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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로마의 서명, 빈의 공포
“오스트리아의 경제적 처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안슐루스 운동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 카를 레너(Karl Renner)
1937년 11월 13일, 독일국과 교황청 사이에 역사적인 정교협약(Reichskonkordat)이 체결되었습니다.
독일 신문들은 그것을 문화투쟁(Kulturkampf)의 종결이라고 불렀습니다. 1871년부터 1878년까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전개되었던 국가와 교회의 충돌, 그리고 그 뒤에도 독일 정치의 깊은 층에 남아 있던 가톨릭과 라이히 사이의 불신이 마침내 문서 위에서 봉합된 것입니다. 물론 외교문서가 역사의 상처를 곧바로 낫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베를린과 로마는 이제 같은 종이 위에 서명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도 같은 이름의 조약은 존재했습니다. 1933년 7월, 나치 정권과 교황청 사이에 체결된 정교협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조약은 반종교적 극단주의 세력이 독일국가를 장악했다는 비상사태에 대한 방어적이고 반응적인 조치에 가까웠습니다. 교황청은 독일 가톨릭을 보호할 최소한의 울타리를 서둘러 세우려 했고, 나치 정권은 국제적 승인과 가톨릭 정치세력의 무력화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성급한 위험관리였습니다.
이 세계의 정교협약은 달랐습니다. 체결이 4년이나 늦어진 것은 협상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루어야 할 것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 인구의 약 40퍼센트는 가톨릭교도였습니다. 중앙당과 BVP는 언제나 내각의 주축이었고, 1934년부터는 중앙당의 아담 슈테거발트가 대통령이었습니다. 독일과의 대화를 주도한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후일 비오 12세가 되는 국무원장 추기경은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차기 교황 후보였고, 동시에 강경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과도 그리 편안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솔리니는 필요했지만, 믿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DNEP 내부의 반가톨릭 정서를 누그러뜨리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 작업에는 라인란트의 가톨릭 산업귀족인 쿠노 폰 비르켄호니히스에센 백작이 수년 동안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로마와의 협정이 굴복이 아니라 보험이라고 말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공장에서 밀어낸 뒤,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도 했습니다.
결정적 계기는 1937년 4월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시도 당시, 가톨릭 교회와 노동조합들은 KPD에 맞서 가장 먼저 공장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장관도 장군도 아니었지만, 붉은 생산파업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공장문 앞에 남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가톨릭 노동조합은 단순한 종교계 노동단체가 아니라, 나라가 적화될 뻔한 순간 생산현장을 지킨 국가유공단체와도 같은 위상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1937년의 정교협약은 일반적인 조항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학교의 교육권 보장, 성직자의 정당활동 제한, 독일 내 가톨릭 다수지역의 특수성 인정 같은 익숙한 내용도 포함되었지만, 핵심은 따로 있었습니다. 가톨릭 노동단체, 사회단체, 청년단체에 준공법적 지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가톨릭 노동조합과 농민협동조합은 그 지위 면에서 교황청의 보증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교황청은 독일 내 가톨릭 단체와 신자들이 국가의 생산전선에 복무해야 한다는 신학적 해석을 내렸습니다. 독일 정부는 이 협정을 가톨릭을 국가생산질서 안에 묶는 보험으로 보았습니다. 교황청은 독일 사회 내부에 깊은 제도적 지분을 확보한 성공으로 보았습니다.
이 소식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하게 놀란 곳은 베를린도 로마도 아니었습니다. 빈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엥겔베르트 돌푸스였습니다.
돌푸스 정권은 지난 4년 동안 세 가지 논리로 버텨왔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다르다. 오스트리아는 가톨릭적 질서국가다. 독일민족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모두 반국가세력이다. 이 세 문장은 돌푸스 체제의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교황청과 깊은 정교협약을 맺는 순간, 그 기둥에는 금이 갔습니다.
독일은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적이고 프로이센적이며 반가톨릭적인 위험국가로만 묘사되기 어려워졌습니다. 독일 안의 가톨릭 학교와 노동조합과 사회단체가 로마의 서명 아래 보호받는다는 소식은 오스트리아의 지방 가톨릭층과 농민층을 흔들었습니다. 독일이 그렇게 반가톨릭 국가라면 왜 로마는 베를린과 서명했는가. 독일에서는 가톨릭 노동조합이 보호받는데, 왜 오스트리아에서는 독일과 거래한 농민신용조합이 반역자가 되는가. 로마조차 독일과 대화하는데, 왜 빈만 독일과의 모든 통로를 죄악시하는가.
돌푸스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를 비난할 수는 없었고, 베를린과 정면충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세게 움켜쥐었습니다. 국내 반대파, 독일계 기업, 농민신용조합, 철도노조, SDAPÖ 잔당, 대독일주의자들이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돌푸스는 독일을 악마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로마와 계약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돌푸스는 악마 대신, 자기 손이 닿는 사람들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34년 초 ‘붉은 빈’이 함락된 이래, 돌푸스 정권은 SDAPÖ를 위시한 좌익 잔당들과 우익 대독일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습니다. 영장 없는 체포, 법적 근거가 희미한 사전구금, 비공개 재판, 때로는 강제실종까지 이어졌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붉어서 위험했고, 대독일주의자는 독일과 가까워서 위험했습니다. 돌푸스 체제는 그 둘을 서로 다른 병으로 보았지만, 처방은 같았습니다. 경찰, 수용소, 보국단, 침묵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이상했습니다. 서로를 혐오하던 좌익과 우익이 같은 감옥, 같은 수용소, 같은 망명지, 같은 비밀 연락망 안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정치범들을 대규모로 수용하던 뵐러스도르프-슈타인아브뤼클(Wöllersdorf-Steinabrückl) 수용소는 사실상 정치적 교배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반체제 인사들은 냉소적으로 그곳을 뵐러스도르프 학원(Wöllersdorfer Akademi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같은 사람들에게 얻어맞고, 같은 감방에서 자고, 같은 검열관에게 편지를 빼앗기면서, 서로를 완전히 미워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SDAPÖ 잔당의 지도자이자, 원래부터 당내에서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카를 레너(Karl Renner)는 오래된 개념 하나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독일오스트리아(Deutschösterreich)였습니다. 그것은 1918년의 미완성된 이름이었고, 패배한 공화국의 기억이었으며, 이제는 돌푸스 체제에 맞선 새로운 정치언어가 되었습니다.
이 융합체는 곧 독일오스트리아 적록동맹(Deutschösterreichischer Rot-Grüner Bund)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옛 SDAPÖ보다 훨씬 민족주의적이고, 옛 대독일주의자들이나 농촌연맹보다 훨씬 사회주의적이며,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공화국을 외치는 괴상한 동맹이었습니다. 붉은 빈은 농민신용조합의 장부를 배웠고, 대독일 농민주의자들은 노동자보험의 언어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정통 사회민주주의도, 낡은 대독일 자유주의도 아니었습니다. 패배자들이 네 해 동안 썩고 삭아 만들어낸 정치적 발효물이었습니다.
돌푸스의 사회경제정책 역시 모순과 딜레마로 가득했습니다. 내전에서 이겼든 졌든, 대공황과 크레디트안슈탈트 붕괴 이후 오스트리아 경제는 독일시장과 결제망, 석탄·기계·철도부품 거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독일과의 정상적인 무역은 곧 대독일주의 세력을 살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후원자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독일을 대체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아비시니아와 오스트리아를 동시에 떠안은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 경제를 먹여 살릴 여력도 없었습니다. 로마는 빈에게 깃발과 군사고문단과 보증의 말을 줄 수는 있었지만, 독일시장만큼의 석탄과 기계와 결제망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돌푸스 정권은 독일과 무역은 하면서도, 그 무역에 각종 제한을 덕지덕지 붙였습니다. 독일과 거래하지 않으면 오스트리아 경제는 숨이 막혔고, 독일과 거래하면 정권이 겁을 먹었습니다. 그 결과 외환은 늘 부족했고, 농산물 판로는 불안했으며, 투자는 줄었습니다. 가게에는 물자가 모자랐고, 공장에는 부품이 늦게 들어왔으며, 농민과 노동자의 불만은 쌓였습니다.
경제난이 심해지면 돌푸스의 지지율은 내려갔습니다.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더 심한 탄압이 필요했습니다. 더 심한 탄압은 더 강한 혐독정책을 불렀고, 더 강한 혐독정책은 다시 경제난을 악화시켰습니다. 그것은 정책이라기보다 신경증에 가까웠습니다.
정교협약 이후 그 신경증은 더 심해졌습니다. 독일과 가톨릭의 접점까지 모두 반역으로 몰기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돌푸스 정권은 더 조급해졌고, 더 조잡해졌습니다. 로마와 베를린 사이에 서명이 오가자, 빈은 린츠의 장부와 농민신용조합의 금고와 철도노조의 연락망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17. 린츠로 이어진 혈흔(Blutspur nach Linz)
“예방전쟁은 죽음이 두려워 자살하는 것과 같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경제가 버티지 못하자, 돌푸스 역시 모든 소국 독재자들이 한 번쯤 빠지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몰수’였습니다.
1938년 1월, 오스트리아 정부는 “외국환관리 및 국민경제보호법(Devisenbewirtschaftungs- und Volkswirtschaftsschutzgesetz)”을 제정했습니다. 법률의 언어는 늘 그럴듯했습니다. 외국환의 불법 유출을 막고, 국민경제를 해로운 외국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며, 국가의 경제주권을 수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항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뜻은 분명했습니다. “국민경제에 해로운 외국 영향”이 확인될 경우, 정부는 해당 재산을 동결하거나 강제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대놓고 독일인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쓰지만 않았을 뿐입니다.
돌푸스에게는 불행히도, 법은 시행되자마자 피를 불렀습니다. 에리히 우베 슈타들러(Erich Uwe Stadler)는 린츠와 빈에서 철도부품 및 운송 설비 회사를 운영하던 독일계 기업가였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보기에 너무 독일적이었고, 독일 정부가 보기에 너무 유용했으며, 오스트리아 경제가 보기에 너무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외국환관리법 시행 직후, 오스트리아 헌병과 보국단은 그의 린츠 지사를 압수수색했습니다. 장부와 결제서류, 독일 본사와의 통신문이 압수되었습니다. 에리히는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항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보국단원 한 명이 총을 쐈습니다. 에리히 우베 슈타들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위험천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불행한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에리히는 독일의 전 특임장관 빌헬름 슈타들러의 동생이었습니다.
1934년, 빌리 슈타들러는 “오스트리아를 상실한 주권회복장관”이라는 오명을 안고 주브라질대사로 좌천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정치라는 것을 혐오해온 사람이었습니다. 협상문과 통계표와 통상협정과 신용공여의 세계에서 살아온 인간이었고, 군중 앞에서 주먹을 쥐고 외치는 정치인을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전국민적 질타와 직업적 실패, 일생 동안 자부했던 외교능력의 부정, 그리고 가족의 죽음은 그를 정치인보다 더 정치인 같은 인물로 빚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비통함이었습니다.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부끄러워했지만, 부정하지는 못했습니다.
DNEP 소속 외무장관 울리히 폰 하셀(Ulrich von Hassell) 역시 이 사건을 오스트리아 문제의 새 분기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운때는 이상할 만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도리나의 RRG는 슈타들러가 린츠에 도착하는 장면부터 찍었습니다. 그가 동생의 시신이 든 관 앞에 서는 장면, 독일-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는 장면, 고향 함부르크로 향하는 장면이 모두 필름에 담겼습니다.
도리나의 심복이자 RRG와 계약한 젊은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은 그 영상들을 편집해 하나의 짧고 강렬한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제목은 <린츠로 이어진 혈흔(Blutspur nach Linz)>이었습니다.
영화는 노골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조잡하지는 않았습니다. 울부짖는 군중보다 관의 침묵을 길게 보여주었고, 분노한 연설보다 국경역의 차가운 바람을 더 오래 잡았습니다. 에리히 슈타들러는 대단한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 쓰기 좋았습니다. 그는 장군도 당수도 순교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독일인이었고, 사업가였고, 형이 있는 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죽어 있었습니다.
함부르크에서 열린 추도식은 곧 정치집회가 되었습니다. 슈타들러는 관 앞에 섰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전문 선동가처럼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딱딱하고 건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건조함이 군중에게는 더 깊게 박혔습니다.
린츠에서 죽은 것은 내 동생 하나가 아닙니다. 린츠에서 총에 맞은 것은 국경 너머 독일인의 권리였습니다. (…) 독일인의 피에는 값이 존재합니다! (Deutsches Blut hat seinen Preis!)
군중은 그 문장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날 이후 슈타들러의 말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리와 신문과 술집과 집회장에서 조금씩 변형되며 하나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독일인의 피, 민족의 권리! (Deutsches Blut — völkisches Recht!)
하셀의 외무부는 즉각 움직였습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외무부는 대신 “오스트리아인의 민주적 권리”를 말했습니다. 정치적 폭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두들겨패고 총으로 쏜 독일 우익이 민주주의를 입에 담는다는 것 자체는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전혀 우습지 않았습니다.
베를린은 한 사람의 죽음이자 한 가족의 비극을 오스트리아 문제 전체로 확대했습니다. 외국환관리법은 재산권 침해였고, 보국단의 발포는 독일인의 생명권 침해였으며, 돌푸스 정권의 탄압은 오스트리아인의 민주적 자기결정권 침해였습니다. 이 세 문장이 하나로 묶이자, 오스트리아 문제는 더 이상 빈의 내무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내부의 적록동맹도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봉기는 1934년의 도시 무장봉기와 달랐습니다. 붉은 빈의 기억은 남아 있었지만, 지도자들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죽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시위는 도시와 농촌, 철도와 신용조합, 노동자조직과 대독일 농민망을 따라 퍼졌습니다. 요구도 단순한 사회민주주의 복권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돌푸스 정권 퇴진, 이탈리아군 철수, 외국환관리법 철회, 정치범 석방, 그리고 독일 재통일(Anschluss)에 대한 국민투표 시행이 함께 외쳐졌습니다.
독일은 이것을 “오스트리아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라고 불렀습니다. 돌푸스 정권은 “독일이 조종하는 반국가 폭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안타깝게도, 둘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돌푸스는 덫에 걸렸습니다. 물러서면 정권이 끝났습니다. 강경진압을 하면 독일 개입의 명분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악의 중간책을 골랐습니다. 일부 지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보국단을 투입했습니다. 외국환관리법은 “국민경제를 수호하기 위한 비상입법”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동시에 이탈리아 군사고문단 증파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물밑으로는 협상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아무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매일 전쟁 가능성을 거론하며 실질적인 동원체제로 점점 이동하는 동안, 프랑스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파리는 일부 예비군을 ‘긴급 훈련소집’하며 개입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소련은 이 ‘제2차 오스트리아 위기’를 유럽 안보의 비상사태로 간주했습니다. 유사시 폴란드 또는 루마니아를 거쳐,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된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는 방안까지 검토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전쟁을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소련까지 개입될 조짐을 보이자, 영국은 더 망설일 수 없었습니다. 1938년 4월, 핼리팩스 자작(Viscount Halifax)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영국 외무상 에드워드 우드(Edward Wood)는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대표단을 스코틀랜드의 귀족 휴양지 글렌이글스 호텔(Gleneagles Hotel)로 불러모았습니다.
그 선택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 문제를 국제연맹식 집단안보 회의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련이 정식 이해당사자로 들어와야 했고, 불소동맹이 전면에 나서며, 오스트리아 문제는 곧바로 독일 대 반독동맹의 군사위기로 변해버릴 수 있었습니다. 영국은 이 사태를 아직 신사들이 식탁에서 다룰 수 있는 문제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냥과 무도회와 승마와 회의가 한데 섞였습니다.
핼리팩스 자작, 프랑스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Georges Bonnet), 독일 외무장관 폰 하셀,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Galeazzo Ciano) 백작은 스코틀랜드의 젖은 잔디와 벽난로와 은식기 사이에서 전쟁 직전의 유럽을 논의했습니다. 오전에는 꿩이 죽었고, 오후에는 조항이 죽었습니다. 저녁에는 모두가 검은 정장을 입고 문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외교가 아니라 사교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외교였습니다. 그 결과물은 핼리팩스답게 차분하고 미지근하고 애매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주권은 재확인되었습니다. 국제연맹에서 선임된 중립국 감시단이 파견되어 치안과 정치과정을 감시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1년 안에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총선거를 개최한다는 원칙이 합의되었습니다.
1938년 4월 23일 도출된 “글렌이글스 의정서(Gleneagles Protocol)”는 독일의 판정승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독립은 유지되었지만, 돌푸스 체제의 독점은 깨졌습니다. 독일은 탱크를 움직이지 않고도 오스트리아 내부정치에 합법적 통로를 열었습니다. 이탈리아와 돌푸스의 입장에서는 사냥터의 늑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내심 전쟁을 바라지 않던 프랑스는 그런대로 만족했습니다. 체면은 잃었지만 병력은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불만족했던 이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글렌이글스에서 밀실 사냥외교가 펼쳐지는 동안에도,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Владимир Антонов-Овсеенко)가 이끄는 소련 특사단은 파리에서 중앙유럽 회랑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검토하던 것은 단순한 외교적 항의가 아니었습니다. 유사시 수십 개 소련군 사단을 폴란드나 루마니아,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이동시키는 문제였습니다.
플랑댕 내각은 그런 논의를 부담스러워했습니다. 폴란드나 루마니아에게 “독일을 정벌해야 하니 붉은 군대가 국토 일부를 지나가도 양해해 달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핼리팩스 자작과 엽총을 쏘며 미지근한 합의안을 만드는 편이 훨씬 덜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글렌이글스로 갔고, 소련 특사단은 파리에 남았습니다.
그들은 별다른 사전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귀족 휴양지에서 오스트리아 문제가 봉합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모스크바에게 그것은 모욕 그 자체였습니다. 스탈린은 바레츠노프 외무인민위원을 해임했습니다. 인민위원회의 주석 부하린조차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새로 임명된 레프 카라한(Лев Карахан)은 훨씬 직설적이고 반제국주의적 수사에 익숙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20년대 중국에서 이합집산과 배신이 일상이던 외교를 겪은 사람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동시에 매우 유연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정부가 소련에 수상한 연줄이 있던 도리나 리하르츠슐러를 모스크바에 특사로 보낸 것은 카라한이 외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지 고작 2주 뒤였습니다.
물론 독소협상은 실제 역사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처럼 충격적인 일괄타결협정을 낳지 못했습니다. 소련의 저가 곡물 유입 문제, KPD 문제, 폴란드 문제는 너무 복잡했습니다. 푀글러 내각은 히틀러처럼 즉흥적이거나 모험주의적이지 못했고, 부하린 내각은 국가안보를 위해 국제공산주의적 이상을 완전히 버릴 만큼 냉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협상이 얼마나 지루하고 교착상태에 빠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이 독일과 따로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폭발적인 충격파였습니다.
그 충격파는 이상한 곳에서 새어나왔습니다. 도리나의 남편이자, 카탈루냐 공화좌파당(ERC) 당원이던 보구밀 리하르츠 이 오로페냐(Bogumil Richartz i Oropeña)는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편지에는 부부 사이의 사소한 농담과, 독소협상에 관한 약간의 성적이고 정치적인 농담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교문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외교문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종류의 사적 문장이었습니다.
보구밀은 그 편지를 소지한 채, 스페인 좌익 망명자들이 많이 모여 있던 프랑스 툴루즈를 다녀왔습니다. 문제는 프랑스 당국이 독일인에 대해서는 검문을 엄격하게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프랑스 우파정부를 싫어하던 보구밀이 검문 과정에서 화를 내며 항의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이틀간 구류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문제의 편지는 프랑스 당국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약간의 성적 농담과 정치적 농담이 적힌 그 러브레터는, 프랑스를 폭발시키는 데 충분했습니다.
번외1: 인민전선이 오지 않은 곳 - 프랑스
“운동은 정확히 어떻게,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 채 터져 나왔다.”
- CGT 총서기 레옹 주오(Léon Jouhaux), 1936년.
원역사의 코민테른이 “제3기 이론”을 사실상 접고 “디미트로프 테제”를 채택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33년 나치 집권이었습니다. 독일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사회파시스트”라고 부르며 싸우다가, 정작 진짜 파시스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장면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 실패는 너무 거대했고, 너무 공개적이었으며, 너무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모스크바는 적어도 말로는 교훈을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1933년이 없었습니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이상, 코민테른이 기존 노선을 급히 접어야 할 결정적 명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회민주주의와 부르주아 공화국을 혁명의 가장 가까운 적으로 보는 제3기적 감각은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은 이론이라기보다 습관이 되었고, 습관이라기보다 당 조직의 생존방식이 되었습니다. 좌파와 중도파의 협력은 혁명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였고, 중도공화국을 방어하는 일은 곧 노동계급을 부르주아 질서 안에 가두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 유럽에서 가장 이상한 일은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벌어졌습니다. 독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거대한 정당이 되었지만, 결국 국가생산전선과 관료적 치안국가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반면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공화국이 아직 살아 있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화국은 더 쉽게 공격당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먼저 균열이 열렸습니다.
1934년 2월 6일 위기 이후, 프랑스의 중도파인 급진사회당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더 이상 단순한 극우 파시스트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익 거리조직은 여전히 위험했고, 파리의 밤거리에서 제복과 몽둥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공화국의 중도파가 보기에 더 근본적인 위협은 다른 곳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삼색기를 붉은 깃발로 덮어버리려는 극좌 자코뱅들이었습니다.
자크 도리오의 프랑스 공산당은 점점 원역사의 공산당과 다른 것이 되어갔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모스크바의 지시를 기다리는 노동자 정당이 아니었습니다. PCF는 프랑스 혁명, 파리 코뮌, 국민방위, 반독 감정, 노동자 직접행동을 한데 엮어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프랑스 공화국의 파괴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공화국을 넘어선 진짜 국민공화국의 계승자라고 불렀습니다. 붉은 깃발은 삼색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삼색기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원역사의 공식, 곧 SFIO와 급진사회당이 인민전선을 구성하고 PCF가 그 바깥에서 지원하는 구도는 성립하기 어려웠습니다. 급진사회당에게 PCF는 공화국을 지켜줄 외곽 지원자가 아니라, 공화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기다리는 또 하나의 반공화국 세력이었습니다. SFIO 역시 더 이상 좌파 통합의 안정적 중재자가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를 타협과 배신의 언어라고 공격했고, 급진사회당은 그런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진영에 서는 순간 자신들의 중도공화주의 기반이 무너질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1936년 프랑스 총선 이후 구성된 것은 좌파 인민전선 내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플랑댕이 이끄는 중도파와 우파의, 훨씬 더 익숙하고 훨씬 덜 열광적인 연립정권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축제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관리와 경찰과 예산표를 선택했습니다.
원역사의 인민전선 내각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경제적·정치적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것이 남긴 흔적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1936년 6월 프랑스 정부, 생산총동맹(CGPF), 노동총동맹(CGT) 사이에 체결된 마티뇽 협약(Accords de Matignon)은 파업권을 인정했고, 임금을 대폭 인상했으며, 40시간 노동제와 유급휴가제도를 신설했습니다.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는 “파업을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로 타협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SFIO 계열의 CGT와 PCF 계열의 통일노동총동맹(CGTU)은 재통합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1936년 봄에는 마티뇽이 없었습니다.
공장점거운동은 협상 테이블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봉합되지 않은 혼란과 관료적 처리지연, 산발적인 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공장주들은 기다렸고, 정부는 서류를 요구했으며, 경찰은 지역마다 다른 강도로 움직였습니다. 어느 공장에서는 점거가 묵인되었고, 어느 항만에서는 곤봉이 먼저 들어갔으며, 어느 철도차량 공장에서는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검문선이 세워졌습니다. 국가가 일관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 나쁜 것은, 국가가 일관된 해결책을 내놓지도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첫 번째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프랑스 노동계급은 제도적 승리 경험을 갖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독일 노동자들은 혁명의 열화대체재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자유로운 노동자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국민생산전선은 노동자를 국가와 산업의 규율 안에 묶는 장치였고, 파업권을 제한했으며, 공장을 전쟁준비와 생산질서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임금보장, 가족수당, 사고보상, 직업훈련, 생산평의회라는 형태로 구체적인 대가를 제공했습니다. 독일 노동자는 혁명을 얻지 못했지만, 혁명을 포기하는 데 따른 보상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노동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원역사의 프랑스는 1936년에 노동자에게 휴가를 주었습니다. 이 세계의 프랑스는 노동자에게 명단을 주었습니다. 누가 점거했는지, 누가 선동했는지, 누가 공장문을 잠갔는지, 누가 경찰과 충돌했는지를 적은 명단이었습니다. 총파업은 더 이상 협상의 수단으로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혁명의 도구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그 도구를 다시 들어야 한다는 유혹은 더 강해졌습니다.
두 번째 결과는 노동조합 운동의 재편이었습니다.
CGT와 CGTU 사이의 통합 논의는 원역사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레옹 주오(Léon Jouhaux)의 CGT는 급진사회당을 그나마 대화 가능한 상대로 여기며, 제도적 협상과 노동권 확장을 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마티뇽 없는 1936년 이후, 그 논리는 힘을 잃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물었습니다. 대화는 어디에 있는가. 임금인상은 어디에 있는가. 40시간 노동제는 어디에 있는가. 유급휴가는 어디에 있는가. 공장점거 뒤에 남은 것이 경찰 기록과 해고 통지뿐이라면, 주오의 조합주의는 무엇을 증명했는가.
가스통 몽무소(Gaston Monmousseau)가 이끄는 CGTU는 그 질문에 훨씬 간단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협상은 실패했고, 전선만이 남았다는 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통합노동기구의 이름은 노동총동맹도, 노동연맹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 노동전선(Front français du Travail, FFT)이 되었습니다. 연맹이 아니라 전선이었습니다. 이 단어 하나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임금과 노동시간을 둘러싼 교섭기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장, 거리, 선거, 지방조직, 실업자위원회, 항만노동자, 철도원, 청년행동대를 연결하는 정치전선이 되었습니다.
SFIO와 CGT가 맡아왔던 완충장치는 이때 사실상 제거되었습니다. 좌익 거리정치와 제도권 정치를 이어주던 느슨한 다리들은 끊어졌습니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PCF와 FFT의 직접적인 조직선이었습니다. 공장점거는 이제 조합운동의 예외적 전술이 아니라, 정치위기의 기본 언어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결과는 경제였습니다.
원역사의 40시간 노동제는 프랑스 생산과 군수준비에 부담을 주었고, 자본유출과 인플레이션 문제도 낳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노동자 구매력을 높였고, 사회적 기대를 만들었으며, 적어도 한순간 프랑스 공화국이 노동계급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세계에는 그 믿음이 없었습니다. 임금은 정체되었고, 내수 회복은 미약했으며,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는 플랑댕 내각의 손을 더 묶었습니다. 자본가들은 투자보다 현금 보유를 선호했고, 공장주들은 정부가 노동자를 제압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보았습니다.
침체는 길어졌고, 침체가 길어질수록 노동자들은 폭력에 더 익숙해졌습니다. 그것은 순수한 빈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빈곤은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은 실패한 기대였습니다. 공장을 점거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기억, 경찰에게 밀려났지만 정부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기억, 독일 노동자들은 적어도 빵과 가족수당을 얻었다는 소문이 프랑스 노동자들의 분노를 더 날카롭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요소는 프랑스에 혁명적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독일인들보다 혁명에 훨씬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혁명을 책에서만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도시 이름과 거리 이름과 기념일과 노래가 이미 혁명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공화국을 뒤엎는다는 말은 언제나 조금 덜 비현실적으로 들렸습니다.
번외2: 인민전선이 오지 않은 곳 - 스페인
“혁명은 말을 믿지 않는다. 혁명은 모든 것을 피로 시험한다.”
- 레프 트로츠키(Лев Троцкий), <스페인 혁명과 그 위협(1931)> 중.
스페인에서는 이보다 더 빠르고, 더 난폭한 형태로 같은 문제가 터졌습니다.
1931년 공화혁명 이후, 스페인 제2공화국의 중심을 이룬 것은 원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공화주의 연합이었습니다. 마누엘 아사냐(Manuel Azaña)와 알레한드로 레루스(Alejandro Leroux)의 공화좌파, 니세토 알칼라사모라(Niceto Alcalá-Zamora)의 공화우파, 그리고 인달레시오 프리에토(Indalecio Prieto)의 사회주의노동당(PSOE)이 공화국의 제도적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당대 신문들은 이 연정을 삼색연정(Coalición Tricolor)이라고 불렀습니다. 공화국기의 적색, 황색, 자색 아래 선 헌정질서의 연합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삼색은 곧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파에게 그것은 하느님 없는 삼색체제였고, 극좌에게 그것은 부르주아 삼색기였습니다. 공화국을 지키겠다는 연합은 공화국을 해체하려는 양쪽 세력 사이에서 매일같이 찢겨나갔습니다.
한쪽에는 공산당(PCE)을 구심점으로 하는 반공화국 좌익이 있었습니다. 이 세계의 PCE는 원역사와 전혀 다른 당이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실제로 1920년대 초중반 소련의 1인자였고, 축출된 뒤에도 스탈린-부하린 지도부의 NEP와 대비되는 집산주의적·군사주의적 노선의 얼굴로 남아 있었습니다. 멕시코와 스페인을 오가며 조직활동을 하던 트로츠키와 모스크바 사이에는 묘한 암묵적 타협이 존재했습니다. 그가 모스크바로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밖에서 무엇을 하든 굳이 건드리지 않겠다는 타협이었습니다.
그 결과, PCE는 안드레우 닌(Andreu Nin) 총서기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통일마르크스주의자당(POUM) 분당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POUM이 차지했을 공간은 처음부터 PCE 안에 있었습니다. 닌은 카탈루냐 노동운동의 언어를 알았고, 트로츠키의 군사화된 노동계급론을 스페인 현실에 맞춰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PCE는 더 이상 작고 교조적인 모스크바 지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평의회공화국, 노동자 민병대, 생산통제, 농민위원회, 혁명방위위원회를 말하는 당이었습니다.
노동총연맹-이베리아 아나키스트동맹(CNT-FAI)과의 관계는 여전히 껄끄러웠습니다. PCE는 CNT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CNT 역시 PCE를 믿지 않았습니다. 무정부주의자들에게 공산당은 붉은 장교단이었고, 공산당원들에게 CNT는 총을 든 본능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혁명이 노동자의 손으로 일어난다면, 그 손 상당수가 CNT 조합원의 손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닌의 PCE는 아나키스트를 배척하기보다, 그들의 바리케이드 위에 자기 깃발을 꽂으려 했습니다.
라르고 카바예로(Largo Caballero) 같은 PSOE 좌파는 이 구도 속에서 약해졌습니다. 원역사에서 그는 “스페인의 레닌”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사회주의 좌파의 급진화를 상징했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 자리를 닌과 PCE가 훨씬 더 일찍, 훨씬 더 조직적으로 가져갔습니다. PSOE 내부의 좌경화는 공화국 안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PCE가 이끄는 평의회 노선에 끌려갈 것인가의 문제로 갈라졌습니다. 프리에토의 온건 사회주의는 공화국 안에 남았고, 반공화국 좌익은 삼색연정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호세 마리아 힐로블레스(José Maria Gil-Robles)의 가톨릭 우익세력, 군부, 그리고 카를리스트들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스페인 전역에서 크고 작은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도시 보수엘리트 중심의 알폰소 복원파는 점점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살롱과 은행과 장교단 상층의 언어만으로는 마을의 성당과 농촌의 무장청년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당장 대응 가능한 민병조직을 갖고 있던 카를로스파가 앞서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34년 아스투리아스 반란 이후, 왕당파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습니다. 고령의 앙주 공작 알폰소 카를로스(Alfonso Carlos)가 정통성을 대표하고,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Javier de Borbon-Parma)가 국가섭정으로서 실제 질서회복을 담당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카를리스트들에게 그것은 하느님, 조국, 지방특권, 왕의 질서였습니다. 군부에게 그것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제압할 수 있는 명분이었습니다. CEDA에게 그것은 너무 노골적인 반공화국 음모였지만, 동시에 점점 더 매혹적인 보험이기도 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국민파’를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팔랑헤, 즉 국민생디칼리즘 공세평의회(FE de las JONS)는 이 세계에서 통일된 조직으로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é Antonio Primo de Rivera)는 1933년 공산주의자의 테러로 사망했습니다. 귀족적이고 폭력적이며 문학적인 국민혁명의 얼굴이 너무 일찍 사라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우파 청년층에게 순교신화를 남겼지만, 조직을 묶어낼 시간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모 레돈도(Onésimo Redondo)의 세력은 더 보수우익적이고 카스티야적이며 가톨릭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래 버티지 않고 왕당파에 흡수되었습니다. 레돈도파는 카를리스트와 CEDA 청년조직 사이의 회색지대가 되었고, 국민생디칼리즘은 우파 성전의 장식언어로 일부만 남았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라미로 레데스마 라모스(Ramiro Ledesma Ramos)의 팔랑헤 좌파였습니다.
라모스는 호세 안토니오의 죽음 이후 팔랑헤라는 이름을 두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은 이미 우파 순교신화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대신 그는 더 짧고, 더 낡고, 더 위험한 이름으로 돌아갔습니다. JONS. 다만 이제 그것은 국민생디칼리즘 공세평의회가 아니었습니다. 라모스는 한 단어를 바꾸었습니다. 공세가 아니라 노동자였습니다. 국민생디칼리즘 노동평의회(Juntas Obreras Nacional-Sindicalistas, JONS).
그들은 “민족, 노동, 국가(Nación, Trabajo, Estado)”를 외쳤습니다. 마르크스도 왕도 아니라는 구호가 뒤따랐습니다. 라모스의 JONS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노동자평의회를 말했습니다. 아나키스트는 아니었지만 조합국가를 말했습니다. 왕당파는 아니었지만 민족과 국가를 말했습니다. 공산당은 그들을 갈색 평의회라고 불렀고, 카를리스트는 국민적 빨갱이라고 불렀습니다. 라모스는 둘 다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계의 PCF는 PCE와의 관계에서 대체로 우위를 점했습니다. 자크 도리오의 국민공산주의 PCF는 프랑스어권 언론, 망명망, 자금, 남부 국경의 연락선, 마르세유와 툴루즈의 노동조직을 쥐고 있었습니다. 닌 지도부에 더 협조적인 PCFI는 스페인의 현장감각과 가까웠지만, 너무 멀고 너무 작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라모스의 JONS는 이상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것은 PCF에게도, PCE에게도, CNT에게도 불편한 존재였지만,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극좌진영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었습니다. 스페인 노동자를 마르크스주의자의 이름으로 동원하려는 닌과, 프랑스 민중공화국의 이름으로 스페인 혁명을 관리하려는 도리오 사이에서, 라모스는 스페인 노동국가라는 독자적 독약을 들이밀었습니다.
1936년 선거는 이 모든 모순을 한꺼번에 폭발시켰습니다.
삼색연정(Coalición Tricolor)은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공화국은 계속 살아 있었지만, 더 이상 스스로만으로는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니세토 알칼라사모라 대통령은 가장 먼저 우익에게 타협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절망적이지만 계산된 제안이었습니다. 어차피 우익의 왕위계승자인 앙주 공작 알폰소 카를로스는 80대 후반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비에르 공을 국가적 조언자에 준하는 위치에 올리고, CEDA가 내각에 참여하며, 공화국과 왕국의 정체 문제는 5년 안에 국민투표로 해결하자는 안이었습니다.
그것은 공화국이 우파를 사랑해서 내민 손이 아니었습니다. 공화국이 아직 우파를 쪼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내민 손이었습니다. 힐로블레스에게 던져진 질문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공화국 안의 가톨릭 우파인가, 아니면 하비에르 섭정의 신하인가.
우익은 고민했습니다. CEDA에게 그 제안은 너무 매혹적이면서도 너무 위험했습니다. 내각에 들어가면 공화국을 안에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들어가는 순간 카를리스트와 군부 강경파에게 배신자로 몰릴 수 있었습니다. 군부는 시간을 벌고 싶어 했고, 카를리스트는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팔콘데에게 공화국과의 타협은 하느님의 이름을 빌린 항복이었습니다.
그들이 고민하는 사이, 좌익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스페인 전역에서 반공화국 좌익이 봉기했습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사라고사 일부, 아스투리아스 광산지대, 안달루시아의 농촌, 카탈루냐의 공장지대가 들끓었습니다. PCE는 평의회공화국을 선포하려 했고, CNT-FAI는 지역마다 혁명위원회를 세웠으며, 라모스의 JONS는 노동국가의 이름으로 독자 민병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지만, 삼색연정이 더 이상 통치할 수 없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습니다.
공화국 정부는 그대로 붕괴했습니다. 그것은 단번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기능을 잃었습니다. 내무부의 명령은 경찰서에 닿지 않았고, 경찰서의 명령은 거리에서 멈췄습니다. 군부대는 충성을 맹세하기 전에 지역의 무장세력이 누구인지부터 살폈습니다. 장관들은 회의를 열었지만, 회의실 밖에서 이미 다른 정부들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평의회, 혁명방위위원회, 지역 민병대, 카를리스트 연락망, 군부 사령부가 같은 지도를 서로 다른 색연필로 칠했습니다.
그러자 에밀리오 몰라(Emilio Mola) 장군의 군부와 마누엘 팔콘데(Manuel Fal Conde)가 이끄는 카를리스트 강경파는 진행 중이던 협상을 엎었습니다. 그들에게 알칼라사모라의 제안은 이미 죽은 문서였습니다. 공화국과 타협할 이유는 사라졌습니다. 공화국은 타협하기도 전에 붕괴했기 때문입니다.
몰라와 팔콘데는 구국정부(Gobierno de Salvación)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공식문서에서는 하느님과 조국의 이름이 반복되었고, 선언문은 스페인이 무신론자, 분리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부르주아 무능의 손에서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좌익 신문들은 곧 그 정부를 훨씬 짧게 불렀습니다. 성심당(Partido del Sagrado Corazón). 예수성심 깃발 아래 장군과 지주와 신부들이 빵 대신 총알을 나눠주는 정부라는 뜻이었습니다.
블랙코미디는 언제나 사실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성심당은 처음에는 멸칭이었지만, 카를리스트 청년들 일부는 그 말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성심이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스페인은 정말로 예수성심 아래 구원되어야 하지 않는가. 좌익이 조롱으로 던진 말은 며칠 뒤 우익 벽보의 가장자리에 몰래 적히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멸칭이 훈장으로 바뀔 때였습니다.
전쟁은 원역사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훨씬 불균형했습니다.
좌익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스페인 절반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그 절반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PCE는 군사화된 평의회공화국을 원했고, CNT-FAI는 국가 없는 혁명을 원했으며, 라모스의 JONS는 민족노동국가를 원했습니다.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지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자치를 지키려 했고, 안달루시아의 농민위원회는 중앙의 명령보다 토지문서를 먼저 불태우려 했습니다. 혁명은 많았지만, 정부는 적었습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공화정부의 유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원역사의 스페인 좌익은 적어도 카바예로나 프리에토가 남겨둔 공화정부의 제도와 국제적 명분, 일부 군사조직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삼색연정이 좌익 봉기 앞에서 먼저 붕괴했습니다. 반공화국 좌익은 공화국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공화국을 쓰러뜨린 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공화국의 외교적 합법성도, 관료적 연속성도,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행정능력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습니다.
스페인 좌익은 노선투쟁, 지역주의자들의 반란, 지휘체계의 불안정 속에서 스스로를 소모했습니다. 닌의 PCE는 질서를 세우려 할수록 CNT와 충돌했고, CNT는 자유를 지키려 할수록 전쟁을 잃었습니다. 라모스의 JONS는 공산당과 왕당파 모두를 비난하며 독자노선을 외쳤지만, 독자노선은 탄약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혁명위원회는 많았고, 탄약창은 적었습니다. 선언문은 빨랐고, 철도시간표는 느렸습니다.
반면 구국정부는 잔혹했지만 단순했습니다. 몰라는 작전계획을 세웠고, 팔콘데는 카를리스트 민병대를 움직였으며, CEDA의 잔여 조직은 행정과 선전을 제공했습니다. 국가섭정 하비에르 공은 너무 많은 권력을 직접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유용했습니다. 그는 군부에게는 정통성의 깃발이었고, 카를리스트에게는 미래의 왕국이었으며, 가톨릭 우파에게는 공화국 이후에도 질서가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1938년 여름, 보구밀 리하르츠가 프랑스로 망명한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을 만나고 있을 때, 스페인 전쟁은 이미 끝을 향해 기울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카페와 허름한 하숙집에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했고, 서로의 패배를 분석했으며, 자신들이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피레네 너머에서는 이미 다른 의식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국가섭정 하비에르 데 보르본파르마의 대관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왕정복고도 아니었고, 단순한 군사독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당과 병영과 농촌 민병대와 가톨릭 대중정당이 서로를 믿지 않으면서도 같은 제단 앞에 서는 의식이었습니다. 앙주 공작 알폰소 카를로스의 이름은 정통성으로 남았고, 하비에르 공의 이름은 통치로 쓰였습니다. 스페인은 다시 왕국이 되었지만, 그 왕국은 오래된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혁명을 이긴 자들이 혁명에게서 배운 방식으로 만든 반혁명 국가였습니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스페인 좌익 망명자들은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PCF와 FFT는 그 소식을 선전문으로 바꾸었습니다. 스페인은 배신당했다. 스페인은 고립되었다. 스페인은 성심당과 장군들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그 말들 아래에는 더 불편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혁명은 패배하기 전에 먼저 공화국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공화국은 그 장면을 바로 국경 너머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내용 추가, 26.5.18.)
번외3: 유예된 전쟁 - 중국과 일본
“이제 문제는 일본이 서구의 패도문명의 매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동양의 보루가 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 쑨원, 「대아시아주의」, 1924년 고베 연설.
6화에서 잠시 언급됐듯, 이 세계의 중국공산당은 조금 더 오래 지속된 취추바이(瞿秋白)-리리싼(李立三) 노선의 후유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중국공산당은 1920년대 제1차 국공합작을 통해 국가운영의 실무적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국민당 조직 안으로 들어가고, 선전과 노동운동과 군사조직을 배우고, 북벌의 한복판에서 근대정당이 국가를 움직이는 방식을 몸으로 익혔습니다.
하지만 이 대체역사의 공산당에게는 그런 학교가 없었습니다. 여러 군벌들과 이합집산을 반복한 이 세계의 공산당은 여러 곳에 소비에트지구를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부전사변 같은 불필요한 잔학행위만 반복한 끝에 점점 고립되었습니다. 봉기는 많았지만 국가는 없었고, 구호는 높았지만 행정은 약했습니다.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혁명이 끝난 뒤 세금을 걷고 곡물을 운송하고 치안을 유지할 사람은 적었습니다.
결국 1932년 6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국민당의 제4차 초공작전을 마지막으로 공산당 지도부는 최종적으로 궤멸되었습니다. 물론 군데군데 산발적인 저항은 조금 더 오래 남았습니다. 광산촌과 산악지대, 항구노동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적색 조직의 잔재가 남았고, 해외 망명자들은 자신들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대장정의 신화도, 농촌의 지지도 이 세계에서는 사라졌습니다.
난징 국민정부는 피를 덜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중국에서 피를 덜 흘린다는 것은 단순한 군사적 이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산과 행정과 명령체계가 조금 덜 새어나간다는 뜻이었습니다.
공산당과 홍군의 조기 궤멸은 장제스에게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이었습니다. 장시와 후난, 후베이와 푸젠에 끝없이 빨려 들어가던 군사비와 행정력이 일부 돌아왔습니다. 지방군벌들은 더 이상 공산당을 협상카드로 쓰기 어려워졌고, 난징의 명령은 적어도 이전보다 조금 더 잘 집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원역사에서 복건사변을 일으켰던 천밍수(陳銘樞) 일파는 그런 반란은 꿈도 꾸기 어려워졌습니다. 난징은 여전히 중국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반란을 꿈꾸는 사람들은 예전보다 계산기를 한 번 더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한 첫 번째 변화는 재정에서 나타났습니다. 국민당 재정부장 쑹쯔원(宋子文, T. V. Soong)의 주도로 이루어진 폐량개원 정책은 몇 개월 앞당겨졌고, 은본위제를 폐지하기 위한 준비도 더 철저해졌습니다. 1934년 미국의 은 구입정책이 중국 경제를 뒤흔들었을 때, 국민정부는 여전히 충격을 받았지만 원역사만큼 허둥대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더 준비된 상태에서, 더 일찍 법폐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중국이 갑자기 부유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방의 세금은 여전히 중간에서 사라졌고, 군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창고와 병력을 먼저 챙겼으며, 상인들은 중앙정부의 지폐보다 은과 외화를 더 믿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정부는 적어도 이전보다 덜 새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중국에서 덜 샌다는 것은 혁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국민당 좌파의 운명이었습니다. 제1차 국공합작이 없다는 것은 우한 국민정부도, 4.12 상하이 쿠데타도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애초에 왕징웨이(汪精衞)도, 천궁보(陳公博)도, 덩옌다(鄧演達)도 공산당에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공산당은 혁명의 동지가 아니라, 중국혁명을 외국 지시문과 무모한 봉기 속에 낭비한 실패자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장제스나 후한민(胡漢民)보다도 반공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실제 역사에서 불발되었던 1927년의 제2차 장왕합작, 즉 왕징웨이가 국민정부 주석을,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을 맡는 거래는 계속 성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국민정부를 더 안정시켰지만, 동시에 안쪽에 새로운 긴장을 만들었습니다. 장제스는 군권을 쥐었고, 왕징웨이는 당권과 조직력을 쥐었습니다. 한쪽은 군사위원회의 명령체계를 통해 국가를 붙잡으려 했고, 다른 한쪽은 국민당 조직과 대중운동을 통해 사회 전체를 바꾸려 했습니다.
세 번째 변화는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이었습니다. 원역사의 신생활운동은 위생, 예절, 규율 확립을 강조한 도덕운동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왕징웨이는 그것을 국민 의식의 개조 수단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거리의 침 뱉기와 쓰레기 문제는 도시위생의 문제가 되었고, 도시위생은 국민체력의 문제가 되었으며, 국민체력은 항일전쟁 준비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문자개혁은 교육개혁이 되었고, 교육개혁은 국민동원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반아편운동은 군벌해체와 결합했고, 청년조직은 학교와 공장을 지나 지방행정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심지어 ‘중화’라는 단어를 철폐하고 전근대적인 한자를 로마자로 대체해버리자는 급진적 주장까지 진지하게 논의되는 수준이 되자,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용공’이 아닌 ‘파쇼’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판에는 당연히 권력투쟁의 냄새가 짙었습니다. 장제스가 갑자기 자유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왕징웨이가 자신보다 더 깊이 사회를 조직하려 한다는 사실을 불편해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군권을 가진 장제스도 당권과 조직력을 갖춘 왕징웨이에게 점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장제스의 군대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왕징웨이의 조직은 학교와 청년단, 신문과 강연회, 반아편 캠페인과 문자강습회로 사람들의 일상에 들어갔습니다. 국민정부 안에서 장제스는 총을 가진 사람이었고, 왕징웨이는 명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중국 정치에서 둘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습니다.
한편 만주사변과 열하사변은 실제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전개되었습니다. 일본은 만주를 장악했고, 열하까지 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1933년 5월 당고정전협정(塘沽停戰協定) 이후 관동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수많은 화북 분리공작들은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난징 국민정부의 재정은 조금 더 안정적이었고, 장제스는 신경을 초공작전에 빼앗기지 않았으며, 왕징웨이는 항일구국을 외치며 북중국의 여론을 규합시켰습니다. 기찰정무위원장 쑹저위안(宋哲元)은 항일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는 만주로 돌격하자는 식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베이핑 너머로 일본이 들어오는 것을 방치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정도의 신중함은 군벌에게는 드문 미덕이었고, 항일운동가들에게는 조금 답답한 미덕이었습니다.
관동군은 적당히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 불가능한 공작에 매달렸고, 그때마다 실패 보고서가 도쿄로 올라갔습니다. 돈은 들어갔고, 지방인맥은 새어나갔고, 난징의 항의는 예전보다 빨랐습니다. 도쿄의 공기도 달라졌습니다. 중국 전체와 지금 당장 전쟁을 벌이자는 식의 모험주의가 과연 옳은가. 그 전에 내지와 조선, 만주로 이어지는 산업권부터 강력하게 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이 원로와 내각 중신, 문민정치권과 육군 통제파 주변에서 더 자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히로타 고키(廣田 弘毅) 외무대신이 주도한 이른바 ‘협화외교’, 즉 대중 유화책은 실제 역사보다 더 광범위하고 강력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히로타의 구상은 간단했습니다. 일본은 만주국에 대한 사실상의 승인을 얻고, 그 대가로 중국에는 불평등조약 폐지, 무력외교 중단, 중일우호관계 수립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상은 관동군에게는 배신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원로와 내각 중신, 문민정치권, 그리고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에게는 현실처럼 들렸습니다. 우가키는 대륙정책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관동군이 대륙정책을 망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만주국을 지키기 위해 중국 전체를 적으로 만드는 것은, 창고를 지키겠다며 집 전체에 불을 붙이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중국에서도 이 구상은 큰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왕징웨이 주석도, 장제스 위원장도 일본과 당장 전쟁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주국 승인은 둘 모두에게 정치적 자살행위에 가까웠습니다. 왕징웨이는 항일구국을 외치며 당 조직을 넓혀왔고,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의 지도자로서 잃어버린 영토를 공식적으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협안으로 ‘삼불정책’이 나왔습니다.
“불승인(不承認), 불침공(不侵攻), 불논급(不論及).”
중국은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장 무력으로 침공하지도 않았고, 중일 양자관계의 모든 의제를 만주국 문제로 묶지도 않았습니다. 일본은 이것을 사실상 승인이라고 국내에 설명했습니다. 중국은 이것을 국력회복을 위한 침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양쪽 모두 같은 문장을 서로 다른 뜻으로 읽었습니다. 외교문서가 원래 그런 용도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협정은 꽤 성공적이었습니다.
1935년 12월 20일, 난징에서 중일우호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아무도 서로를 믿지 않았고, 그래서 더 정중했습니다. 조약문은 예의 바르고 안정적인 문장으로 가득했지만, 그 예의는 신뢰의 증거가 아니라 불신의 포장지였습니다.
난징협정은 도쿄의 젊은 황도파 장교들에게 평화가 아니라 배신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원로는 늙은 역적이었고, 내각은 천황의 이름을 빌린 상인들의 회의였으며, 우가키는 조선을 다스리며 육군을 관료의 사슬에 묶은 배신자였습니다. 히로타는 외교라는 이름으로 만주국을 팔아넘겼고, 통제파는 천황의 군대를 예산표와 동원계획 속에 가두고 있었습니다.
1936년 2월, 반란은 원역사보다 더 크게 일어났습니다. 청년장교들은 도쿄 중심부의 주요 관청과 총리관저, 제국의회를 점령하고, 황도파의 수장 아라키 사다오(荒木 貞夫) 전 육군대신을 유신내각의 총리로 추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라키는 자신이 도대체 무엇에 올라탄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치명적인 오판이었습니다. 반란군이 마음대로 세운 총리는 총리가 아니라 인질과 간판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히로히토는 즉각 격노했습니다. 반란군에게 천황친정의 언어는 있었지만, 천황의 재가는 없었습니다. 황도파가 폐하의 뜻을 외치는 동안, 그 폐하는 그들을 반란군이라 불렀습니다. 진압은 원역사보다 더 철저했고, 더 잔혹했습니다. 청년장교들의 유신은 며칠 만에 끝났고, 그들이 세우려 했던 내각은 법적으로 존재한 적조차 없었습니다.
황도파는 숙청되었습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제거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 육군은 통제파가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나가타 데쓰잔(永田 鉄山)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가 백주대낮 참살당하는 원인이었던 황도파 마사키 진자부로(眞崎 甚三郎) 대장을 육군교육총감직에서 밀어낸 것은 나가타나 도조가 아니라 내각과 원로, 우가키와 육군 중앙의 정리작업이었습니다. 따라서 분노가 나가타 한 사람에게 모이지 않았습니다. 황도파는 개인을 찌르기보다 체제 전체에 덤벼들었고, 체제는 개인보다 훨씬 찌르기 어려웠습니다.
2.26 사건 이후 그 차이는 결정적이었습니다. 통제파는 머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육군은 더 빠르게 중앙으로 묶였습니다. 혁신관료들은 더 안정적으로 등용되었고, 관동군의 독자행동은 더 노골적으로 제어되었습니다. 관동군 내 만주계는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만주의 독립왕국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주는 고도국방국가의 실험장이자 자원기지, 병참공간, 산업계획표 속의 한 구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일본군이 더 온건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더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해졌을 뿐입니다. 문제는 대개 여기서 생겼습니다. 즉흥적인 제국주의는 자주 사고를 쳤지만, 계획적인 제국주의는 장부를 남겼습니다.
난징협정 이후에도 중국과 일본은 친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양쪽 모두 상대가 언젠가는 적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시간을 원했습니다. 왕징웨이는 국가를 총동원 가능한 형태로 개조하고 싶었습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을 더 훈련시키고 싶었습니다. 쑹저위안은 북중국을 지키려 했지만, 만주로 돌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일본도 시간을 원했습니다. 내각총리대신에 오른 우가키, 그리고 육군의 실질적 1인자가 된 나가타는 중국과 싸우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싫어했습니다. 고도국방국가를 만들고, 만주와 조선과 일본 본토를 하나의 산업·병참권으로 묶고, 혁신관료와 군부와 기업을 동원체제 안으로 집어넣은 뒤에야 전쟁을 생각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집권하지 않았습니다. 방공협정도 없었습니다. 동시에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돕는 정도도 약화되었습니다. 독일은 일본과 손잡을 유인이 없어졌고, 거대한 시장인 중국을 버릴 이유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중국은 독일 무역을 지탱하는 충성고객인 동시에, 국군 장교들의 실전경험을 쌓아주는 귀중한 실험장이었습니다. 독일식 장비와 교범이 팔렸고, 중국군의 훈련장에서 독일 장교들은 보고서를 썼습니다. 보고서의 문장은 건조했지만, 대개 건조한 문장이 가장 비쌌습니다.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Alexander von Falkenhausen) 등 독일군 장교들과 더더욱 강하게 협력했습니다. 그는 1920년대 소련군의 지원 부재로 인한 공백을 줄여나가는 데 더해, 실제 역사보다도 더 강력하고 정예화된 사단들을 늘려나갔습니다. 군사적 필요도 있었지만 정치적 필요도 있었습니다. 왕징웨이가 당권과 조직력을 쥐고 국민정부 안에서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장제스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군대였습니다. 자신이 토사구팽당하지 않으려면, 국민혁명군은 단순한 군대가 아니라 그의 정치적 생명보험이어야 했습니다.
중국군은 아직 일본군을 압도하지 못했습니다. 지방군벌은 남아 있었고, 보급은 여전히 약했으며, 장교단의 질도 들쭉날쭉했습니다. 그러나 원역사보다 더 빨리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독일이 중국 쪽으로 기우는 것도 보았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완전히 믿지 않았고, 프랑스는 동남아 이해관계 때문에 애매했으며, 독일은 중국과 가까웠습니다. 그러자 도쿄는 모스크바를 다시 보았습니다.
일본과 소련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당장 등 뒤를 찌르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소련은 유럽의 위기 때문에 극동을 안정시키고 싶었고, 일본은 중국과의 전면전도, 소련과의 국경전도 아직 원하지 않았습니다. 소련 역시 유럽에서의 전쟁이 가시화되는 판에 아시아에서도 싸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1938년 6월, 소일불가침조약이 원역사보다 3년 먼저 체결되었습니다.
1938년의 동아시아에는 평화가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중국은 공산당을 꺾고, 법폐를 세우고, 군대를 고치고, 국민을 다시 조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황도파를 제거하고, 통제파를 세우고, 만주와 조선과 본토를 하나의 동원국가로 묶고 있었습니다. 난징과 도쿄는 서로를 향해 정중한 문서를 보냈고, 모스크바와 도쿄는 서로를 향해 잠시 총구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화해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더 강한 국가가 되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었고, 일본은 더 큰 전쟁을 하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중국을 키웠고, 소련은 일본과 손을 잡았습니다.
1937년에 전쟁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쟁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모두가 조금 더 오래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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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샤츠슈나이더 으악! 그 십자단은 안되요!(?)
@E.E.샤츠슈나이더 rpg의 세계관은 어떻게 되나요? 지금 연재되고 있는 이 세계관인가요? 아니면 현실 세계관인가요?
@로콘 현실 세계관입니다. 따로 시작부터 대체역사 요소를 넣는 건 아마 안할까 생각 중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시작 년도는 언제쯤으로 생각중이신가요?
@차들어 홍차야 1934년 1월말 정도 생각 중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34년이면 마침 폭동이 일어난 해군요…
@E.E.샤츠슈나이더 “Politique d’abord!”(?)
포스터입니다. 당연히(?) AI로 만들었습니다..