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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劉安禮가 問臨民한데 明道先生이 曰 使民으로 各得輸其情이니라 問
(유안례 문임민 명도선생 왈 사민 각득수기정 문
御吏한데 曰 正己以格物이니라
어리 왈 정기이격물)
유안례가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물으니 명도선생이 말하길 “백성으로 하여금 각각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뢸 수 있게 하는 것이니라.”하였다. 아전을 거느리는 도리를 물으니 말하길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남을 바르게 할지니라.”고 하였다.
⋇ 劉安禮(유안례) : 북송(北宋)때 사람으로, 자는 원소(元素).
⋇ 臨(임할 임. 다스리다. 비추다) : 다스리다(治).
⋇ 得(얻을 득) : 여기서는 “할 수 있다(能)”의 의미로 해석.
⋇ 輸其情(나를, 통보하다 수. 기정) : 그 뜻을 알림(관청에).
⋇ 御吏(다스리다 어. 아전, 벼슬아치 리) : 아전을 다스림(거느림).
⋇ 格物(격물) : ① 주자학(朱子學)의 용어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궁극에 도달함. ② 양명학(陽明學)의 용어로 사물에 의지(意志)가 있다고 보아 그에 의해서 마음을 바로 잡음.
(해설)
다스린다와 거느린다.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지만 앞의 용어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장악력을 강조하고, 뒤에 용어는 앞장서서 이끈다는 의미가 강하다. 일방적인 통행이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역할이 다름을 알 수가 있는데, 앞은 조직화되지 않은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며, 뒷부분은 조직화된 조직원들을 통솔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해 놓아 바꿀 수 없는 고정된 법과 규율, 그리고 오랜 전통으로 보편타당성이 인정된 관습과 무조건적 일방으로 만 통용되는 명령의 적용여부가 그 관건이 된다. 정책은 여건의 변화에 따라 탄력적으로 수정될 수 있지만, 법은 그런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경직되어 인간적 배려가 배제되는 단점을 지니고, 반면에 관습은 상황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는 유연성을 발휘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 법이 많을수록 그 사회나 국가는 혼란스럽고 주먹이 앞서는 경향이 강한 특성을 지닌다면 법이 적고 관습과 기본 도덕성이 지켜지는 사회나 국가는 안정되고 밝은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과학과 지식의 발달은 점점 더 복잡하고 전문적인 규제를 하여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많은 법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下意上達(하의상달)과 일방 통행적 명령과 지시로 이루어지는 조직 혹은 사회와 국가는 그 색깔 또한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지금이야 다양한 매체를 통한 통제와 견제 그리고 의사전달이 가능하지만, 대중전달 매체가 없었던 시절에는 입소문과 글을 통한 전달이 주를 이루다 보니 참언과 벽서를 통한 모함과 입소문을 타고 떠도는 소문이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진위를 파악도 하기 전에 여론화되는 힘을 발휘하였다. 시국이 어수선하거나, 대형 재난의 발생(가뭄, 홍수, 전염병 등)하였을 때는 그런 유언비어는 때를 만나 기승을 부리곤 했다. 특히 기존의 예언서 등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사이비 종교의 창궐도 한 몫을 차지한다.
민심 즉 백성들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왜곡되어 기존 체제에 대한 반발로 간주하거나, 불순한 의도가 깔린 용인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가혹한 응징과 처벌을 강행한다면 그에 대한 반발과 신뢰의 상실로 민심이 등을 돌리게 되는 커다란 우를 범하게 된다. 즉 한 고을의 수장이 내린 판단이 잘못하면 한 국가체제를 뒤흔드는 내분을 가져올 수 있기에 민심에 대한 그 내용의 진위와, 동기, 그리고 발생하게 된 내력 등을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판단하여야 한다. 국가체제에 대한 도전과 적게는 자기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반발로 착각한다면 쉽게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키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의 근원을 추적해 보면 아주 작은 일인데, 초기에 적절한 대응과 원인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덮거나 없었던 일로 간주하려고 하다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되어 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군중심리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과 같다. 평소 얌전하고 나약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열성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을 보이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피는 피를 부른다고 하질 않습니까?
어떤 상황이건 주관적 시선을 배제하고 그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과 자신이 솔선수범하는 태도와 자신을 돌아보고 바르게 하는 것이야 말로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 오게 만드는 진정한 힘이 아닐까 합니다.
泰山北斗(태산북두)
- 태산과 북두칠성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인물을 두고 이르는 말로 줄여서 泰斗(태두)라 한다. -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인 韓愈(한유)는 두 살에 고아가 되었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25세에는 進士(진사)가 되었고, 차츰 벼슬이 올라 드디어 京兆尹(경조윤) 겸 御史大夫(어사대부)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죽은 뒤 조정에서는 禮部尙書(예부상서)를 贈(증)하고 시호를 文(문)이라 하였다. 한유는 벼슬을 할 때에 궁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폐단을 상소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는데, “論佛骨表(논불골표)”라 하여 황제가 부처의 유골을 영접하여 궁중에 삼 일간이나 머물게 한 후, 여러 절에 보낸 일에 대하여 간한 글이 유명하다. 한유는 이 글에서 불교는 사교이므로 불골 같은 것은 水火(수화)에 던져버려야 한다고 통렬히 간했기 때문에 潮州刺史(조주자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한유는 글의 모범을 先秦(선진)에 구하고 六朝(육조) 이래의 四六(사육)변려의 宿弊(숙폐)를 타파하려고 하였다. 그 때문에 唐書(당서) “韓愈傳(한유전)”에는 “당나라가 일어난 이래 한유는 六經(육경)의 글을 가지고 모든 학자들의 導師(도사)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그 학문이 점점 융성하여 학자들은 그를 태산북두를 우러러보는 것같이 존경하였다(自愈沒 寄言大行 學者仰之 如泰山北斗云… : 자유몰 기언대행 학자앙지 여태산북두운…).”라고 기록되어 있다.(출전 唐書 韓愈傳)
有所思(유소사) - 宋之問(송지문) -
洛陽城東桃李花(낙양성동도이화) 낙양성 동쪽의 복숭아꽃 오얏 꽃
飛來飛去落誰家(비래비거낙수가) 날아가 날아와서 뉘 집에 떨어지나
幽閨兒女惜顔色(유규아녀석안색) 규방의 아가씨 얼굴빛을 아끼며
坐見落花長歎息(좌견낙화장탄식) 우두커니 낙화 바라보며 긴 한숨 쉬는구나
今年花落顔色改(금년화락안색개) 올해도 꽃 지면 얼굴빛 달라질 것
明年花開復誰在(명년화개부수재) 명년에 꽃 피면 누가 그대로 일까?
已見松柏摧爲薪(이견송백최위신) 이미 보았거니 송백은 꺾이어 섶나무 되고
更聞桑田變成海(갱문상전변성해) 다시 들었노라 상전이 변하여 벽해 됨을
古人無復洛城東(고인무복낙성동) 고인은 한번 가면 다시 낙양성 동쪽으로 오는 이 없고
今人環對落花風(금인환대낙화풍) 이제 사람은 바람에 지는 꽃을 옛사람이 그러듯 보네
年年歲歲花相似(연연세세화상사) 해마다 해마다 꽃핌은 비슷해도
歲歲年年人不同(세세년년인부동) 해마다 해마다 사람의 모습은 같지 않구나!
寄言全盛紅顔子(기언전성홍안자) 한마디 이르노라 그대들 한창 나이의 젊음이여!
須憐半死白頭翁(수련반사백두옹) 모름지기 반죽음인 이 늙은이를 가련히 여겨다오
此翁白頭眞可憐(차옹백두진가련) 이 늙은이의 백발이야 진정 가련하지마는
伊昔紅顔美少年(이석홍안미소년) 이래도 옛적에는 홍안 미소년
公子王孫芳樹下(공자왕손방수하) 공자왕손 귀한 이와 꽃다운 나무 아래 함께 하였고
淸歌妙舞落下前(청가묘무낙하전) 청아한 노래와 멋진 춤으로 낙화 앞에서 즐겼다네.
光祿池臺開錦繡(광록지대개금수) 광록지대 같은 호화스런 자리에 금수 깔고 잔치하며
將軍樓閣畵神仙(장군누각화신선) 장군누각에 신선도를 그려 넣는 것 같은 호사도 누렸 더니
一朝臥病無相識(일조와병무상식) 하루아침에 병들어 누웠으니 아는 이 하나 없고
三春行樂在誰邊(삼춘행락재수변) 삼춘의 행락도 누구네 곁으로 갈 건지 나와는 상관없다
宛轉蛾眉能幾時(완전아미능기시) 고운 아미의 아가씨여 그댄들 몇 날을 능히 그러겠나.
須臾鶴髮亂如絲(수유학발난여사) 잠깐 사이 백발은 실처럼 흐트러질 것이니라.
但看古來歌舞地(단간고래가무지) 고래로 노래나 춤이 있던 이곳을 보노라면
惟有黃昏鳥雀飛(유유황혼조작비) 지금은 다만 황혼에 날아드는 새들뿐 쓸쓸하네.
※ 늙음을 슬퍼하고 인생 무상함을 한탄하면서 청춘을 회고하며 낙화를 읊음.
※ 摧(꺾을 최), 薪(섭 신), 祿(복 록), 宛(정할 완), 蛾(나비 아).
14-8. 抱朴子에 曰 迎斧鉞而正諫하여 據鼎鑊而盡言이면 此謂忠臣也이니라
(포박자 왈 앙부월이정간 거정확이진언 차위충신야)
포박자에 이르길 “도끼로 맞더라도 바른 길로 간하며, 솥에 넣어서 삶아 죽이려 하더라도 옳은 말을 다하면 이것이 충신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 抱朴子(포박자) : 진(晉)나라 사람 갈홍(葛洪)의 호. 그의 저서도 그의 호를 따라 “포박자”라고 하였음. 내외 2편으로 되어 있는데, 내편은 신선수련(神仙修鍊), 외편은 시세(時世)의 득실과 인사의 시비 등을 논했음.
⋇ 斧鉞(부월) : 부(斧)는 “작은 도끼, 월(鉞)은 큰 도끼. 옛날에 형벌에 쓰였던 도끼를 뜻하는 것으로 ”형벌“의 뜻으로도 쓰임.
⋇ 據(의지할 거. 누를 거) : 처함. 처(處)해짐
⋇ 鼎鑊(솥 정. 솥 확) : 가마솥. 형벌의 기구로 사용되었음.
⋇ 謂(이를 위) : ~라고 말하다. ~라고 이르다.
(해설)
충신과 현신이란 당태종과 魏徵(위징)의 대화에서 나왔지만, 군왕의 잘못됨을 바로잡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간하는 신하가 충신이라 부르는데, 대개의 경우 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奸臣(간신)들이 득세하고 군주는 향락에 빠져들 시기에 많이 등장한다. 또한 정변이나 반정을 일으켰을 때에도 가담을 하느냐? 아니냐? 에 따라 극명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또는 왕이 위난이나 위급함을 당하였을 때 초개 같이 한 목숨을 바치어 왕을 구하는 경우도 있다. 寒食(한식)의 유래가 된 사연과 같이〔晉(진)의 文公(문공)이 망명생활 때 그를 따르던 介子推(개자추)는 며칠을 굶어 아사직전에 이르자 주군의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받치었는데, 후에 논공행상 시 소외 받자 緜山(면산)에 숨어 살았다. 문공이 뒤늦게 그를 중용하려 불렀으나 나오질 않으니 산에 불을 질렀는데 그대로 죽어버리자 문공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개자추가 죽은 날을 기리기 위해 모든 신하들에게 찬밥을 먹도록 지시한다〕. 역사 속에 명멸한 수많은 충신들의 일화를 보면 군왕의 처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緜(햇솜 면).
다스림의 바른 길은 무엇을 말할까? 위민과 제도의 합리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세금이다. 대부분 수탈에 가까운 무거운 징수와 대규모 사업을 벌려 사역을 위한 징발로 백성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군왕의 인척의 득세와 내부 환관들의 횡포도 그 한 몫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복잡하고 미묘한 정국에서 한 쪽으로 힘의 균형이 기울 때에 기득권을 지키려는 측과 신흥 세력과의 마찰은 늘 피를 부르는 원인이 된다. 난무하는 모함과 상대방의 잘못을 문제 삼으려는 역정보와 처절하고 괴기한 온갖 술수가 다 동원된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국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바른 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이 바로 바른 소리를 간하게 되니 권력 다툼하는 자들의 표적이 되어 불운한 처지로 전락하게 되는데, 귀향을 가게 되거나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게 된다.
반정의 경우에는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된다.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제거는 필수불가결하기에 싹을 자르는 개념이 적용되어 모든 가족이 몰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저항하는 세력은 산야로 은둔하여 여생을 보내게 된다.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닌 절대적 이념이지만 권력의 속성상 권력자의 선택 여지에 따라 그 색깔은 달라지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난세건 말기건 간에 잘못되어진 기틀을 바로 잡기 위한 최선의 길을 선택하여 한 목숨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충신은 존경과 흠모를 받는 것이 아닐까요.
愚公移山(우공이산)
- 愚公(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어렵고 큰일도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룩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
옛날 北山(북산)에 우공이라는 90세 된 노인이 있었는데, 太行山(태행산)과 王屋山(왕옥산) 사이에 살고 있었다. 이 산은 사방이 700리,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큰 산으로, 북쪽이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하였다. 우공이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고 “저 험한 산을 평평하게 하여 豫州(예주)의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는 동시에 漢水(한수)의 남쪽까지 갈 수 있도록 하겠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하고 묻자, 모두 찬성하였으나 그의 아내만이 반대하며 “당신 힘으로는 조그만 언덕 하나 파헤치기도 어려운데, 어찌 이 큰 산을 깎아 내려는 겁니까? 또, 파낸 흙은 어찌하시렵니까?”하고 말했다. 우공은 흙은 渤海(발해)에다 버리겠다며 세 아들은 물론 손자들까지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와 광주리 등으로 나르기 시작하였다. 황해 근처의 智叟(지수)라는 사람이 그를 비웃었지만 우공은 “내 비록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내가 죽으면 아들이 남을 터이고, 아들은 손자를 낳고…. 이렇게 자자손손 이어 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저 산이 평평해질 날이 오겠지.”하고 태연히 말하였다. 한편 두 산을 지키는 蛇神(사신)이 자신들의 거처가 없어질 형편이라 천제에게 호소하였더니, 천제는 우공의 우직함에 감동하여 力神(역신) 夸娥(과아)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두 산을 하나는 朔東(삭동)에, 또 하나는 雍南(옹남)에 옮겨 놓게 하였다고 한다.(출전 列子 湯問篇)
(太形王屋二山 方七百里 高萬仞 本在冀州之南 河陽之北 北山愚公者 年且九十居 懲山北之塞 出入之迂也 聚室而謀曰 吾與汝畢方平險 指通豫南 達于漢 陰然相許 其妻獻疑曰 以君之力 曾不能損魁父之丘 如太行王屋何 且焉置土石 雜曰 投諸渤海之尾 隱土之北 遂率子孫荷擔者三夫 叩石墾壤 箕畚運於渤海之尾 隣人京城氏之孀妻 有遺男 始齔 跳往助之 塞署易節 始一反焉 河曲智叟 笑而止之曰 甚矣汝之不惠! 以殘年餘力 曾不能毁山之一毛 其如土石何 北山愚公長息曰 汝心之固 固不可徹 曾不若孀妻弱子 雖我之死 有子存焉 子又生孫 孫又生子 子又有子 子又有孫 子子孫孫無匱也 而山不可增 何苦而不 河曲之叟 亡以應 操蛇之神聞之 懼其不已也 告之於帝 帝感其誠 命夸娥氏二子 山一厝朔東 一厝雍南 自此冀之南 漢之陰 無隴斷焉 : 태형왕옥이산 방칠백리 고만인 본재기주지남 하양지북 북산우공자 연차구십거 징산북지새 출입지우야 취실이모왈 오여여필방평험 지통예남 달우한 음연상허 기처헌의왈 이군지력 증불능손괴부지구 여태행왕옥하 차언치토석 잡왈 투제발해지미 은토지북 수솔자손하담자삼부 고석간양 기분운어발해지미 인인경성씨지상처 유유남 시츤 도왕조지 새서역절 시일반언 하곡지수 소이지지왈 심의여지불혜! 이잔년여력 증불능훼산지일모 기여토석하 북산우공장식왈 여심지고 고불가철 증불약상처약자 수아지사 유자존언 자우생손 손우생자 자우유자 자우유손 자자손손무궤야 이산불가증 하고이불 하곡지수 망이응 조사지신문지 구기불이야 고지어제 제감기성 명과아씨이자 산일조삭동 일조옹남 자차기지남 한지음 무농단언)
(출처 네이버 블로그 돼지발톱)
※ 仞(길 인), 迂(멀 우), 魁(으뜸 괴), 荷(연 하), 叩(두드릴 고), 墾(밭갈 간), 箕(키 기), 畚(삼태기 분), 孀(과부 상), 齔(이 갈 츤), 叟(늙은이 수), 匱(함 궤), 夸(자랑할 과), 娥(예쁠 아), 厝(둘 조, = 措 : 둘 조)
동성애 살인
미국인 여강사의 살인사건은 동료 여강사의 동성애로 빚어진 성범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토록 잔인할 수 있을 만큼 동성애의 愛怨(애원)이 진할 수 있는 것일까?
여성의 동성애하면 기원전 6세기 희랍의 여류시인 사포가 연상된다. 레스보스 섬에다 시와 동성애로 지새우는 여인천국을 만들었던 분이다. 그 자신도 제자인 한 소녀와의 동성애 끝에 바다에 투신자살을 하고 있다.
16세기 프랑스의 앙리 2세에게 시집온 카트리느 왕비의 동성애는 유명하다. 루브르 궁전을
왕비의 동성애 인들로 이룩된 여성친위대로 수호시켰을 정도다. 이 애인군단의 제복이 얼 만큼 색정적이었던가 보자, 사관복처럼 몸에 들어붙게 만든 저고리는 두 유방이 튀게 돼있고 젖꼭지는 루즈로 화장시켰다. 발등을 덮는 스커트는 양편의 허리까지 갈라지게 돼 있어 걸을 때나 앉을 때 내복을 입지 않은 하체가 들어나 보이게 했다. 연산군 같은 호색적인 폭군도 하지 못했던 일을 카트리느 왕비는 자행했던 것이다.
프랑스 문호 고티에의 작품소재까지 됐던 오페라 가수 모팡 부인은 그녀가 동성애로 몸을 달구던 한 소녀가 수도원에 들어가자, 칼을 휘두르며 침입, 방화를 하고서 그녀의 연인을 탈취하고 있다. 조루주 상드하면 하이네, 메리메, 소팽, 리스트 등등 그와 사랑하지 않고는 당대에 유명해 질 수 없었다 하리만큼 남성편력을 하는 도중에도 여배우이기도 한 한 유부녀와 동성애를 지속했고, 평생 동안 그녀에게 색정적인 연문을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동성애 때문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세조 때 노비출신의 침모 舍方知(사방지)와 당상의 양반인 李純之(이순지)의 과부된 딸과의 동성연애 사건은 임금의 배려로 가문으로부터의 파문으로 끝냈는데, 그 후에도 법이나 도덕이나 지체에 구애됨 없이 이들의 밀회는 계속 됐었다. 명종 6년에 무당인 甘德(감덕)도 동성애로 왕족과 고관대작의 안방을 오염시켰다 하여 杖殺(장살)을 당하고 있다.
궁중에서 궁녀끼리, 환관촌의 내시 아내들끼리의 동성애도 성행했는데, 이를 속칭 對食(대식)이라 했다. 대식관계가 이루어지면 서방님, 마님 하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대식연인끼리 손을 묶고 나란히 목매어 정사한 사례도 있다.
한국 사람의 동성애는 이처럼 대체로 식물적인데 비해 서양 사람들의 그것은 동물적임을 알 수 있다. 그 본보기를 보는 것 같은 서양여인들의 동성애 살인사건이다.(이규태 코너 1989년)
자료출처-http://cafe.daum.net/sungho52
박광순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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