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사화와 파평윤씨
을사사화는 조선 시대 4대 사화의 하나다. 조선 전기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정치세력은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진다. 이들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은 주로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사화는 사림파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들을 가리키며 '사림의 화'의 준말이다.
4대 사화에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가 있다.
사림파는 기묘사화 이후 중앙 정치 세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538년에 김안로 일파가 실각한 뒤 서서히 등용되어 요직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1543년에는 김인후가 향약 시행을 주장하기까지 이르렀다. 1544년에는 조광조의 신원 문제가 거론되어 이를 계기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재연되기 시작했다.
인종이 즉위한 지 1년도 못 되어 병사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을,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미 중종 대에 외척 김안로를 축출하면서 다른 쪽 외척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외척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것은 이미 예고됐다.
무정왕후는 그의 족질을 시켜 김안로가 왕후를 폐하려 한다는 밀고를 하여 김안로를 제거했다.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공신계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외척들이 여기에 가세한다. 이 일은 단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다.
복잡한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중종의 제1계비 윤씨가 낳은 원자(元子)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2계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뒤의 명종)을 낳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 형제는 세자를 교체할 음모를 꾸민다.
이에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은 세자를 보호하려 했고 두 외척 간에 왕위 승계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로. 윤원형 형제를 소윤(小尹)이라 했다. 대윤과 소윤의 알력 가운데 중종이 죽자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인종은 즉위하여 중종 말년부터 진출해 있던 사림파를 중용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12세의 경원대군이 즉위했다. 모후인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윤원형이 이기(李),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등과 모의하여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윤원형은 핵심 동조 세력과 결탁하여 형조판서 윤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을 양사(兩司)를 통해 제거하려 했다. 당시 양사는 사림파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이를 반대하자 이기 등은 중신회의를 통하여 이들 3명을 모함한다.
결국 윤임은 유배, 유인숙은 파직, 유관은 체차(遞差)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홍문관을 비롯하여 양사의 사림파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이기 등은 3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양사의 관원을 파직시켰다.
또 3명을 역모로 몰아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이어 종친인 계림군도 관련되었다 하여 죽였다. 윤임을 동조하던 사림 10여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당시 사림파는 인종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을사사화에서 큰 화를 당했다.
을사사화는 척신인 윤원형이 권신인 이기와 결탁하여 윤임 및 사림파에게 타격을 가한 정치보복이었다. 을사사화를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기 등은 명종의 보위를 굳혔다는 명분으로 공신 책록을 서둘러 28명을 일단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했다.
따라서 명종 초년에는 이들 공신 집단이 강력한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을사사화의 경우 싸움은 외척 간에 벌어졌으나 사림파도 다수 제거되었다.
수양대군의 장인이었던 윤번 은 대사헌, 우참찬을 지내고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그의 아들인 윤사분, 윤사홀, 윤사흔이 각각 우의정, 예조판서, 우의정에 올라 가문이 번성한다. 뒤에 윤사분과 윤사흔 집안에서 같은 시기에 왕비가 나와 20여 년간 일가상잔의 비극을 초래한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모두 파평윤씨다.
장경왕후의 아우에 윤임이 있었고 문정왕후의 아우에 윤원형이 있었다. 윤임, 윤원형은 같은 종씨이면서도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일찍부터 반목, 세간으로부터 대윤(윤임), 소윤(윤원형)으로 지목 받는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이 득세, 이언적, 유관, 성세창과 같은 사림의 명사를 많이 등용시킨다. 그러나 당시 뜻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윤원형 밑에 모여 사림과 반목하고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본다.
인종이 재위 8년 만에 죽자 나이 불과 12세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자파세력의 기틀을 잡은 윤원형은 당시 형조판서였던 대윤의 보스 윤임을 비롯해 이조판서 유인숙, 영의정 유관 등을 반역죄로 귀양 보내 죽인다. 그 뒤 5-6년에 걸쳐 윤임의 세력을 모두 유배, 또는 죽이니 죽은 자의 수가 1백여 명에 이른다. 이것이 유명한 을사사화다.
윤임의 아들인 윤흥신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용장이다. 그는 1592년 4월14일 왜적의 선봉군이 다대포를 포위하자 이를 일단 격퇴하였으나 다시 대군을 만나 종일토록 싸웠다. 그러나 끝내 성이 함락되자 동생 윤흥제를 안고 함께 순절했다. 을사사화 때 아버지와 형제 셋이 죽음을 당하였는데도 요행히 참화를 모면했었다.
파평윤씨의 시조는 윤신달이다. 그는 신라 경명왕 2년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태사에 이르렀다. 윤신달은 유금필, 김선평, 장길, 유차달 등 11인과 함께 고려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5세손 윤관이 고려 문종 때 파평백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삼았다.
윤관은 문무를 겸비했던 재상이다. 동북면의 여진족을 정벌, 9성을 쌓고 선춘령 아래에 고려 땅을 증명하는 비를 세운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진중에 있을 때도 항상 오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윤관 이후 파평윤씨는 고려조에 윤언이, 윤인첨, 윤돈신, 윤적계, 윤선좌, 윤안숙, 윤세유, 윤척, 윤승례를 배출하면서 삼한의 가장 대표적인 문벌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 개국공신 윤곤을 비롯 윤번, 윤형, 윤자, 윤암, 윤사분, 윤사홀, 윤사흔, 윤호에 이어 성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을 배출하면서 고려조에 이어 계속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파평윤씨는 조선조에 418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었다. 이는 전주이씨 844명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국혼 가문으로는 청주한씨 5명에 이어 여흥민씨와 함께 4명의 왕비를 배출했다. 연산군 생모인 윤비까지 추가하면 청주한씨와 맞먹는 수다.
정승수는 총 365명 중 전주이씨 22명, 안동김씨 19명, 동래정씨 13명, 청주한씨. 여흥민씨 12명 다음에 11명으로 7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수도 94만여 명으로 성씨별 전국 인구 순위 8위이다.
파평윤씨에서는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만큼 과거에 얽힌 숱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문강공(윤언이)의 아들 3형제(인첨. 자고. 돈신)와 문정공(윤인첨)의 아들 3형제가 양대에 걸쳐 모두 대과 급제했다. 이를 일러 <삼제택양사택(三第宅兩師宅)>이라 불렀다. 드물게도 나라에서는 문강. 문정공의 부인들에게 녹봉을 내렷다.
또 참판공(윤민신)은 다섯 아들이 나란히 급제하고 그 중 한 사람이 장원을하여 세상 사람들은 참판공이 사는 마을을 < 오자등과터(五子登科터) > 라고 불렀다. 파평윤씨 세계는 시조 이래 5세 윤관까지 단계로 이어진다. 윤관이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파로 분파된다. 따라서 분적종을 포함한 파평계의 모든 윤씨는 윤관 장군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