(崔椿命).원충갑(元沖甲) 등 민족의 영웅들을 사당에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여 당시 군민의 사기를 고무시켜 주었던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만ㄴ녀은 광해군의 살제폐모(殺弟廢母)의 소동을 당하여 여러번 소차(疏箚)를 올렸으나 통하지 않았고, 북인정권의 횡포밑에 여러차례 중상모함을 입기도 하여, 그의 은퇴지였던 무흘(武屹)에서 다시 여곡(려谷)으로 여곡에서 또다시 사양정사(泗陽精舍)로 이주하여 거기에서 78세를 일기로 그의 숭고한 일생을 마친 것이다.
二. 寒岡先生의 學統
선생이 우리 나라의 대현(大賢)으로 500년 유학사에 뚜렷한 존재가 된 것은 남다른 천품으로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던 때문이겠지만, 당시 영남 상.하도에 자리잡고 있었던 퇴계.남명 두 사문(師門)을 찾아 배움을 청했던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고 보여진다. 즉 21세 때에 퇴계선생에게 그리고 3년 뒤인 24세 때에 남명선생에게 제자의 예를 닦게 된 것은 선생의 일생에 있어서 학문적.정신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16세기 후반에 1대의 종사(宗師)인 퇴계와 남명이 영남의 상.하도에서 각기 유학의 광장을 열고 있었던 것은 당시 사림계의 한 위관(偉觀)이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 1681-1763)은 백두산맥과 동방의 지리를 유(諭)하면서 "退溪는 生於大小白之下하여 爲東方之儒宗하니 其流深涵濃郁하고 揖遜退讓하여 文彩彪映에 有洙泗之風焉이요 南冥은 生於頭流(智異)之下하여 爲東方氣節之最하니 其流苦心力行하고 樂義輕生하여 利不能屈하고 害不能移하여 有特立之操焉이라. 此嶺南上下道之別也"<白頭正幹, 僿說卷一天地門>라고 하여 퇴계도덕의 깊고 넓음과 남명의 기절의 높음을 들어 영남상.하도의 학풍을 대조적으로 말하고 다시 동방의 인문을 논하면서 "聖朝가 建國하매 人文이 始闡이라. 中世以後에 退溪는 生於小白之下하고 南冥은 生於頭流之下하니 皆嶺南之地也라. 上道는 主仁하고下道는 主義하여 儒化와 氣節이 如海闊山高하니 於是乎 文明之極矣.<東文人文, 同上>라고 하여 퇴게의 의하여 상도는 인을 위주하고 남명에 의하여 하도는 의를 위주했는데, 퇴게의 유화를 활해에 비긴다면 남명의 기절은 산고에 견줄만한 것이며 이에 이르러 우리 나라 유교적 문명은 그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남 상하도의 학을 도산과 덕천 두 사문으로부터 흡수.소화하여 자기를 대성시킨 분이 바로 한강선생이었다. 일찌기 선조왕이 퇴계.남명의 학문 및 기상의 차이를 물었을 때, 선생은 퇴계에 대하여 "德器渾厚, 工夫純熟, 階級分明, 學者易以尋入."이라 하고; 남명에 대하여는 "器局峻整, 超然自得, 特立獨行, 學者難以爲要."라 하여 두 스승의 장점과 특징을 명백하 파악하고 설명하였다.
원래 선생은 천성이 호매(豪邁)하여 체질적으로 남명에 유사하였고, 남명의 지려명행(砥礪名行)과 출처의리를 본받았지만 선생의 학문태도 내지 수양방법에 있어서는 퇴계를 따랐던 것 같다. 말하자면 선생은 남명적 체질 위에 퇴계적 함양을 가했던 것이다. 선생이 후일 마침내 퇴계학(退溪學)의 탁월한 계승자로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영남의 학을 종합.성취한 선생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의 말에 "퇴계한강지학(退溪寒岡之學),傳於大嶺之南."(與猶堂全書第一集, 玄坡 尹進士行狀)고 한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대표적 학파를 이루었고, 또한 그의 한줄기 학맥이 근기지방으로 전하게 되어 선생의 학이 영남의 본고장을 벗어나 근기학(近畿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또한 이채로운 일이다. 선생은 전국에 걸쳐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특히 당시 영남인사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도들이었거니와, 한편 근기출신의 미수(眉수) 허목(許穆)이 따로 선생의 의발(衣鉢)을 물려 받아 후일 근기학통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수는 선생의 문하에서 가장 연소했던 분으로 또 후일 가장 오래 생존하여 선생의 광명(광명)을 엮고 문집의 서문을 쓰는 등 선생의 학을 계승.발전시키기에 힘을 다한 분이다. 근기학통이에 대해서는 앞사람들의 설명이 많다. 예를 들면 방산(舫山) 허훈(許薰 : 1836-1907)이 허성재(許性齋)에 대한 만장에서도 잘 지적해 놓았다. "眉翁力倡古詩畵, 星順相從又下廬" (舫山全集卷四)
미수가 고시서(古詩書)의 고학(古學)을 창도하였고, 뒤를 이어 성호(星湖) 이익(李瀷).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이 나왔으며,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을 거쳐 성재(性齋) 허전(許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許昌武) 추기 : 이후의 학통은 성재(性齋) 허전(許傳)에서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으로 다시 소눌(小訥)에서 신암(新庵) 허격(許格)으로 신암에서 경파(耕坡) 許채로 이어져 그 학적 정신이 오늘까지 이회서당(以會書堂)에 살아 숨쉬고 있다.) 방산은 성호 우파인 순암.하려게열만 들었지만, 실은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형제 등 성호좌파들이 모두 모두 근기학통의 주요인물들이다. "寒岡을 淵源으로 한 根畿學統의 系譜는 곧 朝鮮朝後期의 實學思想의 主流를 이루는 經世致用派 그것이다."
三.寒岡先生의 著述과 編纂
일찌기 심재(深齋) 조경섭(曺競燮 : 1873-1933)은 군기학통에 대하여 "畿學은 宏博하여 多急於應用救時라"(십재집권27, 朴晩醒墓碣銘))고 하였다. 응용구시(應用救時)는 곧 경세치용(經世致用)과 동일어이다. 근기학통ㅇ의 연원이 한강선생에서 온 것이라면 과연 한강의 학에서 그러한 요소와 경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껏 선생의 학을 주로 영남의 학-성리학으로 만 알아왔고, 그것은 또한 너무나 잘 알려져 온 것이므로 여기서는 거듭 운운하지 않는다. 다만 선생의 학과 근기학과의 관련을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先生의 學이 지닌 宏博의 일면을 들만하다.
선생의 저술과 편찬에 속한 서적만 하드라도 대단히 호한(浩瀚)하다. 포은(圃隱).한훤(寒暄).일두(一두)와 같은 우리 나라 선유들은 대체로 저술과 편찬이 별로 없었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르러 비로소 구인록(求仁錄).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이 저술되었으며, 그리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에 와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 등이 있었으나 그 후에 다시 영남에 와서는 요요무문(寥寥無聞)이었다. 영남의 학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침잠하고 있었고, 저술.편찬에 힘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심성공부에 주력하면서도 저술과 편찬에 적극적 노력을 보였다. 여기 대충 연보와 행장에 의거하여 그 책들을 부분별로 적어보기로 한다.
1.性理學 : 개정주자서(改定朱子書), 중화집설(中和集說), 성현풍절(聖賢風節), 심경발휘(心經發揮),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 등이다.
2.문학(文學) : 고금문수(古今文粹), 낙천한적(樂天閒適), 주자시분류(朱子詩分類) 등이다.
3.역사(歷史).전기(傳記) : 역대기년(歷代紀年), 고금추모(古今忠謨), 경현속록(景賢續錄), 와룡암지(臥龍巖志), 무이지(武夷志), -고금치란제요(古今治亂提要), 유선속록(儒先續錄), 일두실기(一두實紀), 고슴명환록(古今名宦錄) 등이다.
4.지지(地志) : 창산지(昌山志(), 동복지(同福志), 함주지(咸州志), 통천지(通川志), 임영지(臨瀛志), 관동지(關東志), 충주지(忠州志), 복주지(福州志) 등이다.
5.예학(禮學) :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 오성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 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 등이다.
6.의학(醫學) : 의안지방(醫眼集方), 광사속집(廣嗣續集) 등이다.
31세 때의 <개정주자서절용총목>.<가례집람보주>에 착수한 것을 필두로 75세 즉 고종(考終) 3년전까지 책을 쓰고 엮기에 자자한 그의 정력도 놀랍지만, 성리학, 예학, 역사, 전기, 지지, 의학, 문학 등 각 부문에 걸려 그러한 업적을 내게 된 것은 한마디로 선생지학의 광박(宏博) 함을 알려 주는 것이다.
둘째로 先生之學의 應用救時, 즉 經世致用的 성격을 들 수 있다.
위에서 든 편저중에 <고금충모>, <고금치란제요>는 그 서명만 보아도 알수 있다싶이 경국의 유모(猷謨)와 정치의 득실을 고금의 역사사실에 입각하여 파악하려는 것이고, <고금인물지>, <고금명환록>은 역시 서명 그대로 인물의 전기를 통하여 구체적 행사에 의한 역사적 감계(鑑戒)를 보이려는 것이다. 그 밖에 <역대연기>와 같은 역사물과 각 지방 지지류도 모두 응용구시의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지지>는 선생이 각 지방에 외직으로 가는 곳마다 그 지방의 산천.물산.고적.인정풍속 등을 조사.수집하여 손수 체재를 만들고 편제를 정리한 것으로 <창산지>(창령)를 첫 작업으로 내놓은 뒤에 계속하여 같은 작업을 함으로써 개인의 힘으로 전후 무려 7종의 읍지(邑志)와 한 개의 도지(道志)를 만들게 된 것이다. 임진난중에 선생이 강원감사로서 <관동지>를 편찬할 때에 최게승(崔季昇)이 편지로써 "先生이 撰關東志하니, 方今賊滿疆域하여 國勢가 올날이라 策應軍務도 亦且不暇어늘 乃於此時에 撰集地志하심이 何如합니까" (한강선생문집권팔, 최계승문목)라고 하여 전쟁와중에 군무의 응책도 바쁘기 짝이 없는데 지지따위의 선집이 어인 까닭이냐고 물어온 것이다. 선생은 이에 대하여 "緩急則固異矣나 惟所當爲는 不可以未遑而放過라 只今에 書籍이 蕩然散失하여 若不收拾見聞이면 將無以示後世라 軍政酬應之餘에 令文官儒生으로 各採列邑風土人物하여 以備文獻之參證이 有何不可호리오"(同上)하여 군무와 지지 양자의 완급을은 물론 다르지만, 역시 해야할 것은 해야 하며, 군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지지를 만드는 것이 어찌 잘못인가라고 답변하였다. 전쟁으로 서적이 죄다 사실된 마당에 지금 듣고 보고 한 것을 채집하지 않으면 후세에 보일만한 것이 없게 될 우려가 있으므로 지지를 만들어서 문헌의 자료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선생의 말씀은 단적으로 지지에 대한 선생의 열의가 어떠햇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許昌武 註 :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재직시 주변의 반대를 뿌리치고 전국의 고문서를 수집.정리.편찬하하는 한편 기 수집된 각종자료를 전산화하고 <향토문화전자대전>(鄕土文化電子大典)을 편찬토록 전국의 명가.사찰.향교.소장가를 찾아 10여년 동분서주하는 한편, 교육부와 국회예결위 위원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예산을 확보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매년 근 100억원의 예산이 지원되어 장기사업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을 갖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한강선생(寒岡先生)께 다시금 경외로움을 느낀다.)
의학관계의 책들도 응용구시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의안집방>은 선생의 성천부사로 있을 때, 우목(右目)에 탈이 생겨 그로부터 여러 의서에서 눈에 고나한 부분을 초사(抄寫)하고 거기에서 <본초단방>(本草單方)과 <침구제경>(鍼灸諸經)을 첨부하여 만든 것이고, <광사속집>(廣嗣續集)은 은 육아에 고나한 의서인데, 유자목(兪子木)의 <광사>(廣嗣) 라는 책에서다가 선생이 미비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가장의서(家藏醫書)를 두루 상고하고 행당항목을 따로 모아 속집을 만든 것이다. 선생은 두 책의 서문에서 눈은 학자들에게 독서.진학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이고, 자식의 산육은 개인의 후사를 위해 그리고 인물의 번식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각각 책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특히 후자에서는 임진난후에 민족의 소생과 부흥에 일조를 주려는 심원한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선생의 학의 광박성(굉박성)과 응요구시적(응용구시적) 경향은 뒤에 미수를 통하여 근기학통에 속한 학자들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었고, 성호, 순암, 다산 등에 의한 저술.편찬의 학풍이 된 것처럼 그들의 경세치용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四. 맺음
이상의 서술로써 우리는 한강선생에 고나한 개략을 상고해 보았거니와, 여기 우리가 크게 유감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선생의 그 방대한 저술.편찬물들이 지금 거의 얻어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임진난에 선생은 통천군수로 있었고, 고향에 두었던 선생의 만권장서와 각종 원고가 승주인사들의 노력으로 해인사에 옮겨져서 난을 피해 잘 보존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1614년 선생이 여곡에서 살 때에 큰 화제를 입어 모든 책들이 하루저녁에 유유로 돌아간 것이다. 이 때 선생은 "天喪余, 天喪余."(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고 통탄했지만, 이미 노경에 처한 선생의 건력으로는 그 전부를 재현시킬 수 없었고, 오직 몇몇 종류만 다시 집필하여 복원된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정도이다. 선생이 그렇게 힘들여 만들었던 지지들도 오늘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함주지(함안) 하나 뿐이다.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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