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
최용현(수필가)
1980년대 우리나라 영화계는 이장호와 배창호라는 두 감독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장호 감독은 ‘바람 불어 좋은날’(1980)과 ‘바보선언’(1983)으로, 배창호 감독은 ‘꼬방동네 사람들’(1982)과 ‘고래사냥’(1984)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1985년에는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과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이 각각 서울관객 49만 명과 48만 명을 동원하여 그해 한국영화를 이끈 쌍두마차가 되었다.
‘어우동’은 조선 성종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팜 파탈의 이름이면서, 소설가 방기환이 1981년에 발표한 동명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의 제목이다. 이 영화는 제58회 아카데미상 외국어극영화 부문에 출품되었고, 타이틀 롤을 맡아 열연한 이보희는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대부집 규수 어우동(이보희 扮)은 왕실의 종친 태산군에게 시집을 갔는데, 3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한데다 하인과 시시덕거렸다는 이유로 시댁에서 쫓겨난다. 친정에서도 출가외인이라며 받아주지 않자 어우동은 강물에 뛰어든다. 때마침 좌의정 윤필상(신충식 扮)과 함께 야유회를 가던 기생 향지(박원숙 扮)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지는데, 어우동은 향지로부터 기생수업을 받는다.
타고난 미모에 가무(歌舞)까지 익힌 어우동은 기방에서 남존여비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들먹이는 고관대작들에게 자신의 발가락을 핥게 하는 등 농락을 하는데, 그럴수록 어우동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간다. 그러자,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어우동의 친정아버지와 전 남편 태산군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영의정 정창손의 매제인 어우동의 친정아버지는 고심 끝에 표창(鏢槍)의 달인 갈매(안성기 扮)를 고용하여 어우동을 고통 없이 죽여서 잘 묻어주라고 당부한다. 그때부터 갈매는 숨어서 어우동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데, 어느 날 선비 복장으로 미행(微行) 나온 임금과 어우동이 계곡으로 야유회를 갔다가 널따란 바위에 알몸으로 선 어우동이 자신의 쇄골 사이로 술을 붓고 다리로 흘러내리는 술을 임금이 핥아먹는 것을 보기도 한다.
갈매는 양반들에게 핍박을 받아온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反芻)하면서 어우동에게서 묘한 동병상련을 느낀다. 갈매는 활솜씨가 뛰어난 벙어리 천가(김명곤 扮)와 함께 태산군이 어우동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들을 여러 번 물리치고 어우동을 구해준다. 어릴 때, 갈매는 반가(班家)의 소녀와 사랑을 나누다가 처자의 부모에게 생식기가 잘렸고, 이 장면을 보게 된 천가는 혀가 잘려서 벙어리가 된 것이었다.
드디어 풍기문란죄로 어우동 체포령이 내려지고, 어우동은 서로 사랑하게 된 갈매와 함께 잡혀서 옥에 갇힌다. 성종은 어우동에게 교수형을 내리는데, 때마침 어우동이 탈옥했다는 소식을 들은 좌의정은 어우동이 있는 곳의 기생들을 모두 죽이게 하고 기생 향지를 어우동이라고 속여 교수형을 집행한다. 영의정을 망신시켜서 물러나게 하여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한편, 천가의 도움으로 탈옥한 어우동과 갈매는 동굴로 도피하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육체를 초월하는 영육(靈肉) 합일의 정사(情事)를 벌이고 서로를 칼로 찔러 동반자살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사극 에로물답게 첫 장면부터 물레방앗간에서 어우동이 한 사내와 여성상위 정사 신을 보여주고 그 사내가 자객에게 살해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포도대장(김성찬 扮)이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과 아울러 좌의정이 어우동의 외삼촌인 영의정을 겨냥하는 심모원려 (深謀遠慮)도 함께 다루고 있다. 파격적인 정사 신과 노출 장면 때문에 에로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영화지만, 애써 범죄 스릴러 색깔을 덧씌웠다.
각 인물들의 캐릭터가 스토리에 잘 녹아 있다. 또,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어우동의 새색시시절과 천민 갈매와 천가의 핍박받는 소년시절 영상으로 양반들의 만행을 부각시키면서, 다시 어우동의 조그맣고 연약한 발과 엉덩이로 양반들을 깔아뭉개는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당시 사회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그 때문에 평론가들로부터 영화적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나 싶다.
‘어우동’이 빅 히트를 기록하면서 전국의 나이트클럽에서 한때 어우동 춤이 유행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김문희, 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나왔고, 2014년에는 다시 강은비, 백도빈이 주연한 영화 ‘어우동 : 주인 없는 꽃’이 나왔으나 둘 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보희의 어우동을 능가하는 어우동 영화는 아직까지 없었다.
실존인물인 어우동은 조선 성종 때의 정3품 박윤창의 딸로 본명은 박구마로 알려져 있다.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泰江守) 이동과 혼인하여 외명부 정4품 혜인(惠人)에 봉작되었다. 딸 번좌를 낳았으나 하인과 간통했다는 누명을 쓴 채 쫓겨났다.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자, 따로 거처를 마련하여 여종과 함께 살았다.
미모에 지성미까지 갖춘 어우동은 수많은 남성들을 안방으로 끌어들였다. 세종대왕의 서손자인 방산수(方山守) 이난과 정종의 아홉째 아들 석보군의 서손자인 수산수(守山守) 이기를 포함한 왕족에서부터 사대부,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도 다양했는데, 실록에 이름이 오른 사람만 17명이었다.
풍기문란죄로 의금부에 잡혀온 어우동은 그동안 관계했던 남자들의 이름을 모조리 토설했다. 성종은 왕족인 방산수와 수산수만 귀양 보내고, 나머지 중신들에게는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어우동이 문제였다. 원로대신 정창손이 전례를 들어 귀양을 보내자고 했으나 성종은 극형을 명했다. 어우동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왕실 족보에서도 삭제되었다. 40세였다.
어우동이 5백년 후인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첫댓글 이보희가 어우동을 찍기전 출연했던 영화가 "무릎과 무릎사이" 였지요
80 년대 당시에 굉장히 파격적인 영화였지만
흥행에 성공했고 그 이후에 이 영화를 찍었다고 해요
두 작품 모두. 제가 20 대 초에 본 영화라. 아련하게 되살아 나네요
지금 드라마에 나오는 이보희를 보노라면.. 슬쩍 웃음도 나오고요
세월은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 모습이 보여서.....
오랜 만이네요. 수기 리 님,
'무릎과 무릎 사이'는 제목 자체가 너무 노골적인 그렇고 그런 에로 영화 같아서 안 보았어요.
이미숙이 색기가 흐르는 야한 여자라면 이보희는 은근히 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보희의 '어우동'은 그 시대 상황과도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광고에 나오는 이보희를 보면 세월을 거꾸로 먹는 거 같아요.
불로초를 먹은 건지...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영화 비하인드와 더불어 역사도 알고 가네요.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