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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발행된 장기려 평전 《장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지음,홍성사)에는 장기려 박사의 어원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위키백과>

사진: 장기려박사의 가족
장기려박사의 생애/ 봉사의 삶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 묘지 10평조차 없었다.
그는 언제나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살아왔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그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그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그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했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그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했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그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녘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그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유엔군과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게 되었을 때,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이 평양을 철수하게 되면서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타게 되었다.
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 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다.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서약했다.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한 하나님 앞의 이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그는 초창기 복음병원을 운영할 때 모든 직원의 월급을 식구 수대로 나누었다.
식구 수가 많은 직원이 제일 많은 월급을 받았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있던 장기려는 운전기사와 같은 돈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에 직원들은 '공산당 식 분배 정책'이라며 처음엔 어색해 했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쳐’, ‘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다.
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병원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기려 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키며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 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 외과의사였던 그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자기 월급 이상의 수술비가 나오면 병원을 탈출시켜 주고,
평양 시절 때 그의 부인은 남편이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 가운과 환자복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고 한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을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그 자신은 분단된 조국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둘째 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그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 권유를 거절했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나겠다고......
그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가족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묻자,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부산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들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지난 95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청십자병원에서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그해 성탄절 새벽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비문에는 그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 받는 이웃들의 벗’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간,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칭송 받는 사람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라는 찬사에 한점도 부끄럼없이 평생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했다.
절대 빈곤의 ‘천막 무료진료부터 미래를 내다 본 의료복지 정책인 ‘청십자 의료조합’까지, 그것은 그의 ‘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 했고, 그렇게 살았다.
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
일제 치하 때 의대 입학시험을 보면서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다고 한다.
졸업 후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소유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수련을 받았다.
자신의 서원대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무료 진료소인 복음병원을 개설해 영세민 의료구호사업에 전 생애를 바친 그, 29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이기도 했던 그는 정작 집 한 채 없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다 갔다.
그의 개인적인 외로움을 뒤로 한 채.....
모든 세상의 크리스천들이 장기려 박사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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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가슴에 품고, 한평생 남을 위해 살며, 일평생 그리운 북녁 식구들 얼굴 그리며 봉사하다 떠난 장기려 박사의 삶이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적십니다.
("성자"란 표현은 당사자를 예수 그리스도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통의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훌륭한 모본을 보여주며 비범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의 의미로 사용한 것임.)
<아름다운 기하성총회를 위한 모임>

장기려 /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우리 시대의 성자(聖者)
장기려 선생은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85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였다.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된 선생의 묘비에 새겨진 비문에도 그의 삶이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 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
청년시절 선생이 의사가 되면서 품었던 다짐이 하나 있다.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는 소망이 그것이다. 그 다짐은 한평생을 살며 지켜졌고 실천됐다.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그의 박애정신은 들꽃같은 삶 속에서도 바람에 꺾이는 일이 없었다.
선생은 1932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당시 국내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백병원 설립자) 선생의 수제자로 경성의전 외과에 근무했다. 이때 그는 맹장염을 일으키는 세균에 대한 논문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를 완성했고, 1940년에는 이 논문으로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에는 북한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평양 연합기독(기흘)병원에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해방후 평양도립병원장과 평양의과대학(김일성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하던 중 한국전쟁을 만났다. 둘째 아들 가용(張家鏞·전 서울대 해부학과 교수)씨만 데리고 우역곡절 끝에 월남하면서 그의 제2의 인생은 시작됐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가족과의 생이별이라는 아픔을 안겨주었지만 평생을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며 참의사의 길을 걷게 만든 동기가 됐다.
1950년 12월, 월남 이후 그는 6개월 동안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일했다. 부산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951년 6월에는 영도구 남항동의 제3교회 창고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이를 모태로 복음병원(고신의료원 전신)이 태어났다. 이것은 평생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푸는 의사로서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1958년에는 부산 서구 토성동에 있는 지금의 부산대학병원 뒤쪽에 행려병자 진료소를 차려놓고 3년여 간 봉사하기도 했다.
평생을 박애와 봉사의 삶을 살았던 장기려 선생이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 남긴 업적도 만만치 않다. 1959년 국내 최초로 간에서 암세포를 잘라내는 수술과 이후 간 대량 절제 수술에 처음으로 성공하는 쾌거를 올렸다. 대한간학회는 이 날을 기념해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정했다.
68년에는 정부보다 10년 앞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결성하여 우리나라 의료보험을 앞당기는데 선각자가 됐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모태로 평가하기도 한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취지로 시작한 민간 최초의 의료보험 기구였다. 가난한 환자들이 돈 걱정 없이 치료 받게 해주고 싶은 선생의 노력이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1979년 동양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장기려 선생은 복음병원장(1951~1976년), 청십자병원장(1975~1983년), 부산아동병원장(1976년), 부산백병원 명예원장(1983년) 등 병원장으로 40년, 서울의대 교수(1953~1956년), 부산의대 교수 및 의대학장(1956~1961년), 서울 가톨릭의대 교수(1965~1972년), 복음간호대학장(1968~1979년) 등 대학에서 20년을 일했다.
사랑의 인술 44년, 한평생 가난한 이웃들의 등불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서민적이었다. 초라하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하나,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 그의 인생에는 돈과 명예가 다 부질없는 지푸라기에 불과했다. 말년에는 고신의료원 10층의 24평 남짓한 사택에 거주하며 가진 것 없이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선생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45년을 홀로 살았다. 늘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 했다. 선생을 아는 이들은 그에게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생의 심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그분이 베푼 선행은 헤아릴 수 없다. 걸인이 돈을 구걸하자 현찰이 없어 수표를 줬다는 이야기, 병원비를 내지 못해 발이 묶인 환자에게 몰래 도망가라고 병원 문을 열어준 이야기, 며느리가 혼수로 가져온 이불을 고학생에게 갖다주라고 한 일, 책도둑에게 책대신 돈을 갖고 가라고 했던 일들이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선생은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래 얼마가 필요해'가 아니라 늘 '이것 밖에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세상 사람들은 선생을 가리켜 '바보의사가 아니라면 성자가 틀림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일까. 병원을 운영할 당시 돈 없는 환자들은 일부러 그의 출근길에 쓰러져 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일도 있었다. 돈이 있든 없든 환자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탓이었다. 때로는 돈이 있는 사람들도 돈이 없다며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은 이 마저도 모두 받아들였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이 아니었으면 가능하기라도 했을까.
이런 그의 베품은 안타까운 가족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부인과 다섯 자녀를 북녘에 두고 온 선생은 민족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가족상봉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이 땅의 이산가족들이 모두 상봉을 이룬 후에 만나겠다"며 아내에게는 편지만 보냈다고 한다.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해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갔을 때였다.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될 당시 정부에서 사회 문화계 인사들에게 특별히 가족 상봉을 주선하며 장기려 선생에게도 제안을 한 일이 있다. 애타게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는 함께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라고, 다른 이산가족들과 떳떳이 고향을 찾겠다며 거절했다. 결국은 평생 그리던 아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욕심을 끝까지 버렸다. 개인적 기쁨과 행복조차도 혼자 독점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기려 선생의 이루지 못한 소망은 둘째 아들이 대신 이뤘다. 지난 2000년 8월에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에서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환갑을 넘긴 아들이 50년만에 만났다.)
선생은 통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좀처럼 표명하지 않았다. 1990년 문익환 목사 일행의 방북으로 공안정국이 기승을 부릴 때는 오히려 수많은 지식인들이 움츠려든 것과는 달리 "통일을 위한 용기있고 장한 쾌거"라고 당당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에 자신을 희생한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학생, 문규현 신부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라고 과감히 속내를 털어놨다. 가족을 통해 민족분단의 아픔을 몸소 체험해온 그였기에 그분의 말은 가슴 뭉클하게 하는 호소력이 있었다.
우리곁에 머물다 간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그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던 것은 하나는 신앙심(기독교적 가치관), 다른 하나는 분단과 함께 생이별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었다. 특히 그는 가장 없이 힘들게 지낼 가족들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저렸고, 그래서 병원에 오는 어려운 환자들을 보면 모두 가족 같이 여겼다. 선생 자신이 그 환자들을 잘 돌보면 누군가 자신의 가족도 잘 돌보아 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장기려 선생이 남기고 떠난 말을 되새긴다. "우리 주위 어딘가에 병든 이웃과 가난한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이 우리의 삶과 사회를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그분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선생은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분이다. 그에게는 천한 사람도 없고, 귀한 사람도 없었다. 누구든지 존귀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대하였고, 환자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정을 가졌던 선한 의사였다. 평생 그는 생명을 지키는 일을 의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고, 그것을 실천했다.
장기려 선생은 슈바이처와 같이 비유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무엇이 있다. 슈바이처는 유럽 사람들, 특히 기독교가 저지른 죄를 씻기 위해. 자기 발로, 반은 자선사업 겸 아프리카로 갔다. 그러나 장기려 선생은 6.25라는 동족상잔, 이산가족의 비극을 앉은 자리에서 날벼락처럼 당하면서 그의 인생역정이 시작됐다. 슈바이처에게는 고난의 체험이 없으나 그는 온몸으로 시대의 고난을 체험했다. 인술 하나로 이땅의 고난을 스스로 짊어졌다.
1950년 6월, 한반도에 불어 닥친 전쟁을 피해 내려온 사람들이 누더기가 된 몸과 마음으로 부대끼던 부산. 그곳에서 천막 병원을 열고 무료로 가난한 이웃을 치료하며, 의사 한 번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사람.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다소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며 겸손해 했던 무사무욕의 삶을 실천한 사람.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최고의 외과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집 한 채는커녕 통장에 달랑 천만 원을 남겨 놓았고, 그마저도 간병인에게 줘 버리고 빈손으로 떠나갔던 사람, 장기려 선생.
그가 부산에 남긴 발자취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가치를 깊이 깨닫게 해준다. 그의 삶은 은퇴가 없는 일생이었다. 만년에도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이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세민 환자들을 돌보며, 왕진을 청하는 환자들의 요구를 단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는 가난에 멍든 우리네 서글픈 이웃들에게 소금 같은 존재였다. 서러운 풀잎들에게 한없는 희망을 안겨준 거룩한 영혼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의 인술과 생명, 평화의 정신은 장기려 선생의 전 생애를 엮어간 키워드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를 몸소 가르쳐준 그를 나는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성자(聖者)'라 부르고 싶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를 선생과 함께 살아온 우리로서는 큰 기쁨,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평생 간직하여야 할 것 같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천막병원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44년을 부산에서 사랑의 인술을 베풀다 1995년 12월 25일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로 장기려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났다. 눈부신 아침햇살처럼 빛나는 아름다움만 영원히 남긴채.
<아름다운 기하성총회를 위한 모임>
마석 모란공원의 장기려박사 묘소 / Photo By Skyraider
무소유의 자유인 장기려
[경향신문] 2007. 1. 4 / 박홍규 칼럼 ㅣ 영남대교수·법학
불현듯 욕심 없이 산 장기려가 생각난 것은 새해에 어른이랍시고 등장하는 이들이 모두 욕심쟁이들인 탓일까? 그러나 요즘은 일
반인은 물론 기독교인들도 장기려를 잘 모른다. 장기려와 평생을 함께 한 함석헌에 대한 높은 정치적 평가와 달리 장기려에 대한
평가는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 신앙인이라는 점에 주어져 있고 심지어 그 정치적 보수성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인으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한 보수주의자인 장기려는 그 어떤 진보주의자보다도 사실은 더욱 더 근본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평생 도운 점은 물론이고, 서울대 교수직을 비롯하여 그에게 주어진 모든
영예를 거부하고 오로지 빈민을 위한 병원의 원장으로서 봉사했고, 심지어 병원 직원들이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록
했으며, 교회 장로로서 교회의 모든 직원 월급을 동일하게 지급한 점, 나아가 정부가 의료보험을 시작하기 10년 전에 가난한 환자
들을 위해 의료보험조합을 시작한 점 등이 지금 우리에게는 더욱 돋보인다.
그리고 그가 종사한 병원이나 교회나 대학의 대형화, 전문화, 자본화, 권력화를 철저히 경계하고 일제 때의 신사참배는 물론 해방
후 미국 자본주의에 굴복한 점을 철저히 비판한 그의 목소리는 다시금 보수적인 정경유착이 기승을 부리는 지금에야말로 더욱 절
실하게 들려온다.
최근 장기려에 대한 방대한 평전을 쓴 지강유철의 연구에 의해 새로 밝혀진 만년의 ‘종들의 모임’ 활동은 그가 제도권 교회를 떠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하게 따른 신앙인이라는 점에서 비신도인 나도 놀랍다. ‘종들의 모임’이라는 이름도 장기려가 붙인
이름이고, 사실 그 실체에 대해서는 인터넷은 커녕 그 어디에서도 전혀 알려진 바 없다.
교단 이름도, 교회 건물도, 목회자 관사도, 교회 규칙도, 홍보활동도, 역사기록도 없이 2000년 동안 160여개 나라에서 선교해온 그
목회자들은 떠돌이처럼 살면서 자신들을 원하는 집에서 아이 어른 함께 모여 예배를 올려왔다. 그곳에 참석한 어느 목사가 그곳
사람들이 아무도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는 이유로 돌아가자 장기려는 “예수가 넥타이 매었느냐”고 질타했다.
그곳 목회자는 어떤 신학교육도 받지 않고 목사니 신부니 하는 직함도 없이, 그냥 방을 빌려주는 사람들의 집에 살면서 스스로 밥
하고 청소하며 세탁을 하고, 이동을 할 때에는 최저가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성경에도 없는 십일조라는 헌금은 물론 어떤
사례도 거부하며, 신도가 스무 명을 넘으면 다시 모임을 나누어 교회의 대형화가 아니라 중형화도 거부하고 철저히 작은 것을 추
구했다.
또한 새로이 목회자가 될 젊은이를 위해 늙은 목회자가 밥하고 청소하며 세탁을 하고,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신도도 그렇게 대접하
며, 목회자가 죽으면 모든 재산을 형제들에게 분배한다는 것도 우리의 목회자 숭배, 아니 절대 독재 풍토와는 정반대인, 그야말로
섬기는 자의 전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도한다는 점이다. 바로 장기려 자신 말이 아니라 삶으로 빈민을 섬
긴 또 한 사람의 예수였고, 게다가 그런 자신의 우상화를 철저히 경계하여 만년에 자기의 동상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저주
를 받으라”고 욕했다.
사실 하늘 아래, 역사 위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동서고금의 뛰어난 사람들의 삶이나 책을 아무리 읽어도 진실, 사랑, 정직, 소박,
봉사 그리고 모든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는 자유 외에 달리 인간답게 살 길은 없다.
그래서 그 무소유와 섬김의 삶으로 보여주지 않는 어떤 권력과 권위의 말장난도, 그것이 전 대통령이든 현 대통령이든 추기경이든
총회장이든 종정이든 누구든 간에, 또는 진보든 보수든 또 뭐라고 떠들든 간에,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간에 나는 믿지 않
기로 결심했다. 아, 그리운 무소유 자유인 장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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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혜의 집중탐구 - 장가용박사의 눈으로 본 장기려박사 출처: <업코리아> 2003. 9.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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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성인(聖人) 장기려 박사 - 의사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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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남한혈육 장가용 박사를 만나다.
아들 장가용 박사를 통해 우리시대의 성인(聖人) 장기려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장가용 박사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의대 교수를 지내다 현재 명륜동 자택에서 생활을 하신다. ‘부인 윤 순자’씨는 자택건물 내 ‘윤안과’를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아버님 탓인지, 장가용 교수의 삶 역시 지극히 검소한 삶이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어렵게 찾아간 명륜동 자택을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장기려 박사의 사진이었다. 거실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장기려 박사의 사진을 마주한 자리에 장가용 박사가 지난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찍은 가족사진들이 이산의 아픈 세월을 가슴에 품은 채 웃고 있었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한 켠엔 장기려 박사의 사진이 놓여있고, 맞은편엔 이북에 계신 부인과 자식들의 사진이 놓인 것을 보고, 마주하고 있는 사진에서도 거실이란 공간이 마치 38선처럼 그들을 함께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게 아닌 가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참 의사로써의 장기려 박사의 삶.
장기려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등으로 칭송된다.
1950년 부산에 피난 온 그는 1951년 6월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 3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으로 이 때부터 그는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의사로서 일한 그때가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복음 병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 외과를 창설한 일도 이 지역 의료계를 위한 기여라 할 것이다.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학장, 서울 카톨릭 의대 외과학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다. 이 당시 부산, 경남지방에는 의료기관이 많지 않을 때였으므로 복음병원은 이 지역 보건증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
1968년 5월 13일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이 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표어로 창립하여 ‘진실, 사랑. 협동’의 청십자 정신으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어 21년간 가난한자의 힘이 되어 주었다.
장가용 교수님이 의사가 된 것도 아버님의 권유 때문 이었는지요?
아니에요. 고등학교 때는 농과대학 쪽으로 가서 농공학을 공부하려 했어요. 아버님과 절친한 전정희 교수님이라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전염병학의 권위자이신데, 우리 아버님과 의형제를 맺으셔서, 어릴 때부터 삼촌하고 불렀었습니다. 그분이 의과대를 가라고 하셔서 의대를 갔습니다.
권유로 가셨네요. 자라실 때 아버님께서 ‘참의사’로써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의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신 줄 알았어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님을 보고 외과 의사를 안했죠. 왜냐하면, 아버님하고 피난을 같이 오긴 했지만 귀거를 같이하고 지낸 것은 전부 해서 2년이 채 안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부산에서 1년을 귀거를 같이한 적이 있었는데, 가족을 이북에 놓고 오셨으니까 마음의 고통이 큰데다 표현을 잘 안하시고 그러셔서인지 협심증이 있으셨어요.
그 관계로 밤에 잠을 잘 못 이루셨는데, 새벽에 겨우 잠이 들면 1시간 쯤 후에 누가 와서 똑똑 두드려요.
환자가 온거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땐 외과의사가 아버님 혼자이시니까, 뒤척거리다 겨우 잠이 들자마자 다시 정신 차려 환자를 봐야 하는 일을요.
그게 어디 쉬운가요.......
그런 걸 봤으니......, 자기시간이 전혀 없죠,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웃으시며) 게다가 나는 아버님처럼 신앙심이 돈독한 것도 아니었어요.
해서 나는 내 시간을 갖는 일을 하겠다고 해서 해부학(기초)을 하게 됐죠.
장박사님이 처음에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만드셨잖아요. 그런 것이 어떻게 보면 의료보험조합의 효시죠?
그 부분은 청십자에도 알려지지 않았고, 우리 아버님의 본 뜻을 잘 깨닫지 못한 분들 같은데....... 아버님이 하나님과 ‘평생 없는 사람을 위해 무료봉사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무료병원을 하려고, 복음병원을 시작했어요.
병원이 커지면서 침대 수도 늘고, 직원이 느니까 운영비가 많이 들잖아요. 그래서 수입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무료병원을 할 수 없어서 ‘환자들에게 경비를 받자’ 이렇게 된 겁니다.
결국, 자선(charity)병원으로 하려고 했던 것이, 차차 병원이 커지면서 그렇게 안됐거든요. 고민을 하고 있는 가운데, 최지철 선생이라고 스위스에 갔다 오신 분이 계세요. 그분하고 논의를 한 끝에 ‘의료보험을 하는 것이 좋겠다.’ 해서 시작이 된 거죠. 그게 청십자의 시작이죠.
그러다가 청십자 노동조합도 생기고 그랬었죠. 최근 의약분업 관련해서 우리가 바르게 가고 있다고 보세요?
운영이 제대로 안되서 그렇지, 사회주의 계통으로 나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죠.
경제는 다릅니다. 경제는 다르지만 사회는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모든 평민들, 일반인들한테 고루 돌아갈 수 있고, 그게 또 진정한 삶이 아닐까 싶어요.
제 아버님은 좀 독특한 분이시죠. 재물에 욕심이 없으셨거든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만약에 ‘6.25가 없었다면 아버님이 그렇게 되셨겠냐?’ 싶어요.
‘성공의 비결은 찬스와 노력’이라고 하는데, 우리 아버님한테 찬스가 온 것은 6.25죠. 우리 아버님처럼 의료행위를 하려면, 남미나 아프리카 등 그런 난민이 있는 곳으로 가야죠.
6.25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 동족들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당하니까 우리 아버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게, 기회가 된 것이죠. 6.25는 어떻게 보면 기회죠. 아마 불특정다수에게 보내는 의료행위가 북에 있는 내 가족을 누군가가 보살피리라고 강한 믿음을 가지셨을 겁니다.
아들이 본 아버지 장기려 박사의 의사로서의 삶은 어찌 보면 시대가 만들어낸 성인 같은 의사지만 온전하게 따라가기보다는 얼마만이라도 참 의사로서의 삶을 닮아가기로 한다면 그 자체로 보람이라는 생각이셨다.
장기려 박사의 “참 가정인”으로서의 삶
이 시대의 조국의 분단과 이데올로기적 대립,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산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북에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일생동안 외로이 사셨다. 이성에 대한 연민의 정이 왜 없었겠는가?
여러 사람들의 재혼 권유가 있었으나 “결혼은 오직 한 번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40년이 넘도록 홀로 사셨다. 언제 재회할지 모르는 현실에서 너무나도 지고지순한 그분의 결혼관은 오늘의 교훈이 된다.
결혼의 신성함이 파괴되고, 분별없는 이혼과 재혼이 반복되는 오늘을 기준으로 할 때 그분의 “사랑학” 자체가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하면 할말은 없다.
하지만 장기려 선생의 결혼관처럼 “단지 육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영적인 결합”이라고 깨닫는다면, 또한 참된 사랑이 무엇이지를 느낀다면 새롭게 결혼하는 3쌍 중 한 쌍이 이혼하는 통계수치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남북대화가 있을 때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며 두고 온 아내 만나기를 소망했을 그 심정을 헤아려 본다면, 그가 혼인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장기려 박사의 결혼관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혼인의 신성함과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장기려 박사의 가족적 삶은 지극히 평범하다. 한국 남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는 것처럼.......상당히 무뚝뚝하셨단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오셨지만 그 가족에 대해서도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한 가장의 삶을 사셨다. 북에서 온 아내의 편지에 뭔가 쓸 말을 찾기보다 그저 “잘 있다”는 한마디로 대신하며 내가 여기서 잘하면 북에서 누군가가 우리가족을 도울 것이란 막연한 생각과 기도로 일관하셨다고 한다.
장가용 박사님 어머님에 대한 얘기를 좀 해 주세요.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사상이 이상하다’고 오해를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가족이 10식구였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여섯. 그렇게 하면 모두 열이거든요.
열 식구가 있었는데, 6.25때 갈라졌단 말이죠. 우리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만 이리 내려오고, 나머지 여덟은 이북에 계셨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가 부자 집 딸이에요. 외할아버지가 내과 의사이셨어요. 일제시대 외과의사는 돈 많이 벌었어요.......
아버지는 평범한 의사니까, 어머니가 외가 집에 갔다 올 때는 꼭 택시타고 오고 뭘 많이 가져왔어요. 외할아버지가 잘 해 주셨거든요.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와 결혼해서 고생하신 여자죠.
지난번에 평양 가서 동생들한테,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하고 결혼해서 망한 여자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부자집 딸이니까 일본 음악학교에 입학이 됐을 테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그때 피아노를 하셨으니까 공부도 많이 하시고, 음악에 소질도 있고 했었는데, 결혼을 하셔서 아무것도 못하셨죠.
아이만 여섯을 낳았어요. 스물둘에 결혼해서 2년 터울로 애를 여섯을 낳았으니, 서른넷에 단산을 하셨다구요. 서른여덟에 6.25가 난 거에요. 아버님과 사신 것이라고는 어찌 보면 4년 밖에 안되요.
지금 아흔둘이신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동생들더러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아버님 만나서 망한 여자라며......(.여섯 자식중에 가장 자신과 잘 통했다는 장교수의 어머님에 대한 사랑은 아버님의 애증으로 바뀌어버린다.)
이산가족 상봉 때 여쭤 보셨어요?
어머닌 뭐 그냥 웃으시죠.
우리 어머닌 손이 다 터졌었어요. 평양이 춥다구요. 그래서 손이 늘 터진 손가락이고, 다 갈라지고 엉망이더라구요. 여덟 식구가 대한민국에 있고, 이북에 우리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 남았다고 생각해보면, 애들 데리고 여자 몸으로 어떻게 대학공부를 다 시킬 수 있겠어요. 여자들 일이라고 해 봐야 뻔하죠, 대학공부를 어떻게 다 시키겠어요.
어려서 피난 오셨을 때가 언제였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였었죠.
그러면 주로 어디에 계셨어요?
친척집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병원에 일 하시고.......
아버님 밑에 자라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아버님께서 어떻게 교육을 시키셨는지?
우리 집안의 내력이라고 할까, 내버려 둬요. ('Let Them Do.')
전혀 말을 안 하세요.
생활속에서 실천으로 보이시면 보이셨지.......
남을 너무나 배려하면서 삶을 사셨기 때문에, 피붙이라곤 딱 하나있는 아들에게 소홀 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요.
문제가 되는 것이 윤리관인데요. 다 똑같이 배려하는 거죠.
물질은 뭐 풍부해서 국민소득 만달러 시대, 이만달러 시대를 바라본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정신문화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남을 배려하는 경우가 전혀 없어요.
저희 아버님이 저를 그렇게 가르치신 건 아닌데, 배려하는 것은 집안의 성품인 것 같아요.
아버님이 늘 말씀하시던 것 하면 어떤 것이 기억나세요?
늘 기도하는 얘기를 들었죠. 아들에 대해서도 달리 타이르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어요.
결혼은 어떻게 하셨는지?
연애결혼을 했어요. 그랬더니, 한번은 들켰어요. ‘저희 엄마하고 똑 닮은 여자’라고 얘기를 하시더군요.(그리워하던 아내를 거울에 비쳐 본 듯 며느님에 대한 강한 긍정이었네요)
어머님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일단 아버님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아버님은 그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으셨고, 제가 형제 중에 어머니랑 제일 친했던 것 같아요.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이 있습니까?
정해놓은 것은 없어요. 아버님이 몸소 보여주신 것이죠. 신앙적인 삶도 그렇죠.
주위에서 재혼을 많이 권하셨다고 들었는데.......종교의 힘이었나요?
그렇죠. 종교의 힘이죠.
온 가족이 함께 사는 평범한 삶처럼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
역사의 소용들이 속에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일편단심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승의 편법과 윤리를 따르기보다 더 높은 가치를 바탕으로 삶을 꾸려왔고, 사랑을 하셨다.
장기려 박사의 실향민으로서의 삶
1994년 제 2차 고향방문단 일원으로 확정됐으나 교환 합의가 무산되었을 때 그가 겪은 실망과 아픔은 필자에게도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두고 온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의 아픔을 이해할 만했다.
민족의 분단과 가족과의 생이별을 동일시하면서 가족과의 재결합과 통일을 함께 염원했다. 그는 결코 북한을 비난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뜨거운 동포애와 연민의 정으로 그들이 통일조국의 품에 안기기를 바랬던 것이다.
실향민과 관련해 아버님께서는 한번도 못 만나 보신거죠.?
2000년에 북에 갔었어요. 큰형님은 돌아가셨고, 여동생 둘과 남동생을 만났어요.
여동생 장성용은 평양 암 연구소에 있어요. 물리학을 했는데, 핵물리를 해서 암세포를 연구합니다.
우리 몸에 암세포를 죽이는 세포가 있어요. ‘natural killer cell’이라고. 그걸 연구하더라구요.
평소 아버님께선 실향민의 아픔을 어떻게 달래시던가요?
외로우셨죠. 그래서 병도 생기셨고, 협심증도 생기신거고.
밤에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하셨어요.
성품이라고 할까요. 표현을 잘 안하죠.
실향민으로써 아픔을 느끼실 때 아들로써 우연히 보시게 된 적은 없었던가요?
이북말로 “노주기 변덕”이란 말이 있는데, 그런 변덕 같은 건 전혀 없으셨죠.
정 고통스러우시면 아프시다고 하시고....... 전혀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이산가족만남과 관련해 뒷얘기 좀 들려주세요.
편지도 오고 그랬는데, 우리 아버지는 무뚝뚝하세요. 어머님과 헤어진 지 40년이 됐는데, 40년 만에 미국에 계신분이 이북 갔다 어머님 드린다고 답장을 쓰라고 했더니....... 넉 줄을 쓰셨어요.
“나 잘 있다. 당뇨병 있다.”는 얘기 쓰시고....... 그게 다에요.
그때 다시 며느님 윤여사가 거들었다.
“말도 마세요. 아버님 편지 보고 어머니께서 얼마나 서운하시겠어요. 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께 불러 드릴테니 받아 적으시라고 해도 ‘괜찮다. ‘됐다 됐어’ 하시다 겨우 몇 칸 더 채워 보내실 정도로 표현을 안 하십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우리 어머님 편지 보실래요.”
하며 지금까지 공개 한 적이 없는 친필의 편지를 보여주신다.
필체만 봐도 그 어머님의 성품이 보이는 듯했다.
당시 장기려 박사의 부인이 보낸 편지 내용 중 이런 대목도 눈에 띈다.
나는 안타까울 때 마다 아래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릅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썩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필 때에 오려나
일구원심 나의 맘에 그대마음 간절하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안만 말하여도 안타깝기만 하여 이만하고 당신과 가용이네 가족이 건강하여 만나게 될 그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으며 부디 옥체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옴니다.
평양에서 김봉숙.
장기려 박사님의 아주 잘 쓰신 편지를 본 적이 있는데요.
그건 다 기자분이 만들어 쓰신 거죠.(웃음)
그렇습니까? 말씀 들어 보니까 무뚝뚝하시고. 차라리 그쪽이 맞는 것 같네요.
무심하다는 말이 맞죠.
원래 문학적인 소질이 없으셨어요.
그래도 편지가 왔다 갔다 했으니까.
처음 편지가 오고간 것이 90년 이었을 겁니다. 그 후로 거의 매년 연락이 오고갔어요. 이런 모든 것도 지금이니 공개가 가능합니다.
저희 아버님이 95년에 돌아가셨고, 2000년에 제가 이북에 갔었으니까.......
이산가족 만남은 어떠셨어요?
편지내왕이 늘 있어서 그랬는지, 만나서는 낯설지가 않더라구요.
막내 동생은 강계의과대학에 교수로 있어요. 물리학을 했는데, 물리치료 하는 쪽으로 해서 교수를 하고 있어요.(사진을 보니 한눈에 형제임을 알 수 있었다.)
장가용 교수님이 보시기에, 아버님의 통일관, 대북관을 엿볼 수 있으셨는지?
조심스러운 건데, 남한에서는 우리가 얘기를 자유스럽게 해도, 혹 우리 아버님 얘기의 기사가 이북으로 들어갔을 때, 문제가 되는 게 나오면 이북에 있는 가족들이 고통을 당할까봐 맘대로 얘기를 하지 못해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92년도인가?
8.15때 3박4일 동안 어머님을 뵐 수 있게 한다고 해서, 아버님 가시게 하려고 했었어요.
저는 3박 4일 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했어요. 한번은 이영덕 선생님을 찾아가서 ‘나 아들로써 우리 아버님 3박 4일은 싫다.’, ‘가서 사시면 그냥 계속 사시게, 대한민국도 좋고, 이북도 좋고, 캐나다도 좋고, 어디든지 좋지만 3박4일이 뭐냐. 다시 헤어지는 쓰라림이 있다.’고 했었죠.
그때 마침 대만 정부에 거주의 자유가 있었어요. 70세 이상 대만 사람들은 중국 본토에 가서 살수 있게 해 줬어요. 대한민국이 이북보다 우월하다면 대한민국에서 먼저 거주의 자유를 줘라. 이북 가서 사시게 해 달라 하려고 했어요.
먼저 아버님께 허락을 받고 가서 부탁을 하든 해야지 뭐, 아버님께 가서 이북 가서 사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요. 첨엔 안된다고 그러시더군요.
아버님은 이북체제 하에서 5년을 사셨기 때문에, 45년부터 50년 까지........저보다 많이 알고 계셨죠.
거긴 자유가 없다. 신앙의 자유가 없다. 하나님을 경배드릴 수 없고,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거기 가서 못산다. 하시다가 자꾸 얘기를 하니까 ‘그래 내 가서 전도하다 죽지 뭐’ 하시곤 했었죠.
저는 아버님이 자학, 체념 하시고 어머니 때문에 가시기로 마음먹은 거라 생각을 했죠. 그런데 결국은 못 갔죠.
사건이 또 있어요.
노태우 대통령 때 정원식 선생님이 총리 볼 때에요.
그때 대한민국에서 우리 어머님만 내려 보내달라고 했으면 될지도 몰랐어요.
근데, 우리 북한 가족 모두 다 내려 보내라고 한거에요. 아버님 형제가 다섯 식구인데, 지난번 가 보니 35명인가 되더라구요. 그게 북측에서 가능했겠습니까?
그때 형제들을 모두 평양 방송국으로 나오라고 해서, 인터뷰 하면서 좌담회를 했는데, 가족들이 겁나니까 ‘우리 아버지는 월남한 것이 아니라 미군이 납치해 갔다.’고 한거에요.
그 얘길 방송국에 해 놓고 보니까 남쪽에서 아버지하고 제가 편할지 걱정을 많이 했었데요. 여기가 북쪽 같은 줄 아나 보죠. 그래서 미국을 통해서 또 알아보느라 난리를 치고 했었던 일이 있답니다.
장기려 박사의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기독교 신앙은 그의 84년간의 생애를 움직여왔던 축이었다.
장기려박사는 1930~40년대 대표적인 무교회주의자들과 교제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교회주의자로 머물러 있었고 1949년 8월에는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장로로 있으면서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연구와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몇 벌 안되는 옷이 들어있는 조그만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으시면서 예수님은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가르치셨는데 당신은 옷이 몇 벌이나 된다고.......
오히려 적게라도 가진 것을 서글퍼 하시던 그분처럼 살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 분이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살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해도 된다.
장기려 박사는 교회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기보다는 현실적 응답을 구하고자 했다. 단지 종교인으로써의 삶에 얽매인 듯하지만 그의 삶 자체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졌다.
장기려 박사의 삶을 볼 때 우리시대의 위인으로 칭송돼야 할 분인데, 그리스도의 틀 속에서만 성인으로 있는 것을 보면 좀 답답합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지 않았으면 살기 어려웠을 거에요.
우리 아버지하고 얘기를 하다보면 말이죠.......제 결혼할 때 물건을 사야 하니까 얘기를 주고받았었는데, 제가 한마디 하면 아버지가 받아서 하시고, 또 제가 한마디 하면 아버지가 받아서 하시고...그러다 세 번째 말은 꼭 하나님 얘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밖에 모르고 살아요. 하나님 법만 알지 세상 법은 모르시는 거죠.
(사모님께)성인 같은 시아버님 밑에서 힘드셨겠네요. 장가용 교수님이 다 알아주시죠?
살면서 해준 것 하나도 없는데 결혼할 때 가져온 이불을 고학하는 신학생을 줬죠. 우리 아버님은 매력이 없으세요.......
가까운 분한테는 아주 인색하고, 짜고 그러신데, 좀 거리가 있고, 어렵고, 먼 분들한테는 후덕하세요.
예를 들면, 교회 권사님들 집에 왔다 가실 때 택시타고 가라고 20만원 30만원 주시고 그러셨죠. 손자 녀석들에겐 돈 천 원짜리 한 장 안주시는데 말이죠.
(사모님께)장기려 박사님을 시아버님으로 모시기에 힘드신 점은 없으셨는지?
처음 시집갔을 때 그냥 집에 갈라고 했다니까요. 처음에 친정에 조금만 큰 보자기만 싸 가지고 가면 ‘저게 못살고 오는 구나’ 했다니까요. 저도 의사다 보니까 옷 같은 것을 고치고 해야 하는데, 급하니까 일감을 들고 집에 가곤 했었어요.
남한에 내려오셔서 힘든 삶을 사신 게 아니라 북한에서도 남을 도우는 삶을 사셨다고 들었어요.
대학교수가 한달 월급이 20몇 원 일 때에요. 그 때 아버님이 200원을 넘게 받았으니 남들보다 잘 살 거다 생각하시죠. 그런데, 6.25때 내려올 때 결혼할 때 예복, 그 예복 하나 입고 오셨어요.
기독교 신앙에만 너무 치우치셨다는 건가요?
(그러자 며느님이 답변하셨다.)
그렇다니까요. 하나님이 해 주는 게 있고, 사람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내 아들이 의과대학을 갔는데, 날보고 돈도 많데요.......대학공부 시킨다고.
밥상에 반찬만 조금 잘 나오면, ‘벌받는다.’ 그러시고.......
아버님께 그럼 대학교육 시키지 말까요? 했는데, ‘그래 예수님처럼 목수나 시키라.’고 하시더군요. (웃음)
아들이 중앙대 의과대학 나와서, 백병원 외과교수로 있어요. 제 할아버지 대를 잇고 있는 녀석이 그녀석인데.(웃음)
(사모님): 아버님이 오시면, 양상추니 피망이니 그런 걸 사야해요.(당뇨 때문인 것 같다.) 20년 전엔 그런 것이 귀했어요. 아버님을 위해서 준비해서, 그렇게 해서 먹으면서 뭐라고 하시냐면, ‘젊어서 잘 먹으면, 늙어서 거지돼.’그러셨죠.
드리는 건 다 잡수시면서, 칭찬한번 안하시고 싫은 소리만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한번은 아무것도 안했어요. 그때 일하는 아줌마가 ‘할아버지가 하도 잔소리를 하셔서 아무것도 안했어요’ 했더니, ‘그래 나 잔소리 안 헐게 낼부터 잘 차려’ 그러시는 거에요.
그리고 식사시간엔 모두 한 상에서 먹어야 돼요.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차별하면 안된다’고 그러셔서....... 그러니 바빴죠.
아버님이 기도를 참 많이 하셨어요. 따지고 보면, 이북에 계신 분들이 그래서 잘 계신지도 몰라요.
저희 형제들 모두 이북에서 김일성 대학을 다녔어요. 사실 이북 체제 하에서 우리 어머님이 애들 대학공부 못시킵니다. 김일성이 우리 아버님을 생각해서 봐 준 것 같아요.
우리아버님이 여기서 딴사람을 돌봐주면, 이북에 우리 가족을 딴 사람이 돌봐준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이북에 가족들이 잘 된 것 같아요.
이북체제 하에서도 주일날은 꼭 교회를 가셨었어요. 우리 아버님 교회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 말 못했었거든요.
장기려 박사의 “참 스승”으로써의 삶
인술을 베푸시면서 성산(호) 선생은 신병을 고치실뿐만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고치는 참 스승이었습니다.
고결하고 거룩한 삶은 인간이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인생의 지표이며 역사와 함께 영원히 기려야 할 소중한 가르침이다.
사람을 생각해주고 불쌍하다는 마음이 먼저 있는 사람, 꾸짖는 것보다 먼저 용서해주는 사람, 자기를 잊어버리고 자기를 희생함으로 해서 사람을 내세우려고 하는 사람, 받기보다는 차라리 주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 바로 그 그런 사람이 장기려 박사이시다.
장가용 교수님이 보시기에 아버님이 그리스도의 삶을 사신 것 말고 다른 면을 좀 듣고 싶은데요?
저희 아버님은 본인한텐 인색해요. 그래서 명동에서 식사를 하시곤 명륜동 집까지 걸어오셨어요. 그 정도로 인색하셨어요.
우리 시대 참 스승이라면 어떤 면일까요?
생활속에서 실천하시는 분이죠. 자학은 아니에요. 결국에는 그게 성품이 그렇게 돼있는 사람이죠.
교과서에 실리셨죠?
제가 원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아버님 기념사업회를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도 ‘저는 아버님 같이 하진 못해도 중 고등학교 학생들, 우리 젊은 사람들이 아버님같은 사람들을 많이 알아서 그런 분이 우리 사회에 좀 많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기념사업회를 시작했죠. 어느 학년인지 몰라도 간단히 실려 있습니다.
그런 홍보가 중요하거든요. 기념사업회 들어가 보니까, 우리 사회에 기여하시는 분들 이름은 다 올라가 있지만 그렇게만 활동하는 것 말고, 다른 적극적인 일을 하시는 것이 있는지? 예를 들면,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실천적 일의 하나로 젊은 의사들이 봉사활동을 한다든지 그런 일을 하는 게 좋지 않을 까요?
기념사업회의 일이 주로 우리 아버님의 홍보라고 할까요. 젊은 의사지망생들에게 우리 아버님과 같은 삶을 살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그런 기념사업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거죠. 봉사보다도.......
“내가 남을 도우면, 내 가족들을 북에서도 누군가가 도울 것이다.” 라는 기독교에 그런 정신이 있더라구요.
요즘에는 아동 만화로도 나오고, 위인전에도 나오고 그러는 모양이에요.
아버님과 관련해 몇 말씀 해 주시고 싶은레 있으신지. 아버님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요?
아버님은 단순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결국에는 ‘이 세상사는 것이 신앙과 공부 밖에 없다’고 하신 분이죠.
의학공부는 철저히 하셨어요. 그러니까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를 하더라도 실력 있는 의사가 되어야지....... 저는 학생들한테도 그런 얘기 하거든요.
'실력 있는 의사가 돼서 봉사를 해야 그 환자가 덜 불쌍하지, 가난한 사람들이 실력 없는 의사한테 진료를 받으면 더 비참하지 않느냐!’ 생각하시고 공부를 하셨던 것 같아요. 정말 학문에 취미가 있으셨던지, 끝까지 공부를 하시더라구요.
그분에 대한 일화는 끝이 없다.
‘성인이 아니면 바보’라 하자 ‘바보가 아닌 성인’이라는 작은 거인 장기려 박사가 작금의 우리 상황들을 본다면 “감사가 없는 말쟁이 들!” 하시며 우리가 서로 반목하기보다는 통함 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실 것이다. 인술을 베푸시면서 성산 선생은 신병을 고치실 뿐만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고치는 참 스승이었다.
고결하고 거룩한 삶은 인간이 고난과 시련 중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인생의 지표이며 역사와 함께 영원히 기려야 할 가르침이다.
장기려 박사님이 생각하는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다. 사람을 생각해주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먼저 있는 사람, 꾸짖기보다 먼저 용서해주는 사람, 자기를 잊어버리고 자기를 희생하고 받기보다는 주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
그분의 마음속엔 언제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다. 남들을 나와 동일시 할 수 있는, 내 이웃을 나의 가족처럼 대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품고 평생을 살아오셨다.
<장가용 박사는 올해 초에 타계하셨고(1935.9.20~2008.1.19), 마석 모란공원에 아버님과 나란히 누워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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