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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 주석
삭개오의 회개(누가복음 19:1-10)
복음서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개종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의 주님과 어떤 사람과의 담화는 기록되어 있는데 삭개오와의 담화가 그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고 있었다(1절). 이 여리고 성은 저주를 받아 세워진 곳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성이 남아 있음을 귀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저주에 관한 기사가 없다. 이 성은 세워지지 말았어야 할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성이 세워졌을 때에 이 성 안에 사는 것이 죄는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요단 저편에서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베다니로 나사로를 살리러 오시는 길이었다. 주님께서는 한 가지 선한 일을 하시려고 가실 때에 도중에서 여러 가지 하실 일을 생각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들의 영혼과 육체에 다 좋은 일을 하시었는데, 여기서는 영혼을 위하여 하신 좋은 일의 실례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삭개오는 누구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가. 그의 이름은 그가 한 유대인이었음을 나타낸다. 삭개란 이름은 유대인들의 흔한 이름이었다. 거의 이때쯤 삭개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한 랍비도 있었다. 주목할 것은,
1. 그의 명칭과 직위이다. 그는 세리장 곧 총세무관 이었다. 다른 세리들은 그 밑에 있는 사무원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징세청 총관리인 이었다. 우리는 가끔 세리관들이 그리스도께로 온 기사를 읽는다. 이 사람은 권세가 있는 세리장으로서 세리들이 그에게 문안오곤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사물에 있어서 남은 자를 가지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괴수까지도 구원하러 오셨으므로 세리장도 구원하러 오셨다.
2. 세상에서의 그 환경은 매우 유력하였다. 그는 부자였다. 하급 세리들은 보통 불행한 사람들이었고 하층계급에 있었다. 그러나 세리장은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며칠 전에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어려운지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잃었던 한 부자의 영혼을 찾으신 예를 만드시고, 탐욕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탕자와 같이 되지 않게 하셨다.
Ⅱ. 어떻게 세리장이 그리스도의 도로 들어왔으며, 어떠한 기호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까.
1. 그는 예수를 보려는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예수가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게 큰 소문이 났을까(3절). 명성이 드날리는 사람의 소문을 들으면, 용모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어떠한 것일까 하고 상상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 인물을 할 수 있는 대로보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가 이러이러한 위대한 사람을 보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예수를 보려고 힘써서 그가 누구이심을 알아야 하며, 우리는 거룩한 의식으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예수를 보려고 힘쓰면 결국은 예수를 보게 될 것이다.
2. 삭개오는 키는 작고 사람은 많았기 때문에 예수를 보고 싶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시려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어깨 위를 타고 가시지 않았다(교황이 행렬할 때는 사람들의 어깨 위를 타고 간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왕들처럼 열려있는 마차를 타지 않으셨기 때문에 보통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보이지 않으셨다. 그것은 주님께서 굴욕을 받으실 때였기 때문이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다. 그리고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 가리웠기 때문에 예수를 볼 수 없었다. 키가 작은 사람들은 대개 마음이 크고 정신이 쾌활하다. 사울은 비록 머리와 어깨가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보다 컸지만 어느 누가 사울보다는 차라리 삭개오가 되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키가 작다고 해서 그의 키가 조금이라도 더 크기를 생각지 말자.
3. 삭개오는 자기의 호기심을 좌절시킬 수 없어서 세리장으로서의 근엄성을 생각지 않고, 소년처럼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보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주님을 볼 수 있는 유리한 적당한 수단을 이용할 것이며, 고난과 반대를 물리치고 주님을 보기 위하여 수고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보기에 자기가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보기에 적당하도록 자기의 키를 높일 수 있는 모든 이점을 이용할 것이며, 자기에게는 그러한 필요조건을 구비하지 못했다든지 키가 작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 것이다. 비록 난쟁이 라도 실망하지 않고, 좋은 도움을 받아 높은 목표를 세우고, 높이 도달할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삭개오를 보시고, 더 가까이 아시기 위하여 내려오라고 부르심과(5절) 그 부르심의 효력(6절).
1.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자청해 가셨다. 삭개오가 자기 집에 가서 정성을 다하여 접대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니 주님께서는 어디를 가시든지 당신의 위로를 지니고 다니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의 환대를 가지고 가신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사람을 대하실 때에 마음을 탁 열어놓으시고 당신을 환대할 마음이 생기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뽕나무를 우러러보시고 삭개오를 보셨다. 삭개오는 그리스도를 보려고 와서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의 눈에 뜨이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키는 작지만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삭개오에게 너무도 큰 광명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바에 비하면 너무도 고귀한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삭개오를 자애로운 은총으로 보호하고, 그의 기대한 바에 능가하는 일을 하셨으며, 처음에는 매우 약하게 용기를 돋우시고, 앞으로도 그를 도우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알림을 받을 것이며, 주님을 보기를 원하기만 하더라도 주님과 대화할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적게 믿는 자들도 보다 더 주님의 신임을 받게 되며, 때로는 삭개오의 경우와 같이 단지 호기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양심이 일깨워져서 그들의 심령이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를 이름으로 부르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자를 이름으로 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삭개오는 나다나엘이 말한 것처럼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8) 하고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보시고, 그를 아셨던 것이다. 주님은 삭개오에게 "급히 내려 오라"고 명하셨다. 그리스도에게 부름 받을 사람들은 반드시 겸손하게 내려와야지 자기들의 의로움에 의하여 하늘로 올라가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급히 내려와야 한다. 지체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삭개오는 주저한다고 안 될 것은 아니었지만 급히 내려왔다. 삭개오는 그는 훌륭한 손님을 자기 집으로 환영할는지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자기 집에 들리셔서 자기와 함께 한 시간이나 2시간 머물겠다 하심을 알았으니 빨리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라"(계 3:20).
2. 삭개오는 자기 집에 그런 놀라운 광명이 임하였음을 몹시 기뻐했다(6절). 그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 삭개오가 그리스도를 자기 집으로 영접함을 주님을 자기의 심령 속에 영접하는 표시이며 증거였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급히 해야 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에는 즐겁게 맞아들여야 한다.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시 24:7). 우리는 모든 선함을 가져오시는 주님을 즐거이 영접할 것이며, 그는 영혼을 점유하고 계신 분이시며 영원히 흐르는 즐거움의 샘터를 열어 놓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내게 문을 열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신부와 함께 마음의 문을 열면 용서를 받는다는 말도 있다(아 5:2, 3). 삭개오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앞장 선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지금도 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 자신처럼 여기시던 그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Ⅳ. 그리스도와 삭개오 사이에 이러한 다정한 대화를 보고 백성들은 반대가 심했다. 마음이 편협하고 남의 탈을 잡기 좋아하는 유대인들은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 하였다. 죄인의 집, 그러면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었는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들을 찾아서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여리고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삭개오는 더 큰 죄인이라 하였다. 그러한 죄인과는 더불어 말할 사람도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가시는 것을 책망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 이유는,
1. 삭개오는 세리였고, 세리의 대부분은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세리가 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모두 거리로 또는 세평에 따라서 정죄함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각 사람이 따라서 심판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비록 세리장은 죄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과 마찬가지로 그가 지금도 나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세리장의 과거의 생활이 나빴다고 하더라도 그의 현재의 마음은 선하다는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회개할 여유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회개할 여유와 기회를 가지고 있다.
3. 세리장이 현재도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에게로 가시는 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죄인에게 상처를 받을 위험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에게 선을 행하시려는 큰 희망을 가지고 가셨다. 의사가 병자를 내놓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러나 잘한 일을 나쁘게 해석하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Ⅴ. 삭개오는 이 때까지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참회하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임을 증명해 준다(8절). 세리장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으로 삼는 바리새인처럼 자기가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자기가 행한 선한 일이 자기의 믿음과 회개가 진실됨을 증거하였고, 자기의 결심이 어떻다는 것을 여기서 선언한다. 그는 일어서서 이를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보고 수근거리는 사람들이 보고 또한 들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믿는 동시에 회개하였음을 "입으로 시인했다." 삭개오는 섰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 맹세함에 있어서 성실하게 신중히 또한 엄숙하게 함을 표시한다. 그는 백성들(이들은 그의 심판관이 될 수 없었음)을 향하여 그리스도 곧 주님께 말씀드렸으며, 법정에서 진술하는 것처럼 서서 하였다. 우리가 행하는 선은 주님께 해야 하며, 주님께 호소하고, 우리 자신을 주님께 입증하고, 모든 우리의 선한 목적과 결심을 성실하게 주님께 아뢰올 것이다. 삭개오는 그의 심령의 변화(이것이 회개이다)가 일어났음을 그의 생활 태도의 변화로 나타냈다. 그의 결심은 회개 후에 마땅히 할 의무였다. 그는 자기의 결심을 강조함에 있어서 어떤 경우에나 그리스도를 위함이었다. 우리도 이렇게 함으로써 회개의 진실성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1. 삭개오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까지는 자기 자신을 위한 보물을 쌓아 가며 자기자신을 해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결심하기를 장차에는 모든 일을 할 때 그것으로 남을 위하여 선을 행하기로 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나이다. 그는 내가 죽을 때에 유언으로 내 소유의 절반을 주겠나이다" 하지 않고 "지금 이것을 주겠나이다" 하고 말했다. 삭개오는 아마 그리스도께서 전일에 다른 부자 관원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을 때에 관원이 그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주님과 갈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마 19:21) 들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속으로 말했다. "나는 주님의 말씀에 곧 순종하겠다. 이제까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들을 구제하되 이때까지 이행하지 못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소유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결심했다. 이것은 신앙심과 자비심의 사업을 위하여 떼어낼 재산으로서는 매우 큰 것이다. 유대인들은 흔히 말하기를 매년 사람의 수입의 5분의 1을 신앙적인 용도로 바치는 것이 아주 정당한 일이라 하였으며 이를 율법으로 명하였다. 그러나 삭개오는 훨씬 더 나아가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는데, 그러려면 그는 모든 낭비하는 비용을 절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절약해야만 그의 여분의 재산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우리가 좀더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하면 우리는 보다 자선을 베풀 수 있을 것이며, 적은 것으로 자족할 수 있으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삭개오는 그의 회개의 결실로써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게 된다는 사실을 알자.
2. 삭개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정직하고 정당하게 소유한 것이 아니고 얼마는 부정당하고 불법한 수단으로 취한 것임을 자인하고, 이러한 부당한 수단으로 얻은 것을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다시 말하면 세리로서의 직무에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 잘못한 일 곧 정해진 세금보다 더 받은 것이 있으면 그에게 사 배를 갚겠노라"고 약속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이 도적질하였을 때의 배상하도록 된 율법이다(출 22:1).
(1) 삭개오는 자기가 잘못했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세리로서의 그의 직분은 정부의 비위를 맞추도록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시키는 악행을 할 기회를 주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일반적인 죄과를 자인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범한 죄악을 반성하고, 또한 세상에서의 사업과 직업 관계로 많이 괴롭힘을 받는 부정한 일에 대하여 반성한다.
(2) 삭개오는 잘못 고소함으로써 악을 범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특별히 세리들에게 경계한 세리들의 유혹이였었다(요 3:14). 세리들은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 모든 것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과장해서 혹 어떤 사람에 대하여 악의를 품고 있으면 자기들의 원한을 풀을 기회로 삼으려 한다.
(3) 세리장은 생각해 본다든지 장부에 적힌 것을 찾아보아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음을 알아내면 그 4배를 갚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는 "만일 내가 소송을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죠. 배상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어찌할 도리가 없는 경우에는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리장은 자진해서 그렇게 했다. 그 자신의 행동이며 행위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반환함으로써만 그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장은 자기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준다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속죄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위한 강탈을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첫째로 의롭게 행할 것이며, 그리고 나서 자비를 베풀 것이다. 우리의 것이 아닌 것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자선이 아니다. 정직하게 들어오지 않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모든 빚을 갚지 않고 또는 악행을 하여 얻은 것을 보상하지 않았을 때도 그것을 우리의 재산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Ⅵ.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회개를 시인하시고 가납하심과 동시에 주님께서는 또한 삭개오의 집으로 손님으로 가시는데 대한 사람들의 비난을 친히 혁명하셨다(9, 10절).
1. 삭개오는 이제는 한 행복한 사람이 되었음을 선언 받았다. 이제 삭개오는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 왔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게 되었으며 정직하고 자비스러우며 선한 사람이 되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회개한 삭개오는 사실상 구원을 받아, 죄로부터 구원받았고 죄의 범행에서 구원받았고,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았다. 구원의 모든 유익함이 다 그의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집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곳에는 주님과 함께 구원이 따라온다. 그리스도는 현재도 또한 미래에도 삭개오처럼 주님을 시인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장본인이 되신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른 것이다."
(1) 삭개오가 한 회개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이제까지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 될 것이며 그의 집에도 복이 올 것이었다. 삭개오는 그의 집으로 은혜와 구원의 수단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이제는 과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그의 가족들에게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도록 가르칠 것이다.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가 있지만"(합 2:9)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자기의 집에서 애정을 베푸는 것이며, 복을 가져오고 구원을 가져오며 그 의가 영원히 있을 것이다(시 112:3).
(2) 삭개오가 자진해서 그리스도께로 왔을 때에 그의 가족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의 자녀들이 주님의 교회의 회원이 되게 되었고, 따라서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으니,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래서 아브라함과의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이 깊어지고 아브라함에게 내릴 복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리들과 이방인들에게도 내려져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삭개오가 믿었을 때에 간수장의 집에 임했던 것처럼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간수장이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간수장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다(행 16:31). 삭개오는 나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한 세리로서 한 이교도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저울대 위에 놓여 있는 셈이었다(마 18:17). 그래서 유대인들은 삭개오와 더불어 말하기를 부끄러워하고 그리스도께서도 그와 말하지 않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삭개오는 자기가 한 참된 참회자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법정에서 정직한 사람으로서 마치 세리와는 전연 딴판인 것처럼 아브라함의 선한 자손이어서 탓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 특히 삭개오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하신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큰 계획과 목적과 일치되는 것이었다(10절). 이와 같은 의론으로 주님께서는 전에도 세리들과 말씀하심이 정당함을 밝히셨다(마 9:13). 이 때에 주님께서는 "죄인을 불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 인간 자손의 통탄할 상황. 이들은 잃어버린 자들이다. 이 말은 인류의 전체 경주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인류의 전세계는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세상이 된다. 그 잃어버림은 한 도시가 반란자에 의하여 반란을 당한 것과 같고, 한 나그네가 광야에서 길을 잃어버림 같으며 병자가 그의 병이 불치의 병일 때와 같고 또는 죄수가 판결을 선고받음과 같다.
(2) 하나님의 자손을 위한 은혜로운 계획. 인자의 오심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다. 주님은 하늘에서 땅으로(긴 여행) 오셨다. 잃어버린 자를(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자) 찾아서 도로 데려가려고 오셨고(마 18:11, 12) 멸망당하고 있고, 파괴되어 잘라버린 상태에 있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고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에게 판결이 선고되었을 때에 그 사건을 떠맡으셨으며, 잃어버린 자들을 하나님과 모든 선한 곳으로 데려오는 일을 책임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이 타락된 세상으로 오셨다. 주님의 경륜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때에" 그 타락한 자를 구원하는 일이었다. 이 경륜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주님은 그 구원 사업에 유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 찾아서 이용하셨다. 주님은 찾을 가치가 없는 자들을 찾으셨다. 주님은 삭개오의 경우와 같이 주님을 찾지 않은 자 또한 주님을 요청하지 않는 자들을 찾으신다.
귀족과 그의 종들(누가복음 19:11-27)
Ⅰ. 이 경우에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기대는 어떠하였을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다(11절). 바리새인들도 이때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리라고 기대했다(눅 17:20).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까지도 그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다 착각했다. 바리새인들은 왕국이 예수 이외의 어떤 다른 속세의 왕자나 권력자에 의하여 이루어질 줄로 생각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이 왕국을 이룩하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주님의 세속적인 화려함과 권세로써 감행하시되 전에 이적을 행하시던 권능으로 하시리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잠깐 사이에 왕이 되실 수 있을 것으로 알았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은 바로 주님의 왕의 권좌가 될 것이라 결론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직접 그곳으로 가고 계시니 얼마 안 있으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왕좌에 오르실 것을 의심치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선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하여 착각할 위험성이 있으며, 왕국을 잘못 이해하고, 이때까지 보류되었던 왕국이 당장에 나타나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Ⅱ. 어떻게 그들의 기대는 좌절되었으며 그 착오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로잡았을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으로 이를 바로잡으셨다.
1. 그들은 주님께서 지금 당장 영광 중에 나타나시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직은 오랫동안 당신의 나라를 공공연하게 세우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한 고상한 사람─가문이 좋은 집안 사람(하몬드 박사가 표현한 말) 같았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고, 나면서부터 하늘나라에 속해 있으시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한 왕국을 받으시려고 먼 나라로 가셨다. 그리스도는 마땅히 하늘로 올라가셔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성령이 흘러나와서 주님의 왕국이 땅 위에 세워지고, 그 전에 주님을 위한 교회가 이방인 세계에 세워져야 했다. 주님은 마땅히 땅 위에 세우신 왕국을 받아 가지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셔야 한다. 주님은 성령이 흘러나왔을 때, 예루살렘이 멸망하였을 때에 돌아오셨다. 이 때에는 친구들과 원수들이 곧 서로 대화하던 세대들이다. 사망에 의하여 없어지고 그들의 가치를 단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의 돌아오심의 주요한 뜻은 우리가 아직도 기대하고 있는 큰 날인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오리라고 기대하는 왕국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하늘로 올라오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셨다(행 1:11).
2. 이들은 기대하기를 주님의 사도들과 수행원(종자)들은 권위와 존귀를 나보다 먼저 받아서 왕자와 귀족들, 추밀 고문관과 법관들이 되어 법정과 도시의 화려함과 우선권을 누릴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되기보다는 주님께서 경륜하시는 바는 그들(사도들과 수행자들)을 직업인들이 되게 하셔서 이 세상에서의 어떤 우선권을 기대하기보다는 세상에서의 일을 충실히 하게 하며, 그들이 할 일거리를 주어 그들 자신이 이를 이용하여 주님을 섬기며 세상에 주님의 왕국을 세우는데 유일한 일을 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전도자의 참된 명예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이렇게 되기를 열망한다면 성인다운 경멸하는 태도로 모든 세속적인 명예를 남의 일처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현재는 자기들이 수고를 하고 남에게 경멸함을 받지만 그 후에는 주님의 왕국에서 주님의 우편에 앉아서 편안하게 즐기게 되리라고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주님의 경륜하심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자기들은 머리에 꽉 차있는 열망에 부풀기보다도 걱정과 근심과 심각한 사려에 잠길 것이라 말씀하셨다.
(1) 사도들은 이제 해야 할 큰 일이 있다. 그들의 주님은 왕국을 받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신다. 떠나시면서 사도들에게 각기 한파운드(므나)를 주신다. 성경의 난외에는 한 므나가 파운드 남짓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받은 모든 은사와 이 세상에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봉사할 수 있게 된 장점과 자격, 또한 어느 정도 낮기는 하지만 사도들과 같은 사명과 자격을 가진 전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비유에서와 같이 차이가 있게 표현된 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보다 겸손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사도들의 영예는 상인의 그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장사를 하기에 많은 재고량을 가지고 있는 일류상인도 아니고 넉넉지 못한 상인의 자격을 가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장사를 하려면 조심도 많이 하고 고통도 많이 받지 않으며 안 된다. 주님이 이 므나를 당신의 종들에게 주신 것은 예복만은 훨씬 못한 화려한 정복을 사거나 훌륭한 마차를 사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기들을 돋보이게 하려하심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책임을 지우시기 위함이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이것은 바쁜 일이다. 장사한다는 말은 잘 표현된 말이다. "너희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떠난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를 세워야 하며, 모든 국가들이 믿고 그리스도를 순종하도록 하며 모든 국가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워지도록 하라.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리라. 이는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행 1:8)." 그리스도께서 열 한 제자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시며 그들에게 열 므나를 주셨다. 주님은 "자 이제 너희는 너희들의 한 일을 명심하라. 그 일을 열심히 시작하고 꾸준히 계속하라. 너희 자신들이 계획하되 사람들의 영혼들을 위하여 너희들의 가능한 모든 선을 행하고, 그들을 모두 그리스도께로 모이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할 일이 있다. 전도자들이 특히 그렇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전도자들도 게으르게도 세례를 받지 않았었다.
[2] 그리스도를 위한 일을 할 사람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에 필요한 은사를 주님께서 주시고, 그 반면에 당신께서 능력을 주시는 자들로부터 봉사함을 받기를 기대하신다. 곧 주님께서는 므나를 주시는 동시에 가서 일하라, 가서 장사하라는 책임을 주신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2:7).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3]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의 할 일을 계속하여 명심해야 한다. 어떠한 어려움이나 반대가 있더라도 그것을 감당할 것이며,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받을 것이다.
(2) 종들에게는 머지 않아 청산해야 될 큰 회계가 있다. 종들은 주님께로 불리운다. 그것으로 위엄을 갖추었던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어떻게 이용했는가를 보여드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한 일이 무엇이며,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무슨 선한 일을 하여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부르시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부지런히 또한 충실히 장사한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사업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열심히 장사하지만 손해를 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를 본다.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더라도 저들을 영광되게 하시리라.
[2] 영혼의 회개는 영혼의 승리이다. 진정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시 결백해짐이다. 전도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대리자이며, 주님께 복음의 그물로 에워싸인 물고기가 무엇이라는 것을 여쭈어야 한다. 곧 어떠한 손님을 주님의 혼인 잔치에 오도록 설득했는지 말해야 한다. 이들은 바로 전도자들이 장사하여 얻은 이익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몇 사람의 종이 말한 좋은 보고와 저들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다. 이러한 좋은 보고를 한 사람이 둘이 있다(16, 19절).
a. 이들은 둘이 다 상당한 이를 남겼다. 그러나 둘이 같은 것은 아니다. 하나는 장사를 하여 10므나를 얻었고 다른 종은 5므나의 이를 남겼다.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보통 그들이 사는 곳에서 복되게 하는 축복을 받고 있다. 이들은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충실하다고 해서 똑같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마 두 종들이 다 충실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은 고통을 더 받고, 다른 종보다 자기 직무에 더 밀접하게 정력을 쏟을 수 있으며, 따라서 일이 더 빨리 진척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축복 받은 사도 바울은 분명히 10므나의 이익 곧 다른 나머지 종의 이익의 배나 남긴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분히 전했기 때문이다.
b. 두 종은 다 자기들의 주님에 대한 의무를 알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주님을 섬길 능력과 기회와 아울러 일을 맡기셨던 것이다. 주여 제가 10므나의 이익을 남긴 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은사의 므나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소득의 모든 영예를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예를 돌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되 찬송을 돌려야 한다(시 65:1). 10므나의 이익을 낸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전 15:10).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한 일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시켜서 하신 일을 말한다(롬 15:18).
c. 두 종은 다 충성과 근면으로 일할 것을 명령받았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17절). 주님은 다른 종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였다(19절).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선을 행한 사람은 이와 같은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다. 잘하자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잘하였다"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잘하였다"고 말씀하시면 달리 무엇이라도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다(창 4:7 참조).
d. 종들은 그들이 한 선행에 비례하여 우선권을 받았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므나을 가지고 장사하러 감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적은 밑천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말씀하지 않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밑천을 이(利)를 남기기 위하여 힘을 썼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일어나기를 순조롭게 하는 사람들은 낮게 시작하기를 기꺼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딤전 3:13). 여기에서 사도들은 두 가지 언약을 받았다.
(a) 사도들이 많은 교회를 세우느라고 고통을 받을 때에는 그들에게 통할하는 만족함과 존귀함을 받을 것이며 교회를 다스릴 것이며, 교회들에게 큰 존경을 받을 것이고 또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중에 큰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은 배나 존경을 받으리라."
(b)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자기들의 세대를 위하여 봉사할 때는 비록 이 세상에서 경멸함을 받고 짓밟히며 또 혹시는 사도들이 당했던 것처럼 치욕과 핍박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저 세상에 가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과 같이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주님과 함께 왕좌에 앉아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게 될 것이다(계 2:26). 하늘나라의 즐거움은 선한 전도자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훨씬 큰 것으로써 한 가난한 장사가 많은 수고를 하여 10 므나를 얻게 되어 10 도성의 장관이 되는 것보다도 더 큰 즐거움이다. 5 므나의 이를 본 사람도 다섯 성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서는 영광의 등급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릇마다 다 같이 꽉 찼다고 해서 크기도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영광의 등급이 이용도의 정도에 따라서 다르다. 둘째, 한 므나를 받은 좋지 못한 결산 보고를 한 사람은 그의 나태함과 불성실로 인하여 저주의 판결을 받았다(20절 이하).
a. 그는 자기에게 위임된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하지 않았음을 시인했다(20절).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사실입니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이를 남기지도 않고 손해를 보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 말은 은사를 받고도 그것을 가지고 선을 행하려고 계획하지 않는 부주의한 사람을 표현한다. 이 태도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사업이 잠겨져 버리느냐 헤엄쳐 나가느냐, 뒤로 물러가느냐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달려 있다. 이런 조심성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왕국 사업에 관심도 없어서 고통도 받지 않고, 손해를 볼 것도 없으며 위험성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선행은 못하더라도 해로운 일은 안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므나를 수건에 싸 두는 종들이다.
b. 나쁜 종은 나쁜 일도 안하고 선한 일도 않았다는 것을 변명 삼아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정당화했다(21절).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헬라어로 "아우스테레"란 말은 날카로운 사람이란 뜻이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나이다." 그는 자기의 주인이 므나를 주면서 이를 남기기를 요구하고 기대할 때에 자기에게 어려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지 않는 것을 거두나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실상은 심은 데서 거두고 주인이 기대한 대로 그가 심은 것에 비례하여 거두는 것이다. 그는 주인의 준엄함을 두려워하거나 그의 기대를 책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속이는 것뿐이었고 달리 변명할 수 없는 그의 게으름을 하찮게 근거없이 변명하려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검사를 받게 되었을 때에 게으른, 자칭 신앙인의 변명은 자기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보다는 수치를 더 드러내게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c. 그의 변명은 그에게로 되돌아갔다.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악한 종아"(22절). 그는 범죄로 인하여 정죄 받을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는 변명하므로 죄를 더욱 악화시켰다. (장사만 했다면 틀림없이 이익은 남았을 것이다) "만일 네가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보는 것은 어렵게 여기었다면 나의 이를 중하게 생각하여 나의 돈을 은행에 예금을 하였더라면 나의 돈 뿐 아니라 이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적긴 하더라도 얼마간의 이익을 있을 것이라"하고 말했다. 그가 원금을 잃고 주인에게 변명을 하는 것이 두려워 장사를 감히 할 수 없었다는 그의 말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변명은 이익이 확실히 보장되는 장사를 하지 않은데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게으른 신앙 고백자의 꾸밈이 그의 게으름을 변명하기 위하여 어떠한 말이나 모양으로 나타나더라도 그 진정한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무관심하고 그에 대하여 냉담한 것이다. 이들은 종교에 대하여 기초가 잡혀 있느냐 기초가 없느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이하게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d. 게으른 종의 므나는 빼앗겼다(24절). 은사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 은사를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은사를 잘못 다루는 사람은 더 이상 신임 받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자기들의 주님께서 맡겨 주신 것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은 사람들이 그 받은 것을 가지고 자신을 섬기는데 왜 고통을 당해야 될까? "그에게서 므나를 빼앗으라." 이 빼앗은 므나는 10 므나를 가졌던 사람에게 주었다. 이미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왜 또 주느냐고 옆에 있던 사람이 반대했을 때에 (주여 저에게 이미 10므나가 있나이다. 25절) 주님은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26절). 이것은 정당한 법이다.
(a) 가장 부지런한 사람과 선행을 하는데 헌신한 사람은 보다 선행을 많이 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보다 높은 범위가 큰 일을 할 지위에 놓여져야 한다. 이익을 낸 사람, 더 이익을 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진다.
(b) 은사를 받아서 갖고 있는데도 마치 그 은사를 갖지 않고 있는 것처럼 아무 목적도 없어서 그 은사를 가지고 선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은사를 빼앗을 수밖에 없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늘이려고 힘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사를 더 주시고, 그 은사를 경멸히 여기는 사람들과 그 은사를 못쓰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은사를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요긴한 경계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셔서 그들이 지상에서의 명예를 탐냄으로써 자기들이 할 일을 경시하다가 하늘나라에서의 행복을 받지 못하게 되지 않도록 하셨다.
(c) 주님의 제자들이 또 한 가지 기대했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유대인의 국가는 즉시 그 나라와 하나가 되고, 그 나라에 순복되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상과 주님의 복음을 싫어하는 일이 다 없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떠나신 뒤에는 완고함과 패역함으로 유대인의 대부분이 빠져 들어가 결국은 멸망하고 말리라고 하셨다. 이 사실로 다음의 기사로 알 수 있다.
(d)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었다"(14절).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려운 처지에 계실 때에 주님을 반대할 뿐 아니라, 당신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시려고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신 뒤에도 유대인이 계속하여 주님을 적대시하고 주님의 주권을 반대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다.
[a]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뒤에 유대인들의 심한 배신 행위와 복음 왕국의 건설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그들의 목을 주님의 멍에에 복중하지 않고, 주님의 주권에도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시 2:1-3; 행 4:26).
[b] 이 사실은 모든 불(不)신앙자들이 하는 말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구원할 것을 흡족히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기들을 다스리시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유일한 왕이시며 그들의 구주이시고 그들이 마땅히 순종해야 될 분이시다.
(3) 주인은 돌아와서 종들에서 선언을 내렸다.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27절). 주인의 신실한 종들이 칭찬 받고 상급을 받을 때에 주인의 원수들에게는 앙갚음을 하고 특히 유대 국민에게는 멸망이 올 것을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복음의 나라를 세우시고 복음 사업의 명성이 드날릴 때에는 주님께서 오셔서 그 유대인들과 회계하시고, 그들이 특히 주님의 왕권을 부정하고 반항한데 대하여 기억하실 것이다. 이때에 그들은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으며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기를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호소했으며, 가이사에게로 갈 것이다. 가이사는 그들의 멸망을 줄 것뿐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하여 조화될 수 없는 원수들에게 복수가 취해진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고, 그들을 끌어다가 주님 앞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유대인들의 싸움에서처럼 많은 죽음을 당하는 일은 어느 전쟁에서도 일찍이 없었다. 주님의 복음과 나라에 대하여 적대시하고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이방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의 승리적 번영을 볼 수 있도록 남아 있는 나라는 이 때에는 헌 쓰레기처럼 버림을 받게 된다(살전 2:15, 16). 그리고 그들의 멸망은 그리스도의 영예와 교회의 평화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이 사건은 완악함을 고집하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어 틀림없이 이로 인하여 멸망될 것이다. 알아 둘 일,
[1]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틀림없이 전부에게 멸망이 임할 것이며, 앙갚음하는 날에는 그들은 모두 끌어다가 주님 앞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들을 주님 앞으로 끌어다가 성인들과 천사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게 할 것이다(수 10:22, 24 참조). 그들은 주님 앞으로 끌어다가 그들이 미워하고 핍박하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영광과 즐거워함을 보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쓰잘 데 없이 변명했던 것이 뒤집히고 자기들이 한 짓에 따라서 선고를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각이 사무엘 앞에서 당한 것처럼 그들을 끌어다가 주님 앞에서 죽이게 된다. 그들이 경멸히 여겼던 구주께서는 옆에 서서 그들이 죽는 것을 보시면서도 본체 만체하실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지 못할 사람들은 다 주님의 원수로 여겨지고 다루어질 것이다.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하나도 그리스도의 원수이거나 그리스도교의 핍박자도 아니고, 적어도 냉소자도 아니라고 하기 쉽다. 그러나 구원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길을 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은사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진노에 의하여 불가불 멸망당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예루살렘의 입성(누가복음 19:28-40)
여기에서 우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말을 타시고 승전한 장군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을 보게 된다. 여기서는 다만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기로 하자.
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셨다. 주님은 그곳에 가시면 당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심령의 매임을" 받아 나아가셨다. 더구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었다(28절). 주님께서는 무리들보다 맨 앞장서서 가셨다. 마치 그 고난의 자리를 기다리고 계시기나 하셨던 것처럼, 가고 싶은 곳이나 가시듯, 경기장에 나가시듯, 권투장에 들어가시듯 앞으로 나아가셨다. 주님께서 그처럼 우리를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죽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능히 할 수 있는 일에서 물러서야 할까?
Ⅱ. 주님께서 죽으시기 조금 전에 예루살렘으로 공공연하게 들어가신 것은 주님의 겸손하심으로나 주님이 당하고 계신 굴욕의 상태로 보나 조금도 모순된 일이 아니었다.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을 보다 들어 나게 하셔서 받으시는 죽음의 치욕을 보다 크게 나타나게 하셨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창조물을 처리하실 자격을 가지셨고 언제나 원하시는 대로 이용하실 수 있으시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 언제나 주님이 우선권을 가지셨고 그 만물을 쓰실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소유인 산에 있는 모든 짐승 또한 집에서 길들인 모든 가축을 위하여 봉사하시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하셔야 할 때가 이르렀을 때에 한 나귀와 망아지를 그 "임자와 주인의 구유"로부터 끌어오라고 사람을 보내셨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당신의 눈으로 살펴보시고 수중에 넣으시고 주관하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귀와 망아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감화 시켜셔서 그것들을 끌어가는 것을 찬성하게 하시되 주님께서 그것들을 쓰실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자 곧 허락하였다.
Ⅴ.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다른 사람의 나귀와 망아지를 끌어오는 주님의 제자들은 이 때까지 처음 당하는 일이라 탐탁하게 생각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섬김을 받으셔야 하고 존귀를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것들을 필요하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끌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Ⅵ. 주님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은 빨리 해야 한다(32절).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찾아야 할 것과 함께 하기 원할 짐승들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스도의 사자들이 사실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에 그것을 가져오도록 보냄을 받았을 때에 그 필요한 것을 가져오는 일은 유쾌한 일이다.
Ⅶ. 주님께서 요긴하게 여기시는 것이 자기들에게는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서 가져오는 주님의 제자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랄 무엇이든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어서 주님께서 섬김을 받으시고 존귀함을 받으셔야 될 때에 즉시 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그들 자신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바치려는 생각도 없는 다른 사람들의 비용을 들여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이때의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나귀새끼를 끌어올 뿐 아니라 망아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깔고 그 겉옷으로 말장식까지 하기를 원했다.
Ⅷ. 그리스도의 승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찬양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님의 제자 전체, 12제자 뿐 아니라 아주 많은 제자가 다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37절). 그리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기쁨의 표시로써 장막절 때에도 이렇게 기뻐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하여 찬양을 돌리게 한 조건이었는가. 이들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 특히 요한복음 12장 17, 18절에 기록된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었다. 새로운 기적과 자비를 받고 감명을 가졌던 사람은 그 일을 늘 기억하게 마련이다.
2. 그들은 어떻게 자기들의 기쁨과 찬양을 표현하였는가(38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였다. 그리스도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의 권위로 옷 입으시고 하늘로부터 평화의 율법과 큰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이시다. 주님을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자. 하나님께서 주님이 형통하게 하시기를 빌자. 주님은 영원히 찬송 받으시리니 그를 칭찬할 것이다. "하늘에는 평화로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시는 일에 평화와 성공을 보내시고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늘과 땅에서 다 찬양이 있을 것인데, 천사들은 말하기를 땅에는 평화로다 하면서 땅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림으로써 기뻐하고 성자들은 하늘에는 평화로다 말하면서 하늘의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맞게 됨으로써 즐거워한다. 이와 같이 땅에 있는 우리들은 하늘의 거룩한 천사들과 교통하여 땅에서의 평화를 천사들이 즐거워하게 되고 땅에 있는 우리들은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기 때문이다(욥 25:2).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땅에서나 하늘에서 다 그리스도께 모든 일에 화해를 이루어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Ⅸ. 그리스도의 승리와 주님의 제자들의 즐거움 찬양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 그 교만한 자들의 경멸적인 태도를 무시하셨으므로 주님께서는 오히려 겸손한 무리들의 찬양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Ⅹ.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든 안하든 주님께서는 찬양 받으실 것이며 또한 찬양 받으셔야 할 분이다(40절). 만일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평안을 중히 여겨서 메시야의 왕국을 찬양하지 않고 잠잠하면 주님께서 찬양을 받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돌들이 곧 소리지를 것에 대한 원수인 거만한 바리새인들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즐거워하는 무리 속에는 그들과 공동행동을 취하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약간의 바리새인들이 있었으며 그리스도는 겸손하기로 유명한 모범적인 분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환호 갈채를 용납하지 않으시리라고 바리새인들은 생각했으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시리라고 기대했다(39절). 그러나 그 환호 갈채는 그리스도의 영예이며, 주님은 다 이 일을 실제로 문자 그대로 이루셨다. 곧 인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찬양하기보다도 욕을 돌리며 주님의 제자들까지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잠잠했을 때에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찬양함을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자손들의 입으로 완전한 찬양을 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다.
예루살렘이 겪을 운명(누가복음 19:41-48)
하늘로부터 오신 특명대사이신 주님은 여기에서 공공연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거기서 존경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배반을 당하러 가신다. 주님은 당신이 친히 걸려 들어가신 독사의 그물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과 이곳을 위하여 걱정하시는 두 실례를 보게 된다.
Ⅰ. 주님은 예루살렘성의 멸망이 가까워 옴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셨다(41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 아마 이 때는 예루살렘성을 다 내려다보실 수 있는 감람산으로부터 언덕을 내려오실 때였을 것이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성의 대부분과 성 안에 있는 당당한 여러 구조물들을 보실 때에 그 광경은 주님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고 그 괴로움은 눈물을 흘리시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게 된다.
1. 주님의 마음은 너무도 온유하셨다. 주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몇 군데 있다. 바로 이곳에서 주님의 조상이 되는 다윗과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울었다. 그러나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전쟁하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에는 가장 용감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얕보지 못할 경우가 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창 승리의 개가를 올리실 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환희에 차 있을 때에 눈물을 흘리셨다. 사람들의 박수갈채나 환호로써 조금도 흥분하시는 분이 아님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기쁜 일이 있더라도 떨리는 마음으로 기뻐할 것이며 마치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승리의 기쁨이란 불행이 닥쳐와서 그것을 흐리게 할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의 슬픔으로 인하여 사라져 버리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 세상에는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 성들이 있다. 그런데 거룩한 성으로 여기어 내려오던 예루살렘보다 더 비참하게 될 성이 없었다. 이 성이 타락되면 온 땅의 기쁨도 퇴화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을까? "저것이 예루살렘 성이로구나, 저기서 내가 배반당하고, 묶이고, 침 뱉음 당하며, 채찍을 당하고 정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을 곳이로구나" 하시며 우셨을까? 아니다. 주님은 친히 주님의 눈물의 참뜻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셨다.
(1) 예루살렘은 기회의 시기를 잘 이용하지 못했다. 주님께서는 우시며 말씀하시기를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 하였도다"라고 하셨다. 복음이 너에게 전해질 때에 네가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에 의하여 너에게 구원이 주어졌을 것인데, 만일 내가 마침내 결심하고, 너희 평화에 속한 것이 무엇인 줄 알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너희의 영적이며 영원한 복을 얻는 길을 따랐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하는구나" 하셨다(44절). 주님의 말씀하시는 태도는 무뚝뚝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가 알았다면! 오! 네가 복음을 약간이라도 받아들였더라면.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시 81:13; 사 48:18)이라는 말을 청종하였더라면" 하시며 한탄하셨던 것이다. 혹은 만일 네가 말라 가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듯이 잘 알았더라면 너를 위하여 얼마나 행복했었느냐! 또는 "만일 네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을 알고 너 자신을 위하여 울었더라면 나는 너 때문에 울기보다도 기뻐했을 것이 아니냐"고 하셨을 것이다. 여기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멸망이 임박한 예루살렘을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화평에는 거기에 종속된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화평이 이루어지는 방도, 화평이 제공해 주는 것, 화평의 복을 받게 되는 조건 등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화평에 속해 있는 것들은 우리의 현재와 장래의 행복에 관계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실제로 화평을 적용함으로써 잘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2] 우리의 화평에 속한 것들을 알고 또 선한 목적으로 이해하려면 한때의 권고 받는 시기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풍성하게 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우리에게 전해질 때─곧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 하시고 우리의 양심이 가책을 받아 각성하게 될 때에는 우리가 보다 좋은 사람이 되라고 권고 받는 시기이다.
[3] 자기들의 권고 받는 때를 오래 동안 무시해 내려온 사람들이 만일 드디어 곧 최후에 그들의 눈이 열리면 스스로 결심하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11시에 포도원에 온 일군도 거절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4] 은사의 방법만을 무리들이 기쁘게 여긴 것은 놀랄 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치명적인 것은 기회의 시기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화평의 조건들이 그들에게 보여졌지만 그들은 이를 무관심하게 여긴다. 그것들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들은 "받을 만한" 때와 구원의 날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저 정신차리지 못한 채로 지나쳐 버리고 허송해버리고 만다. 그 때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눈먼 자가 없고, 화평한 일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처럼 큰 형벌이 돌아오는 것은 없다.
[5] 복음의 은사를 경멸히 여기는 죄와 어리석음은 주 예수에게 큰 고민이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도 큰 고민이 된다. 주님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잃어버린 영들 곧 회개하지 않고 그들의 멸망의 길로 곤두박질하는 자들을 보신다. 주님은 그들이 그대로 계속해 살다가 죽지 않고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2) 예루살렘은 멸망의 날을 피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화평에 관한 일은 이제는 그들의 눈에서 가리어지고, 멀지 않아 없어질 것이다. 그 뒤에도 복음은 제자들에 의하여 그들에게 전파되었다. "이스라엘 온 집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화평이심을 정녕 알게 하였다(행 2:36)." 그래서 많은 무리들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유대 나라와 그 지도자들은 꼼짝도 않고 불신앙 태도를 가졌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혼미한 영을 주셨던 것이다(롬 11:8).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너무도 싫어하고 반대하였으며, 몇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그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이적(회개한 바울의 경우와 같이)이었으며, 이러한 이적을 일어나서 저들이 그 천벌을 받을 몽매함과 완고함을 단념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화평에 관한 일은 특별한 사람들의 눈에서는 가리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늦다. 그러므로 그들은 멸망되기로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분명한 결과로써 올 멸망을 주님은 내다보시며 예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자. 위대한 구원을 무시함은 흔히 한 사람에게 일시적인 심판이 내리는 것인데 주님께서 예언하신 지 40년이 못되어 예루살렘에 이런 심판이 내리었으니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1] 로마인들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참호를 파고, 주위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그 주민들을 나가지 못하게 가두었다. 요세푸스는 이에 관련하여 기록하기를 티터스는 아주 빨리 예루살렘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한 성벽으로 달려 올라가서 주민들이 도망칠 길을 모두 막아버렸다고 기록해 놓았다.
[2] 로마 군사들은 예루살렘 성내도 완전히 점령했다. 티터스는 그의 군사들을 명하여 예루살렘을 파일구고 3개의 탑을 빼놓고는 경내 전부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요세푸스의 유대인의 전쟁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예루살렘성 뿐 아니라 시민들을 땅 위에 눕혀 놓고(어린것들도 함께) 잔혹한 살인자들에 의하여 살해했다. 그리하여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권고의 날을 몰랐기 때문이다. 다른 도성과 국가들이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Ⅱ. 사람들 앞에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주님의 열정. 예루살렘이 오래지 않아 파괴될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이라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더럽히는 것들을 깨끗이 하셨다. 주님께서는 곧장 성전으로 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셨다"(45절). 이에 의하여(비록 성전에 대하여 원수처럼 나타내셨고, 대제사장를 앞에서는 주님이 하신 일이 범죄라 할 수 있겠지만) 주님께서 성전의 공납품이나 보물들을 거룩한 물건이라 하여 숭배하는 제사장이나 다른 누구보다도 성전을 참으로 사랑하는 분이심을 나타내셨다. 성전을 정결케 함은 그 보물이나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엄함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이유를 말씀하셨다(46절). 성전은 기도하는 집, 곧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하여 구별해 놓은 집이다. 장사꾼들은 사기적인 매매를 함으로써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기도하러 온 사람들에게 소란을 피우는 일이니 제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2. 주님께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성전을 가장 잘 이용하셨으니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이었다(47절).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교회의 부패적인 행위를 추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복음전도를 장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주님께서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신 일을 여기서 살펴보자.
(1) 성전을 다스리는 자들이 얼마나 주님을 대항하여 짖궂게 굴었는가. 그들이 주님께 위해 가하려고 얼마나 기회와 구실을 찾기에 힘썼는가(47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 그리고 산헤드린 위원들, 이들은 다 주님을 잘 접대하고 또한 백성들에게도 주님을 수종들도록 권해야 할 사람들인데 "주님을 죽이려고 꾀했고" 또 죽이었던 것이다.
(2) 보통 백성들은 주님을 얼마나 존경하였었는가. 그들은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었다." 주님은 주로 시간은 촌에서 보내셨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전도하지 않으시다가 성전에서 하시니까 더욱 존경하여 열심히 주님의 전도에 참석하여 주님의 말씀 듣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주의하여 들어서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주석했다. "모든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주님의 편이 되었다"고.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반항하는 자들이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는 말을 아주 적절하게 이유를 밝혀 준다. 주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만일 자기들이 주님에 대항하여 난동을 부린다면 백성들이 달려들어서 항거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때가 이르기까지는 주님을 보호해 드리는 일반 백성들에게 관심을 쏟으셨다. 그러나 주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 대제사장의 위력이 일반 백성들에게 미치어 주님을 그에게 넘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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