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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식의
' 클래식은 영화를 타고 '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The Sense of an Ending >
기억은 우리 입을 통해 그려지는 이야기입니다.
찬란하게 빛나던 그 시절, 과연 우리의 기억은
진실일런지요?
여기,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 첫사랑에 얽힌
서로 다른 기억, 바로 그 뒤에 숨겨진 충격적 진실을
기억의 '왜곡' 과 '간극' 이라는 명제로 풀어낸...
정치(精緻)한 철학적 깊이와 서스펜스를 갖춘
드라마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가 있습니다.
영화는 한 통의 편지와 함께 시작되지요.
주인공 토니(짐 브로드밴트 분) 는 무뚝뚝한데다
문명의 이기를 하찮게 여긴 나머지 휴대폰조차
없을 정도로 고지식합니다.
하지만 그는 워커 홀릭의 이혼한 아내 마가렛
(해리엇 월터 분)을 대신해, 임신한 싱글 맘인 딸
수지(미셀 도커리 분)와 산모 교실에 동행하는 등
나름 최선을 다하죠.
어느날... 어느덧 노년이 된 그 앞으로 예기치 못한
편지가 도착합니다.
그 안에는 잊고 지냈던 첫사랑 베로니카(프레야
메이버 분)의 어머니 사라(에밀리 모티머 분)가
자신에게 약간의 돈과 친구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유산으로 남겼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죠.
토니는 유언장에 언급된 일기장을 받기 위해
헤어진지 40년을 훌쩍 넘어선 베로니카(샬롯
램플링 분)를 수소문하기에 이릅니다.
그 과정에서 잊고 있던 청춘의 순간들을 하나씩
되찾아 갑니다만... 우여곡절 끝에 재회하게 된
두 사람.
세인트 폴 대성당과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한눈에
조망되는, 과거와 현재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어우러지는 맨체스터 브리지에서 토니는 실로
오랜만에 베로니카와 만나게 되죠.
추억 속 그저 눈부시게 아름답기만 했던 베로니카는
이미 그늘진 얼굴에 슬픈 표정의 할머니가 되어
있었고...
젊은 시절 빛나는 훈남이었던 토니 역시 완고하고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할아버지로 변해 있습니다.
"어디에 가 앉을까!"
"어디?"
"나, 무난한 사람이잖아..."
그렇게, 미술관 내 카페로 옮긴 토니와 베로니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기억과 다시금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뒤엉켰는지 생각하고
있다며, 첫사랑의 기억을 되찾고 싶은 토니는
조심스레 얘기를 꺼내지요.
"반지 보니까 결혼한 모양이네? 난 이혼했어..."
이어 어머니 일은 정말 유감이라며, 그녀가
토니에게 남겼다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건을
어렵사리 얘기해보지만 그건 이미 태워버렸다며
차갑게 답하는 베로니카...
"적어도 그게 뭔지는 알 권리가 있잖아!" 라며
토니는 항의해 보지만, 첫사랑의 기억을 지우길
원하는 베로니카는 야속하기 그지없는 말을
뱉어낼 뿐입니다.
"법적(legally)으로는 있지(yes). 하지만
도덕적(morally)으론 아니야(no). 난 우리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
더욱이 베로니카는 또 다른 편지 한 통을 토니에게
건넨 채, 그를 현재의 기억과 전혀 다른 과거를
맞닥뜨리케 하며 크나큰 혼란에 빠트리게 하지요.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는 토니가 전처
마가렛에게 과거사를 털어놓는다는 설정으로
젊음의 시절을 줄기차게 소환합니다만...
이처럼 문득 날아든 한 통의 편지로 동기화되고
있는 영화는 어긋난 기억으로 휘청거리는
토니의 일상을 오롯이 따라갑니다.
하여 첫사랑 여인의 변심에 나름대로 의연하고
너그럽게 대처했다고 기억하는 토니가 실제론
'불편한 진실', 즉, 비열한 행동을 했던 과거의
자신과 마주치는 순간순간을 섬세하고도 은밀한
시선으로 조명하고 있지요.
토니는 그토록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아니 잊고
싶었던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960년 영국 런던 중심부의 고등학교 시절, 토니와
엘렉스 등 문학과 역사를 좋아했던 단짝 친구들
셋이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지성과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카뮈와 니체를 사랑하는 자못 철학적인 친구
에이드리언이 전학을 옵니다.
토니와 그의 친구들은 전학오자마자 까다로운
역사 선생님의 질문을 철학적으로 맏밪아친
수재 에이드리언과 금방 친해지며 함께 어울려
다니게 되지요.
토니는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믿어지는 확신이다" 라고 한
에이드리언의 말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토니는 자신과 에이드리언, 둘 모두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베로니카를 대학교 파티에서
마주치게 되죠.
한눈에 베로니카에게 빠져든 토니는 집으로 초대를
받아 주말을 그녀의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오빠인 잭 역시 캠브리지에 다니는 수재 집안으로,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유한 계층의
자제임을 알게된 토니...
그는 베로니카의 가족들이 곤혹스런 질문을 해대며
아랫사람 다루듯 대하는 것에 감정을 상합니다만,
자기를 상냥히 대해주는 그녀의 엄마 사라에겐
호감을 느끼게 되지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에는 토니 혼자였습니다.
늦은 아침을 해결하러 냉장고를 뒤지다 마주친
사라는 딸이 산책을 나가면서 토니가 그냥 자도록
내버려 두라고 했다면서도, 베로니카에게 너무 끌려
다니지 말라는 묘한 말과 함께 토니를 사뭇
어리둥절하게 만들지요.
토니가 베로니카의 집에 도착해서 방을 안내받은 후
사라에게 알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되는 시퀀스와,
베로니카가 굿나잇 키스를 하며 그를 유혹하는
귓속말을 남기고 그녀의 방으로 가버리자 혼자서
욕정을 해소하는 장면,
그리고 사라가 헤어지는 토니의 볼에 농밀한
키스를 하고 남편 몰래 손인사를 건네는 장면들...
이들 씬들은 토니가 품은 사랑과 욕망의 감정을
은밀한 매타포적 시선으로 비추어 내며, 이후
벌어질 비극적 파멸의 운명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베로니카와 결국 하룻밤을
보내는 사이로 발전하며 사랑을 이어갑니다만...
어느선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그녀에게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토니는 베로니카와의 감정적인
갈등에 부딪히며 결국 헤어지고 말지요.
졸업을 앞둔 어느날, 토니는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베로니카를 좋아하게 됐는데 사귀어도 되겠냐고
이해를 구하는 편지를 받습니다.
"베로니카와 난 늘 함께였지. 얼마 후에 내 친한
친구랑 사귀더라고!"
이처럼 감정이 크게 상할대로 상한 토니는 그래도
애써 화를 억누르며,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편지를 보내지요.
"그래, 친구들아! 나 상관말고 잘해봐."
그러나 그것은 토니의 왜곡된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편지 내용이었을 뿐으로...
실제 토니는 이성을 잃은 채, 저주와 악담으로
가득찬 편지를 보내 버렸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6개월 동안의 졸업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토니에게 친구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요.
" 베로니카는 가까이 다가가기엔 문제가 많다.
그러니 그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녀의 엄마를
만나 봐 " 라는 토니가 보낸 편지 속 메시지를
떠올리며 에드리안은 사라를 찾아 갑니다만...
막상 사라를 만난 그는 그만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사라 역시 매력적인 에이드리언에게 빠져 들며
이 둘은 그만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서고 맙니다.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와 최악의 형태로 결별을
하게 되고 동시에 사라와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노산 후유증으로 인해
장애아로 태어나게 됩니다.
항상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던 에이드리언에게
화불단행식으로 한꺼번에 밀려든 불행...
아직 젊기에 감당하기가 너무도 버거웠던 간통과
불륜, 장애아라는 삼중고 속에 휩싸였던 에이드리언.
자신이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고뇌하던 그는
친구 토니에게서 받은 저주의 편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지요.
영화는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 기억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실을 섬뜩하리만치 조용한
톤으로 일깨워 줍니다.
토니는 베로니카가 준 옛 편지를 읽고 그제서야
본인이 저지른 엄청난 잘못을 깨닫고, 자신이 갖고
있던 기억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단편적이었는지를
실감하며 뼈져린 자책과 회한에 빠져듭니다.
하여... 펜싱과 클라리넷, 문학과 역사, 철학을
사랑했던 친구이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명징하게 직시하고 스스로를 결정할 수
있었던, 너무도 멋있었던 친구 에이드리언을
떠올리게 되지요.
진실의 기억과 마주한 후 비로소 가족과 사랑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토니는 출산을 앞둔 딸
수지에게 자신의 잘못을 스스럼없이 고백하고,
딸 역시 그러한 아버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감독 리테시 바트라는 ‘기억’ 이란 것이 얼마나
왜곡과 각색, 그리고 의도치 않은 착각으로
가득한, 허술한 추억의 한 조각인지를 정치하게
추적하고 있지요.
양파 껍질을 벗기듯 인물의 생을 벗겨 나가며 ,
과거를 저미고 또 저며서, 마침내 새로운 그를
재탄생시키는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영화는 '알 수 없는 것' 과 '말할 수 없는 것' 에 대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이른바 '나이 듦과 기억
의제' 에 관한 독창적이면서도 냉철한 통찰력으로
곱씹습니다.
또한 행간의 의미를 읽게 만드는 '치밀한 형식' 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죠.
클래식 음악인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 으로부터
도노반, 카운트 파이브와 닉 드레이크, 그리고
트로그스의 음성으로 실리는 올드 팝에
이르기까지...
영화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속 화면을 우아하게
감싸주는 사운드 트랙들은 잠들어 있던 추억을
아련히 떠오르게 해줍니다.
런던 교외의 전원마을 클래펌에 사는 토니가
빈티지 카메라 숍으로 출근하기 전, 아침에 차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장면에 흐르는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C장조 Op.46의 7'.
영화 속 유일한 클래식 음악인 이 곡은
토니의 여유로움과 평온한 일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지요.
이어 1960년대를 대표하는 록 밴드 카운트 파이브의 ‘Psychotic Reaction’ 은 파티에서 토니와
베로니카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풀어지며,
꿈 많은 스무 살, 혼란스러운 청춘 시절을 보내는
두 남녀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도노반의 'A gift from a flower to a garden'
앨범에 수록된 'There was a time',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한 이 곡에 맞춰, 토니와
베로니카, 두 청춘 남녀는 새번강변의 공원에서
사랑의 마음을 확인하는 첫 데이트를 즐기지요.
그리고 토니가 베로니카의 초대로 그녀의 집에
처음 방문한 장면에서 흘렀던 닉 드레이크의
'Time has told me'...
서정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애잔함의 선율은 아직
서로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젊은 두 남녀의
아슬아슬하고도 설레는 감성을 의미있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이드리언의 죽음 후 토니와 친구들이
단골 술집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
삽입되었던, 록 밴드 트로그스의 'With a girl like
you' 또한 아스라한 회상의 감성을 불러 일으키고
있지요.
1. 영화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The Sense of an Ending > 예고 영상물
https://youtu.be/gw3Zbzj5NoQ
2. 영화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The Sense
of an Ending > '40년 만에 재회한 첫사랑' 영상물
https://youtu.be/hzIutxC2Ldw
서로 다른 기억과 재회하는 그와 그녀를 향해
뒤늦게, 그리고 한꺼번에 오는 것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는 한 남자가 살아온
기억의 오류와 그 역사를 재구성해내며, '보는
재미' 를 넘어, '읽는 재미' 까지 선사해줍니다.
우연히 잘못 배달된 도시락으로 인해 싹튼 '남과
여의 교감' 을 담백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2013년
장편 데뷔작 < 런치 박스 > 로 제66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관객상을 수상한 바 있는 리테시
바트라 감독의 2017년 연출작 이지요.
이 영화는 영어권 최고 문학상이자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 수상에 빛나는 줄리언 반스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심리 스릴러 작품
입니다.
전후 영국이 낳은 가장 지성적이고 재치 있는
작가로 꼽히는 줄리언 반스는, 역사와 진실,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진지하고도 독특한
시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흥미롭고도 이끌림있는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고 있지요.
'숨겨진 진실 속의 기억이란 과연 뭘까' 에 대해
관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예감(?)하게 만드는,
하지만 놀랍게도 그 예감과는 너무도 어긋난
충격의 반전이 드러나는 영화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는 빛바래지기 마련일 터,
감독 리테시 바트라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기억을
토대로 미스터리한 사랑의 서사를 절묘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는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을 순차편집으로
엮어냈죠.
이는 같은 장소에서 젊은 날의 토니와 현재의 그가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 보는 감성을 직선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장치로 작용하며, 40년 전후로
엇갈리며 풀어지는 토니의 감정 변화를 잘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로 시작되는
원작처럼, 영화는 '학창 시절에 대한 관심이나
그리움은 거의 없지만 고교 시절은 기억한다' 는
내레이션으로 그 막을 열어가죠.
스치듯 지나간 대사가 후반부 엄청난 무게감으로
되돌아온다고 할까요...
토니의 고교 학창 시절을 그리는 영화 초반부,
역사 수업 중 주제를 관통하는 대사가 이어집니다.
“모르는 걸 알 순 없습니다.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이죠”
“무슨 일이 일어났었다는 사실만을 알 뿐입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생성됩니다."
“지적 가식으로 진실을 대신할 순 없죠”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매튜 구드 분)과 학생들은
'승자의 기록이자, 또한 패자의 자기 기만' 이기도 한
'역사' 에 대해 이처럼 자못 현학적인 토론을
나누고 있습니다.
감독 리테시 바트라는 원작 소설의 핵심에
충실하면서도 영화적 감각을 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며, 이른바 '기억과 윤리' 에 대한
단상을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지요.
원작이 토니의 내면적 독백에 중점을 두고
서술된다면... 영화에서는 전 부인 마가렛과
딸 수지와의 관계를 더욱 비중 있게 그려내며,
토니의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으로 살려내고
있습니다.
마가렛은 이혼한 남편 토니의 첫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인내심있게 들어 주며,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베로니카를 꼭 만나 보라고 친절(?)한
조언까지 해주고 있지요.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는 예순살이 된
토니로부터 출발해 자유롭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있습니다만...
마치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사실로서의 과거와
조작된 기억이 현재의 토니의 삶에 불쑥불쑥
끼어들며, 불균질한 시간의 이동, 또 편집의 리듬이
원작과 다른 긴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지요.
영화는 그렇게 원작자 줄리언 반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1부와 2부, 처음과 끝,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긴밀하게 연결되며,
소설이 취할 수 있는 궁국의 형식미를 보여준
원작과는 보완적이면서도 확실한 배신을 택하고
있습니다.
하여 왜 영화가 '편집의 마술', '시간 여행의
예술' 이라 불리는지 흔연스레 깨닫게 해주죠.
감독은, 찬란했던 청춘의 두 배우와 달리 세월의
흔적이 절절히 스며든 노년의 회한과 감회를
처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두 배우의 모습을 빛과
어둠처럼 갈려지게 비추어 냅니다.
서로 다른 기억과 재회하는 토니와 베로니카,
두사람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 숨겨진 간극을
차분하게 좁혀가며 말이죠.
딱히 새로운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토니...
그는 학창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테드 휴즈,
T.S.엘리어트와 딜런 토마스의 시, 그리고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을 읽고 토론을
즐겼던 문학도였습니다.
이처럼 책과 섹스, 그 모두에 굶주려 있었으며,
성적표에 연연하는 아나키스트였던 젊은 시절의
초상 '토니 웹스터'(빌리 하울 분) 를 노년의
토니 웹스터는 회고하지요.
"모든 정치·사회 제도가 썩어 빠진 걸로 느껴졌으나,
우리는 쾌락주의적 혼돈에 기울어 있을 뿐, 다른
대안은 생각하지 않았다.
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었겠는가!"
정리 정돈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유서도
작성해 놓은...어느새 60대의 대머리 아저씨가 된
토니는 종종 얘기합니다.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사람들은 술의 특정
성분 덕에 머리가 빠지지 않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중간 밝기의 밤색 머리에,
파란색 안경테 너머 청회색 눈동자와 빠르지만
자제력 있는 미소를 지닌 매력녀였던 첫사랑
베로니카를 토니는 이렇게 추억하지요.
" 전 세계를 통틀어 남자가 사랑할 수 있고, 그런
와중에도 목숨을 저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여자가 있다면 바로 베로니카였다. "
'라이카 카메라' 를 좋아했던 베로니카, 그리고
환갑이 된 토니는 아마도 그녀가 선물했을 라이카를
주로 취급하는 자그마한 빈티지 카메라 상점을
운영하고 있죠.
시인을 꿈꿨던 스무 살의 토니는 역시나 스무 살의
베로니카에게 '우리 관계의 미래를 생각해 본 적
있냐' 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사진작가를 동경했던 그녀는 "관계에 어떤
미래가 꼭 필요해?" 라고 반문했지요.
현저히 늘어난 흰머리가 갈래갈래 뒤섞여 있는
베로니카, 그녀의 얼굴은 20대와 60대를 동시에
오가는 듯 보입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눈을 내리깔고 생각을
입 밖으로 내놓지 않는...키가 크고 조용했던 친구
에이드리언 핀(조 알윈 분).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던 토니와 그의 단짝들
모두 카뮈와 니체를 즐겨 읽었던, 진중하면서도
지적인 에이드리언의 관심과 인증을 받고 싶어
애썼죠.
그토록 에이드리언을 선망하던 토니였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던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친구
에이드리언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두 사람과 멀어지게 됩니다.
얼마 뒤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지요.
여러 장의 현란한 스카프, 넋이 나간 듯한 태도,
그리고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왠지 모르게
몽환적인 예술가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토니는 그렇게... '사라진 추억', 그리고 '진실의
기억' 속의 인물들과 다시금 마주해 갑니다.
3.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7번 c단조, Op.46.
https://youtu.be/HJn8jLhrP-4
슬라브 민요나 민속 무곡에 관심이 많았던 드보르작.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집에 영향을 받았던 그는
브람스의 권유에 따라 이 '슬라브 무곡'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엔 4손을 위한 피아노 곡으로 완성되었으며,
후에 관현악으로 편곡해서 널리 알려졌고,
결과적으로는 드보르작의 출세작이 되었지요.
프리안트, 폴카, 폴로네이즈, 둠카 등과 같은 민족적
색채가 짙은 무곡의 리듬을 다채롭게 살렸으며,
또한 소박한 표현이 대담한 전조 속에 이루어져
있습니다.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집' 은 Op.46과 Op.72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각각 8곡씩 모두 16곡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제1권(작품 46)은 1876년에, 제2권(작품 72)은
1886년에 각각 출판되었습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작품 46의 7번 c단조' 는 4분의
2박자 리듬을 가진 바로크 춤곡 '지그(Gigue)'의
일종으로,
관현악 버젼에서는 현이 저미어 가는 리듬에 실려서
오보에와 파곳의 선율이 목가풍으로 전개되지요.
4. 도노반(Donovan)의 'There was a time'
https://youtu.be/9HjkCtfzWso
5. 닉 드레이크(Nick Drake)의
'Time has told me'
https://youtu.be/ZYugrlV8KUM
- 李 忠 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