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에필로그 - 영광 후의 함정
전우애
맹호사단 재구대대 내 다음 다음 후임 3대 대대장 노태우 중령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재구대대장 경력을 늘 자랑스러워 했다. 또한 초대 대대장인 나를 사석에서 내 무공에 대해 경의를 표한바 있을 정도였다. 내가 한국군사학회와 군사평론가협회를 창립, 용산 전쟁기념관에 사무실을 내고 전역 후 10여 년 동안 군사발전에 기여하고 있을 무렵 노태우의 묵시적인 후원이 이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오직 나 박경석의 시비(詩碑) 서시(序詩), 조국(祖國), 추모시(追慕詩), 3점이 건립돼 있다. 당시 한국 문단의 원로 시인을 비롯해 많은 후보 작품이 있었으나 모두 심사에서 물러나고 박경석의 시작품 3점만 전쟁기념관 시비로 선정됐다 특히 심사 기준에 시가 탁월한 문장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시를 지은 시인이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이 전제 조건이었다. 이 경우 또한 노태우 대통령의 배려인듯싶다.
재구대대 대대장 전, 후임 간의 전우애가 보여준 멋진 경우가 아닐까?. 노태우 장군은 전역사에서 '육군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근무처를 맹호사단 재구대대장 시절' 임을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강재구 소령의 거룩한 살신성인의 연(緣)은 조국 대한민국을 보위하는 전사(戰士-warrior) 들의 귀감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다.
영광 후 불행의 질곡
채명신 장군에 의해 직접 기획한 맹호5호작전, 맹호6호작전 두 주요 작전에서의 대대장 임무를 완수하고 정글 속 지휘소 생활을 마감했다. 꼬박 정글 근무 13개월 동안 더위와 모기 베트콩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1966년 11월 하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선을 타고 부산항에 상륙, 고국에 들어서자 몇 가지 경이로운 사실이 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첫째, 모든 국민이 예상 밖으로 베트남전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한국군의 연전연승에 환호하고 있었다. 베트남전 참전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국군의 참전을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추앙의 경지까지 이르고 있었다. 더구나 곳곳에서 "다음 대통령은 채명신 장군이야" 하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기뻐하기는 커녕 암울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6,25전쟁시 이승만 대통령을 능가하는 6.25 초전 한강방어의 영웅 일명 5성장군으로 불리던 김홍일 중장이 하늘 찌르는 인기 탓에 느닷없는 예비역 편입에 이어 자유중국(현 대만) 대사로 유배 아닌 유배를 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 나의 예측은 적중하였다. 채명신 장군의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개선 귀국했지만 모든 국민이 원하던 4성 장군에 오르지 못하고 2군사령관을 끝으로 예비역에 편입되면서 스웨덴 대사로 유배 아닌 유배를 당했다. 그 후에도 계속 귀국하지 못하고 그리스 대사, 부라질 대사를 전전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10여 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암흑의 족쇄
그뿐인가, 그 족쇄는 채명신 장군에 이어 나 박경석에게까지 미치는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재구대대의 분전 상이 조선일보 간부 기자인 선우 휘 작가가 재구대대 11중대에 상주하면서 보낸 귀국 리포트가 조선일보 지상에 연속 게재되기 시작하면서 재구대대 명성과 함께 내 이름이 오르내리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더구나 유명 외신까지 재구대대 분전상이 연이어 보도되자 그 여파로 정글 속에서 내가 집필한 진중수기(陳中手記) '十九番道路' 와 '그대와 나의 遺産' 두 권의 에세이 가운데 '十九番道路'가 베스트셀러가 돼 있었다, 수입 인세는 전액 파월 가족 후원단체에 자동 기부했다.
KBS 1TV 에서는 '1967년을 빛낸 사람'으로 선정돼 박경석 중령의 출연 인터뷰 영상이 보도 되는 등 박경석의 이름은 계속 베트남전의 후광을 입으며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되고 있었다. MBC TV에서도 베트남전 대하 실록 '그날' 이 독서 토론 시간에 독점 방영되었다. 이같은 TV 출연은 내가 자청한 것이 아니라 모두 육군본부 정훈감실의 공식 절차에 따랐을 뿐이었다.
한편, 영화가에서는 1966년. 신성일, 고은아 주연 영화 '소령 강재구' 가 제작되어 상영관마다 만석을 누리는 호황이 계속되었다. 당시의 교과서에는 내가 기초한 '소령 강재구 이야기' 가 일제히 게재되었다. 더구나 육군본부에서는 대회의실 전체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참모총장 김계원 대장이 나 박경석에게 베트남전에서의 두 번째 을지무공훈장을 달아주며 베트남전의 영웅으로 명명함에 따라 시샘과 질시의 눈은 늘 내 주위를 따랐다. 뒷말도 무성하였다. "박경석이 혼자 싸웠나?" "재구촌 만들어 쇼만 했다지" 등등. 그 뒷말은 사실상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 혼자 싸운 게 아니라 부하 장병이 싸웠고 재구촌은 평화 지대 유지를 위해 베트콩에게 쇼 했기 때문이다.
그 엉뚱한 유명세 영향 탓에 나는 중령, 대령, 준장 시절 합계 무려 10회 16년의 진급 탈락을 겪으며 결국 육군준장 8년 차에 만기 전역했다.
원래 장교 진급은 선발된 진급심사위원에 의해 합숙 심사하기 때문에 무공, 근무성적 등의 영향은 받지 않을 경우가 있었다. 오히려 기록이 좋을 경우 진급에서 누락되는 폐단이 있어 늘 뒷말이 무성했다. 특히 민감한 시기에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등 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엉뚱한 방향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2021년 기준, 8년간의 만년 육군준장으로 예편 된 지 40년을 맞이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인고의 세월 16년을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는 자살 직전의 고통을 겪었을지라도 그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작품의 소재가 무궁하여 작가의 길에서 계속 작품을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험난했던 길이지만 정의롭게 걸어왔다는 자긍심도 오늘의 보람이다.
무너지는 박경석의 자존
과거로 되돌아가 1965년 10월 4일 10시 37분의 박경석이 되어 본다. 당시의 10중대장 강재구 대위를 내 자존에 오버랩했다. 그 결과는 내 자존이 무참히 무너진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그 한 발의 수류탄이 내 부하 앞에 날아가고 있다면 나는 강재구처럼 달려가 그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부하를 살리지 못하고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수류탄 반대 방향에 엎드릴 것이다. 그러므로 소령 강재구는 내 부하 중대장이지만 나의 영웅이며 군신(軍神)이다.
아래 사진 3매 위 문장 해당 부분 하단에 크기 조정해 삽입
1966년 4월 5일 발행. 재구대대장 첫 6개월 간의 진중 에세이
1967년 7월 25일 발행. 재구대대장 후반기 진중 에세이 (표지 훼손)
베튼남전 대하실록 그날 (전작 6권)
육군본부 대회의실.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김계원 총장이 귀국한 나에게 두 번째 을지무공훈장 전수
하며 베트남전 영웅으로 명명했다.
1966년 개봉한 영화 '소령 강재구' 포스터
주연 신성일 고은아
1966년, 일간신문 광고
슬픈 전역, 1981년 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