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5.木. 흐림
과꽃.
어느 글에서인가 서유석의 노래 타박네를 듣고 있으면 슬픈 생각에 발등부터 젖어드는 느낌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았다. 그래서 새삼 서유석의 타박네를 들어보았다. 누군가가 또 그랬다. 이연실의 찔레꽃은 참 슬픈 노래라고. 그래서 또 이연실의 찔레꽃을 들어보았다. 사실 이연실의 노래 중에는 슬픔을 드러내놓고 외치는 찔레꽃보담 활달을 가장하고 있는 목로주점이 더 슬프다. 쏟아지는 눈물보다는 미소 속에 숨어 있는 눈물이 우리 감성을 깊숙이 자극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봐도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나 김원중의 ‘직녀에게’만큼 나를 슬프게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고래사냥이 ’75년도에 발표되었고, 그 때 우리들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안주삼아 목이 터져라 어깨동무를 한 채 이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직녀에게는 ’86년 처음 방송을 타고 흘렀고, 우리는 역시 막걸리를 마시다 취하면 허공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두 노래의 공통점은 한 번 부르기 시작하면 계속 불러야 한다는 점이다. 노래를 멈추고 나면 그 뒤의 침묵을 무엇으로도 메우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감성을 들쑤시는 서정의 기점은 1965년 8월 15일 초판을 박아 낸 국민학교 음악교과서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35쪽에 나와 있는 조금 느리게의 ‘과꽃’은 가사도, 곡도, 부르기도 왜 그리 슬프게 느껴지는 노래였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느 가을 날 과꽃을 보고는 그 화사함에 조금 실망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처음 본 과꽃은 붉고 화사한 송이가 제법 큰 꽃이었다. 나는 과꽃이 소식이 없는 누나처럼 조그맣고 애잔한 꽃일 거라고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봉숭아꽃.
홍난파 선생이 이 노래를 작곡할 무렵 첫 소절인 ‘울 밑에 선 봉선화야 ~’ 이 부분을 골똘히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음악이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음을 받아 적었다는 일화를 꽤 오래 전 어느 조간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빼어난 작품이나 훌륭한 인물 곁에 액세서리 모양 장식용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만들어 붙여진 수식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도무지 풀리지 않던 글 대목이, 막혀서 미뤄두고 있던 시구절詩句節이 어느 순간 영화의 자막처럼 눈앞에서 흘러내렸던 경험을 나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면에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오직 그것만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몰입하고 있으면 우리가 평소에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경우가 있다. 홍난파 선생도 그런 지경에 이르러 대낮에 길을 가다 하늘로부터 울려오는 환청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불후의 명곡인 봉선화가 탄생을 했다.
노래에서처럼 봉숭아꽃은 대개 담장 밑이나 장독대 주변, 우물가에 붉거나 연분홍으로, 또는 흰 색으로 곱게 피어 있던 꽃이다. 너무 흔하고 친밀해서 그다지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지는 못했지만 내 어린 기억은 온통 봉숭아꽃 천지다. 잘 익은 봉숭아꽃 씨방을 손가락으로 스쳐주면 까만 씨가 툭툭 튀어 나오는 것이 재미있어서 옆에 핀 채송화를 다 밟는 줄도 모르고 화단을 둘러가며 장난을 치고 놀았다. 봉숭아꽃은 아무리 보아도 꼭 순이를 닮은 꽃이다.
채송화.
울안에 정착한 꽃 중에서 이만큼 따돌림을 받은 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꽃을 대상으로 써 낸 詩가 수백 수천이겠지만 채송화를 노래한 시는 거의 보지를 못 했다. 도회지에서 관상용으로 일부러 가꿀 만큼 화려하지 않아서일까 도시에서는 정말 보기 귀한 꽃이 되어버렸다. 어린 날 시골집 화단 가장자리나 면사무소 입구에 빙 둘러가며 피어 있던 채송화는 강렬하게 눈에 띄지는 않을지라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주는 생명력 강인한 수줍은 꽃이었다. 사실 나도 채송화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은 나이가 한참이나 먹은 뒤이었다. 다행히도 ‘꽃밭에서’라는 동요에서 채송화를 봉숭아와 나팔꽃과 함께 한 꽃밭 속에 나란히 심어 주었다. 심성 맑은 눈에는 채송화가 아름답지 않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나팔꽃.
어효선 작사, 권길상 작곡 ‘꽃밭에서’ 라는 동요가 있다. 어렸을 때는 이 노래를 명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불렀었는데 언제나 일 절만 불렀기 때문이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 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을 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같이 살자 그랬죠
이 절은 과꽃의 누나처럼 아빠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다. 이 절 가사를 한참 들여다 본 후에 일 절을 노래 부르랴 하면 서서히 가슴이 젖어온다. 가슴이 젖어오는 이유는 또 있다. 삼십여 년 전 인도 원산지인 연보라색 나팔꽃을 인도 어느 시골길에서 함께 여행 중이던 인도 처녀로부터 선물을 받아 책갈피에 끼워놓은 채로 지금껏 책장에 보관해오고 있어서 이기도 하다. 나팔꽃이 예쁜지 우아한지, 연보라색이 신비한지 매혹적인지 잘 분간이 가질 않지만 나에게는 입때껏 쉽지 않은 꽃이고, 단순치 않은 색깔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 과꽃, 봉숭아꽃, 채송화, 나팔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