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집신을 몇 켤레나 닳았느냐? 고 물었는데 제자는 왜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물었을까요?
고려말 무학 차초는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받기 위해 당대의 고승 나옹 혜근을 찾아갔습니다. 나옹선사는 원나라에서 여러 선생에게 수행을 배우고 높은 훗날 고려의 왕사에 오른 당신을 대표하는 선승이었습니다. 그러니 무학에게 수행을 배우고 훗날 고려의 왕사에 오른 당시를 대표하는 선승이었습니다. 그러니 무학에게 이 만남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자신의 수행을 시험받는 자리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나옹선사는 불법도 경전도 아닌 듯밖에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집신을 몇 켤레나 달았느냐? 먼 길을 걸어온 노고를 묻는 평범한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선문답에서는 이런 평범한 질문 하나가 주행자의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살피는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무학은 망설이지 않고 되물었다고 전해집니다. 집신이 닳고 안 닳은 것은 그만두고. 스님께서는 지금 어디서 오셨습니까?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얼마나 고생했는지보다 지금 이 순간의 본질을 되묻는 답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만남이 말 한마디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무학은 이후 나옹의 산맥을 잇는 대표적인 승려가 되었고 훗날 자신의 선종 계보에서도 나옹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훗날 무학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어 고려 말의 선맥을 조선 초기까지 이어갑니다.
이 짧은 선문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묘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사람이 예전에 나에게 어떻게 했는데 하며 지나간 일에 마음을 붙잡아 둡니다.
불교에서는 과거를 잊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나간 것에 붙을려 지금의 마음까지 놓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아직 내려놓지 못한 낡은 짚신 한 켤레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불교 설화 이야기와 함께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